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364화 (364/366)

364화 대륙의 중심으로 (1)

공화국의 비밀 국고, 테르사우의 출입 여부는 적어도 2인 최고 의원과 10인의 일반 의원이 회의에 참석했을 경우에 논의될 수 있다.

그리고 투표를 통해, 과반 이상의 최고 의원과 3분의 2를 넘는 의원들의 동의를 얻어야만 개방이 결정된다.

지극히 까다로운 조건이다.

사람의 머릿수가 많은 데다가,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죄다 정치에 몸담은 이들이니.

보란 듯이 최고 의원을 단숨에 때려눕히고.

다크 워튼과 루아스교의 반응을 언급하여 압박감을 주지 않았다면 테르사우는 여전히 닫혀 있었으리라.

마석등의 불빛이 감도는 어둠 속에서 여러 발소리가 메아리친다.

고요한 적막.

베르덴 일행은 브릴런과 그의 호위를 맡은 우드거드를 묵묵히 뒤따랐다.

‘깊이 들어갈수록 점차 폭이 넓어지는군.’

게다가 통로의 방향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전체적인 구조를 생각해 보면 3차원의 회오리와 흡사했다. 브릴런은 그 중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모두가 소용돌이의 눈에 도착했다.

반월 구조의 넓은 공간.

저 앞에는 총 9개의 열쇠 구멍이 새겨져 있는 거대한 벽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다.

브릴런이 통로를 작동했던 열쇠를 내보였다.

“이 테르사우의 개금(開金)은 투표를 통해 개방이 결정되었을 때만 한시적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제 역할을 하면 저절로 소멸하지요. 중앙 대륙에서 영감을 얻은 끝에 만들어진 보안 시설인데, 절차가 까다롭기는 해도 아주 효과적입니다.”

아무리 비밀 국고라고 하나 통상적인 범위를 벗어났다.

베르덴이 들어갔었던 리비안트 공국의 왕성 창고, 리에론테(Re Eronte)와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높은 수준.

“또한 이 거대한 문의 잠금장치를 여는 순서는 항상 무작위로 바뀝니다. 오직 최고 의원에게만 전해지는 복잡한 패턴만으로 풀 수 있죠.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리는 터라 잠시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브릴런이 벽 전체를 둘러보더니, 확신한 듯 가장 왼쪽에 다가섰다.

철컥.

열쇠를 한 바퀴 돌리자, 안쪽에서 금속음이 들려왔다. 단계적으로 벽의 형태가 미세하게 바뀌었다.

“흐음…….”

브릴런이 다시금 관찰을 이어 나가고는, 두 번째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또다시 쇳소리가 고막을 간질이더니, 벽 위에 새로운 구조가 나타났다.

베르덴이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매번 해석을 하고, 매번 정답을 내놓아야 하는 방식인가.’

위험성이 큰 만큼 보안적인 면에서는 탁월하긴 하겠지만…… 아주 번거로워 보인다.

새로이 나타나는 패턴의 구조도 꽤나 복잡한 것 같고.

베르덴의 눈썰미로도 한눈에 해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한두 번 정도 더 본다면 풀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알아도 딱히 쓸데가 없기에 유념하지는 않았다.

철컥…… 철컥…… 철컥…….

몇 분 간격으로 하나둘씩 보안이 풀려 간다.

상당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 브릴런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윽고 여덟 번째 순서를 마치고, 아홉 번째 해제만이 남았다.

마지막이기에 패턴을 해석할 필요가 없었다.

브릴런이 열쇠를 꽂아 넣고는 고개를 돌렸다.

“열쇠를 돌리는 순간부터 30분의 시간제한이 시작됩니다. 이후에는 완전히 닫혀서 바깥으로 나올 수가 없으니 가능한 여유 있게 움직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다시 열려면 최소 몇 주는 지나야 하니까요. 마지막으로 진열장에서 물건을 빼면 다시 보관하기가 번거로우니 꼭 조심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베르덴이 주의 사항을 인지했다.

확답을 들은 브릴런이 곧 손목을 비틀었다.

철컥───쿠웅.

한차례 굉음이 인다.

다음 어지러울 정도의 철성(鐵聲)이 공간에 울려 퍼졌다.

