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이변 (1)
레이라는 재작년, 애셔와 함께 도전했던 방주의 시련을 기억한다.
리비안트 공국에 위치한 악마의 숲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형종, ‘소울 트리’.
특수 개체가 되기 직전까지 진화를 거친 거목은(巨木)은 수많은 트런트와 함께 도시, 로리엔을 침공하려 했다.
다행히 돌이킬 수 없는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애셔 덕분이었다.
땅 아래에 숨어 있는 소울 트리를 지상으로 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원소 폭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니.
레이라도 소울 트리의 신경을 분산시키고 나무껍질을 베어 넘겼으나, 애셔의 활약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결국 소울 트리는 도시에 닿지 못한 채 토벌되었다.
그렇게 시련은 무탈하게 극복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레이라 혼자 상대했다면 고전을 면치 못했을 만큼.
굳이 따지자면 소울 트리는 정신계를 다루는 이형종이다.
마지막에 내지른 끔찍한 비명은 애셔와 레이라만이 아닌, 로리엔 주민을 포함한 수만 명의 사람을 악몽에 빠뜨렸다.
나라를 절망으로 물들이는 나무, 소울 트리.
만약 그것이 로리엔을 집어삼켜 완성체가 되었다면…… 공국의 사활을 걸었어야 했을 것이다.
이처럼 통상적인 진화에서 벗어난 특별한 존재.
기존 개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지닌, 세계가 최우선으로 없애야 할 위험 인자.
그게 바로 ‘특수 개체’로 분류된 괴물들이다.
‘그리고 그 특수 개체가 지금 눈앞에…….’
레이라가 조심스럽게 검을 다잡으며 시선을 높였다.
셉타 호른이 광장 중심에 서서 느릿하게 눈동자만을 굴리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공식적으로 모험가 길드에서 셉타 호른을 발견한 건 약 47년 전.’
중앙 대륙에서 거대한 무리를 이끌고 나타난 놈은 무려 일곱 개의 마을과 두 개의 도시를 멸망시켰다.
기록에 의하면 도시 전체가 사람의 파편으로 가득했으며, 성벽 바깥은 도망치다 사냥당한 사람들의 혈흔으로 물들어 있었다고.
그런 공포의 행진을 막기 위해 모험가 길드와 국가가 전력을 집중했다.
하위 등급에서 고위 등급에 걸친 모험가가 상당수.
그리고 길드의 정점인 흑요 등급 모험가가 셋.
또한 전쟁을 방불케 하는 규모의 군대가 토벌을 보조했다.
그렇게 두 집단이 격돌했고 인간은 승리했다.
‘결과적으로 미스릴과 백금 등급 모험가 다수가 사망했고, 흑요 등급 모험가 셋 중 둘은 중상.’
오직 셉타 호른만을 따로 유인하여, 최고위 모험가들이 급습했음에도 그만한 피해를 입었을 정도다.
‘그에 비하면 여기에 모인 전력은…… 부족해.’
나름 한가락 하는 사람이 몇몇 있는 것 같긴 해도 마찬가지.
실력에 자신 있는 정도론 안 된다.
단 한 번의 충돌로 속이 뒤엉켜, 레나 주교에게 치유를 받은 레이라였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엔, 드높은 경지를 이룩한 강자의 존재가 필요 불가결 하다.
다크 워튼의 후계자.
당장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선, 그가 필요하다.
‘시간을 끌어야 해.’
할디른이 저주를 풀고 참전할 때까지.
모든 전력을 끌어모아 셉타 호른을 막아야 한다.
“레나 주교님.”
“네, 네?”
후열에 있던 레나 주교가 어깨를 움찔거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제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그 말씀은…….”
“부탁드릴게요.”
결연한 선택이었다.
차마 말릴 수는 없었던 레나 주교가 기도하며 신성력을 발했다.
평소처럼 얼굴에 새겨진 악마의 저주를 완화하는 게 아니었다.
역으로 자극해 날뛰게 만들어, 그 힘을 끌어내는 것.
