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한 걸음
인간이 신의 힘을 품고 초월하여 구현해 낸 빛의 천벌.
[───!]
성녀가 쏘아올린 성창, 그란테르가 유골룡의 몸을 관통했다.
초월적인 힘이 담긴 빛의 기둥이 하늘과 땅을 연결했다.
그 아래에 있던 언데드의 사기가 일시에 증발하고, 거대한 용의 형체마저 자취를 감추었다.
모든 이의 시야가 고귀한 광명으로 물들었다.
그러한 섬광이 점차 커지더니, 이윽고 공간을 격하며 도시 전체를 뒤덮었다.
병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따뜻해.”
성벽이 무너지지도, 애꿎은 사상자가 발생하지도 않았다.
성녀의 기적은 빛을 거역하는 악을 멸절하되, 세상을 안정시키고 인간의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하는 따사로운 빛이기에.
그제야 유골룡의 존재감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주저앉거나, 제대로 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다.
바짝 얼어붙어 있던 이성도 멀쩡하게 돌아왔다.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하루아침에 절망 속으로 떨어지고 있던 세크리드가 구제되었다.
아인종과 마수의 침공이, 초월적인 언데드의 공포가 마침내 막을 내린 것이다.
그 사실에, 모두의 가슴속에서 안도와 희망이 가득히 차올랐다.
잠시 후, 그란테르의 형상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어, 저기 봐……!”
빛이 잦아들며 유골룡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툭…… 투둑…….
부러진 갈비뼈와 일그러진 척추.
등에 돋아나 있던 두 개의 날개는 무너진 끝에 완전히 소멸했다.
하나둘씩 떨어지는 파편이 지면에 박히거나 굴러다녔다.
그 외의 골격에도 수많은 금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데다가, 몸 내부에 있던 언데드 특유의 푸른 불꽃 또한 사라졌다.
신성력은 죽음에서 태어난 존재와 상극이다.
심지어 루아스교의 최강자인 성녀가 대륙 저편에서 발현한 기적이다.
그 앞에, 베르덴의 마법마저 견뎌 냈던 언데드 드래곤의 저항력은 무색했다.
죽었다.
죽은 게 분명하다.
어느 모로 보나 생존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의식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조제프 대주교도, 겨우 몸을 추스르고 있는 할디른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은 전부 다 그럴 거라 확신했다.
오직 단 한 사람, 베르덴을 제외하면.
초월에 닿아 있기에 감지할 수 있는 존재.
직전에 비해서 극히 희미해졌다고는 하나…….
‘……아직, 살아 있다.’
그 직후였다.
화아아아악.
갑작스레 유골룡의 내부에서 푸른 화염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 빛이 무너져 내려가던 전신으로 퍼지며, 안와에도 두 개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어, 어떻게 언데드가 성녀님의 기적을……!”
조제프의 말대로 본래라면 소멸했어야 했다.
언데드라면 그게 정상이다.
그러나 유골룡은 찰나의 순간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피할 수 없는 빛이라면, 날개를 버리는 것으로 막아 내자고.
확률 싸움에 가깝지만 주사위를 던지지 않으면 모르는 법.
초월종이라고 해도 언데드의 일종이라는 사실은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 반대로, 언데드라고 해도 초월종의 범주에 속해 있다.
드래곤은 엄연한 지성체다.
아무리 사체라고 한들, 그것이 지닌 오성(悟性)은 인간을 아득하게 초월하고 있다.
[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성을 잃은 유골룡의 포효에 아지랑이처럼 대기가 일렁인다.
쩌저저적, 주변 일대가 갈라진다.
막대한 진동이 성벽을 포함한 도시 전체를 뒤흔들었다.
동시에 입 안쪽에서부터 번쩍이는 서늘한 청광(淸光).
더는 발현되지 말았어야 할 유골룡의 숨결이 정면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 앞에, 베르덴이 있었다.
‘피할 수 있다.’
치명상을 입은 탓에 전체적으로 기존의 위력보다 약해져 있는 듯하다.
또한 유골룡의 무게중심이 뒤틀려 있기에 정확성이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착탄 지점은 베르덴의 머리 위.
