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선봉
할디른이 도착하자마자 회의가 소집되었다.
베르덴을 포함한, 이전에 참석했던 다섯 명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다만 오늘 준비된 의석은 총 여섯 개.
기존 구성원 외에, 이번 회의에 새로이 함께하게 된 낯선 남자가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현 공화국의 최고 의원직을 맡고 있는 브릴런 케이란스라고 합니다.”
루아스교와 협력하고 있는 최고 의원.
나이는 약 30대 후반.
짙은 갈색 머리칼을 뒤로 넘겨 고정했고, 복장은 더할 나위 없이 정갈했다.
깊게 파인 눈가에 드리운 그늘과 감정을 읽기 어려운 얼굴이 퍽 인상 깊다.
“우선 회의에 들어가기 앞서. 최고 의원된 자로서, 앵그랑 최고 의원이 일으킨 난동에 대해 깊이 사과드리겠습니다.”
남자, 브릴런 최고 의원의 첫마디는 사죄였다.
“공화국과 왕국 사이의 전쟁이 끝난 지 거의 30년이 되어 가지만, 피차 상처가 다 아물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앵그랑의 극단적인 차별이 그 예. 에셔 백작께선 부디 이해해 주시길.”
“개의치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또한 이번 일로 조금은 깨닫는 바가 있을 겁니다. 살면서 맞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요. 상대가 동대륙 최대 암흑가를 지배하는 이라면 더더욱.”
농담을 하듯 가벼운 말투였으나 속에 가시가 들어 있다.
‘떠보고 있군.’
베르덴에 내력에 대해 다크 워튼과 루아스교가 전부 인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다면 얼마나 깊은 관계인지.
일련의 태도가 자연스러운 걸 보아 타고난 정치인이다.
직후 브릴런이 조제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레나 주교를 곤란케 한 것,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대주교로서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이전과 같은 상황‘들’을 다시 보게 된다면 그리 유쾌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움찔. 브릴런의 평정이 순간 흐트러졌다.
저 경고는 당장 대주교가 비호하는 것이 교인만이 아니라는 의미였기에.
“……예, 명심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통성명도 끝났으니 바로 본회의로 들어가도록 하지요.”
저번과 마찬가지로 회의의 시작은 조제프가 맡았다.
“저희 루아스교는 공적으로 주검의 영광의 거점을 토벌함으로써 시선을 한데 모으는데 집중했습니다. 그러곤 한편에서는 레이라가 다른 거점을 수색했으나…….”
“유감스럽게도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죠.”
은신처로 삼기에 적합하리라 여겼던 닿지 않는 숲에는 거점이 없다.
공화국의 서남부 일대는 제외한다.
이것이 루아스교와 레이라가 얻은 수확이었다.
간략하게 설명을 마친 조제프가 차례를 넘겼다.
“할디른, 그대는 어떻습니까?”
“카일리언스로부터 옮겨진 아인종과 인간의 사체를 운송해 오던 상회를 찾았다. 이미 입막음을 당하긴 했으나 가까스로 정보를 접할 수 있었지.”
흑마법을 통해 죽은 자의 기억을 엿보았다.
살해당한 피아라트 상회에 속한 상인들.
그들은 거래자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하는, 단순히 돈을 밝히는 범법자에 불과했기에 유력한 단서는 얻을 수 없었다.
하나 시체들이 어디로 운반되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시체가 실린 마차들은 공화국의 북부로 향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는 건가?”
“마차 운반에 피아라트 상회만이 아니라 여러 범죄 집단까지 동원했더군. 당연히 전원 실종됐고. 이후 추적을 시도했으나 도중에 끊겼지. 그래도 예상되는 지역 몇몇은 특정할 수 있었다.”
할디른이 양손을 펴보였다.
각각 특유의 마력으로 발현된 사기와 생기의 덩어리가 떠올랐다.
“무릇 산 것에는 생기가, 죽은 것에는 사기가 존재한다. 그리고 둘은 동등하게 공존하지 못하고 서로를 집어삼키지.”