화아아악!
샛노란 광휘가 피어오른다.
잔뜩 경계심을 높이고 있던 사람들의 이목을 빼앗을 정도의 빛이었다.
[크르르…….]
그런 와중에도 셉타 호른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흥미롭다는 듯 빛을 쳐다볼 뿐.
이윽고 신성력이 가라앉았다.
작게 숨을 내쉰 레이라에게서 알 수 없는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앞꿈치에 체중을 실었다.
“제가 먼저 가도록 하죠.”
쩌적, 악마의 저주로 인해 강해진 신체 능력에 의해 금이 간 바닥.
정적이 이는 광장 속에서 셉타 호른에게 육박했다.
혈검血劍.
주요 급소를 베고 지나가는 8개의 붉은 검기.
닿았으나 느낌은 없다.
마치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가죽을 베는 듯한 손맛이었다.
[카아아앗!]
스쳐 지나가는 레이라의 위로 거대한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정통으로 맞으면 갑옷은 종잇장처럼 찢겨 나갈 터. 위력을 가늠한 레이라가 사각을 찾아 기민하게 움직였다.
콰아앙! 콰앙! 쐐애애액───!
단신으로 특수 개체와 접전을 벌이는 실력자.
그 광경에, 망설이고 있던 사람들이 전의를 가다듬었다.
“그래, 썅. 특수 개체라고 해서 별거 있나. 내가 지금까지 토벌한 놈들만 몇 마린데.”
“핏빛검……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하군. 그보다 셉타 호른이 우리에게 정신을 팔고 있으니, 내곽에 있는 시민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성벽이 뚫리기 전에 저 괴물을 처리하는 게 급선무야.”
“저놈 왼팔을 내가 붙들어 보겠소. 그리고 어지간한 공격은 통하지 않는 것 같으니 팔다리부터 무력화하는 게 좋아 보이는군. 겔톤, 루비나. 뒤는 맡기겠소.”
“치료는 루아스교에게 맡기세요!”
레나 주교를 포함한 네 명의 성직자가 뒤를 보조한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셉타 호른을 상대할 주력은 모험가 길드와 여러 용병이다.
이유는 토벌에 대한 경험도 많을뿐더러 집단전에 익숙하기에.
공화국의 처형자들이나 떠돌이 마법사와 같은 이들은 성벽 부근에서 아인종과 마수를 처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손발도 맞지 않은 채로 숫자만 불렸다간 대참사가 일어날 테니.
“아니, 휴식하기 좋은 도시라고 해서 왔는데 대체 이게 뭔…….”
중앙 대륙에서 온 외로운 늑대, 로메르가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뿐이었다.
한 손에는 방패를, 한 손에는 검을 들고 앞장섰다. 그야 창피하게 후열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서던피트에서 손상될 대로 손상된, 중앙 대륙의 강자다운 위엄을 보일 때다.
“하아아아아압!”
방패를 내세운 로메르가 돌진했다.
그를 필두로 토벌대원이 일제히 앞으로 내달렸다.
파공음과 비명.
쇳소리와 함성이 메아리친다.
치열해져 가는 전란 속에서 기예과 마법 그리고 기적이 난무했다.
* * *
레이라, 레나 주교, 처형자 등이 도시를 지키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브릴런 최고 의원 또한 직접 시민들을 보살피려 바깥으로 나섰다.
세크리드의 시청은 텅 비었다.
어쩔 수 없이 발이 묶인 할디른이 있는 시장실을 제외하면.
뚜둑. 뚜두둑.
오른팔을 옭아매고 있던 핏줄기가 끓어지며 소멸했다.
이제 속박은 거의 다 푼 상태.
세크리드를 포함한 광범위한 일대에 연쇄적으로 혈향을 퍼뜨려 포식자들을 끌어당기는 흑마법진 <제물의 우리>도 거의 파훼가 끝났다.
‘앞으로 4분…… 아니, 3분 정도.’
겉으로 보기엔 담담했으나, 나름 서두르고 있다.
