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폭군 (1)
[주검의 영광 손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경호원을 찾는다.]
베르덴과 아드리안이 맡은 계획.
다만 아쉽게도 단서는, 목표물이 최고 의원에게 암중에서 추적당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유력한 정보가 없다.
할디른이나 레이라와 달리 수색 범위가 한정되어 있지 않아 쉽지가 않다는 건 자명하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면 속에도 사람은 있는 법이니.’
배고픔에 허덕이며 살아갈 뿐만이 아닌, 어둠 속에 뿌리내려 삶을 영위하는 뒷세계의 주민들.
리비안트 공국, 에스티리아 왕국, 미들로스 자치령이 그러했듯 이곳 벨디른 공화국도 마찬가지일 터.
역시 베르덴의 생각은 적중했다.
쿼레일을 떠나기 직전, 오랫동안 공화국에 거주하고 있던 성직자에게서 한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비공식 도시, 서던피트(Southern Pit).
과거 살 곳도 없고 살길도 막막했던 공화국에서 빈민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촌락을 이루었고, 훗날 자그마한 마을을 형성했다.
초라하지만 하루 두 끼는 챙길 수 있는, 노력한다면 가족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소박한 터전이었다.
그렇기에 이목이 집중되는 건 필연적이었다.
───남쪽에 마을이 있는데, 부자는 될 수 없어도 먹고살 수는 있다더라.
그런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며 하나둘씩 이주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토벌당할 것을 두려워한 도적도, 돈 냄새를 맡은 상인도, 새로운 출발을 원하는 시민 등도…….
하루, 이틀, 며칠, 수개월, 수년, 수십 년.
처음에는 고작 몇 명에 불과했으나 시간이 쌓이며 무시할 수 없는 숫자에 이르렀다.
마을에서 타운으로
타운에서 넓은 도시로.
당연히 공화국의 의원들이 이를 가만 놔둘 리가 없었으나, 그 문제는 아주 손쉽게 해결되었다.
도시에서 발생한 모든 수익 중 일부를 떼어, 기존 세율을 훌쩍 넘는 막대한 상납금을 바쳤으니.
요란스러운 접대와 값비싼 선물 등은 부차적인 요소였다.
그 결과 공식적으로 도시로 받아들인 건 아니나, 여러 조항을 체결한 끝에 제한적인 존립이 인정되었다.
말인즉슨 자치 도시나 다름없다는 뜻.
‘그렇기에 공화국 내에서 다양한 소문들을 얻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다.’
베르덴은 확신했다.
이로써 목적지는 특정했다.
거리가 상당하기에 루아스교의 성기사가 운전하는 마차를 이용하면 늦을 터.
베르덴이 아공간에서 전용 마차를 소환하여 까마득한 상공을 통해 일직선으로 남하했다.
아드리안은 높은 곳을 선호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당장 호불호를 따질 때가 아니니.
그래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양인지 나름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 아드리안이 물었다.
“한데 주군, 서던피트에서는 어떻게 움직일 계획이십니까?”
평소였다면 수소문을 통하여 값을 치르고 정보를 얻었을 터다.
하나 베르덴과 아드리안은 수십억의 현상 수배가 걸린 몸.
주검의 영광이 의도하여 퍼뜨렸으니 이미 서던피트에도 알려졌을 게 분명하리라.
“역시 예정대로 정체를 숨기고 정보를 취급하는 자를 찾는 것이…….”
“아니. 생각이 바뀌었다.”
정체를 감추지도, 은밀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으니까.
서던피트의 특수성을 인지한 순간 행동 방침은 바뀌었다.
“초행길이니 우리가 직접 나선다고 해도, 자칫하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
그러니.
“도시가 우리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수배자가 아닌, 암흑가의 왕.
베르덴은 서던피트가 결코 환영할 수 없는 ‘손님’이었다.
* * *
벨디른 공화국, 서던피트의 환락가.
낮과 밤의 구별 없이 술과 오물의 지독한 냄새가 진동하고 폭력과 교성이 만연한 거리는 방랑객의 안식처였다.
그 가장 호화로운 건물에 한 손님이 있었다.
“하하하하! 이 도시가 공화국에서 가장 더러운 진창이라더니, 듣던 것보다 훨씬 낫잖아? 자, 여기 비싸고 독한 걸로 한 병 더!”
“꺄아, 멋져!”
곡선을 이루는 커다란 소파의 중심에 앉아, 양옆에 아름다운 여인들을 끌어안고 있는 잘생긴 사내.
식탁 위에 양다리를 올리고 미녀들이 주는 술과 안주를 즐기는 모습은 쾌락에 중독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젊은 귀족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겉모습과 달리 사내의 정신은 잘 벼려진 칼날처럼 뚜렷했다.
윤기가 흐르는, 백발과 흑발이 뒤섞인 머리칼. 그와 조화를 이루는 주황색 눈동자.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삼아 단련된 신체는 전사의 그것이었다.