두 개의 덩어리를 겹쳤다.
조금 더 크기가 컸던 생기의 덩어리가 사기를 뒤덮었다.
마치 잡아먹듯이.
“북부 일대를 돌아봤지만, 내 감각으로도 어떠한 기운도 감지하지 못했다. 정황상 수많은 사체를 한곳에 모아두고 있다면 흑마법진으로도 완전히 은폐하는 건 불가능할 텐데.”
“그렇다는 건…….”
“네 생각이 맞다, 애셔. 막대한 사기를, 그보다 더 큰 생기가 덮고 있는 거지.”
할디른이 마력을 회수했다
그러곤 탁상 위에 있던 공화국 지도의 상부를 가리켰다.
“놈들이 모은 시체들은 북부에 위치한 세 개의 도시 중 하나, 그 내부에 쌓여 있을 거다. 이게 내 결론이다.”
신빙성은 지극히 높다.
이곳에 모인 이들 중 흑마법과 죽음에 대해, 할디른을 넘어서는 권위자는 없으니까.
다크 워튼의 차기 주인이라는 명성은 결코 허상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범위가 좁혀지긴 했으나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니.
“이제 네가 얻어 온 단서가 관건이겠군.”
모두의 시선이 베르덴에게 모여들었다.
확실히 서던피트에서 확보한 것이 열쇠가 될지 모른다.
다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이미 조제프 대주교에게 아티팩트를 통째로 넘겼으니까.
기다렸다는 듯 조제프가 푸른 입방체를 꺼내어 탁상 위에 올렸다.
가볍게 밀어 보내며 베르덴에게 돌려주었다.
그를 응시하던 할디른이 물었다.
“그건…… 아티팩트인가?”
“봉인형 아티팩트 [아르케오]. 저 안에 주검의 영광으로부터 도주한 호위, 잭이 봉인되어 있더군.”
“어디서 구했지?”
“우연히 빌려왔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우연히 로메르와 만났고, 또 빌려가겠다고 말했으니.
대답을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조제프가 말했다.
“봉인을 해제하고 제가 직접 면밀히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적지 않은 외상을 입은 데다가 심신 또한 무력화된 상태이나 저주는 일절 감지되지 않더군요.”
손끝에서 미약하게 신성력을 빛냈다.
문밖에서 신호을 받은 팔라딘, 세인이 휠체어를 끌고 들어왔다.
* * *
“…….”
의식을 잃은 잭이 앉아 있다.
아직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필요한 건 잭이 지나온 과거.
임의로 기억을 숨기거나 실수로 누락되는 것 없이, 온전히 정보를 얻으려면 무의식에서 끄집어내는 게 가장 효과적일 터.
“이 부분은 다크 워튼의 흑마법이 적합하겠지요. 그러니 부탁드리겠습니다, 할디른.”
“……정신계 쪽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닌데. 일단 해 보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자신 없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할디른이 성큼 잭에게 다가섰다.
오른손에 착용한 건틀릿에 저주가 깃든다. 특유의 불길함을 품은 손길이 흉터투성이의 얼굴을 덮었다.
<인타이스>
정신을 장악하여 시전자의 뜻대로 유도하는 5위계 상위 흑마법.
저항에 실패한 잭이 스르륵 초점 없는 눈동자를 드러냈다.
“지금부터 내 질문에 답하라.”
“알겠……다…….”
조금 말투가 어눌하긴 해도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다.
“그날, 특별 회담장에서 최고 의원이 폭사한 당일. 근처에 있던 넬로니안 최고 의원이 중상을 입고 쓰러진 적이 있었다.”
“…….”
“그 개인 호위대에 속해 있던 잭, 너는 넬로니안 의원을 데리고는 덤브레드 최고 의원과 함께 도주했지.”
“그렇……다…….”
“묻겠다. 덤브레드, 놈은 어디에 있지?”
