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317화 (317/366)

317화 선장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장발.

그와 대비되는 어두운 드레스를 입은, 회색의 천으로 눈을 감은 여인이 이동진을 통해 공간을 넘었다.

다른 사람과 달리 시야가 차단되어 있음에도 거침이 없는 발걸음.

길게 늘어선 회랑을 통해 목적지, 엑소디움의 회장(會場)에 도착했다.

중심이 비어 있는 거대한 원형의 테이블과 정확한 간격으로 떨어진 여섯 개의 의석이 그녀를 맞이했다.

“네가 두 번째다, 주시자.”

고개를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상대의 존재가, 형태가 여실히 느껴지고 있었기에.

“평소 회의에 가장 늦게 오시던 분이 올해는 가장 빨리 오셨네요, 탐색자.”

탐색자, 레그리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거 아니겠어? 애초에 사람 마음이란 게 원체 종잡을 수가 없는 거잖나. 아무리 주시자인 너라고 해도.”

“그래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죠. 항상 회의가 재미없다고 노래를 부르면서 난리를 치던 당신이 얌전히 있다는 건, 그 지겨움을 충분히 상쇄해 줄 만한 게 있다는 것일 테니까요. 마침 그럴 만한 안건이 이번 회의의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남의 의중을 파악하려 드는 건 여전하군.”

“그게 제 의무니까요. 당신도 수많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저처럼 될걸요? 정 궁금하시면 역할을 바꿔 보든가요.”

“그건 능력 부족이라 무리인데. 애초에 방주의 주인께서 허락하시지도 않을 테고. 그리고 온종일 아크에 처박혀서 세상을 바라보고만 있다니…… 으으, 절대로 사절이야.”

레그리트가 움츠리며 팔을 쓸었다.

탐색자, 누구도 닿지 못한 미지를 탐험하는 것이 선장으로서의 의무. 그러한 모험을 삶의 낙으로 삼는 그녀였다.

그런데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고 아크에만 있어야 한다니.

아무리 시설이 좋다고 해도 무의미했다.

기본적으로 흥미 본위로 행동하는 레그리트에게는 창문 하나 딸린 감옥에 갇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레그리트가 질색했다.

“죄수처럼 잡혀 있는 건 죽어도 싫어. 나는 자유가 좋다.”

“멀쩡히 있는 저를 멋대로 죄수로 치부하지 말아 줄래요? 그리고 저도 자유로운 거 좋아해요. 당신처럼 방랑벽이 없을 뿐이지.”

발끈한 주시자가 홱 고개를 돌렸다.

상대를 쳐다보기 싫다는 몸짓이었으나, 감지되는 건 여전히 같았다.

과거 눈이 멀쩡했을 때의 잔재였다.

“그래, 알았으니까 그만 화 풀어라. 아르나크 제국에서 최고급 다과를 사 왔는데 먹을 텐가?”

“……고마워요.”

두 사람의 잡담은 계속되었다.

얼마 후 시침이 정각을 가리키자, 약속된 사람들이 하나둘씩 회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최근 시련에 문제가 생겨서 조금 늦었다만…… 탐색자가 먼저 와 있었을 줄이야. 뭔가 자존심이 상하는데.”

불그스름한 금발,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는 올백 머리.

깔끔한 정복을 갖추고 단안경으로 오른쪽 눈을 장식한 사내, 조율자.

“…….”

금속과 가죽으로 형성된 전신 갑주.

머리와 손 그리고 머리칼마저 포함하여 신체의 일부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는 존재, 토벌자.

“죄송합니다. 가능한 일찍 오려고 했는데 본의 아니게 가장 늦었군요. 아무튼 1년 만인데 모두들 건강해 보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마수의 털로 장식된 두꺼운 망토.

청색의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화사한 금발과 벽안이 특징인 청년, 감시자.

이로써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착석했다.

레그리트가 팔짱을 꼈다.