말인즉슨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도 무사할 것이다.
‘되레 기회를 삼아 역공을 노려 볼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브레스가 저대로 일직선을 관통하여 정확히 도시 내곽에 다다를 것이다.
이어 바닥과 맞닿아 발생하는 폭발의 규모를 예측해 본다면…… 사상자는 최소 수만 단위.
쿵.
베르덴이 오리엔트를 지면에 박았다.
망설임 없이 마안으로 하나의 마법을 발동했다.
<회로 역전>
마력의 분신을 생성하는 <환영>과 부여 마법의 성능을 높이는 <인텐션>.
그것들과 함께 아크의 도서관, 라이브러리에서 터득해 온 세 가지 6위계 부여 마법 중 하나.
전신에 뻗어 있는 마력 회로의 흐름이 반대로 뒤바뀐다.
순류와 역류의 충돌.
일시적으로 과도한 마력이 체내에 머무르게 되었다.
원래 이 마법의 용도는, 마력을 더욱 소모하여 짧은 시간 동안 보다 다수의 사람에게 부여 마법을 걸어 주기 위함이다.
하지만 베르덴은 이걸 다르게 활용했다.
<아케인>에 의해 흐름이 가속화된 방대한 마력이 삽시간에 일대를 집어삼켰다.
어금니를 깨문 베르덴이 단숨에 마력을 조작했다.
<마력 방벽>
세크리드의 전면을 차단하는, 거대한 마력의 보호막.
그 위로 극저온의 숨결이 들이닥치며, 강렬한 울렁임이 신경을 강타했다.
“……!!……!!!!”
안 그래도 로어에 당한 피해와 마력회로의 피로감이 몸에 쌓여 있는 상태다.
그와 더해서 유성과 <원소화>로, 다른 6위계 마법사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마력을 소모한 이후다.
……막지 말아야 했다.
피한 다음 마법을 펼쳐, 중상을 입은 유골룡을 격퇴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지금의 상황은 베르덴이 할 수 있는 최악의 판단이었다.
도대체 왜 그랬는가.
베르덴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대답을 생각해 내기 전, 마치 성벽과도 같던 마력의 장막이 사라졌다.
정적이 감돌았다.
눈앞에는 극저온의 냉기로 뒤덮인 길이 쭉 이어져 있었고, 뒤에는 고요한 세크리드가 자리했다.
세간에서 기초 마법으로 여겨지는 <마력 방벽>으로 유골룡이 토해 낸 브레스를 온전히 막아 낸 것이다.
이윽고 <회로 역전>에 의한 반동이 엄습했다.
“큭…….”
털썩.
베르덴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얼굴 너머로 힘겨운 기색이 가득했다. 오리엔트를 잡고 있는 손아귀가 느슨해졌다.
쿵…… 쿵…… 쿵…….
유골룡이 눈앞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시점에서 자신에게 가장 위협적이라고 판단되는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 이성이 아닌 본능을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니, 기어 온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금이 가 있는 놈의 다리가 연신 삐걱거리며 몸체까지 흔들리고 있으니.
“…….”
그럼에도 베르덴은 그저 지켜봐야만 했다.
당장 전혀 움직일 힘이 없었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루아스시여……! 부디 어둠을 몰아낼 빛을─── 쿨럭, 쿨럭!”
조제프가 도우려 하다 숨을 토하며 휘청거렸다.
신성력이 모이다 흩어졌다.
그 또한 의식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몸이었다.
앞에 있는 두 명의 팔라딘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만 내쉬고 있었다.
“막아라……! 저놈도 멀쩡하지 않으니 당장 막으란 말이다!”
저 멀리서 상처를 부여잡은 할디른이 소리쳤다.
귓가를 파고드는 고함에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지금이라면……!”
“대형 화살! 아무나 창고에서 대형 화살 좀 가져와!!”
“마법이든 뭐든 쏴 버려!! 저 괴물이 세크리드에게 오지 못하도록!”
유골룡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약해진 덕분에 사람들이 전의를 되찾았다.
