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360화 (360/366)
  • 360화 거래 (1)

    자리를 벗어난 베르덴과 레이라가 세크리드의 교회 뒤편에 있는 자그마한 뒷마당에 들어섰다.

    고요한 풍경이다.

    계절에 의해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는 앙상했지만, 그렇기에 구석구석에 붉게 피어난 겨울 꽃은 한층 더 도드라져 보였다.

    베르덴이 마력을 조작하며 검지를 휘적였다.

    주위에 내려앉은 푸른 술식.

    마법진이 형성된 이상, 바깥에서는 내부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끼익.

    레이라가 바퀴에 손을 대어 휠체어를 멈췄다.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내 어떠한 결심이 섰는지, 숨을 들이켜고는 입술을 떼었다.

    “악마의 저주는…… 흑마법과 달리 일방적으로 해를 끼치지는 않아요. 작용이 발생하면 반드시 반작용이 따라와 균형을 이루죠.”

    마치 저울처럼.

    “제 경우엔 일종의 강화에 가까워요. 저주의 정도가 심화될수록 더욱 강력한 신체 능력과 재생력을 갖게 되는 거죠. 유골룡에게 당해도 즉사하지 않을 정도의…….”

    레이라는 미스릴 등급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나, 그 실력은 명백히 상위에 위치해 있다.

    재능과 노력.

    그를 기반으로 방주의 시련을 극복하여 남들보다 빠른 성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현재 그녀의 실력으로는 셉타 호른의 가죽을 간단히 뚫을 수는 없다.

    전력을 다한들 초월종과 조금이나마 대적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걸 가능케 해 주는 것이 악마의 저주가 가진 힘이었다.

    베르덴이 물었다.

    “그 대가는 뭡니까?”

    “반작용은 총 두 개. 하나는 정신 침식으로, 루아스교에서 말하길, 그 힘에 의존할수록 저주에 집어삼켜진다고 해요. 그래서 최대한 그런 일이 없도록 주의해 왔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었죠.”

    유골룡과의 토벌전이 끝난 직후, 레이라는 일시적으로 무언가…… 아마 악마로 여겨지는 존재에게 의지를 빼앗겼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배척(排斥)’이에요. 누구든 간에, 제 얼굴의 편린이라도 본 사람은 공포에 질리죠. 저항에 성공한다고 해도 꺼림칙함과 같은 부정적인 거부감을 느끼고요. 설령 대주교님이라고 해도 말이죠.”

    레이라가 슬며시 손을 올려 가면을 벗었다.

    그러고는 휠체어를 돌려, 베르덴과 눈을 마주쳤다.

    황금색 눈동자에 베르덴의 얼굴이 비친다.

    끔찍한 비명 소리도, 뒷걸음질을 치는 소리도, 숨을 삼키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다못해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표정했다.

    “……역시 레나 주교님이 말한 대로군요.”

    작게 중얼거린 레이라가 말을 이었다.

    “제가 저주에 의해 몸의 주도권을 빼앗겼을 때, 당신을 향해 어떤 말을 했다고 들었어요. 넌. 누구냐……라고요.”

    “기억납니다.”

    “그래서 이렇게 당신을 부른 거예요. 하나 궁금한 게 있어서요.”

    그녀가 나지막이 물었다.

    “애셔, 당신은 뭐가 그렇게 특별하죠?”

    투박한 말투처럼 들리지만 비아냥거리는 건 전혀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의문이었다.

    어째서 악마의 저주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는지.

    어째서 그녀조차 정체를 파악하지도, 대화도 나눠 보지 못한 악마가 그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어째서 신성력 없이 포션만으로 부상을 회복했는지.’

    레이라는 토벌전 당시 베르덴의 상처를 아주 가까이서 확인했다.

    복부에 있던 깊은 절창…… 유골룡에 맞섰던 어떤 이들보다 깊고 치명적인 상처였다.

    게다가 유골룡의 영햑력을 생각해 보면 단언컨대 간단히 회복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대주교의 기적이 없다면 더더욱.

    그런데 지금, 그는 누구보다 태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이윽고 대답이 들려왔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악마를 만나 본 적이 없어서.”

    애써 감출 것도 없었다.

    기억을 세세하게 돌이켜 본들, 베르덴이 악마라는 이형종과 접점이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런가요.”

    그러한 답변에 레이라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하나 목소리에 아쉬움은 전혀 묻어나 있지 않았다.

    “거래는 유효해요.”

    “……?”

    “당신이 악마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공유해 준다면 제가 합당한 대가를 지불할 거라는 거래. 아직 유효하다고요.”

    아주 단연한 음성이었다.

    레이라의 시선에 강렬한 의기가 깃들었다.