브릴런의 열쇠가 소멸함과 동시에 틈새가 벌어지며, 마침내 진정한 테르사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

이전까지의 풍경과는 차원이 다른, 휘황찬란한 실내.

브릴런이 손을 뻗어, 공손히 안쪽을 가리켰다.

“저희는 바깥에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바라는 걸 손에 넣으시길.”

넉넉잡아 가용 가능한 시간은 최대 28분 정도.

안에 무엇이 보관되어 있는지 전혀 모르는 이상, 여유롭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베르덴, 아드리안, 레이라.

세 사람은 지체하지 않고 테르사우에 진입했다.

* * *

일반적인 마법 물품부터 시작해 값비싼 소모품이나 진귀해 보이는 아인종과 마수의 소재까지.

일정 간격으로 놓여 있는 진열장의 행렬은 저 멀리 있는, 세 갈래의 복도 끝까지 이어져 있다.

또한 복도 사이사이에 있는 수십 개의 길목에는, 각각 손가락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물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드넓은 공간이다.

그럼에도 천장에 박혀 있는, 수많은 샛노란 마석등 덕분에 사방이 탁 트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림자조차 거의 없는 눈부신 풍경이었다.

‘같이 돌아다니면서 보수를 고르기에는 시간이 한참 모자라겠어.’

따로 움직여야 한다.

그게 효율적이고 또 현명했다.

레이라가 오른쪽.

베르덴이 중앙.

아드리안은 왼쪽.

각자가 향할 방향이 당장 정해졌다.

문이 열린 후 정확히 1분의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않고 즉시 탐색에 나섰다.

최대한 시간을 아껴야만 하니까.

저벅, 저벅.

베르덴이 복도를 둘러보며, 사전에 정해 두었던 목적을 상기했다.

‘당장 최우선으로 필요한 건 실용적인 성능을 지닌 아티팩트, 아니면 미등록 마법서다.’

적합한 아티팩트는 효용 가치가 막대하기 때문이고.

미등록 마법서는 아크에서 얻은 [다원의 마법서]에 흡수시켜 마법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우선순위일 뿐.

그런 진귀한 것들이 아니라고 해도, 유용성이 더 높은 게 있다면 기꺼이 선택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감정>

베르덴이 도중 그럴듯해 보이는 진열품을 빠르게 확인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흐르는 시간.

어느새 수십 개에 달하는 마법 물품의 성능을 봤지만, 기준에 부합하는 건 아직 보이지 않았다.

“…….”

그때, 특이한 형태의 액세서리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를 장식하는, 세 개의 투명한 보석이 전면에 박혀 있는 고급스러운 서클렛.

그 아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감정서가 놓여 있었으나 글자 하나하나 읽을 시간은 없었다.

무시하고 <감정>을 발동했다.

[투영의 관]

아티팩트는 아니지만, 특수한 마법 물품의 범주에 속한다.

‘6위계 부여 마법 <환영>, 즉 마력의 분신에 시전자의 의식을 투영하여 임의로 조작을 가능케 한다라…….’

한마디로 오직 마법 하나에 특화된 마법 액세서리였다.

성능은 착용자의 마력 조작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듯하나, 베르덴에게는 전혀 문제 될 요소가 아니었다.

베르덴이 턱을 쓸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거…… 나쁘지 않군. 아니, 오히려 앞으로의 계획에 있어서는 어지간한 아티팩트보다 낫겠어.’

이후 중앙 대륙에서의 활동을 고려해 본다면, 아주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확신에 가까웠다.

하지만 아직 18분 20초라는 시간이 남았기에 선뜻 결정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일단 <투영의 관>의 위치를 정확하게 확인하고는, 다시금 여러 선택지를 둘러봤다.

그러다 도중 아드리안과 레이라와 몇 번 마주치기도 했다.

그런데 급하게 움직이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마치 관광객처럼 여유로운 태도로 테르사우를 구경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보수로 받을 물건을 진즉에 찾아낸 모양.

‘……나만 정하지 못한 건가?’

졸지에 우유부단한 마도사가 되어 버렸다.

베르덴이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특유의 직관력으로 대부분의 것들을 거르고, 몇몇 후보들을 머릿속으로 선정하여 면밀히 유용성을 비교했다.

그리고 약 5분이 남은 시점, 괜찮은 아티팩트를 발견하지 못한 베르덴이 내심 두 개를 택했다.

