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330화 (330/366)
  • 330화 초청 (1)

    회색의 하늘로 뒤덮인 잊혀진 지대.

    아득한 세월에 견디지 못하고 생기를 잃어버린 땅과 무너진 성터는 황폐화되어 있다.

    그곳에 한 사내가 있었다.

    뒤집어쓴 로브 아래로 드러난 피부는 회색에 가깝다. 마치 생기와 사기가 이리저리 뒤섞인 듯한, 소름 끼치는 혈색이다.

    건강한 듯 몸에 살집은 적당히 있으나 오래된 주름이 가득한 양손.

    그중 약지가 없는 오른손에 쥐인 고목 지팡이는 마치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먹빛으로 까맸다.

    모순적이다.

    마치 삶이 허락되지 않은 존재처럼.

    만약 사내의 얼굴을 본다면 누구나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할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과 판단에 의미 따위는 없다.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그는 이렇게 버젓이 땅을 딛고 있으니.

    다만 이 세상 아래, 같은 숨을 쉬지 않을 뿐이다.

    “…….”

    무너진 천장 위로 하늘을 응시하던 사내가 고개를 내렸다.

    간질거리는 감각에 느긋하게 소매를 걷자, 팔뚝 위에 새겨져 있던 일곱 개의 고대 문자 중 하나가 변형되고 있었다.

    “리버런그의 시장이 발각되었나.”

    시장의 영혼과 연결되어 있던 흑마법.

    기존에 걸려 있던 네 개의 저주가 타의에 의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발동하는 고대의 저주.

    까드드드득.

    사내가 손톱을 세워 피부를 긁었다.

    살가죽을 짓이기며 변형된 문자를 일그러뜨렸다. 그를 통해 리버런그의 시장이 가진 생명을 느낌과 동시에 마력을 일으켰다.

    <폭주하는 피>

    생명을 산 채로 터뜨리는 흑마법.

    당연하게도 저항하지 못한 시장은 즉사했다. 일그러진 문자가 이내 정반대로 뒤틀린 것이 그를 증명한다.

    그러나 문자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다시 말해 고대의 저주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며, 특정 대상에게 낙인을 남겼다는 의미가 된다.

    즉시 정신을 집중했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 느껴진다.

    익숙하고도 불쾌하고 증오스럽기 짝이 없는 기운…… 낙인이 찍힌 대상에게서 신성력이 감지된다.

    생명력으로 보아 여성.

    낙인이 찍히고도 살아남았다면 최소 상위 주교급.

    “의외로군.”

    예상했던 것보다 발각되는 시기가 이르다.

    하물며 대주교 중 하나가 아니라 고작 주교에 의해서라니.

    도중에 어떤 변수가 작용했던 걸까.

    어쨌든 카일리언스에서 어느 정도의 단서를 얻었으니. 이제부터 루아스교에서 악착같이 추적해 올 것이다.

    그것도 상위 주교나 성기사만이 아니라 7인의 대주교 중 하나를 대동한 상태로.

    루아스 교국의 일각.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다.

    ‘물론 문제는 없다.’

    상황은 여전히 순조롭다.

    얼마 전 최소한의 준비를 끝마쳤으니까. 루아스교가 개입하는 건 지극히 계획대로였으며 바라던 바였다.

    ‘그래도 이대로 내버려 두는 건 여러모로 섭섭하겠지.’

    대주교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다.

    그리고 낙인이 찍힌 상위 주교가 어디서 그와 접촉할지도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훤하다.

    그래서 특별히 초청하려고 한다.

    대주교를 죽음의 무대 위로 끌어 올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변수들을 확인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을 만들 것이다.

    사내가 입가를 비틀었다.

    숭고함이 깃든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대한 주검의 영광을 위해.”

    * * *

    주검의 영광.

    백골의 비올라와 같은 흑마도사를 보유하며, 그림 리퍼라는 특수한 언데드를 다뤘던 집단이 에스티리아 왕국에 끼친 악영향은 막대하다.

    루아스교의 교구를 반파시키고 두 명의 주교를 살해.

    그뿐만 아니라 언데드 군세를 이용해 왕국 남부를 말 그대로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사상자는 최소 수천 명이며 피난민까지 합하면 무려 수만이다.