    그를 응시하던 베르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꽉. 레이라가 저도 모르게 힘껏 주먹을 쥐었다.

    고아가 된 아홉 살 때부터 찾고자 했던, 거의 20년에 가깝도록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던 악마에 대한 단서.

    ‘드디어 찾았어.’

    마침내 그 실마리가 되어 줄 사람을 찾았다.

    * * *

    한편, 세크리드의 교회 앞에 있는 정원.

    베르덴과 레이라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아드리안과 할디른은 원형 탁자를 중심에 둔 채 앉아 있었다.

    “…….”

    “…….”

    차갑고도 어색한 적막이 감돈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지던 도중이었다.

    느닷없이 할디른이 마력을 일으키더니, 침묵의 저주가 깃든 장막이 소리를 차단했다.

    아드리안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자색의 기운, 속도에 치중된 움직임, 하늘을 베는 검기.”

    할디른의 목소리를 통해, 아드리안의 정보가 나열되었다.

    “시간이 꽤 지났다고는 해도, 그러한 특징을 지닌 검사는 기억에서 그리 쉽게 잊힐 만한 것이 아니지.”

    “…….”

    “안 그런가? 중앙 대륙 4강. 천검(天劍), 아드리안 첸버스.”

    베르덴이 아닌, 타인에 의해 이름을 불린 아드리안이 하늘색 눈동자를 빛냈다.

    얼버무릴 생각은 없다.

    상대방은 이미 확신이 가득해 보였을뿐더러, 유골룡과의 격전에서 전력을 보였던 이상 이런 상황은 어느 정도는 예측했던 부분이기도 했기에.

    판단을 내린 그가 어떠한 동요도 없이, 슬그머니 하관을 가린 금속 마스크를 벗었다.

    “전, 중앙 대륙 4강이다.”

    “전이든 뭐든. 천검 본인이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지.”

    “중앙 대륙에 대해 나름 자세히 알고 있나 보군. 흑마법사의 마탑은 동대륙에 자리 잡고 있는 걸로 아는데.”

    “가장 먼 서대륙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크 워튼이니.”

    할디른이 팔짱을 끼었다.

    이런저런 흠집이 나 있는 날카로운 건틀릿이 철컥거렸다.

    “그래서 갑자기 내 이름을 발설한 이유가 뭐지? 잘도 정체를 알아냈다고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하나?”

    “듣던 대로 사납군. 중앙 대륙의 망나니다워.”

    중앙 대륙의 망나니.

    천검이라 불리기 이전, 귀족이든 왕이든 하대하며 송곳니를 드러냈던 아드리안을 일컫는 이명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가 스스로 주군을 모시며 충성을 바치다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모양이야.”

    “본론이나 말해라.”

    “뭐, 그냥 궁금할 뿐이다. 약 10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네가 동대륙의 신성…… 애셔를 따르고 있다는 게.”

    할디른이 나직하게 물었다.

    “대체 너희들의 목적이 뭐지?”

    애셔와 아드리안의 조합.

    숫자는 적지만 결코 고작이라고 할 수 없었다.

    직전의 전투를 상기해 봤을 때, 그 둘과 대적할 수 있는 자와 세력은 세상을 기준으로도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특히, 애셔는.

    “…….”

    아드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단순한 궁금증이라고 해도, 그 호기심 자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대가 다크 워튼의 후계자든 뭐든 간에.

    어느샌가 검집에 손을 올리고 있던 아드리안이 엄지손가락으로 칼의 날밑을 밀었다.

    철컥. 마검 케덴스의 검날이 일부 드러났다.

    푸른 도신이 서늘하게 빛났다.

    예리한 살기가 번진다.

    할디른은 약간의 미동도 없이 그를 마주했다.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다만 찰나에 불과했다.

    두 사람의 대치는 한순간에 끝이 났다.

    “그렇게 궁금하다면.”

    마검을 집어넣은 아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저 지켜봐라. 휘말리지 않게 멀리서.”

    간섭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라는 경고이자 협박.

    아드리안이 다시금 금속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감췄다.

    이내 저주의 장막을 벗어나며, 레이라와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베르덴에게 향했다.

    가만히 자리하고 있던 할디른이 그들을 바라봤다.

    “재밌군.”

    시선을 고정한 그가 작게 웃었다.

    * * *

    세크리드의 상황을 전파받은, 가장 가까운 대도시에서 중형급 비행정 한 대가 날아왔다.

    브릴런 최고 의원을 공화국의 수도까지 운반할 이동 수단.

