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섭리 (3)
도시의 인구수가 과포화되면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하던 사람들은 더 살기 좋은 지역으로 이동한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경쟁자들이 너무 많아 먹이를 구할 수가 없게 되면 다른 활동지를 찾기 마련.
이것이 아인종과 마수가 대대적으로 움직이는 주된 원인이다.
이러한 자연적인 재해의 발생을, 모험가 길드에서는 ‘스탬피드’라 명명했다.
물론 어디에서나 볼 법한 흔한 현상은 아니다.
보통 문제가 될 법한 전조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모험가에 의해 개체 수가 조절되니까. 카일리언스에서 무리하게 지속적인 토벌을 진행하고 있듯이.
그런데 만약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레 스탬피드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마을이나 타운, 혹은 도시가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적지 않은 희생자가 발생한다는 건 자명하고.
역사적 사료가 그렇게 말한다.
대앵───! 대앵───! 대앵───!
고풍스러운 미관으로만 여겨졌던 오래된 종이 세차게 흔들렸다.
세크리드의 비상령이었다.
갑옷과 창을 든 병사들이 다급하게 성벽 쪽으로 달려갔다.
“뭐, 뭐지? 갑자기?”
“누가 칼 들고 술주정이라도 부리는 건가?”
아무튼 무언가의 행사는 아닐 터다.
평소와 다른 거리의 분위기에 시민들의 얼굴이 불안으로 얼룩졌다.
느닷없이 코끝을 스치는, 거리에 가득한 철분 냄새도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여지없이 적중했다.
“비상 상황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아인종과 마수들이 대거 세크리드에 집결하고 있다!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병사들을 모아라! 모험가든 용병이든 마법사든 전부!”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중년 기사의 목소리에 도시가 술렁거렸다.
경비병의 다급한 안내에 따라, 외곽 성벽 부근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이 보다 안쪽으로 이동했다.
막 채비를 마치고 여관에서 나온 젊은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갑자기 왜 이렇게 시끄러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거기, 자네! 행색을 보아하니 용병 같은데. 이름이 뭐지?”
“응? 이름은 로메르고 용병 비슷한 걸 하고 있기는 한데…….”
“그렇군. 그럼 나를 따라오게!”
대응은 재빨랐다.
도시 자체적인 방위 능력은 아니었다.
고위 모험가들과 브릴런 최고 의원의 처형자들이 솔선해서 지휘한 결과였다.
성벽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레이라가 말했다.
“숫자가 상당히 많긴 하지만…… 거리를 침범할 정도는 아닌 것 같네요.”
“저, 정말인가요, 레이라 님?”
긍정적인 전문가의 분석에 레나 주교의 표정이 밝아졌다.
“개활지나 마을이었다면 위험했을 테지만 세크리드는 도시니까요. 그것도 몇 년 전에 손을 본 최신식 성벽이 지키고 있는. 절대로 쉽게 무너지지 않아요.”
“그렇군요! 아, 정말 다행이───”
“물론 저게 전부라면요.”
아인종과 마수는 활동하는 영역이 겹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그렇기에 죽고 죽이는 건 기본.
하나 때론 먹잇감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정도로 그치거나, 영역을 공유하며 상생하기도 한다.
이처럼 둘 간의 관계는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르다.
그리고 현재 세크리드의 숲 경계선에 모여들고 있는 괴물들은 일제히 도시를 노려보고만 있다.
본능조차 억누른 채.
말인즉슨 무리를 이끄는 지휘 개체가 존재하는 게 분명할 터.
‘카일리언스에서 토벌했던 무리는 보통 수십 마리였고 끽해야 백 단위를 조금 넘는 게 전부였는데…….’
그런데 수천이 넘는 개체라니.
저만한 숫자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존재가 무엇인지, 그녀가 가진 지식과 경험으로도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하나 주검의 영광의 행적을 생각해 본다면…… 단언컨대 일반적인 상위 개체는 결코 아니리라.
그러던 그때였다.
“……어?”
갑작스레 대기하고 있던 아인종과 마수들이 양옆으로 물러났다.
마치 군대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규칙적인 진동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괴물.
전체적인 외형은 이족 보행을 하는 개와도 같았으며, 놈의 머리에 돋아난 일곱 개의 뿔은 마치 왕관처럼 보였다.
대충 가늠해 봤을 때, 그 체고가 4m를 넘어갔다.
