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유골룡 (1)
어릴 적, 레이라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그녀의 부모를 살해한 악마가 남기고 간 강대한 저주.
그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은 감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한편생을 저주를 없애기 위해 살아왔다.
그렇기에 악마의 힘에 기대고 싶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너무도 끔찍하고 혐오스러웠으니까.
하지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용하리라.
극단적인 감정에 치우쳐 목숨을 내버릴 생각은 없다.
최소한의 이성(理性). 그것이 레이라의 장점이었다.
촤아아아악!
붉은 검기가 셉타 호른의 목덜미 부근을 베어 갈랐다.
찢어진 가죽 너머로 피가 번진다.
겨우 흠집을 내는 게 전부였던 이전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차이.
[크롸아아아아!!]
먹잇감에게 고통을 느꼈다는 사실에 셉타 호른이 격분했다.
콰과과과광!
내지른 포효가 건물 세 채를 관통했다.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간 칼바람이 거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무대는 광장에서 세크리드 외곽으로 옮겨졌다.
‘이쯤이면 되겠군.’
그때, 마력을 번뜩인 할디른이 흑색의 창을 내던졌다.
콰직.
정확히 레이라가 낸 상처를 꿰뚫었다.
흉악한 괴성이 메아리쳤다.
아예 관통하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마도, <명영命景>.
할디른이 개척한 길은 자신과 타인의 생명력을 저주에 깃들게 하여 특수성을 품게 하는 힘.
그리고 그가 지니고 있는 아티팩트 <정혈의 고리>는 상대의 혈류와 자신의 마력이 직접적으로 닿아 있는 동안, 저항력을 무시하고 저주를 거는 게 가능하다.
현재 골육의 창으로 조건은 만족했다.
<오멸>
<모독>
<앰플리파이>
<대악화>
피를 더럽히고, 신체 능력을 약화시키며, 피해를 증폭시키고, 상처를 강제로 벌어지게 만든다.
전부 6위계에 위치한 고위 저주.
당연히 마도와 흑마법서, 각종 매직 아이템으로 강화된 위력이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셉타 호른이 몸부리치며 창을 뽑아내 짓이겼다.
하나 이미 한시적으로 저주가 걸린 상태.
<하스타르>
혈풍血風.
검기의 폭풍과 수십 개의 저주의 창이 휘몰아친다.
일시적으로 힘이 약화된 셉타 호른의 육신에 보다 깊은 상흔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를 깨달은 놈이 점차 회피에 의존했다.
제대로 먹힌다.
더없이 효과적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강대한 개체임은 부정할 수가 없다.
콰아아앙!
정통으로 얻어맞은 레이라가 울컥 피를 토했다.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뒤이어 매서운 발톱이 할디른의 로브를 손상하고 출혈을 일으켰다.
실수하면 치명상이다.
그 사실을 명확히 인지한 채, 두 사람이 검기와 흑마법을 발현했다.
콰앙! 콰과과과광!
쐐액───촤아아악!
[카아아아아아아악!]
살육전에 가까운 치열한 공방.
그들이 지나쳐 온 모든 것이 철저하게 유린되었다.
파괴된 건물 잔해가 거리에 가득하다.
장장 수십 분에 걸친 전투에, 세크리드의 외곽이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혈死血.
레이라가 역수로 쥔 검이 셉타 호른의 복부를 관통했다.
즉시 지면을 박차, 자리를 벗어났다. 놈의 상처에서 피가 꿀렁거리며 쏟아졌다.
동시에 할디른이 전력을 집중했다.
<낙명의 천앙>
삽시간에 쇄도한 저주의 구체에서 거대한 폭발이 발생했다.
일대를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린 힘에 셉타 호른이 나가떨어졌다.
성벽 너머의 저편으로.
“허억, 허억…….”
“…….”
지친 레이라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할디른 또한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피로감이 짙다.
여기저기 입은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즉시 두 사람이 성벽 위로 올라가 전황을 살폈다.
[크르르…….]
아직 셉타 호른은 죽지 않았다.
무리 사이에 둘러싸여, 두 사람을 노려보며 이빨을 드러냈다.
살기와 전의는 여전히 가득하다.