“내가 가장 먼저 왔으니 개최는 내 역할이군. 그럼 차례대로 호명하겠다.”

미지의 탐색자.

세계의 주시자.

균형의 조율자.

재액의 토벌자.

북부의 감시자.

남은 한 자리는 공석.

“이하 다섯 명. 구성원의 참석을 확인했다.”

이들은 숱한 시련에 도전하고 극복해 온 강자.

인류를 이끌 인재로서 인정받고, 전대로부터 선장의 직위를 물려받은 계승자다.

그러한 방주의 최고 전력이 한데 모였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

* * *

방주는 세상에 군림하지 않는다.

다만 어디까지나 집단 자체로서의 의미로, 선장과 후보 각 개인의 욕망이나 꿈은 해당되지 않는다.

설령 선장 중 하나가 국가를 건국한다고 해도 마찬가지.

실질적인 행위가 차후 인류라는 종에게 악영향을 끼치거나 마땅히 갖추고 있어야 할 인간성을 버려야 하는 게 아니라면…… 의무를 저버리지만 않는다면 허용된다.

대신 개인적인 사정으로 방주의 힘을 빌리는 건 불가하지만.

그런 이유로 방주 회의의 주제는 한정된다.

각 선장이 지키는 의무.

그리고 인류를 이끌 재목을 키우는 것.

목적은 오직 그것들뿐이다.

회의를 주재하는 건 관행대로 주시자의 역할.

그녀가 테이블의 정면으로 고개를 향하며 처음으로 운을 떼었다.

“먼저 특이 사항에 대한 것부터 시작하도록 하죠. 관련 안건은 총 두 가지.”

첫 번째.

“동대륙에서 멸종되었던 고대 혈통이 발견되었어요. 정확히는 작년의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에스티리아 왕국이라면…… 설마 마녀를 말하는 건가?”

레그리트가 의문을 표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28년 전, 에스티리아 왕가의 재상으로 위장했던 글러트니.

놈들은 전쟁을 빌미로 왕을 설득하고는, 네 번째 왕비에게 강제로 마녀의 기억을 주입하여 잠들어 있던 혈통을 깨웠던 사건이 있었다.

글러트니는 마녀의 신체 조직을 이용하여 잔혹한 생체 실험을 실행했다.

단순히 실험체로서 희생된 숫자만 만 단위, 글러트니의 마법사가 공화국과의 전쟁에 참가하여 죽인 숫자는 그 이상이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전대 주시자가 이를 감지하고, 여기 있는 토벌자가 직접 나서서 왕국에 숨어 있는 모든 글러트니를 전멸시켰죠.”

“…….”

토벌자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왕비의 죽음으로 인해 마녀의 기억이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판단했고요. 그런데 그 기억이 자식에게 이어졌더군요.”

감시자가 고개를 기울었다.

“갑자기 기억이 되살아난 건 아닐 테니…… 그럼 28년 전에 왕비가 사망하면서 전이되었다고 보는 게 옳겠군요. 그런데 어째서 지금 관측된 겁니까?”

“주시자에게도 한계는 있으니까요.”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그 전체를 담는 건 불가능.

그리고 능력의 한계로 관측 불가능한 지역과 존재가 있다.

아무런 외부 조력도 없이 어떤 지점을 콕 집어서 유의미한 정보를 얻는 건, 행운을 빌린다고 해도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마녀가 [마녀의 왕관]까지 써 가며 힘을 개방하지 않았다면 영영 알아차릴 수 없었으리라.

“그래서, 방주의 일원 혹은 후보로 받아들이려고?”

“깊게 고민하고 있어요. 내면은 기준점에 머물러 있긴 하지만…… 과거 글러트니에게 휘둘렸던 왕가니까요. 방주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리비안트 공국의 2왕자 이상으로 면밀히 따질 필요가 있겠죠. 아무튼 전달했으니 넘어갈게요. 조율자.”