    또한 곡창지대가 언데드의 사기로 물들기까지.

    신성력을 통한 정화는 둘째 치고, 식량난의 발생이 불가피하다.

    그러한 문제와 관련된 피해자까지 감히 헤아린다면 수십만…… 아니, 족히 수백만은 되리라.

    ‘그런데 주검의 영광이 카일리언스에 나타났다라.’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한 테러 따위는 아닐 터다.

    주검의 영광이라는 이름이나, ‘위대한 주검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문장을 들었을 때, 놈들에게 어떠한 목적이 있음이 느껴졌으니.

    위대한 주검…… 그것이 어떠한 키워드인 것 같은데, 당장은 그 정체의 편린조차도 해석할 방법이 전혀 없다.

    상상력을 가미하지 못할 정도로 정보가 부족하다.

    ‘하지만 상황이 무겁다는 건 자명하다.’

    리버런그의 시장이 당했다.

    말인즉슨 카일리언스를 구성하는, 다른 여섯 개의 도시를 다스리는 시장들에게도 마수가 뻗쳤을 가능성이 높다.

    아예 확정적이라고 단정 짓는 게 낫겠지.

    ‘그리고 레나 주교에게 걸린 저주 또한 미지수다.’

    완전히 검게 물든 손.

    신성력 덕분인지 본인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는 건 아닌 것 같다만, 다른 효과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저주를 건 당사자에게 실시간으로 추적당할 수도 있다든가.

    ‘뭐가 됐든 해답은 대주교밖에 없군.’

    상위 주교조차 해주하지 못한 저주를 없앨 수 있는 건 그밖에 없으니.

    주검의 영광에게 접선 장소가 들킨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감안해야 하는 부분이다.

    판단을 내린 베르덴이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부터 배를 버리고 대주교와 접촉하겠습니다.”

    “대, 대주교님과……!”

    레나 주교가 작게 떨었다.

    그녀가 대주교를 마주한 적은 주교 과정 수료식 이외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7인의 대주교.

    루아스교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이 지닌 위상은, 감히 젊은 주교 따위가 넘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레이라가 말했다.

    “확실히 강을 따라 움직이는 건 행동반경이 제한되는 탓에 불리하긴 하죠. 추적당하기가 너무 쉽기도 하고요. 결국은 배를 버리는 게 당연하겠죠.”

    하지만.

    “약속 장소인 북동쪽의 마을까지 거리가 꽤 있어요. 레나 주교를 데리고 강행군으로 움직이는 건 여러모로 무리가 있고…… 그러니 강을 따라 최대한 이동한 뒤, 근방에서 마차라도 한 대 구하는 게 어떨까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정석적으로 생각해 보면 타당한 의견이었다.

    에스티리아 왕가의 국보, [레인디아]를 소지한 베르덴이 아니었다면.

    “마차는 이미 있습니다.”

    쿠웅.

    아공간에서 나타난 마차가 갑판 위에 놓였다.

    마땅히 있어야 할 말을 배제한, 베르덴의 전용 마차. <염동력>을 펼치자, 마차의 문이 활짝 개방되었다.

    “조종은 직접 할 테니 타시죠.”

    레이라가 눈을 끔뻑였다.

    그사이 아드리안과 레나 주교가 움직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주군.”

    “와, 마법사가 직접 마법으로 움직이는 마차라니. 살다 살다 이런 호화로운 마차에도 타 보게 되네요! 아무 데나 앉아도 되는 거죠?”

    두 사람이 마차에 탑승했다.

    직후 <비행>을 사용한 베르덴이 마부 자리에 올라탔다. 그 특이한 광경에 레이라의 뇌리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최근 카일리언스 국경에서 떠도는, 괴담에 가까운 소문.

    “마법으로 아인종을 몰살하며 말 없이 달리는 마차…… 그게 당신이었나요?”

    “……?”

    “아, 모른다면 됐어요.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아무튼 이동 수단이 이미 있다니 다행이네요. 전적으로 당신의 마법에 의존하게 돼서 미안하지만…… 부탁할게요.”

    마지막으로 레이라가 마차 안에 들어섰다.

