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보상 (1)
외딴 하늘섬에 찾아온 두 명의 노인.
그들을 본 레그리트가 곧장 앞으로 걸음을 옮기고는 간단히 예를 취했다.
“오셨습니까. 렌 발하그 장로님, 쉐오른 장로님.”
방주의 세 장로 중 둘.
그중 로크의 스승, 렌 발하그가 뒷짐을 진 채 단호히 말했다.
“그래, 왔다. 네가 우리를 오게끔 만들었지. 레그리트, 네 기행은 익숙하다 생각했건만……. 설마 방주 회의를 도중에 중단시킨 것도 모자라 후보를 데리고 도주할 줄이야.”
“도주가 아니라 교류전입니다만.”
“흠, 교류전이라…….”
렌 발하그가 주변을 둘러봤다.
사방을 감싸고 있어야 할 푸른 하늘은 온데간데없다.
그림자에 잡아먹힌 하늘섬.
당장이라도 폭우가 내릴 듯한 먹구름이 천천히 바람을 타고 흘러가고 있다. 섬의 일부는 지진이라도 난 듯 쪼개졌다.
마치 번개 폭풍이 떨어지는 듯한 그을린 흔적도 가득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상당히 격렬한 흔적이군. 그래도 다행히 섬 자체를 부수지는 않았구나.”
“물론입니다. 서로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요.”
베르덴과 레그리트.
둘 다 마도를 개방하며 본 실력을 드러냈으나 필요 이상의 파괴는 일으키지 않았다.
만약 진심으로 상대를 멸하고자 했다면, 무차별적으로 날뛰며 모든 전력을 발휘했다면 상황은 아주 많이 달랐을 것이다.
아무리 지반이 단단하다 한들, 두 사람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하늘섬은 반쯤 무너졌겠지.
그랬다간 교류전이고 뭐고 대참사였다.
저 아래에 사람이 없다고 해도 여파는 무지막지할 테니.
붕괴된 섬의 파편이 지상으로 추락하는 걸 막느라 필사적으로 안간힘을 써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느냐?”
“제가 졌습니다.”
선장의 패배.
렌 발하그가 눈썹을 씰룩였다.
“제국의 워 로드인 네가 말이냐?”
“물론 제대로 승부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 그 흐름이 계속 이어졌더라면 결국엔 졌을 겁니다.”
“깔끔하게 인정하는구나.”
“사실은 사실입니다.”
레그리트는 당당했다.
황금 갑옷의 일부가 미약하게 파손된 모습. 하지만 그녀에게는 패배감은 물론이고 어떠한 후회 따위도 없었다.
“그래도 아쉽지는 않은가? ‘그것들’을 썼다면 달랐을 텐데.”
“어디까지나 이 자리는 교류전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저라고 해도 그 정도는 자제할 줄 압니다.”
워 로드로서의 실력을 보인 건 사실.
마도를 개방하고 기예를 다루며 비장의 수단 중 하나까지 사용했다.
다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기예의 극치에 다다른 절기도, 최후의 수단인 고대 아티팩트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모든 전력을 드러냈다고 한들 과연 승패가 달라졌을지는…… 감히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숨긴 것만큼, 아니 분명 그 이상으로 애셔도 전력을 감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까요.”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투명하고도 깊은 벽안 너머, 정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느껴졌다.
“그 정도란 말인가…….”
레그리트와 렌 발하그.
두 사람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 끝에는 서로 마주하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잿빛 머리의 마도사와 다른 한 명의 장로가 있었다.
베르덴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설마 장로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그럴 걸세. 내가 굳이 밝히지 않았으니까.
도서관장, 쉐오른 케르노든.
라이브러리를 지키는 자가 턱을 당겼다.
“교류전은 잘 봤네. 기존의 것과는 성질이 다른 <마력 위압>으로 방주 후보들을 대거 무력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탐색자, 레그리트와 교류전을 치르다니. 방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어. 자네도 레그리트만큼이나 피가 끓는 경향이 있군그래.”
“실례했습니다.”
“그리 말할 필요 없네. 아주 놀랍고도 당황스러우면서도 인상적이었으니. 서로 크게 다친 것도 없어 뵈니 교류전의 규칙도 제대로 지킨 것 같고.”
교류전은 끝났다.
“그러니 아크로 돌아가도록 하지.”
쉐오른 장로가 짧은 지팡이를 들었다.
여유롭게 마력을 집중시키며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화아아아악.
마력이 흘러 속성을 이룬다.
보라색의 빛이 번쩍이자, 이내 틈새가 갈라지며 공간이 열렸다.
‘이 느낌은…….’
영혼을 자극하는 강대한 격.
저도 모르게 마력이 술렁이게 하는 압도적인 존재감.
설마.
“……초월자셨습니까?”