다만 특이 사항이 있다면 이성에 대한 욕망이 남들보다 솔직하다는 점.
“기분 전환 삼아서 동대륙으로 놀러왔다가 본의 아니게 갇혀 버리긴 했는데, 여기라면 한동안 즐겁게 있을 수 있겠어. 안 그래?”
“그럼요! 아니, 그냥 돌아가지 말고 쭉 여기 있으면 안 돼요? 평생 보살펴 줄게요!”
“저도요!”
“그거 말로만 들어도 기쁜데? 진짜 눌러앉아 버릴까?”
사내가 두 여인의 이마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지금의 대화에 지속성이 없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면 뭐 어떤가.
내일이 되면 잊어버릴 약속이라고 해도 지금만큼은 진실된 것을.
이렇듯 사랑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즐거운 시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내가 한마디를 하면, 여인들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맞장구를 치며 진심이 담긴 웃음을 지었다.
흥미로운 화두가 던져진 건 그때였다.
“혹시 그 소식 들으셨나요? 암흑가의 왕이 벨디른 공화국에 밀입국했다는 거요.”
“암흑가의 왕? 그게 뭔데?”
“아, 중앙 대륙에서 오셔서 모르시는구나.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에스티리아 왕국의 지하 도시, 로아프라의 지배자예요. 동대륙 뒷세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죠.”
말솜씨가 뛰어난 여인이 사내에게 안주를 먹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동대륙 최대 암흑가, 로아프라.
왕국의 이면을 장악한 빈테르트라는 조직과 정점에 선 존재, 그론드 베일 디 발리다스.
그리고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끔찍한 악명까지.
정보들이 정연하게 나열된다.
주로 환락가를 찾아온 상류층을 상대하는 그녀가 가진 건 미모와 웃음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런데 작년에 그론드가 죽으면서 왕위를 빼앗겼어요. 새로운 왕은 애셔라는 이름의 마법사. 듣기로는 마법으로 로아프라를 통째로 뒤집어엎었다는데……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겠지만 괴물이라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왕가를 구슬렸는지 명예 귀족 작위도 받았고요.”
“하, 뒷세계를 찬탈한 괴물이라…….”
사내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눈빛을 빛냈다.
“그래서 걔가 여긴 무슨 볼일인데?”
“그건 저도 모르지만 예사스러운 건 아닌 것 같아요.”
“여기요!”
반대쪽에 있던 여인이 서던피트의 신문을 건넸다.
워낙 대충 만든 탓에 조악하기 짝이 없었으나, 수배서에 대한 내용만큼은 정확하게 실려 있었다.
시선이 글귀를 따라갔다.
“카일리언스의 시장 살해에다가 도시 테러 등의 용의자 중 하나로 생사 불문 현상금 40억 엘크…… 와, 죄목 한번 엄청난데. 귀족이라도 처형감이겠는걸.”
“괜히 암흑가의 왕이 아닌 거죠. 왜 로아프라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각에서는 특별 회담장에서 최고 의원을 죽인 범인이라고 보고 있기도 하대요.”
그야말로 악인 중의 악인.
애초에 온갖 범죄자가 득실거리는 암흑가의 왕이라고 하니 말 다 했다.
입술을 매만지며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사내가 고개를 기울였다.
“흠, 기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잡아 버릴까.”
“네?”
“돈도 돈인데 무엇보다 이렇게 나쁜 놈을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현상금 사냥도 내 부업 중 하나거든.”
“하지만 그 암흑가의 왕인데…….”
“왕이든 황제든 뭐든 관계없어. 날고 기어 봤자 동대륙에서 노는 놈이잖아? 온갖 강자가 가득한 중앙 대륙하고는 비교도 안 된다고.”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낫지.”
호전적인 눈동자가 구석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쇠사슬로 묶인 채 만신창이가 된, 흉터투성이의 사내가 있었다.
두 여인이 눈을 깜빡였다.
“…저 사람도 현상범이었어요?”
“아주 높으신 분이 수배를 걸었거든. 금액도 억 단위로 말이야. 다른 동업자들이 채 가기 전에 확보해 뒀지.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는데.”
사내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만약 내가 암흑가의 왕을 잡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내가 왕이 되는 건가? 그 로아프라란 곳도 갖게 되는 거고?”
“어, 그론드도 전대로부터 찬탈했고, 애셔도 그랬으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그건 왜요?”
“뭐, 이유야 많긴 한데.”
오직 강자만을 위한 왕좌.
실력에 자신이 있는 자라면 한 번쯤은 앉으려고 시도해 볼 것이다.
더군다나 결투 한 번으로 대도시에 필적하는 지하 도시를 지배할 수 있다니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암흑가의 왕이라니. 엄청 멋있잖아.”
이명이 마음에 쏙 든다.
사내의 치기(稚氣)가 흥분으로 요동쳤다.
* * *
언뜻 보면 서던피트는 로아프라와 비슷해 보이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먼저 서던피트엔 각 거리를 다스리는 터줏대감이 있을 뿐,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지배자가 없다.