[투영의 관]과 나머지 일곱 개의 후보 중 세 번째 것.

후자는 그리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나마 쓸 만하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내 기준이 너무 높았나.’

그래도 절반 정도는 성공했으니 낭패는 아니었다.

베르덴은 두 개의 보수를 최단 루트로 회수하고, 입구로 돌아가기 위해 낯선 왼쪽 길목에 들어섰다.

“음?”

하지만 도중에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발목을 잡은 건 아티팩트도, 희소한 마법 물품도 아니었다.

이끌리듯 구석으로 향한 베르덴이 눈을 깜빡였다.

‘이거 설마…….’

고대의 유물, 황금의 유골이 벽안에 비쳤다.

* * *

주검의 영광, 백골의 비올라의 소지품에서 발견한 옛 유물, 황금의 대퇴골.

그것과 아주 흡사해 보이는 금색의 뼈가 눈앞에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테르사우에 보관되어 있는 부위는 ‘갈비뼈’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조제프 대주교가 정화했었던 황금의 대퇴골과 달리 사령의 기운에 오염되어 있지도 않았다.

베르덴이 갈비뼈를 들고는 마력의 안광을 번뜩였다.

[두개골. 갈비뼈. 대퇴골]

[세 개의 황금 유골을 모으는 자에게 황금의 길이 열리리라]

‘확실히 같은 유물이다.’

외형적인 성질, 적혀 있는 글귀가 완전히 동일하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도대체 이게 왜 테르사우에 있는 걸까.

겉으로 보기에 귀중한 유물처럼 보이기는 하니, 일단 보관이라도 해 둔 걸까.

‘……어떻게 한다.’

갑작스레 늘어난 선택지에, 베르덴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유물은 대부분 거짓된 전설이다.

가짜 혹은 과장된 것일 확률이 매우 높다고 조제프 대주교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세 개의 황금 뼈 중 두 개를 찾았다고 해도, 영영 나머지 하나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망설임이 일었다.

아예 무시해 버린다면 황금의 갈비뼈는 아주 오래도록 테르사우에 남겨질 테니.

그걸 다시 회수하려면, 공화국의 승낙을 받지 않는 이상 테르사우에 강제로 침입해야 한다.

적당히 유용한 마법 물품이냐, 허황됨에 가까운 고대 유물이냐.

베르덴은 선택해야만 했고, 끝내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입구로 돌아갔다.

남은 시간은 단 1분이었다.

* * *

쿠구구구구……!

테르사우의 입구가 닫힌다.

무수한 마찰음이 들려오며 복구되는 아홉 개의 잠금장치.

이내 거대한 문이 원래의 벽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누구도 낙오되는 일 없이 무사히 빠져나왔는데, 베르덴과 달리 아드리안과 레이라의 모습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둘 다 아티팩트를 고른 건가.’

베르덴이 테르사우를 탐색할 때 봤었던 것들이었다.

먼저 아드리안이 겉에 두르고 있는 검푸른 로브의 명칭은 [그늘거미].

착용자에 의지에 따라 기척이 감소되고, 밤에 시동어를 읊으면 어둠에 녹아들어 시야로 식별이 불가능해지는 성능을 지니고 있다.

전 중앙 대륙 4강이라는 신분을 숨긴 채 활동하기에 적합한 은신형 아티팩트였다.

“흠.”

아드리안은 특히 단순하면서도 모자람이 없는 색감과 외형이 마음에 든 듯했다.

‘그리고…….’

레이라는 이전에 언급했듯 방어구를 보수로 골랐다.

투구부터 각반까지.

체형에 딱 맞는 칠흑의 전신 갑주와 무릎 아래까지 오는 흑색 망토, 그 전체가 한 세트였다.

‘아티팩트, [이아든의 흑혈].’

피를 머금을수록 일시적으로 모든 저항력이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특수한 효과를 품고 있다.

다만 큰 반작용이 하나 있었다.

착용한 이후, 주기적으로 착용자 외의 선혈을 묻히지 않으면 영구적으로 손상된다는 단점이었다.

레이라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저야 본업이 모험가라 싸울 일이 많으니까요. 딱히 제약이라고 할 수 없다고 판단했어요, 방금 전 차림보다는 낫죠?”