    모두가 착석한 것을 확인한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허공에 뜬 마차가 배를 벗어나며 강가를 넘어 지면에 착지했다. 네 개의 바퀴가 일제히 움직이며 가속화되는 속도.

    마차의 무게에 짓눌린 자국들이 일직선으로 뒤를 이었다.

    향하는 곳은 북동쪽에 있는 마을.

    현재 아인종이 들끓는 위험 지역 중 하나다.

    * * *

    다수의 용병으로 이루어진 무리가 강가를 질주한다.

    피부를 적시는 겨울의 한기.

    사람과 말이 내뿜는 숨결이 하얗게 변하며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들의 눈동자는 헤인강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때, 선두에 있던 용병 하나가 앞을 가리켰다.

    “이봐! 저기 도난당한 선박이다!”

    모두가 눈을 빛냈다.

    이들은 수배령에 오른 범죄자를 쫓는 용병들로 급조된 단체로, 직접 현상 수배범을 사냥하기보다는 전문적인 추적꾼에 가까웠다.

    정보를 제공하는 것 또한 상당한 돈이 되기에.

    “이대로 리버런그에 보고할까? 더 접근했다가는 위험할 것 같은데.”

    수배된 사람은 총 세 명.

    그중 금속 마스크를 착용한 자는 불명이었지만, 다른 둘의 신원은 밝혀졌다.

    하나는 에스티리아 왕국의 귀족.

    나머지 하나는 미스릴 등급 모험가인 핏빛검, 레이라.

    어째서 그들이 시장과 수호자를 죽이고 주교를 납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알아내는 건 용병들의 몫이 아니다.

    그들을 붙잡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전자는 그렇다 치고 후자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니.

    그러니 위치 정보를 제공하고 보수만 받는다.

    돈에 목이 말라 있는 용병들에게는 단지 그뿐인 이야기다.

    “그러고는 싶지만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군. 게다가 돛도 제대로 펴지지도 않은 데다가 아무도 보이지 않아. 아무래도 배를 버린 것 같은데…… 수색해 보는 게 좋겠어.”

    카일리언스가 바라는 건 수배자의 위치.

    놈들이 훔쳐 간 배의 행방 따위가 아니었다. 이대로 돌아가 봤자 한 푼도 받지 못하리라는 건 분명하다.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간 용병들이 조심스레 배에 올라탔다.

    예상대로 텅 비어 있었다.

    “진짜 아무것도 없구먼.”

    “그래도 주교를 데리고 다니니 어떤 흔적은 남겼을 거다. 주변을 샅샅이 뒤지면 발자국 하나라도 나오겠지.”

    낭패는 아니다.

    본디 추적이라면 적당한 줄타기가 필요한 법.

    너무 빨리 끝내면 일이 쉬웠다며 보수가 적어지고, 너무 늦게 끝내면 다른 놈들한테 일거리를 빼앗길 수도 있으니.

    밥그릇을 지키는 건 언제나 중요하다.

    “……응?”

    그러던 그때였다.

    저 멀리서 낯선 무리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동업자인가?’

    세어 보니 세 명이다.

    자신들에 비해 적은 숫자다.

    배에서 내려온 용병들이 말에 탄 채, 제각기 무기에 손을 올리며 불청객을 반겼다.

    “누군지는 몰라도 여기는 우리가 맡았다. 그러니 피 보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꺼지시지.”

    슬쩍 보인 검날이 서늘하게 빛난다.

    그와 마주한 세 명 중, 양 손목에 특이한 팔찌를 찬 남자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 무언가 착각하셨나 보군요. 저희는 당신들을 방해하러 온 게 아닙니다. 오히려 도우려 온 거지.”

    “돕는다고……? 너희들이 누군데?”

    “이런 사람이죠.”

    남자가 품속에서 증서를 꺼냈다.

    카일리언스의 도시 중 하나, ‘서드밀’에서 왔다는 증거. 그것도 다름 아닌 시장이 직접 사인한 증명서였다.

    그를 본 용병 하나가 눈썹을 씰룩였다.

    “리버런그의 소식이 벌써 서드밀에 닿았다고? 아니, 전국적으로 수배령을 때렸으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아무리 빨리 움직였다고 해도, 이 짧은 시간 동안 거기서 여기까지 오는 건 무리일 텐데?”