각종 화살과 마법, 신성의 기적이 쏟아지며 강대한 언데드를 타격했다.
그러나 죽기 직전이라고 해도 초월종이다.
아주 잠깐 주저하게 할 수는 있어도, 전진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유골룡이 베르덴의 앞에 도달했다.
[…….]
“…….”
타고난 초월자와 준초월자의 시선이 교차했다.
베르덴이 말없이 양팔을 들어 머리를 보호했다.
쩌어어어억───!
만물을 찢어발기는 용의 발톱이 그에게 격중했다.
* * *
───그아아아아아아아!
세크리드에 당도한 유골룡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 몸부림.
마법진으로 강화되어 있던 성벽들이 담벼락처럼 무너지고, 사람들의 비명과 함성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고막이 세차게 진동하며 머리마저 울린다.
요란한 상황 속에서 몇몇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웠다.
───레, 레이라 님…… 어, 어떡해요? 신성력이, 치유의 기적이 전혀 듣지가 않아요……!
───어째서…….
───어이, 뭔가 날아온다! 그쪽은 성직자한테 맡기고 당장 무기 들어!!
익숙한 음성이다.
강제로 의식을 끄집어낸 베르덴이 아주 얕게 눈을 떴다.
“흑, 흐윽…….”
바로 앞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의 상처를 누른 채 신성력을 발하고 있는 레나 주교가 보인다.
시선을 아래로 옮기자, 레이라와…… 서던피트에서 만난 로메르가 날아오는 얼음 송곳들을 막아 내고 있었다.
잠시 정신을 잃은 베르덴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더욱 아래에서는, 아드리안과 할디른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유골룡을 상대하고 있다.
‘모두들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나.’
치명적이긴 한 것 같다만.
그건 베르덴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스스로의 몸을 관조했다.
‘늑골이 두 개 정도 부러졌고…… 복부 쪽의 절창(切創)이 꽤 심하군.’
드래곤을 소재로 만든 아인베르가 베인 것이다.
특히나 무방비한 상태에서.
마도왕의 아티팩트가 아니었다면 몸이 조각났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상처 부근에 있는 신경이 큰 손상을 입었는지 이렇다 할 고통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스르륵.
베르덴이 눈을 감았다.
솔직히 말해 가만히만 있어도 생기지 않을 부상이었다.
그래, 지금의 상황은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왜 그랬을까.’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알량한 영웅심? 아니면 같잖은 양심?
천만에.
베르덴은 그렇게나 이타적인 인간이 아니다.
그와 비슷한 사명도 없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거 죽는다고 한들, 끝내 눈앞에서 도시가 멸망한다고 한들, 기분만 좀 나빠지는 게 전부겠지.
슬픔 같은 사치스러운 감정은 느끼지 않으리라 단언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맞섰는가.
대답은 간단했다.
‘그냥, 싫었으니까.’
베르덴에겐 자신만의 선이 있다.
마탑주, 발로크 베시아스에게는 없는 선이 말이다.
스스로 이겨 내지 못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제물 혹은 미끼로 삼아 승리를 쟁취하는 건 결코 베르덴의 방식이 아니었다.
대적할 수 없는 적을 앞에 둔다고 한들 마찬가지다.
그것이 세상이 운명이라 부르는 것이라고 해도 순응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게 베르덴이었다.
네 번째 하인, 케실루스의 말대로 세상은 불합리하고 불공평하다.
이처럼 준초월자가 되었음에도 더욱더 위가 있으니…… 유골룡이든, 루아스교의 성녀든.
이상할 건 없다.
애초에 그게 세상이니까.
‘섭리라고 했던가.’
또한 케실루스가 유언 삼아 말했다.
초월에 닿은 자는 타고난 초월자를 감히 이길 수 없다고.
별개로 인정은 한다.
유골룡이 이제까지 상대해 왔던 어떤 적보다 강대하다는 건.
‘하지만 케실루스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베르덴은 불합리함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섭리, 그 자체를 깨부수는 것.
그것이 역천의 마법진이 탄생한 계기였다.
* * *
“하아, 하아…….”
레이라가 힘겨운 숨을 내뱉었다.