바깥이 보이진 않지만 여실히 느껴진다.
성벽에서 시시각각 발생하는 무수한 죽음과 세크리드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강렬한 충돌이.
그중에서도 특히 어마어마한 생명력을 지닌, 일곱 개의 뿔을 가진 아인종이 할디른을 자극했다.
‘저것이 주검의 영광이 세크리드에서 준비한 계획인가.’
정체는 모르겠지만, 이제껏 만나 본 아인종과 마수와는 격이 다르다.
마주하지 않아도, 느슨하게 상대할 괴물이 아니라는 건 인지했다.
실로 위협적이다.
놈들이 어째서 이만한 밑 준비를 해 왔는지 납득할 정도.
대부분의 인과관계가 머리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군.”
어떻게 확언하기는 어렵다.
그저 괴물들을 이용해 세크리드를 침공하는 게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근거 없는 예감이다.
그렇기에 무시하지 않았다.
할디른은 죽음의 초월자라 불리는 마탑주의 유일 제자.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건 흑마법과 지식만이 아니었다.
‘……뭔가가 더 있다.’
본능에 의거한 직감.
그것은 때론 하나의 이유이자 전부가 되기도 한다.
* * *
성기사단이 빛바랜 유적지 안으로 진군했다.
몰려드는 언데드를 남김없이 소멸시킨, 신성이 깃든 검과 거룩한 기적.
이내 큰 피해 없이 완전히 내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조제프 대주교와 두 명의 팔라딘, 이하 세 명이 깊은 지하로 이어진 일직선 통로를 하강했다.
그러고는 어둠이 만연한 외길의 끝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아악.
공허한 공동의 중심,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빛의 구체가 있었다.
약 800년 전, 당시의 대주교들에 의해 구현된 기적이자 봉인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람의 팔’이 고정되어 있었다.
“대주교님, 설마…….”
“맞습니다.”
조제프가 단언했다.
“저것이 ‘옛 왕의 오른팔’입니다.”
대륙의 반을 불태웠던 폭군.
고대에 군림했던, 죽일 방법이 없어 봉인을 하여 뿔뿔이 흩어 버려야만 했던 강대한 초월자의 신체.
저벅, 저벅.
조제프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여기저기 봉인을 해제하려 했던 흔적이 보이긴 하나 여전히 고고하다.
손을 뻗어 봉인과 접촉했다.
신성력을 불어넣어, 옛 대주교들이 남긴 기적과 공명했다.
“흠……!”
세월이 흘렀음에도 방대한 신성력이다.
순간 주춤한 조제프가 나머지 한 손마저 봉인에 갖다 대었다.
동시에 목소리를 내었다.
“루아스시여.”
빛이 강하게 점멸한다.
수십, 수백 번 어둠이 드리웠다 물러났다. 어떠한 동요 없이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던 조제프가 나지막이 기도했다.
“우리에게 맡기소서.”
파아아아앗!
광활한 신성이 맥동한다.
마치 호응이라도 하듯, 서서히 사라져 간 봉인이 이내 자취를 감췄다.
압도적인 죽음의 기운이 서린 오른팔이 떨어진다.
대기하고 있던 두 팔라딘이 잽싸게 목함에 넣고, 신성이 깃든 쇠사슬로 단단히 묶어 버렸다.
“무사히 끝났군요.”
확인을 마친 조제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곧바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예, 대주교님.”
목적은 달성했지만 한가하게 여운을 느끼고 있을 시간은 없다.
애셔, 할디른, 레이라, 브릴런, 레나 주교.
당장 다른 사람들을 도우러 가야 한다. 무고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지체 없이 빛바랜 유적을 빠져나갔다.
루아스교의 역사적 사료가 가득한 장소이지만 미련 따위는 없었다.
공간이 연결된 통로를 지나, 주검의 영광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바로 왼쪽 문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공간 이동진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섣불리 들어갈 수는 없다.
자칫 오류가 발생하면 애먼 장소에 떨어질 수도 있기에.