사방팔방으로 나뉜 집단은 점조직의 특성을 띠고 있는 탓에 연계적으로 무언가를 쫓기에 어렵다.
그리고 이곳은 치외법권이 아니다.
자치적으로 운영하라곤 했으나 여전히 닿아 있는 벨디른 공화국의 감시.
국가에 해가 되는 불미스러운 일을 꾸미거나 필요 이상의 무력을 축적하다 발각되었다간 즉각적으로 제재에 들어간다.
한정된 자유다.
이 도시는 결국 의원들의 자금줄인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시설이 열악한 편이군.’
서던피트에 도착한 베르덴과 아드리안이 거리 한복판을 거닐며 주변을 둘러봤다.
낡은 목조 건물.
자잘하게 금이 간 석벽.
불쾌함이 느껴지는 거리의 악취와 몇 겹이나 되는 허름한 옷을 입고 골목길마다 자리한 사람들.
빈민과 시민.
그 사이의 풍경이었다.
기감을 높이고 있던 아드리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슬슬 시선이 모여드는군요.”
아드리안은 그렇다 치더라도, 베르덴은 현재 [아인베르]를 착용하고 있다.
마도왕의 로브가 가진 찬란함은 어딜 가든 간에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지 않을 수 없는 미끼.
“타국의 귀족님이신가?”
“그런 것 같은데. 의원 중에 저런 젊은 사람은 못 봤다고.”
“근데 어디서 들은 적 있는 것 같은 행색인데?”
주민들이 웅성거린다.
현상 수배서가 담긴 신문을 들고서도 긴가민가하고 있다.
설마 거액의 현상범이 이토록 대놓고 다닐 줄은 몰랐기에.
“어? 잠깐, 저 얼굴은……?”
“이런 미친. 저, 저자가 왜 여기에……!!”
두 사람, 특히 베르덴을 알아본 자들은 헐레벌떡 어딘가로 뛰어갔다.
‘습격일까, 아니면 대화일까.’
뭐가 됐든 간에 상관없으니 적당한 위치에 있는 자라면 좋을 텐데.
가장 먼저 어떤 반응이 찾아올지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약 3분쯤 지나던 그때였다.
“허억, 허억…… 시, 실례합니다.”
왼쪽 귀끝에 베인 상처가 있는 사내가 달려와 멈춰 섰다.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희 어르신, 게르본 님께서 두 분을 정중히 초대하라고 하셨습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시간을 할애해 줄 수 있으시겠습니까?”
금방 입질이 왔다.
* * *
“와 주셔서 정말 고맙소. 누추하고 차린 건 없지만 그래도 내 최선이니 너그러이 봐주길 바라오.”
미간을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는 흉터가 있는 사내, 게르본.
그가 베르덴과 아드리안에게 따뜻한 차와 착석을 권유하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베르덴이 주저 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애초에 독이 통할지도 미지수일뿐더러, [아인베르]의 효과 덕분에 중독에 완전 면역이니.
은은한 꽃향기가 퍼진다.
처음은 걸쭉한 듯했으나 끝은 깔끔했다.
“썩 나쁘지 않군.”
“그거 참 다행───”
“그래서.”
벽안이 게르본을 주시했다.
표정과 신체 반응으로부터 감정을 읽었다.
공포 그리고 긴장.
낯선 이들을 초대한 자는 떨고 있었다.
“나에게 무슨 볼일이지?”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에 게르본이 꿀꺽 침을 삼켰다.
“애셔…… 나는 당신을 알고 있소. 물론 단순히 소문으로만 들은 게 아니오. ‘그론드가 죽던 날’…… 나도 그 자리에 있었지. 우연히도.”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로, 로아프라의 절반이 무너지는 광경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지하 도시 전체를 울리는 지각 변동.
의지가 깃들기라도 한 듯 지면이 꿈틀거리더니, 로아프라에서 활동하던 악랄한 범죄자들을 집어삼키고 꿰뚫었다.
굉음 사이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멀리 있었지만 선명하게 보았다.
거대한 빙산이 그론드를 짓누르는 것과 동시에 빈테르트가 다스리는 거대한 암흑가가 단 한 명에게 함락되는 참상을.
그건 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난 비록 나이가 좀 들긴 했어도, 한창 젊었을 적엔 상급 용병의 끝자락까지 닿았었기에 건강한 편이오. 서던피트의 거리 여섯 개를 다스리고 있어, 벌어들이는 수익만큼 나름대로 이 도시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권력자다운 분쟁을 좋아하지 않소. 그야 잃을 것도 많고, 지금의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놓치기 싫었으니까…… 그러니 부디 진심으로 답해 주시길 바라오.”
게르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베르덴과 아드리안을 마주했다.
그러곤 신문을 탁상 위에 올렸다.
정확히 수배서가 실려 있는 페이지를 편 채로.
“암흑가의 왕,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마치 재해를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