“위압적인 외형이지만 잘 어울립니다. 금발하고 대비되는 색상이라 조화롭기도 하고.”

“……그렇게 자세한 감상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레이라가 투구 밖으로 나온, 등허리까지 오는 머리칼을 어색하게 어루만졌다.

그러곤 작게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애셔, 당신이 뭘 선택했는지 구경해도 될까요?”

딱히 숨길 건 없다.

베르덴은 [투영의 관]과 황금의 갈비뼈를 보였다.

두 사람에 비해서 급이 낮은 보수였다. 그렇기에 오히려 주목되었다.

“되게…… 특이한 걸 가져왔네요. 다른 건 몰라도 금색 뼈라니. 골동품에 취미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취향은 존중하도록.”

레이라의 의외라는 반응에, 아드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과 시선을 같이하던 브릴런이 눈을 깜빡였다.

“그건…… 황금의 뼈군요.”

“응? 알고 계신 물건인가요?”

“예, 제가 외교 업무로 중앙 대륙에 갔을 때, 직접 가져온 유물입니다. 우연히 고고학자들의 경매에 갔다가 낙찰받게 되었지요.”

“그런데 왜 테르사우에……?”

“공화국의 이익이 될까 싶어 구입하려 했는데, 돈이 모자라서 세금으로 충당했습니다. 그래서 국고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손에 넣고 보니, 실제로 그리 값어치가 있는 건 아니더군요.”

국가를 생각하고 행동했으니 애국자라고 해야 할까, 세금을 멋대로 유용했으니 부정한 정치인이라고 해야 할까.

뭐라 여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

“그런데 다른 걸 제쳐 두고 그걸 가져오시다니…… 고대 유물에 관심이 많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뭐, 조금은 흥미가 있습니다.”

“단순한 가치보다는, 각자의 기호를 충족하는 것이 중요한 법이지요. 이제껏 그와 비슷한 유물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희소성 하나만큼은 아티팩트 못지않을 겁니다.”

브릴런의 말은 반쯤 진심이었다.

공화국이 보유하고 있는 아티팩트는 종류 구분 없이 총 일곱 개.

다른 국가에 비해서도 많은 편이긴 하나, 그중 세 개를 외부인에게 넘기는 건 아주 큰 지출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하나가 줄었다.

‘심지어 아티팩트 대신 반출된 건, 매직 아이템과 쓸모없는 유물……!’

솔직히 말해 절로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의원들에게도 면을 세울 수 있게 될 테니.

테르사우를 개방한 건 브릴런 본인이긴 하지만, 최고 의원으로서의 입장을 버릴 수는 없었다.

아무튼 이로써 보수가 정상적으로 지급되었다.

이제 테르사우를 떠날 차례.

그리고 동대륙을 벗어날 때가 다가왔다.

* * *

테르사우에서 출발한 비행정이, 벨디른 공화국 최서단(最西端)에 도착했다.

공식적으로 세계에 몇 안 되는 대륙 간 공간 이동진이 설치된 도시, 세미타르(Semitar).

본래라면 중앙 대륙을 오가는 사람으로 북적거려야 했으나, 지금은 공간 이동진이 폐쇄된 터라 비교적 거리가 한산한 편이었다.

“저희는 절차를 수속하고 올 테니 잠시 기다리세요.”

레이라와 브릴런 그리고 호위를 맡은 처형자들이 이동 관리소로 향했다.

본래라면 그녀 혼자 해야 할 일이지만, 브릴런이 몇몇 과정을 생략하게 해 주겠다며 선뜻 조력했다.

일종의 배웅이자 호의였다.

이내 베르덴과 아드리안이 덩그러니 남게 되자, 근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잭이 몰래 다가왔다.

“무슨 일 있나?”

“애셔, 당신에게 줄 게 있다.”

잭이 뭔가를 휙 던졌다.

곁에 있던 아드리안이 순간적으로 잡아챘다. 그건 특정 마력 배열이 새겨져 있는 금속 막대였다.

“이게 뭐지?”

“세계 3대 은행 중 하나인 ‘아노니움 은행’ 계좌의 열쇠다.”

마그누스 은행, 다이나 은행, 아노니움 은행.