유골룡에게 당한 충격이 극심하다.
다행히 즉사는 면했으나, 악마의 저주에 의한 회복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왼쪽 팔을 축 늘어뜨린 채, 간신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전부였다.
“제길, 몸을 숨길 곳이 하나도 없잖아……!”
먼지로 더럽혀진, 백발과 흑발이 섞인 머리칼을 지닌 사내, 로메르가 중얼거렸다.
검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다.
양손에 잡고 있는 건 평소 들고 있는 방패 하나뿐.
로메르가 서던피트에서 자신을 묵사발로 만든, 뒤에 쓰러져 있는 잿빛 머리의 남자를 지키고 있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으니까.
“이봐, 동대륙 모험가! 다른 방법 없어?! 이러다 우리도 끝장난다고!”
“또, 와요.”
“뭐? 아, 진짜……!”
당장 방패를 세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깨지기 쉬운 얼음 조각 따위가 아니었다.
[가아아아아아아아아!]
유골룡을 이루고 있던 파편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아니, 왜 저놈은 여기만 노리는 거야?!”
로메르가 불평했으나 이미 늦었다.
드래곤의 뼛조각이 직선의 궤적으로 날아온다.
정면으로 막는 건 곧 죽음이었다. 레이라와 로메르가 전력을 다해 안력과 신체 제어력을 높여 비스듬히 튕겨 냈다.
그러나, 끝까지 막아 내지는 못했다.
“으아아아악!!”
휘두른 방패와 떨어진 몸.
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온 그것이 로메르의 어깨를 뚫고 지나갔다.
그가 비명과 피를 흩뿌리며 나가떨어졌다.
카앙! 캉! 카아앙!
레이라는 조금 더 견뎌 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진다. 갑옷과 함께 허벅지가 관통당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향해 마지막 파편이 쇄도했다.
‘……죽는다.’
악마의 치유력이 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머리가 꿰뚫리면 살아남을 수 없다.
끝을 직감한 레이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콰직.
끔찍한 파육음.
그런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백금의 로브를 두른 사내의 등이 보였다.
“애……셔……!”
베르덴이 팔뚝에 박힌 유골룡의 뼈를 뽑아냈다.
격통이 인다.
무뎌진 정신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통증이다.
저벅, 저벅.
뼛조각을 던진 베르덴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태연함에 경악한 레나 주교가 눈을 깜빡였다. 베르덴의 발아래로 핏자국이 이어졌다.
레이라가 그를 뒤따르려 했으나 몸이 꿈쩍하지가 않았다.
“가만히 있어요!! 그러다가 진짜로 죽는다고요!!”
레나 주교가 소리치며 레이라와 로메르를 치유했다.
그런 그들을 뒤로한 베르덴이 격전지를 향해 다가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늘에서 벨디른 공화국의 비행정이 날아와 유골룡과 충돌했다.
그리고 폭발까지.
브릴런 최고 의원이 도시 내곽에서 지원 삼아 보낸 것인가.
순간 유골룡이 휘청거리며 괴로운 듯 포효했으나 역시 부족했다.
충격을 견뎌 낸 놈이 사방에 파괴를 흩뿌렸다.
이윽고 베르덴이 무너진 성벽 부근에 도달했다.
“…….”
분전하고 있던 할디른과 아드리안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유골룡은 보다 더 골격이 무너져 있었으나, 언데드로서 사멸(死滅)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애셔…… 상처가……!”
성벽에서 내려와 있던 조제프가, 한 성기사에게 부축을 받은 채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본인의 상태를 돌보지 않고, 무리를 해서라도 치유를 해 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베르덴에게 신성력에 의한 치유나 버프는 통하지 않는다.
간단히 손을 저어 그를 제지하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대주교님, 유골룡을 도시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게 할 방법이 있습니까? 잠시라도 좋습니다.”
“잠시라면…….”
조제프가 슬쩍 잔해 너머로 눈동자를 향했다.
시선의 끝에는, 반파된 러스트러스가 있었다.
“예, 있습니다. 다만 유골룡의 신경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잠시 동안은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가능하다는 답변에,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베르덴이 다시금 앞으로 향했다.