단번에 핵심을 파고들었다.
멍하니 기억 속에 잠겨 있던 잭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모른다.”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건가, 아니면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
“머릿속이…… 희미해…….”
기억에 공백이 있다.
심력 소모로 인한 자체적인 문제인 것 같긴 한데…… 이렇게 된 이상 억지로 캐내는 건 무리일 터.
“그럼 내가 단어를 나열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단어나 문장을 말하도록.”
차선책으로 연쇄적인 연상 작용을 이용한다.
“넬로니안…… 덤브레드…… 흑마법…… 위험…….”
“죽음…… 배신…… 습격…….”
잭이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다 위험이란 단어에 뜸을 들이다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피비린내…… 그곳엔, 사체가 있었다. 인간, 짐승 그리고…… 아인종.”
“자세히.”
“알 수 없는 장소에…… 일정한 간격으로 사체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바다과 벽…… 천장까지.”
카일리언스에서 운반된 사체들의 행방이 드러났다.
“그렇군. 그런데 너는 거기서 어떻게 탈출했지?”
“정신계 마법에 저항한 동료가 몰래 풀어 주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날뛰었고…… 그 과정에서 넬로니안 최고 의원을 구출했지만……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을 지배당한 뒤더군. 그래서, 죽였다.”
“넬로니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브릴런이 착잡한 심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우리는 바깥으로 나갔다. 도시…… 도시가 있었지.”
“어떤 도시지? 풍경은.”
“이름은 모르나…… 성벽이 깨끗했고…… 주변에 높이가 낮은 두 개의 산이 보였다……. 다른 도시보다 따뜻했고.”
“그렇다면───”
할디른의 심문은 조금 더 이어졌지만 이렇다 할 만한 정보는 없었다.
곧장 다른 호위들과 뿔뿔이 흩어져 정신없이 도주한 끝에 서던피트에 숨어들었고, 또 잡혔다는 것만이 전부.
이윽고 <인타이스>의 지속 시간이 끝났다.
조용히 눈을 감은 잭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대기하고 있던 팔라딘이 휠체어를 끌고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잭의 기억 덕분에 조금 더 상황이 명확해졌다.’
그래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다.
주변 환경만을 듣고 도시를 특정할 수 있을 만큼 공화국의 지리에 밝지 않았으니까.
단 한 명만 빼고.
“기후가 비교적 따뜻하고 두 개의 낮은 산이 있으며 성벽이 유별나게 깨끗하다……. 그와 더해서 북부에 있는 도시 세 개 중 하나라면…….”
할디른과 잭의 정보를 조합한 브릴런이 지도 한 곳을 짚었다.
“교집합에 해당하는 장소는 이곳 ‘세크리드(Sacrid)’ 외에는 없습니다.”
“장담할 수 있나?”
“할디른 공께서 국한하신 범위라면 분명합니다. 재작년에 성벽을 보수하기도 했고, 유동 인구가 많기로 정평이 나 있어 인구수가 높은 게 특징이기에.”
성벽이 깨끗하다.
그리고 생기가 가득하다.
확신까지는 아니어도 브릴런의 판단은 납득 가능할 만큼 타당하다.
다름 아닌 공화국의 최고 의원이니.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히 움직일 이유가 된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
“……뭔지 몰라도 주검의 영광에게 유도당하는 기분이군.”
아드리안이 느끼는 꺼림칙함은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마치 놈들이 의도적으로 뿌린 퍼즐 조각을 맞춰 가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선택지가 없는 심리전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경계심을 품은 채, 조심히 행동할 수밖에.
“아무튼. 그럼 세크리드로 가는 건 확정이네요. 하지만 그곳에 주검의 영광을 이끄는 자가 있다고는 할 수 없는데…….”
레이라가 베르덴에게 고개를 향했다.
“그건 해결되었겠죠?”
“물론입니다.”
주검의 영광의 간부, 네 번째 하인.