개중 아노니움 은행은 다른 은행들과는 달리, 지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중앙 대륙에 위치한 본점만을 운영하는데, 일종의 금고의 개념에 가까웠다.

매달 유지비를 내는 대가로, 철옹성의 보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주력 상품.

게다가 철저하게 익명성을 보장하기에 신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물건을 되찾는 방법은, 처음에 지급한 금속 막대만이 유일하다.

다시 말해 열쇠를 가진 자가 곧 주인이라는 뜻이었다.

“넬로니안 최고 의원의 비자금이 담겨 있는 거다. 3개월 전에, 내가 직접 명령을 받아 1년 치 유지비를 선불로 냈으니 마음 내킬 때 가져가면 될 거다.”

“아, 며칠 이내로 목숨 빚을 갚겠다고 하더니 이거였나……. 그런데 이렇게 넘겨줘도 상관없는 건가?”

분명 적지 않은 재산이 들어 있을 텐데.

그러자 잭이 씨익 웃었다.

“비자금이 그거 하나라고는 얘기하지 않았다만.”

자기 몫은 이미 챙겼나.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능활한 처신이었다.

베르덴이 금속 막대를 받아 아공간에 수납했다.

“잭,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왜 리비안트 공국에 있을 때, 같이 벨디른 공화국으로 가자고 제안한 거지?”

“별거 아닌 이유다. 능력 있는 마법사와 파티를 이루면, 공화국에서 크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내가 당신을 한참이나 과소평가한 거지.”

할 말을 마친 잭이 발걸음을 돌렸다.

“어쨌든 빚은 제대로 갚았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비자금이 있다는 게 들통나면 귀찮아지니. 행운을 빌겠다.”

간단히 인사를 건넨 그가 공화국의 비행정이 있는 정박장으로 향했다.

보아하니, 일자리를 잃긴 했지만 여전히 벨디른 공화국에서 활동할 생각인 것 같았다.

의외의 선물을 받은 베르덴이 서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보이는 미개척 지대 너머, 베르덴이 가 본 적 없는 하나의 대륙이 있다.

“아드리안, 중앙 대륙은 어떤 곳이지?”

“누군가는 혼돈, 경쟁, 약육강식, 강자존의 세상이라 여기고, 다른 누군가는 변화, 기회, 안정의 대지라 칭합니다.”

모순이 충돌하는 대륙.

그것은 가장 낮은 층과 가장 높은 층이 자리한 탑이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미래로 이어지는 가장 거대한 땅이다.

아드리안이 물었다.

“세크리드에서의 전투가 끝난 이후, 주군께서는 보다 명확하게 방향을 정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베르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루아스교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될, 용의 뼈를 대리로 판매하다고 알려질 허위 상단 ‘리켄티아(Licentia)’. 그게 계획의 주축이 될 거다.”

그것은 행동의 중심점이자, 미끼를 잡을 거대한 그물이었다.

베르덴의 목소리에 강렬한 확신이 깃들었다.

그때, 멀리서 레이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옆으로 향하니, 공간 속성의 빛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대륙 간 공간 이동진이 준비된 모양이군. 자세한 이야기는 중앙 대륙에 넘어가서 이어 가도록 하지.”

“예, 주군.”

베르덴과 아드리안이 걸음을 옮겼다.

본래라면 아주 긴 대기 줄이 있어야 할 길을 지나고는, 레이라와 함께 거대한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후우.”

레이라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공간 이동 뒤에 찾아올 멀미를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시 한번 벨디른 공화국을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부디 강녕하시길.”

브릴런의 작별 인사가 끝난 직후, 공통적인 안내가 뒤따랐다.

[처음 이용하시는 고객께는 구토 증세나 어지럼증이 일어날 수 있으니, 위급 상황 시 안내원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키이잉───!

특유의 보라색 빛이 점멸한다.

이윽고 막대한 양의 마력이 휘몰아치며 베르덴, 아드리안, 레이라를 일시에 집어삼켰다.

마탑을 벗어나, 동대륙에서 보낸 약 2년의 시간.

몇 번의 사선을 넘은 끝에 강대한 경지를 이룩한 베르덴이 마침내 본 무대에 오른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는 동대륙의 신성, 애셔의 이름이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었다.

동대륙, 중앙 대륙 그리고…… 서대륙의 보헤미른 마탑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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