눈을 부릅뜬 조제프가 다급히 만류했다.
“설마…… 유골룡을 막으시려는 겁니까? 그대의 몸으로는 무리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과 같이 중상을 입은 건 마도왕의 무덤 이래로 처음이니.
그래도, 괜찮다.
───탁.
손을 뻗어, 잔해 속에 있던 오리엔트를 잡아챘다.
“모두, 물러나라.”
음성이 마력을 타고 울려 퍼진다.
유골룡에게 근접해 있던 할디른과 아드리안이 당장 후방으로 향했다.
베르덴에게서 기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것이다.
그리고 병사와 모험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이미 어느 정도 멀어진 상태였다.
베르덴이 유골룡을 직시했다.
따가운 시선을 느낀 녀석이 거대한 빙산을 허공에 구현하기 시작했다.
그를 응시하며 베르덴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준초월자란 일종의 경계선에 위치한 경지와도 같다.’
정확히 6위계와 7위계를 나누는 간극.
베르덴은 한번 이 선을 넘었던 적이 있었다.
관리자에게 대적하기 위해서, 개신(開身)을 통해 두 번째 역천을 이루었을 때였다.
당시에는 10분에 불과한 불완전한 초월.
앞으로 진정한 초월자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남은, 절반의 깨달음.
물론 이런 상황에서 정신적 깨달음을 얻고 초월하리라는 건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운 따위는 배제한다.’
요행을 바라지 마라.
기적에 기대지 마라.
어떠한 가능성도 없이, 오롯이 확신만을 품는다.
세상이 불합리하다면, 베르덴 자신 또한 불합리한 존재가 되면 그만이다.
적이 압도적인 강함을 지니고 있다면, 그보다 더욱 강대한 힘을 손에 넣으면 될 뿐이다.
누군가 이를 듣는다면 허황된, 말뿐인 논리라고 부르짖겠지만, 그들과 다르게 베르덴은 몸소 경험한 적이 있는 간단한 이치다.
첫 번째 역천을 통한 육체의 재구성.
두 번째 역천을 통한 절반에 이른 마도의 개척과 마법적으로 완성된 육체.
그사이와 이후의 삶까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운명은 무시한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기꺼이 하늘마저 거역하는 의지와 실행력.
그것들만이 베르덴이 실현한, 세상의 섭리를 부수는 유일한 해답이다.
‘경계선을 완전히 벗어날 생각은 없다.’
단번에 초월자가 된다는 욕심은 미련 없이 버린다.
‘조급해하지 않고 아주 조금만.’
이미 걸어 봤었던 길만을 다시 걷는 정도면 된다.
많이도 필요 없다.
‘한 걸음만, 더.’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베르덴이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그 순간 거칠게 맥동하는 심장 속에서 이질적인 마력이 일기 시작했다.
진홍의 테두리에 휩싸인 칠흑의 마력.
관리가가 말했던, 마도왕의 초위 마법을 파멸시켰던 예의 그 마력임이 틀림없었다.
‘파멸이라.’
관리자가 왜 그 단어를 강조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체내에 있던, 한없이 순수한 마력이 가진 성질과 전혀 다른, 위압적이고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베르덴은 이 검붉은 마력에 전혀 의문을 갖지 않았다.
애써 정체를 해석하려 하지도, 의식을 집중해 면밀하게 살펴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히 이끌리듯, 마땅히 주인답게 마력을 다루었다.
그 의지에 따라 위계를 이루고 있던 벽이, 한시적으로 파멸한다.
동시에 이제껏 지식으로만 품고 있던 마법을 최초로 떠올리며 마안을 발동했다.
주르륵.
부담을 견디지 못한 오른쪽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피.
그를 대가로, 유골룡을 겨냥한 오리엔트의 오브에서 붉은빛이 선명하게 명멸했다.
염계(炎界)의 현현.
<헬파이어>
과거 관리자가 베르덴 앞에서 선보인 마법 중 하나.
세상을 불살라 버리는 7위계의 화염이 원뿔 형태로 뻗어 나가며 공간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