“두 번째 특이 사항은 내가 전달하도록 하지.”

조율자가 단안경을 고쳐 썼다.

“본래 도시 국가 연합, 카일리언스에 자연적인 시련이 발생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가능성이 현재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말해 예측이 불가능해졌다는 얘기지.”

“누군가 개입한 겁니까?”

“아마도. 하지만 글러트니가 아닌 건 분명하다. 그러니 그뿐이지.”

시련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방주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인류는 보호받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건 종의 약화를 불러일으키며, 끝내 도태로 이어지게 될 테니. 수백,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이 죽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당장의 구원은 반드시 훗날의 절망이 된다.

사건을 주도하는 건 불허한다.

방주는 방관자이되 조력자의 위치를 지켜야 하기에.

레그리트가 입맛을 다셨다.

“뭐야, 그걸로 끝인가? 재미없군.”

“……회의에서 재미를 추구하는 건 너뿐일 거다, 탐색자. 그렇다면 너는 그 재미라는 걸 충족시킬 만한 정보를 가져왔다는 거냐?”

“핫, 그야 당연하지. 내가 이번에 아주 대단한 걸 발견했거든.”

“대단한 거?”

“그래, 그게 뭐냐면…….”

선장들이 제각기 반응했다.

탐색자가 저렇게 자신한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까. 오직 토벌자만이 팔짱을 낀 채 부동의 자세를 유지했다.

“비밀이야.”

“뭐?”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애매하긴 하거든. 그러니까 회의에서 자세히 말할 의무를 아직 지킬 필요는 없지. 정 궁금하면 지루한 회의는 잠시 멈추고 교류전부터 시작하든가.”

“그게 목적이었습니까.”

“솔직히 너희들도 궁금하잖나?”

탐색자, 레그리트가 양팔을 폈다.

“이번 신입 후보. 한 명은 새롭게 개발된 마법 종류를 터득했고, 다른 한 명은 그 마도왕의 무덤에서 살아 돌아왔지. 후보는 물론이고 선장조차 극복하지 못한 시련에서.”

그녀의 시선이 공석에 잠시 머물렀다.

7년 전에 주인이 사라진 자리는 여전히 싸늘했다.

주시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법사 애셔. 여러모로 기이한 사내이긴 하죠.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알 수가 없는 데다가 내면조차 읽을 수 없었으니…….”

주시자가 내면을 살필 수 없는 존재는 한정되어 있다.

크게 분류하자면 이형종이나 초월의 격을 터득한 초월자가 그에 해당된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걸 감안한다고 해도 애셔는 이제까지와 비교해 무언가가 달랐다.

관측이 아예 통하지 않는다.

어떠한 정신의 편린조차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공국에서 온 리스너에게 보고받은 이후로 지금까지 말이다.

아크에 있는 고대 아티팩트를 이용하여 위치를 특정하는 것만이 전부였다.

조율자가 덧붙였다.

“게다가 라이브러리의 주인께서도 그 힘을 완전히 꿰뚫어 볼 수 없다고 하시더군.”

“그분께서…….”

감시자가 경악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도서관장의 눈이 통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레그리트가 히죽 웃었다.

“들었지? 그러니까 예정을 앞당겨서 교류전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싶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분위기는 긍정적이었다.

방주에 속해 있지 않았음에도 글러트니의 이빨을 죽였던, 유례없는 후보. 그에게 흥미가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거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토벌자조차 미약하게 반응할 정도니.

그때, 주시자가 말했다.

“저, 회의 주재자는 전데요? 왜 갑자기 마음대로 순서를 바꾸시려 하는 거죠?”

“교류전부터 안 하면 회의 안 해.”

“…….”

레그리트는 단호했다.

만장일치로 회의는 잠시 중지되었다.

* * *

신입 후보 대기실.

아카데미의 마법사는 서툴렀지만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노력했다. 이미 여섯 잔이나 되는 음료를 비우기까지.