    공간 이동진의 허가증, 보수로 줄 아티팩트, 예산 회의 등에 대한 일 처리를 최대한 빠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세크리드를 임시로 다스리고 있던 머리가 사라진 셈이지만 대체자는 준비해 두었다.

    비행정 안에는, 브릴런을 대신하여 세크리드의 수복과 안정을 지휘하러 온 공화국의 의원들이 타고 있었으니.

    “호, 공화국이 보유한 아티팩트를 보수로 받는다니. 브릴런이 꽤나 좋게 봤나 보군. 아니면 그 이상으로 겁을 먹었든가.”

    할디른이 어깨를 으쓱이며 약간의 부러움을 표했다.

    그는 다크 워튼을 ‘대표’해서 파견된 마도사. 공화국을 도와준 대가의 지급은 국가와 마탑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이유로 루아스교처럼 사적으로 뭔가를 받을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 브릴런의 제안은 베르덴, 아드리안, 레이라, 위 세 사람으로 한정된 것이다.

    “그래서 날 따로 보자고 한 이유가 뭐지? 설마 아티팩트 자랑이라도 하려는 건 아닐 테고.”

    이곳은 베르덴이 세크리드에서 머물고 있는 방.

    반쯤 비워진 술잔을 앞에 둔 채, 의자에 몸을 누이고 있는 할디른이 건틀릿으로 자신의 팔뚝을 툭툭 두들겼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베르덴이 말했다.

    “거래를 할까 해서.”

    “……거래?”

    “마침 괜찮은 전리품을 손에 넣은 참이다. 그런데 우리가 쓸 수는 없더군.”

    베르덴이 [레인디아]를 기동했다.

    아공간에서 있던 칠흑의 고목 지팡이와 팔찌를 각각 하나씩 탁자 위로 소환했다.

    그것들을 응시하고 있던 할디른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 또한 제대로 된 <감정>을 사용할 줄 아는 마도사였다.

    “설마 이건…….”

    “주검의 영광의 네 번째 하인, 케실루스가 가지고 있던 장비들이다. 파괴되지 않은 게 이 두 가지밖에 없더군.”

    “그 와중에 가져왔다는 말인가?”

    “당연한 거 아닌가?”

    챙기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한번 써 봐도 되나?”

    “얼마든지.”

    베르덴의 허락을 받은, 할디른이 당장 팔찌를 착용했다.

    아티팩트 [원한의 형상].

    마력을 소모하여, 자유자재로 저주의 무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다만 어떤 저주를 깃들게 할지는 착용자의 역량이었다.

    말인즉슨 오직 흑마법사를 위한 아티팩트라는 의미였다.

    후웅.

    할디른의 마력이 단검의 형상을 취했다.

    가볍게 손목을 까딱거리며 유심히 살펴보고는, 고목 지팡이를 한 손에 들었다.

    ‘마력 전달률이 장난이 아니군. 게다가 자연스레 흑마법을 강화하고 있어.’

    <감정>으로도 어떤 재질인지 알 수 없다.

    마법적 가공 없이 소재 자체가 가진 성능이라는 것. 자세하게 알아내기 위해서는 다크 워튼에서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팔찌와 고목 지팡이를 내려놓은 할디른이 턱을 쓸었다.

    물론 로브 아래로 어둠밖에 보이지 않아, 실제로 턱을 쓸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윽고 할디른이 말했다.

    “얼마에 팔 생각이지?”

    “너에게 맡기지.”

    선제시.

    할디른이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고는 차분히 액수를 세어 봤다.

    ‘부족할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 그는 물건의 정확한 감정가를 매기는 데 미숙한 편이었다.

    단순히 직감으로써 대충 가치를 가늠할 수 있을 뿐.

    고민에 빠져 있던 할디른이 이내 내용물을 훤히 보였다.

    “이 정도면 되나?”

    “나가.”

    베르덴이 문 쪽을 가리켰다.

    조용히 지갑을 회수한 할디른이 걸음을 옮겼다.

    “……잠시 공화국 수도에 있는 은행에 다녀오지. 얼마 안 걸릴 테니 애먼 데 넘기지 말도록.”

    할디른이 곧장 복도로 나섰다.

    직후 그를 감싼 어둠이 건물을 빠져나가며 세크리드를 벗어났다.

    어차피 달리 팔 곳도 없어서 그렇게까지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는데…….

    ‘아티팩트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군.’

    그론드의 금고에서 얻은 돈과 현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는 하나, 자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베르덴이 그리고 있는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러던 그때였다.

    똑똑똑.

    “저기, 아, 아티팩트 돌려받으러 왔는데…….”

    서던피트에서 만난 로메르.

    중앙 대륙의 외로운 늑대가 제 물건을 되찾기 위해 찾아왔다.

    거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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