쉐오른 장로.
공간의 마도를 개척한 방주의 초월자.
그가 베르덴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라이브러리. 아크가 보유한 지식의 보고를 수호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규모가 규모인 만큼 초월자가 있으리라는 건 예상했다. 그런데 설마 도서관장이 초월자였을 줄이야.
‘대체 방주의 주인이 누구길래…….’
대등한 것도 아니고 초월자를 아래로 두었을까.
감히 예측해 봤으나 그 정체가 도저히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가 가진 힘도, 속내도, 그 어떤 무언가도.
“그럼 가세.”
아크로 연결된 공간의 입구.
쉐오른 장로를 필두로, 두 장로와 한 명의 선장, 그리고 베르덴이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아크의 성채, 엑소디움.
현 방주의 주인이 기거하는 까마득한 최정상.
“별다른 문제는 없었나?”
“전혀 없었습니다. 도착하니 마침 교류전이 끝나 있더군요. 애셔와 레그리트, 두 사람 모두 약간의 부상은 있지만 중상에는 한참 미치지 않았습니다. 굳이 포션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자연 치유로도 금방 회복될 정도였습니다.”
“그렇군.”
렌 발하그 장로의 보고에, 방주의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보가 선장과의 교류전에서 승리했다라……. 아무리 레그리트가 전력을 보이지 않았다고 해도 예상을 뛰어넘는 힘이로군. 역시 고대의 시련을 극복한 자인가.”
“그런 의미에서 심히 보고 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때 선장의 일각이었던 장로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애셔가 마도왕의 마력운용법 <아케인>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
방주의 주인이 반응했다.
놀라운 소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레그리트의 마도에서 파생된 마법을 재현했다고 하더군요. 완전히 같은 마법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쩌면 그와 같은 원리로 <아케인>을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그가 두르고 있는 로브 또한 마도왕의 것으로 추정, 아니 확인된 상황입니다.”
“분명한가?”
“드래곤의 소재로 만든 로브는 세상에 몇 없기도 하니…… 저 또한 레그리트와 같은 생각입니다.”
“마도왕의 혈통이 아님에도 마도왕의 것을 다루는 존재라.”
생각이 깊어진다.
침묵하던 주인이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단순히 주인 없는 물건을 주워 온 것도 아닌······ 피가 아닌 무언가를 잇는 후계자라는 말인가.’
그렇다는 건 설마······.
‘아니, 아직 단정할 수는 없다.’
직접 애셔에게 물어보지 않는 이상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고대의 시련에서 얻은 무언가에 대해 일일이 캐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건 방주의 이념에 위배되는 행위였으니까.
그 의무는 방주의 주인에게도 해당된다.
후보에 대한 불필요한 간섭은 오직 해가 될 뿐.
그가 스스로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방주가 해야 할 일.
지금도 마찬가지다.
시련을 극복한 이에게 보상을.
교류전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보인 자에게 또한 보상을.
직접 돕지 않되 성장을 조력하는 것이 방주의 역할.
“애셔에게 무엇을 줘야 할지 정해졌군.”
그의 시선이 렌 발하그에게 향했다.
“렌 발하그 장로.”
“부르셨나이까.”
“라이브러리의 보관소를 개방한다.”
그리고.
“쉐오른 장로를 불러오도록.”
* * *
레그리트와의 교류전이 끝나고, 베르덴은 자신에게 제공된 방에 들어왔다.
아크에 방문한 후보들에게 주어지는 개인적인 공간이었으나, 라이브러리에서 밤을 새웠기에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기에 적당하군.’
조용하고 넓다.
레그리트에게서 얻은 마력 제어 그리고 원소 유합에 대해 고찰하고 연구하기에 적합했다.
하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술은 할 줄 아나?”
“주신다면 받겠습니다.”
“선호하는 건.”
“가리지 않으나 보다 깔끔한 걸 즐기는 편입니다.”
“마실 줄 아는군.”
중심에 놓인 테이블.
평범한 나무 의자가 두 개.
맞은편에 앉은 렌 발하그 장로가 직접 유리잔에 술을 채웠다.
예를 갖추며 건네받은 베르덴이 간단히 얼음을 만들어 잔에 담았다. 당연하게도 술은 한 방울도 튀기지 않았다.
그를 단번에 들이켠 두 사람이 마주했다.
문득 렌 발하그가 베르덴의 손을 바라봤다.
“공국에서 선물로 주었던 [카멜리오스의 가죽 장갑]이 없군. 망가진 건가?”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광염의 레오닐과의 사투 중, 화염 마법의 열기에 버티지 못하고 녹아 버리고 말았다.
“잘했네. 장비란 제대로 써야지 의미가 있는 법이니. 망가지는 걸 아까워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 그나저나 글러트니의 이빨을 토벌했을 때와 비교해 자네는 참으로 많이 달라졌군.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이 아닌데도…….”