말을 많이 한 탓에 점잖아 보이는 말투가 자주 흐트러지긴 했지만, 베르덴은 모른 척 일관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 글러트니의 간부를 토벌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대체 어떤 자들이오? 나는 본 적이 없어서.”

“끔찍한 놈들이지.”

베르덴이 간략하게 설명했다.

글러트니의 잔혹한 실험 과정, 다른 종의 신체를 붙여 이능을 갖게 된 이식자, 섭식으로 진화를 추구하는 뒤틀린 이념 등.

적나라한 사실에 마법사가 기겁했다.

“사, 사람을 산 채로 잡아서 실험하기까지 한다고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아, 아니, 있을 수 있소?”

세상은 넓고 다양하다.

상식과 비상식이 사방에 만연했다. 그렇기에 있을 수 없는 일은 없다.

베르덴의 근간인 역천의 마법진도, 거대한 하늘섬으로 이루어진 아크도, 생체 실험을 일삼는 글러트니의 존재도 말이다.

‘대답은 이쯤 했으면 됐겠지.’

이제 베르덴의 차례였다.

“너는 새로운 마법 종류를 터득했다고 들었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마법인지 말해 줄 수 있나? 여태껏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아, 물론이오. 비밀리에 진행되던 건데 거의 완성되었으니. 조만간 확실시되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될 거요. 아직 교수님이 논문을 준비 못…… 읍!”

뒤늦게 입을 틀어막은 마법사가 말을 이었다.

“그, 그러니까! 이름부터 말하자면 ‘소환 마법’이요.”

“소환……? 언데드를 다루는 흑마법 같은 걸 말하는 건가?”

“결은 비슷하지만 내용은 완전히 다르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마법사가 공간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러고는 낯선 물건을 꺼내 베르덴에게 보였다.

밑바닥에는 황동색 금속판이, 그 위로는 투명한 막이 안팎을 구분하고 있는 구조였다.

‘마석은 들어가 있지 않군. 마력을 흘려 넣어 내부로 집중시키는 용도인가.’

마법 물품인 건 분명하다.

하나 베르덴의 지식으로도 생소했기에, 완전히 정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이건 ‘디스펜서(Dispenser)’라는 매직 아이템이오. 소환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전용 도구지. 내부에 마력을 불어넣고 조작하여, 떠올린 심상을 그대로 투영한 뒤에 공간 마법으로 구현화하는 원리요.”

“……공간 마법이라고?”

“그게, 자랑은 아니지만 공간 속성에 적성이 있어서…… 하하.”

마법사가 쑥쓰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공간이라는 최상의 속성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관련 서적을 구하거나 마법 난이도가 매우 높은 건 둘째 치더라도, 일반적으로 재능을 타고나지 않으면 손도 대지 못하니까.

그런데 아카데미 학생이 사용할 수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건가.’

그건 베르덴을 향한 말이기도 했다.

“혹시 보여 줄 수 있나?”

“미, 미안하지만 그건 어렵소. 소모되는 마력이 워낙 많은 터라 지금 사용하면 교류전이 많이 힘들어져서…… 양해 부탁드리겠소.”

흑마법이 아닌 소환 마법.

그것도 공간 속성을 필요할 줄이야……. 새로운 마법 종류라더니, 머릿속으로 예상해 왔던 것 이상이었다.

‘과연 어떤 마법일까.’

기대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직 방주 회의가 끝나려면 멀었다는 게 아쉬울 뿐.

그러던 그때였다.

“……!”

소용돌이치는 마력.

감지한 직후 대기실의 구석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보랏빛이 환하게 명멸하며 두 사람을 비추었다.

“어? 공간 이동진? 분명 회의가 끝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고 했는데…….”

베르덴도 그렇게 들었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서선 마도왕의 로브를 가다듬으며 채비를 갖추었다.

“출발하지.”

선장과 마법.

베르덴은 의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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