“확실히 특수 개체라 그런지…… 진짜 괴물이긴 하네요.”
“저게 그 특수 개체였나? 어쩐지 강하더군.”
“…….”
짧은 소강상태.
가능하다면 당장 끝내고 싶지만, 어느 정도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레이라에게는 말이다.
그러는 동안 할디른이 조제프의 행방을 찾았다.
“다행히 살아 있군.”
무사히 추락한 러스트러스에서 구출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정신을 잃은 상태이긴 하다만.
옆에 있는 팔라딘, 셰인에게 물었다.
사고의 여파에 당했는지 그의 왼쪽 팔은 사라져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파악하지 못했다. 대주교께서 갑작스레 공간 이동을 하던 도중에 무언가가 습격했다는 것 외에는…….”
습격이라.
“그렇다면 조제프가 그 정체를 알고 있겠군.”
당장 조제프의 정신에 간섭했다.
셰인이 반사적으로 제지하려 했으나 곧 참아 냈다.
할디른의 의도와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허억!”
이윽고 조제프가 눈을 떴다.
다급하게 몸을 일으킨 그가 곧바로 상황을 살폈다.
아인종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세크리드의 전장.
주위에 있는 할디른과 레이라, 레나 주교, 중상을 입은 셰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연유를 물을 때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급한 사안이 있었기에.
“러스트러스가 추락한 지 얼마나 지났습니까?”
“정확히 28분 지났다.”
주검의 영광의 근거지와 세크리드와의 거리.
러스트러스를 공격한 그것의 속도.
28분.
“……할디른, 지금 저 아인종과 마수를 상대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뭐?”
“그것이 오고 있습니다. 지금쯤이며 아마 거의 도착했을───”
……?!
갑작스레 감지된 거대한 사기(死氣).
눈을 부릅뜬 할디른이 본능적으로 뒤를 돌았다.
하늘을 바라봤다.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다.
“뭐, 뭐지, 저건?”
[크르륵?]
이내 할디른만이 아니라 성벽 부근에 있는 모두가, 심지어 셉타 호른을 비롯한 아인종과 마수까지 반응했다.
순간 정적이 일었다.
무거운 침묵 속, 까마득한 상공에서 거대한 물체가 비스듬히 낙하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면에 도달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
인근 숲을 초토화하며 속도를 줄이고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언데드.
이윽고 그것이 아인종과 마수를 말 그대로 갈아 버리며 멈춰 섰다.
“어째서…….”
할디른의 목소리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드래곤이 여기에 있는 거냐.”
드래곤의 시체에서 탄생한 언데드, 유골룡(遺骨龍).
초월적 존재가 이 땅에 나타났다.
* * *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인간도, 마수도, 아인종도…… 생명을 가진 그 무엇도 움직이지 못했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압도적인 중압감이 내면을 짓눌렀다.
[…….]
스윽.
유골룡의 눈을 이루고 있는 푸른 불꽃이 천천히 좌중을 바라봤다.
언데드가 증오해 마지않는 산 자들이 여기저기 득실거린다. 누구부터 없애야 할지 고민이 들 정도였다.
그때, 유골룡이 자신의 앞에 있는 셉타 호른을 직시했다.
[카…… 카앗…….]
특수 개체, 셉타 호른이 덜덜 떨었다.
공포는 생명의 방어기제.
본능적으로 대적할 수 없음을 직감한 것이다. 대항할 생각이 없다는 듯 셉타 호른이 꼬리를 말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유골룡은 그딴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셉타 호른은 간교하다.
그에 비해 드래곤은 교활하고 영악하며 현명하다.
그야말로 존재의 격이 다르다.
콰지지직!
[케에에에에엑?!]
유골룡의 발톱이 셉타 호른을 관통했다.
정확히 레이라가 꿰뚫은 복부의 상처를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이내 극한의 냉기가 장기 내부로 흘러 들어갔다.
아무리 저항력이 높다고 해도 내장까지 그렇지는 않다.
또한 유골룡의 한기는 마법으로 치면, 7위계에 육박할 정도.
[카아아아앗! 카아아아아아아앗?!]