그만큼 격정적인 삶을 살았다는 의미였다.
손에 거머쥔 결과물이 위대할수록, 그를 얻기 위한 과정은 그야말로 역경이었을 테니.
“덕분에 교류전이 일찍 끝나 버렸어.”
말 그대로였다.
교류전은 그대로 종료되었다.
참가 대상자 대부분이 정신을 잃었는데 어떻게 이어 나갈 수 있을까. <마력 위압>을 버틴 여섯 명의 후보들 또한 교류전에 나서기를 거부했다.
무엇보다 안내를 맡은 레그리트가 탈주하기까지.
이러한 사태의 책임은 그녀의 잘못이 가장 크긴 했지만 베르덴의 지분도 상당했다.
다른 건 차치하고 레그리트가 인위적으로 일으킨 공간 이동을 거부할 수 있었음에도 저항하지 않았으니까.
오늘은 방주 역사상 가장 빨리 끝나게 된 교류전이 있었던 날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자네는 가장 많은 후보들을 쓰러뜨린 후보이자, 선장과의 교류전에서 승리한 마도사로 전해지게 될 걸세. 후에 그 기록이 깨질는지 모르겠군.”
“…….”
베르덴은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후회는커녕 반성조차 하지 않았다.
제국의 워 로드와 마법전을 벌이면서 아주 많을 걸 얻었으니.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튼 잡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내가 지금 여기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건 자네에게 줄 게 있기 때문이네. 시련과 교류전, 거기서 주어지는 보상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겠지?”
“사전에 듣긴 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전해 주러 왔네. 먼저 교류전에 대한 건부터.”
렌 발하그가 보인 건, 앞표지에 마법적인 문양이 가득한 새하얀 책.
‘설마…….’
직접 본 적은 없었으나 지식으로 접한 적이 있다.
인공 아티팩트의 목록이 기록된 서적에서 동일한 형태의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혹시 [다원의 마법서]입니까?”
“한눈에 알아보는군.”
마법서(魔法書)란 마석을 소모하여 특정 마법을 등록하고, 사용자의 마법적 역량을 강화하는 성능을 지니고 있는 마법 물품.
베르덴도 그중 하나를 소유하고 있다.
보헤미른 마탑의 보물고에서 훔친 미개방된 마법서, 그걸 대지의 마법서로 만든 다음 마법진을 연결하여 현재 아공간에 보관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까지 느껴 왔듯, 마법서의 강화 효과는 막강하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탐을 낼 만큼이나.
다만 단점이 있다면, 마법사는 오직 하나의 마법서만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이건 다르다.’
먼저 다원의 마법서는 마법을 등록할 필요가 없다.
오리엔트의 재료 중 하나였던 오브처럼, 원소 속성 자체와 관련된 모든 마법을 강화시켜 주기에.
심지어 기존의 마법서와 달리 어떤 원소 하나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야말로 모든 원소를 아우르는 마법서이자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법서의 제작이 가능한 건 오직 아티슨 마탑뿐.
개중에서도 다원의 마법사와 같은 인공 아티팩트는 이 세상에 몇 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
“자네도 알다시피 다원의 마법서는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지. 이건 다른 원소 마법서를 흡수하여 사용하는 아티팩트이니. 그리고 그를 충족하는 건, 다원의 마법서에 등록되어 있는 마법사가 직접 개방한 마법서뿐이고.”
타인의 마력이 닿은 마법서는 안 된다.
오직 본인 스스로 개방한 마법서만이 가능하다.
간단하지만, 아주 까다로운 조건이다.
“자네는 그런 마법서를 갖고 있는가?”
“마침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거 잘됐군. 당장 시험해 보면 되겠어.”
거절할 이유는 없다.
베르덴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았다.
‘다원의 마법서는 피와 마력으로 등록된다.’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동시에 손바닥을 조금 깊게 베어 힘껏 쥐어짜 내자, 마력이 깃든 핏방울이 마법서의 표지 위로 떨어졌다.
툭, 투두둑.
다원의 마법서가 붉게 명멸한다.
게걸스럽게 피와 마력을 빨아들인 그것이 본래의 흰색을 되찾았다.
“……!”
선명하게 연결되는 감각.
아티팩트의 각인과 흡사한 느낌이었다.
“축하하네, 다원의 마법서를 소유한 몇 없는 주인이 된 걸. 이제 다음 차례로군.”
고개를 끄덕인 베르덴이 다원의 마법서를 열었다.
그 안에는 책장 따위는 없었다.
정확히 마법서의 규격에 맞는 크기의 작은 공간만이 있을 뿐.
아공간에서 대지의 마법서를 꺼내 안에 집어넣었다.
