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화 승패
아무리 기적적으로 대학살을 면했다고 하지만 희생자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스탬피드에 맞서 무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적지 않은 피를 흘렸고, 유골룡의 습격에 의해 많은 시신들이 훼손되었다.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실종자가 태반 이상이다.
잔해를 치우면 치울수록 실종자는 줄고 사망자가 늘어나긴 했으나 발견되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다.
찾아낸 시신은 남김없이 수습했다.
공동묘지에 옮겨 정중히 장례를 치르고, 루아스교의 교인들이 성가(聖歌)로써 안식을 기도했다.
그러한 슬픔을 뒤로한 채 세크리드는 최소한의 복구 작업을 이어 나갔다.
임시 거처 건축, 외부 침입 감시, 치안 관리, 잔해 운반 등 능력이 되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도시의 안정을 유지시켰다.
바쁘다면 바쁜 나날이다.
워낙 파괴 규모가 큰 터라 체력적으로 상당히 부담이었다.
그렇기에 세크리드의 주점들은 각자가 맡은 작업을 마치고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미스릴 모험가 파티, 만하도 그중 하나였다.
“건배!”
만하의 리더, 스칼드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에일이 목 안쪽을 타고 내려가니 후끈함이 올라온다.
캬아. 술 냄새가 물씬 풍기는 한숨을 내쉰 그가 덥수룩한 수염을 문질렀다.
“후, 역시 열심히 일을 한 직후에 마시는 술이 제일이지. 여기, 각자 한 잔씩 더 추가하겠소!”
“네, 금방 나가요!”
종업원이 곧장 답하며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에일 여섯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따스한 주점 내부와 달리 차갑기 그지없었다.
스칼드가 직접 잔을 들고는, 맞은편 상대 앞에 놓았다.
“그보다 애셔.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당신과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소.”
“마찬가지입니다.”
베르덴이 가볍게 술잔을 쥐며, 술기운에 금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겔톤을 흘겼다.
───저번에 동료들에게 듣자 하니 벨디른 공화국에 유명한 관광 명소가 있다고 하더군요. 아마 빠른 시일 내에 왕국을 떠나게 될 것 같습니다.
겔톤이 마침내 화염 속성을 터득한 당시에 나누었던 대화였다.
‘그런데 설마 그 관광 명소가 세크리드를 말하는 걸 줄이야.’
게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여기 머물고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버민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저희가 미스릴 등급으로 승급할 때, 모험가 본부를 방문했던 걸 제외하면 동대륙을 벗어나 본 적이 없어서요.”
“예, 그래서인지 공화국 문화가 많이 색다르더군요. 볼 것도 많고…… 아, 크흠. 그나저나 애셔 님, 제가 갑자기 찾아왔음에도 흔쾌히 같이 합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걸로 감사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하, 그래도요.”
애초에 베르덴은 세크리드를 떠나기 전에, 겔톤의 얼굴을 한 번쯤 보고 갈 생각이었다.
기왕 마주치기도 했지만…… 성벽 위에서 유골룡에게 <화염 화살>을 날리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기에.
“음, 막상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애셔, 당신에겐 고마운 것투성이오. 자칫 여기서 뼈를 묻었을 뻔했던 우리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스칼드의 동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과 얼음 마법밖에 쓰지 못하던 겔톤에게 불꽃을 안겨 주기도 했고.”
“의뢰의 일환이었습니다. 보수도 받았고요.”
“하하! 그거나 저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소? 당신처럼 대단한 마도사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니 말이오!”
그들도 고위 모험가인 만큼 듣는 귀가 밝은 편이다.
로아프라의 새로운 지배자, 애셔.
지금 술자리를 같이하고 있는 사람은 동대륙 최대 암흑가의 주인이다.
하지만 그러한 놀라운 사실도 이제는 보름달 앞의 반딧불과도 같다.