어쩌면 땅 아래에 처박힐 수도 있다.
공간을 이동한다는 건 지극히 섬세하고도 위험한 일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판단은 즉시였다.
“당초의 약속대로 세크리드로 가겠습니다. 분명 애셔와 이를 모를 분은, 네 번째 하인을 토벌하고 그곳으로 합류하러 올 테니까요.”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 안에는 한 치의 불안과 의심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대주교의 명령을 받은 성기사단이 러스트러스에 승선했다.
신성력으로 가득한 비행정이 서서히 고도를 높여 드높은 하늘에 다다랐다.
조제프가 지시했다.
“성물의 힘을 사용해, 세크리드의 상공으로 공간 이동을 하겠습니다. 그러니 준비하십시오.”
“곧바로 좌표를 설정하겠습니다.”
이곳과 세크리드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하지만 그게 성물을 아낄 이유는 되지 못한다. 세계 종교이자 인류의 빛을 표방하는 루아스교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
그 순간이었다.
“음?”
갑작스레 무언가를 감지한 조제프가 고개를 옆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선장실의 창문 바깥으로 넓게 펼쳐진 하늘을 응시했다.
‘대체 이 기운은…….’
언데드와 비슷하지만 뭔가 다르다.
마치 전신의 감각과 영혼을 잡아당기는 듯한 그런 기분.
조제프조차 생소한 경험이기에 정확히 대처하지 못하고 상황을 주시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제서야 저 멀리서,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접근하고 있는 게 아주 명확하게 감지되었다.
시야에 닿는 거리에 들어오고 나서야, 그게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었다.
누더기처럼 여기저기 해진 날개의 피막.
파충류를 연상케 하는 굉대한 골격과 그 내부에서 일렁이는 특유의 푸른 불꽃.
반사적으로 기억 속에서, 그 정체를 끄집어냈다.
멍하니 서 있던 조제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럴 수가…….”
손끝이 떨린다.
하나 당황할 때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루아스교의 대주교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강하게 입술을 깨문 그가 목소리에 신성력을 담았다.
“서둘러, 서둘러 갑판 위에 있는 모든 교인은 선내로 들어오십시오!! 당장 공간 이동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대주교님, 아직 성물이 안정화되지───”
대답할 여유가 없다.
성큼 다가간 조제프가 러스트러스의 동력원인 성물을 붙잡았다.
신성력을 통해 강제로 공명하여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그때, 정체불명의 비행체에게서 막대한 존재감이 발현되었다.
무지막지한 힘의 파동에 공간 전체가 술렁인다.
몸속에 있던 푸른 불꽃이 활활 타오르더니,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입이 쩍 벌어졌다.
그리고 세계를 집어삼킬 듯한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루아스시여, 제발 늦지 않기를!”
식은땀을 흘린 조제프가 기도하며 성물을 발동시켰다.
화아아아악.
비행정 전체를 감싸는 아득한 신성의 빛.
그와 동시에 극저온의 숨결이 러스트러스를 덮쳤다.
* * *
베르덴이 공간 이동진의 좌표를 재설정하고, 아드리안과 함께 돌아왔을 때는 이미 루아스교가 떠난 뒤였다.
아무래도 입구의 상태가 멀쩡하지 않은 걸 본 모양이다.
그러니 본래의 예정대로, 러스트러스를 타고 세크리드로 이동했을 터.
‘본의 아니게 뒤처졌군.’
그래도 늦지 않게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마도왕의 로브, [아인베르]의 광환으로 가속한 속력이라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아드리안, 혹시 뭔가 느껴지지 않나?”
“예? 어떤…….”
“모른다면 됐다.”
베르덴이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극히 희미하지만 부자연스럽게 뒤틀려 있는 대기.
그를 바라본 순간 감각이 요동쳤다.
아드리안이 전혀 깨닫지 못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베르덴의 감각을 강하게 자극했다.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최대한 서둘러야겠군.”
뭐가 됐든 늦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