    “시장님께서 이번 사태를 아주 엄중하게 지켜보고 있다……. 당장은 이것까지만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진위는 알 수 없다.

    그래도 크게 걸리지는 않았다. 증서는 진짜였으니까.

    “그래서. 우리를 어떤 식으로 도와줄 생각이지? 뭐, 돈이라도 더 얹어 줄 셈인가?”

    “수배자들을 직접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습니다.”

    “어떻게?”

    직후 남자의 팔찌가 기동했다.

    “이렇게.”

    꺼림칙한 파동이 주위를 휩쓸었다.

    다급하게 무기를 뽑으려던 찰나, 갑작스레 발밑에서 썩어 문드러진 뿌리들이 솟아 나와 용병들과 말을 단단히 옭아맸다.

    “으아아아악!”

    “X발, 이, 이게 뭔……!!”

    “생기를 흡수하고 사기를 주입하는 특별한 뿌리입니다. 저항력이 높은 사람에게는 어떠한 해도 끼치지 못하지만…… 역시나 당신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닌 모양이로군요.”

    솨아아아악.

    뿌리를 벗어나지 못한 용병들의 피골이 상접해졌다.

    “끄어…… 어…… 억……!”

    핏기가 완전히 가신다.

    이윽고 생명력을 상실한 피부 조직이 하나둘씩 떨어지며 고약한 악취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날뛰던 말조차 곧 잠잠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해골마와 스켈레톤───다수의 언데드 기수(騎手).

    “흠, 죽음의 기수가 태어나지 않은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이걸로 숫자를 얼추 채우긴 했으니까.”

    남자가 팔을 들었다.

    정확히 북동쪽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저쪽으로 가서 다른 언데드와 합류하세요. 그리고 지시를 따르시길.”

    [───!]

    언데드 기수들이 곧장 질주했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죽음의 기운이 대지를 더럽힌다. 말발굽 모양으로 검게 죽어 버린 잡초들을 보며 남자가 말 머리를 돌렸다.

    “초청장은 제대로 보냈으니 이만 가도록 하죠. ‘네 번째 하인’께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서둘러 국경을 넘어갑시다.”

    남자를 비롯한 세 사람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위대한 주검의 영광을 위해.”

    * * *

    말없이 움직이는 마차가 숲속을 관통했다.

    도중에 여러 아인종이 이빨을 드러내긴 했으나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했다.

    베르덴의 마법은, 한낱 괴물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군.”

    두꺼운 목책으로 둘러싸인 북동쪽의 작은 마을.

    마차를 아공간에 보관한 뒤, 네 사람이 마을의 입구에 다가섰다.

    그러자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백색 금속으로 전신을 가린 존재가 나타났다.

    레나 주교가 눈을 부릅떴다

    “진짜 파, 팔라딘……!”

    대주교 직속 성기사, 팔라딘.

    그가 베르덴, 레나 주교, 아드리안, 레이라를 차례로 바라봤다.

    “따라오도록.”

    등을 돌린 팔라딘이 마을 안으로 향했다.

    베르덴 일행이 그를 뒤따르자, 마을의 풍경이 시야에 비쳤다. 그 안에는 여러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평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부 신성력을 품고 있다.’

    아인종 범람으로 인해 비워진 마을을 점거하고 있는 건가?

    이건 성기사와 성직자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루아스교의 전초기지나 다름이 없었다.

    덜컥.

    팔라딘을 따라 목조 건물에 들어섰다.

    중심에 허름한 책상 하나, 그 주위에는 다수의 의자가 놓여 있다.

    팔라딘이 턱짓했다.

    “앉아라. 곧 대주교께서 오실 테니.”

    명령에 가까운, 고압적인 말투였다.

    선택받은 성기사이자 대주교의 호위인 팔라딘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이상할 건 딱히 없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말투가 거슬리는군.”

    아드리안 첸버스.

    그는 베르덴의 검이다.

    “교국에서 예의범절은 못 배웠나, 팔라딘?”

    주군이 용납하지 않은 무례는 베어 버린다.

    그게 누구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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