“저게…… 대체 뭐지?”
성벽 위에 있던 경비병 하나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듣는 이는 많았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야 아무도 저것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일부는 달랐다.
“일곱 개의 뿔에다가 저만한 거체라면…… 서, 설마?!”
“이런 말도 안 되는……!!”
근처에 있던 미스릴 등급 모험가 파티 ‘만하’가 경악하기 시작했다. 몇몇 고위 모험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레이라조차 미처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셉타 호른.”
모험가 길드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던 그 이름.
그녀가 멍하니 개체명을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
셉타 호른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며 앞발이 땅에 닿았다.
막대한 체중에 의해 갈라지는 대지. 이내 폭발적인 각력으로 세크리드의 정문을 향해 혼자 돌진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울림이 가까워진다.
형용할 수 없는 존재감까지도.
화들짝 놀란 경비대장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마, 막아라! 어떻게든 막아!!!!”
화살과 마법이 빗발친다.
방위 마법진이 발동하며 성벽 전체를 강화했고, 그 위에 있던 설치된 발리스타가 포격을 퍼부었다.
콰아아앙! 콰아앙!
기민한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고 대부분이 빗나갔다.
운 좋게 일부가 명중하기는 했으나 가죽에 흠집을 내기는커녕 속도조차 줄이지 못했다.
레이라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모험가 길드의 토벌 기록에 실린 정보가 전부 사실이라면…… 잠시 후 성문이 어떻게 될지 훤했기에.
막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어? 어디 가세요?!”
레나 주교의 비명을 뒤로한 레이라가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부드럽게 낙법을 펼치곤 지면을 박찼다.
전력으로 신체를 강화했다.
붉은 기에 휩싸인 레아라가 셉타 호른을 향해 내달렸다. 손에 쥔 붉은 검이 섬뜩한 예기를 발했다.
그를 마주한 셉타 호른이 입을 쩍 벌렸다.
[크롸아아아아아아아아!]
대기를 찢어발기는 포효.
로어 울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가공할 압력이 땅을 부수며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동시에 다리에 제동을 건 레이라가 수직으로 검을 휘둘렀다.
혈섬血閃.
거대한 붉은 검기가 포효를 반으로 베어 갈랐다. 양옆으로 나뉜 충격파가 세크리드의 성벽을 때렸다.
직후 미끄러지듯 회전한 레이라가 재차 자세를 잡았다.
연이어 기예를 펼치기 위해서.
그러나 셉타 호른은 단순한 아인종이 아니다.
특히나 사냥에 있어서는, 인간을 상회하는 지적 능력을 타고났다.
쿠웅!
순간적으로 가속한 셉타 호른이 팔을 뻗었다.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레이라를 덮쳤다.
“……?!”
검으로 막아 냈으나 근력에서 압도적으로 밀린다.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그대로 레이라를 붙든 채 앞으로 나아간 셉타 호른이 세크리드의 성문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레이라 님!!”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단번에 성문이 박살 났다.
보안 마법진의 효과를 무색하게 만드는 충격력.
우그러진, 거대한 금속 철문이 통째로 날아가 거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함께 휩쓸린 레이라가 인가에 처박혔다.
“서, 성문이…… 돌파당했다고?”
경비대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벌벌 떨었다.
먼지 구름 속에서 셉타 호른이 몸을 일으켰다.
주위에서 향해 오는 경악과 공포로 얼룩진 시선들을 만끽하며 입가를 비틀었다.
[캇. 캇. 캇. 캇. 캇.]
소름끼치는 비웃음 소리.
상궤를 벗어난 힘, 본능적인 두려움을 일게 하는 존재감.
모험가의 역사는 말한다.
일곱 개의 뿔을 지닌 거대한 놀.
이르기를, 숲의 재앙이며.
말하기를, 살육의 화신이고.
전해지길, 공포의 왕이라고 부른다.
놀의 진화 개체 중 최상위를 넘어선 정점.
특수 개체, 셉타 호른(Septa Horn).
본래 카일리언스에 나타났어야 할 강대한 포식자가, 케실루스에 의해 벨디른 공화국에 당도했다.
놈이 하늘을 향해 나지막이 울부짖었다.
그것을 신호로, 멀리서 기다리고 있던 아인종과 마수들이 일제히 도시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 루아스시여…….”