무려 루아스교의 대주교와 다크 워튼의 후계자와 힘을 합쳐, 언데드계의 초월종인 유골룡과 맞선 끝에 토벌한 그 마법, 그 경지.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려운, 훗날 역사에 기록될 광경을 한시도 놓치지 않고 전부 눈에 담았다.
클레릭, 케디언이 조심스레 숨을 내쉬었다.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정령을 토벌할 때가 엊그제처럼 느껴지는데 말이죠.”
“그때도 애셔 혼자 분노한 정령을 토벌했었소.”
“거의 1년쯤 전이네……. 근데 마법사의 경지가 저렇게나 가파르게 오르기도 하는 거야, 겔톤?”
“하하, 상식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버민. 그러니까 천재이신 게 아니겠습니까.”
베르덴을 제외한 모두가 작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정령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
분노한 정령.
사방에서 덮치는 괴물들.
당시에 느꼈던 긴박감이 자연스레 기억 속에서 흘러나왔다.
지금 그 정령…… 블루는 되살아나 페르네와 함께 있다.
물론 불필요한 말이었기에 베르덴은 모른 척 입을 닫았다.
궁수, 루비나가 안주를 질겅거리며 턱을 괴었다.
“암흑가의 왕, 6위계 마도사…… 거기다 이번에 공화국에 엄청 큰 빚을 지게 했으니, 잘하면 귀족이라도 되는 거 아니야?”
“공화국에 묶일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귀족이기도 하고.”
“그래…… 아?”
모험가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귀족이라고? 어디?”
“에스티리아 왕국.”
“자, 작위는?”
“명예 백작.”
에스티리아 왕국의 명예 백작.
영지는 없다고 해도 실질적인 고위 귀족이었다.
스칼드가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신경 안 쓰니까 그냥 원래대로 대하십시오.”
“그럼 말이라도 놓으시오. 불편하오.”
“뭐, 그게 편하다면.”
베르덴에게 작위란 그저 써먹기 좋은 신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귀족 특유의 우월주의 특권 의식은 전혀 없었다.
그런 태도에, 순간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다시금 활활 타올랐다.
하나둘씩 빈 잔이 늘어 가고, 차츰 모험가들에게서 술기운이 올라왔다.
“예전에 비하면 지금의 겔톤은 아주 다른 사람이 된 거나 마찬가지요! 술도 잘 마시고, 운동도 하고, 게다가 유골룡한테 마법까지 날릴 정도로 용감해졌소!”
“그, 그건 저도 모르게……!”
주점이 점차 시끌벅적해진다.
여전히 혈색 하나 변하지 않은 베르덴은 종종 자신에게 향해 오는 질문에 답하거나, 모험가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노을이 지고 밤하늘이 드리웠다.
이제 마지막 술잔이었다.
“저기, 마무리는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그야 물론이오.”
“크흠흠.”
겔톤이 목을 가다듬고는, 어울리지 않게 큰 목소리를 내었다.
“동대륙의 신성을 위해서───!”
우렁찬 건배사가 가리키는 주인공은 바로 베르덴.
그에 반응한 건 만하의 파티원만이 아니었다.
주점에 자리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잔을 높이 들며 합세했다.
신성을 위해서───!
도시와 목숨을 구원해 준 은인을 위한 축복이었다.
* * *
며칠 뒤, 베르덴 일행을 태우기 위한 공화국의 비행정이 세크리드에 당도했다.
“이 배는 공화국의 수도가 아닌, ‘테르사우’란 장소로 향할 것입니다. 불편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각하.”
비행정의 선장이 정중하게 항로를 설명했다.
타국의 귀족에 대해 최대한의 예의를 취하며. 그러한 모습을 보인 건 선장뿐만이 아니었다.
베르덴은 가급적 조용히 떠나기 위해 곧장 갑판 위로 올랐으나, 미처 날아오르기 전 낌새를 눈치챈 도시의 상층부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브릴런을 대신해 세크리드의 지휘를 맡고 있던 의원들이 직접 찾아와 그럴듯한 인사말을 지껄였다.