쩌저저적.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던 셉타 호른의 생명이 서서히 정지되어 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완전히 얼어붙었다. 가볍게 내치자, 셉타 호른이었던 동상이 산산조각이 났다.
“어, 어떻게…….”
레이라가 믿을 수 없다며 목소리를 흘렸다.
그토록 고전했던 특수 개체를 단숨에 없애 버릴 줄이야.
애당초 언데드 드래곤의 존재 자체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너무도 갑작스러워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녀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러했다.
[케, 케에에에에!]
[키륵, 키르르륵!]
[카아악!]
우두머리를 잃은 아인종과 마수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더니 달아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다간 죽임을 당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럼에도 유골룡은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그보다 더욱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성벽 위에 있는 몇몇 인간들에게 더 관심이 갔기에.
생명을 쫓는 건 언데드로서의 본능이었다.
할디른이 주먹을 강하게 말아 쥐었다.
“말도 안 되는군. 주검의 영광이 초월종의 시체를 부활시키다니. 그게 가능할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진실입니다.”
조제프가 태연히 말했다.
로브 안쪽의 어둠 속에서 할디른이 이를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태평하군. 대주교랍시고 체면을 차리는 건가, 조제프?”
“저에게 비책이 있습니다.”
“……뭐?”
근방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조제프에게 향했다.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해 그분께서 비장의 수단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분이라면.”
“현 루아스교의 ‘성녀’이십니다.”
그러자 할디른이 감정을 가라앉혔다.
확실히 그 이름을 가진 존재가 가진 힘은, 유골룡을 잠재울 만한 능력이 있었기에.
“하지만…… 이것을 쓰려면 준비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보고 시간을 벌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럼 답하지. 불가능하다.”
드래곤은 종족 자체가 초월에 위치해 있다. 그야말로 타고난 초월자다.
“아무리 유골룡이 드래곤이 가진 능력과 힘을 태반 이상 쓰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초월종에서 비롯된───”
말하던 도중, 등골이 서늘해졌다.
즉시 그들이 자리에서 벗어나 성벽의 양옆으로 도주했다.
근방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쿠웅.
직후 파공음이 공간을 울렸다.
무형의 충격파가 조제프와 할디른이 있던 성벽의 일부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
“저게 로어(Roar)인가……!”
드래곤이 가진 능력 중 하나.
책에 실린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지, 그 위력을 직접 보게 된 건 할디른도 난생처음이었다.
그러지 않은 이가 없었다.
느긋하게 대화할 때가 아니다.
“그 의식. 몇 분이면 되지?”
“최대한 많이 확보해 주십시오.”
“가장 어려운 부탁을 하는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그 외엔 없었으니까.
심지어 그조차도 가능할지 의문이다.
[쿠오오오오.]
유골룡이 나지막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몸체에서 흘러나온 냉기가 하늘로 솟구치더니 빙산을 구현했다.
그 크기는 가히 성벽의 입구에 필적할 정도.
“젠장.”
할디른이 필사적으로 전력을 끌어모았다.
저만한 무게를 지닌 물리력을 자신의 저주로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할디른이었기에.
“그보다 애셔는 어디로 갔지?”
“말하자면 깁니다만…….”
“되는 게 없군. 알았으니까 의식에 집중해라.”
할디른이 사고를 가속하며 어떻게 무리 없이 빙산을 막을 수 있을지, 어떻게 시간을 끌어야 할지 궁리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파아아아아아앗!
구름 위에서 황금빛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언뜻 신성력과 비슷해 보이나 아니었다. 특유의 성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새로 나타난 두 명의 존재를 감지한 할디른이 숨을 내쉬었다.
“기막힌 타이밍이군.”
후욱.
드높은 상공에서 아드리안이 낙하했다.
마검 케덴스를 든 채 회전하며, 유골룡을 향해 거대한 자색의 검기를 날렸다.
두 동강 난 빙산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
콰과과과과과과과과광!
하늘에서 원소 마법의 폭격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유골룡이 모습이 화염에 휩싸여 시야에서 사라졌다.
서서히 고도를 낮춘 잿빛 머리의 마도사가 세크리드의 성벽에 시선을 향했다.
그가 아는 이들 중 죽은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늦진 않았나.”
베르덴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