사냥이, 시작됐다.
* * *
케실루스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정황으로 보아 세크리드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던 건 분명하니.
할디른과 레이라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카일리언스에서 데려온 괴물이란 게 뭔지는 알 수 없어도 쉽게 해결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베르덴은 다른 이들에게 조금도 신경을 할애하지 않았다.
복잡하게 이리저리 생각해 봤자 여기서 어찌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내가 맡은 역할은 네 번째 하인, 케실루스를 처리하는 것.’
목적은 분명하다.
당장 집중해야 할 건 눈앞이다.
무한의 마도.
허공에 떠오른 수십 개의 뇌창이 폭우처럼 쏟아지며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광활한 뇌격이 시야를 퍼렇게 물들였다.
‘……이런 위력으론 부족하다.’
지금까지의 전투로 가늠했을 때, 케실루스의 경지는 6위계 상위.
그 견고한 원소 저항력을 뚫고 몇 번이고 죽이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베르덴이 강하다고 한들, 고위 흑마법이 내포한 위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얕보는 것.
방심의 대가는 치명적이다.
‘죽음에서 부활하는 케실루스의 마도.’
특별하다는 건 인정하다.
심지어 회생할 때마다 마법과 마력이 강해지며 방대해지고 있기까지.
장기전에서 있어서 가장 성가신 능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결국 한계점은 있다.’
케실루스의 목숨은 무한이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베르덴이 깊게 생각한 바, 놈을 보다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그중 첫 번째가 무력화.
───!
베르덴이 망설임 없이 접근했다.
현란한 궤적을 그리던 오리엔트가 순간적으로 가속했다.
“근접전이라. 확실히 마도사 간의 마법전에서는 그 편이 목숨을 빼앗기 쉽겠지. 너에게도, 나에게도,”
케실루스의 팔찌에서 불길한 파동이 일었다.
아티팩트 [원한의 형상].
변환된 마력이 저주가 깃든 무기의 형태를 취했다.
케실루스의 등에서 뻗어 나온 두 개의 팔뼈가, 어둠이 흘러내리는 기괴한 검을 단단히 쥐었다.
쩌어어엉!
끔찍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직후 팔뼈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케실루스의 저주가, 베르덴의 원소와 맞부딪쳤다.
수차례 이어지는 충돌.
두 사람의 격전에 주변 일대가 초토화되었다.
그동안 케실루스가 두 번의 죽음을 맞이했고, 다시금 부활하여 고목 지팡이를 양손으로 쥐었다.
“원한을, 상기하라.”
아티팩트의 시동어에 [원한의 형상]이 반응한다.
지팡이 위로 삽시간에 뻗어 나간 어둠이 거대한 낫이 되었다.
후웅───
단 한 번의 휘두름에 전방에 있던 모든 것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식물, 대지, 공기 그리고 인간까지도.
그런데 도중, 몸이 뒤틀리던 베르덴이 잔상처럼 사라졌다.
“……분신?”
케실루스가 드물게 당황했다.
설마 마력 구성체 따위로 자신의 이목을 속일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않았기에.
그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바람이 피부를 스친다.
동시에 예기가 번뜩이며 케실루스의 팔다리가 찢겨 나갔다.
마도로 형성된 두 팔뼈 또한 반응하지 못하고 완전히 박살 났다.
“?!”
털썩 무릎 꿇은 그가 눈을 부릅떴다.
스스로 벼락이 될 수 있으면 바람도 될 수 있는 법.
베르덴이 재현하는 <원소 융합>은 어느 한 속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
사방에 만연하던 바람이 일제히 모여들며 작은 폭풍이 일었다.
그 안에서 베르덴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의 팔다리는 묶었다.’
물론 잠깐에 불과하다.
케실루스라면 스스로 심장을 부수는 등 제 목숨을 끊고 몸을 회복시킬 방법은 수도 없이 많을 테니.
고작 이 정도로 놈을 제압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베르덴이 노린 건, 케실루스가 저항 수단을 잃은 극히 짧은 시간.
진짜는 지금부터다.
화아아아아악.
거칠게 휘몰아치는 마력.
베르덴이 마안을 번뜩이며 오리엔트를 내뻗었다.
혜성, 라레니아(Rarenia).
성신 마법, 그 두 번째 별,
“이런……!”
은하수의 격류가 케실루스를 향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