죄다 감사를 입에 담지만, 개중에는 가식도 섞여 있었다.
어차피 뭐라 하든지 간에 별 관심도 없었기에 베르덴과 아드리안, 레이라는 대충 흘려들었다.
그리고 배웅에 나선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모두들! 언제나 몸조심하세요!!”
레나 주교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힘껏 손을 흔들었다.
할디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고, 조제프 대주교는 양손을 모아 기도했다.
“부디 루아스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이미 헤어짐을 알고 있었기에 작별의 시간은 짧았다.
후우우우웅.
이윽고 비행정이 부상하며 상공으로 향했다.
레나 주교는 이제 다른 팔까지 뻗어, 선박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양팔을 세차게 흔들었다.
할디른은 텅 비어 버린 지갑의 공허함을 느끼며, 멀어져 가는 비행정을 응시했다.
“스승님께서 그러셨지. 머지않아 새로운 마법의 초월자가 탄생할 거라고. 당시엔 그저 재능 있는 5위계 마법사를 보신 거라고 여겼건만…… 실상은 그 이상이더군.”
“훗날 애셔가 세상에 거대한 영향을 끼치리라는 건 자명한 일이겠지요.”
할디른과 조제프는, 유골룡 토벌 건으로 그가 일반적인 마도사가 아님을 확실히 인지했다.
명백히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몇몇 능력들.
그건 초월자의 편린이었다.
“저런 경지는 난생처음 보지만…… 그렇기에 그가 악인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고 있습니다. 힘에 취한 초월자는 그 자체로 대륙의 위협이니.”
“장담할 수는 없지. 모든 건 변하는 법이니…… 흠, 차기 초월자는 가능하면 내가 되고 싶었는데.”
할디른은 베르덴에게서 강렬한 경쟁의식을 느꼈다.
인간으로 6위계 상위 마도사가 끝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높은 경지라니.
이렇게나 혈기가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감정의 변화를 곱씹던 할디른이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주검의 영광이 유골룡을 부활시켰다는 건, 아마도 그거겠지.”
“예, 죽음 자체를 자원으로 사용한 거겠지요. 분명 그 흉물은 파괴했다고 전해졌는데…… 설마 그것을 재현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과거의 잔당이라고 해도 800년 간 명맥이 이어진 놈들이다. 현시대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그만한 준비를 갖췄다는 얘기겠지.”
“그렇겠지요. 그나마 옛 왕의 신체를 회수하는 데 성공해서 다행입니다.”
현재 목함에 보관 중인 옛 왕의 오른팔.
그날의 하루는 너무도 다사다난했으나, 대주교로서 의무를 다했다.
주검의 영광은 실패했다.
빛은 카일리언스와 공화국에 도사린 어둠을 밀어냈다.
다만, 지금의 결과가 곧 끝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조제프, 너는 주검의 영광이 목적을 이루지 못할 거라고 보나?”
“그럴 겁니다. 그래야만 하고요. 하지만,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최악의 미래를 떠올린 조제프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웠다.
“이 세계는 전란에 휩싸이게 될 겁니다.”
얼마나 많은 죽음이 세상을 덮을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두렵다.
하지만 세상이 어둠에 빠지는 일은 영원토록 없으리라.
그렇기에 당당히 맞설 수 있다.
끝내 우리는 이겨 낼 수 있다고 믿기에───빛은 언제나 승리할 거라 확신하기에.
* * *
대륙 어딘가에 있는, 까마득한 산맥의 내부에는 인공적인 건축물이 존재해 왔다.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퀴퀴한 냄새.
고풍스럽다는 말로 포장할 수 없는 낡고 닳은 풍경.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수많은 틈새.
어딜 둘러봐도 무수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일정 간격으로 벽에 설치된 촛대 위에는 영원히 녹지 않는 초들이 만연했다.