놈의 마력은 이미 마석에 옮겨 담아, 나침반 안에 집어 넣었다.
현재 자침이 멈춰 있는 방향은 공화국의 서북부.
세크리드가 아닌, 그 옆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베르덴은 나침반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선에서 자신했다.
왕국에서도 비올라의 위치를 찾은 전적이 있었기에 대부분 믿고 넘어갔다.
조제프가 턱을 쓸었다.
“목적지는 두 곳. 어쩔 수 없이 다시 전력을 나눠야겠습니다.”
몇 분가량 회의가 이어진다.
이윽고 만장일치 끝에 두 개의 집단으로 갈렸다.
‘세크리드는 할디른, 브릴런, 레이라가 맡는다.’
혹여 위험한 흑마법 의식이 벌어지고 있다면, 그를 도중에 중단시킬 수 있는 건 할디른밖에 없기에.
브릴런은 공화국의 비행정을 운용하고, 직속 처형자들을 이끌어 세크리드의 명령 체계를 장악하는 역할.
마지막으로 레이라는 순수한 전력이다.
그와 더해서 그들을 적극적으로 보조할 성직자들을 대동시킬 것이기에 힘이 부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주검의 영광의 근거지는 나와 아드리안, 조제프 대주교의 몫.’
루아스교의 비행정, 러스트러스로 정면을 돌파한다.
오직 토벌에만 집중하여 짜인 전력이었다.
결정은 내려졌다.
지체할 것 없이 모두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종 집결지는 세크리드. 근거지를 토벌한 뒤에 도우러 가겠습니다.”
“그 전에 마무리 짓도록 하지.”
조제프와 할디른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회의는 끝이 났다.
“그럼 무운을 빌겠다.”
토벌이 시작되었다.
* * *
베르덴은 언제나 스스로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마탑의 동력원을 통해 이뤄 낸 역천이 어떤 예상치 못한 효과를 자아냈는지.
그로부터 재구성된 심장 속, 아직 해금되지 않은 마력이 얼마나 잠들어 있는지.
‘그리고 관리자…… 마도왕의 초위 마법을 파멸시킨 ‘검붉은 마력’의 정체가 무엇인지.’
애초에 준초월자란 것이 무엇인가.
이제껏 들어 본 적 없는, 뭐라 규명하기 어려운 애매하고도 드높은 경지다.
과연 초월자에 비견되는 마력량을 가진 것만이 6위계와의 유일한 차이점일까.
‘그럴 리가.’
현재 베르덴의 경지에는 무언가가 더 있다.
다만 알 수는 없었다. 스스로도 파악하지 못한 비밀이다.
그러나 절반의 마도를 이루기 이전처럼 방황하는 일은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닿을 거라 믿기에.
베르덴은 확신한다.
“…….”
생각을 마친 그가 갑판으로 나섰다.
고도를 낮추고 있는 러스트러스에 깃든 성물의 신성력이 사방을 비추었다.
조제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주검의 영광. 저기 숨어 있었군요.”
저 멀리, 은폐되어 있던 대규모 흑마법진이 정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히 위험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러니 접근하기 전에 성물의 힘을 소모해 제거하겠습니다. 그다음에는───”
저벅, 저벅.
갑작스레 베르덴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내 비행정의 울타리, 현장(舷墻)에 올라섰다.
“애셔?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조제프의 물음에 침묵으로 답했다. 어차피 곧 직접 보게 될 테니.
주검의 영광은 중앙 대륙으로 가기 위해서 넘어야 할 장애물.
거치적거리기 짝이 없다.
뭐가 됐든 간에 이 지긋지긋한 정보 수집과 탐색을 더는 이어 나갈 생각이 없었다.
‘오늘 끝낸다.’
아공간에서 오리엔트를 소환했다.
마력회로를 활성화하며, 뒤에 있던 아드리안에게 말했다.
“선봉은 내가 맡겠다.”
“예, 주군.”
후욱.
베르덴이 비행정 아래로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