망설임 없이 책장을 닫자, 마력의 빛이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이윽고 다원의 마법서의 표지에 새겨진, 복합적이고 마법적인 문양 중, 줄무니에 해당하는 부분이 갈색으로 변했다.
‘대지의 마법서와 연결된 커넥션이 끊어졌다.’
하지만 허전함은 없다.
오히려 더욱 마법의 힘이 충만해졌다.
‘마침 마법서에 등록할 수 있는 용량이 부족해지던 참이었는데.’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할까.
그뿐만 아니라, 대지 속성 이외에도 원소 마법적 역량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외적 수단이 생긴 셈이었다.
미개방한 마법서를 구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물론 엄청나게 구하기 어렵겠지만.’
돈이 많다고 해도 마찬가지.
기회가 닿지 않는다면 보는 것조차 어려울 터.
그래도 전혀 조급할 필요는 없다.
여정 도중에 이룰 만한, 부가적인 목표로 삼는 정도면 충분했다.
흡족한 베르덴이 최상급 포션을 꺼내 당장 상처를 치료했다.
“표정을 보니 잘 끝냈나 보군.”
“아주 귀한 걸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은 방주의 주인께 전해 드리겠네. 이걸 주고자 하신 것은 그분의 결정이니. 그리고 그런 반응을 보이기에는 이르네. 아직 줄 게 남았으니까.”
남은 건 고대의 시련, 마도왕의 무덤을 극복한 것에 대한 보상.
다원의 마법서 하나만으로도 차고도 넘쳤다.
그런데 무언가 더 줄 게 있다니……. 과한 듯싶으나, 방주의 규모를 생각해 보면 베르덴이 우려할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그 보상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지.”
“그럼…….”
“시간이 됐으니 이제 곧 오겠군. 나는 이만 가 보도록 하지. 그럼 만나서 반가웠네.”
자신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른 렌 발하그 장로가 훌쩍 방을 나섰다.
‘……조용하군.’
혼자가 되니 정적이 찾아왔다.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감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분침과 시침이 함께 기울던 바로 그때였다.
화아아아아아아악!
공간이 비틀렸다.
마력의 파장이 요동치는 흐름 속에서 익숙한 사람이 나타났다.
라이브러리의 도서관장, 쉐오른 장로.
갑작스레 나타난 그가, 인사를 할 새도 없이 렌 발하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턱 하니 걸터앉아 몸을 누이고는 술을 들이켰다.
“깔끔하군. 나쁘지 않아.”
“장로님을 뵙───”
“되도록 장로 대신 도서관장이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군. 나는 그쪽을 더 선호하는 편이니. 뭐, 자네가 레그리트처럼 고집이 세다면 아무렇게나 불러도 상관없지만.”
베르덴이 경청했다.
“예, 도서관장님.”
“좋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렌 발하그 장로가 미리 언질을 해 두었을 테니까.”
쉐오른 장로가 품속에서 서적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이번에도 책이었다.
다만 마법서처럼 마법 물품은 아니었다.
어떠한 마력도 깃들어 있지 않다.
하나 단언하건대 그 내부에 담겨 있는 지식은 결코 그에 못지않았다.
“……공간 마법에 관한 서적은 후보는 열람 불가라고 들었습니다만.”
“분명 그랬지.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가 있네. 고대의 시련으로 분류된 마도왕의 무덤을 극복한 것이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하지.”
스윽.
장로가 슬쩍 책을 밀었다.
언제든 가져가도 좋다는 듯, 선뜻.
하지만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서적은 자네에게 주는 보상일세. 단 선택지 중 하나로서.”
선택지?
그렇다면 다른 게 있다는 건가?
베르덴이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셔, 자네의 마도는 매우 특별하다고 하더군. 타인의 마도, 그로부터 파생된 마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현할 수 있다고……. 틀림없나?”
“비슷합니다.”
마도를 묻는다
베르덴은 애써 숨기지 않았다.
도서관장이나 레그리트가 인지하고 있는 부분은 어디까지나 일부분에 불과하니까.
“그렇군. 그래서 자네에게 다른 선택지를 보여 주려고 하네.”
쉐오른 장로가 마력을 움직였다.
거칠지 않고 부드럽다. 초월자의 격이 은은하게 공간을 휘감았다.
“나는 쉐오른 케르노든. 공간의 마도를 개척한 마법의 초월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공간이 비틀리며 자색의 형광이 명멸했다.
“공간 마법 서적을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내 마도를 일견(一見)할 것인가.”
쉐오른 장로가 입가를 비틀었다.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이 깃든 미소였다.
“자. 선택해라, 애셔.”
둘 중 하나.
서로 다르지만 의미는 같다.
그토록 바라왔던 공간 마법,
그 힘이 마침내 베르덴의 앞에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