그것들의 미약한 불꽃이 어둠과 하나 되어, 공간의 중심에 놓인 거대한 탁자를 희미하게 밝혔다.
그곳에 세 사람이 있었다.
“네 번째 하인, 케실루스 차에렌이 죽었어. 그간 동대륙에서 발생한 생명의 죽음을 축적하여 부활시킨 유골룡도 토벌되었지. 하다못해 많은 생명을 죽이지도 못했고. 쯧, 변명할 여지도 없는 패배야.”
가녀린 목소리를 낸 두 번째 하인이 시선을 옮겼다.
한편에 설치된 고대의 장식장.
투명한 유리 너머에는 귀, 손가락, 뼈, 코 등 누군가가 남긴 신체의 일부가 자리하고 있다.
개중에는 케실루스의 오른손 약지 또한 보관되어 있었다.
세 번째 하인이 긴 수염을 차분히 쓸었다.
“확실히 당대의 성녀는 위험하구먼. 대륙 너머에서 쏘아 올린 성창으로 유골룡에게 그만한 피해를 입힐 줄이야. 루아스교 역사상 최강이라고 평가받을 만해.”
“그래도 유골룡은 그걸로 죽지 않았어. 마무리는 왕국에서 우리를 방해했던 어린 마도사가 맡았지.”
“케실루스를 죽인 동대륙의 신성…… 분명 애셔라고 했었지. 흠, 그 힘은 실로 괴이했네.”
이들은 케실루스의 최후를 보았다.
마도에 의해 반복된 죽음.
완전한 기억을 볼 수는 없었으나 몇몇 장면은 뇌리에 각인되었다.
“인간보다는 초월자에 가까웠는데. 혹여 타고난 초월자, 그 피를 일부 물려받았을 가능성은 없는가?”
“혈통 문제가 아니야. 피를 얼마나 물려받든 간에 이제껏 이런 경우는 없었으니까. 800년 전에도, 지금도.”
두 번째 하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타고난 초월자, 그 자체라고 보기엔 너무 약하니……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돌연변이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
“돌연변이. 그거 말 되는구먼.”
“놈이 돌연변이든 뭐든 간에 상관은 없다.”
그때, 침묵을 고수하고 있던 첫 번째 하인이 말했다.
“케실루스의 부재는 아깝지만, 결국 죽음은 일시적인 상태에 불과하다. 그 외의 모든 것이 우리가 맞이할 결과 중 최악이라 할지언정, 그 또한 상정한 흐름 중 하나일 뿐.”
칠흑의 장갑으로 덮인 손을 앞으로 뻗었다.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감히 출처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양피지에 새겨진 지도.
국가를 포함한 어떠한 표시도 없이, 오직 대륙의 형태만이 그려져 있다.
그 위에는 총 여섯 개의, 자그마한 신체 부위 모형이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는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위대한 주검의 왼 다리를 손에 넣었다. 이어 벨디른 공화국에서 오른팔을 빼앗겼지.”
손길을 따라 모형들이 움직인다.
오랜 기간 흔적을 쫓은 끝에 대부분의 위치를 밝혔다.
루아스 교국에 ‘셋’.
주검의 영광에 ‘하나’.
“그리고 이번에 서대륙에서 왼팔의 행방을 발견했으니.”
그렇게 총 ‘다섯 개’의 모형이 지도에 자리 잡았다.
인지의 바깥에 놓인 건 하나뿐.
“이제, 머리만 남았군.”
돌연변이가 나타나든, 루아스교가, 다크 워튼이, 이 세상이 어떤 훼방을 놓든 간에 멈출 수 없다.
패배든 실패든 목적지로 나아가는 계단의 일부.
모든 신체 부위의 행방이 확인되는 순간 시작되리라.
주검의 영광이 바라는 건 오직 위대한 주검의 부활.
끝내 이루지 못했던 머나먼 계약의 이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