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밀회 (2)
예고도 없이 찾아와 부탁할 게 있다며 도움을 청한다면 어떨까.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많은 이가 곤란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타의에 의해 고민을 강요당하게 되는 일이니.
그것이 어려운 부탁일수록, 서로 간의 친분이 깊지 않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 관점에서 레이라의 반응은 덤덤했다.
얼굴을 숨기고 있어 표정을 살필 수 없으나 당황스러운 기색은 없다. 왠지 모르게 목소리에서 묘한 반가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마침 잘됐다는 것처럼.’
애초에 그걸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멀쩡한 입구를 내버려 두고, 먼지가 수북한 다락방을 통해 들어온 걸 보면 말이다.
대화의 여지는 있다.
뭔지 들어 보겠다는 건, 경우에 따라 수락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하니. 그 부분을 파고들어 레이라를 설득하는 건 베르덴의 몫이었다.
미사여구는 필요 없다.
언제나처럼, 본론은 짧고 간결하게.
“중앙 대륙으로 갈 예정인데 공간 이동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동대륙의 공간 이동진이라면…… 벨디른 공화국 말이군요. 저도 소문으로 듣기는 했어요.”
최고 의원을 죽인 범인은 불명.
엄격한 검문검색을 통해 입국 자체는 가능하나, 이후엔 국경이든 해안선이든 공간 이동진이든 출국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대륙 간 공간 이동진을 재가동시킬 수 있는 미스릴 모험가 등급 권한이 필요하다는 거군요. 확실히 공화국과 모험가 길드에서 승인이 떨어진다면, 굳이 길드 소속이 아니더라도 대륙을 넘어갈 수는 있어요. 제가 보증을 선다는 가정하에.”
레이라가 팔짱을 끼었다.
“아예 감춰져 있는 사실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험가 길드의 기밀 중 하나인데…… 이쪽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뭐, 우연히 들었습니다.”
“우연히 들을 수 있는 정보가 아니지만요. 어쨌든 대답부터 하자면……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 용의는 있어요.”
그녀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다만 세 가지 조건이 있어요. 하나는 신분. 임시로 발급되는 신분증 같은 거 말고, 당신이란 사람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물증이 필요해요.”
“이거면 됐습니까?”
베르덴이 메달과 증서를 꺼냈다.
에스티리아 왕국, 명예 백작.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레이라가 뒤늦게 말을 이었다.
“……그사이에 명예 귀족 작위를 얻었을 줄은 몰랐는데요. 예, 이거라면 당신 일행은 별다른 신분이 필요 없겠네요. 귀족으로서 신분을 보장하면 될 테니까요.”
레이라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이라도 각하라고 불러야 할까요?”
“됐습니다. 그보다 두 번째 조건은 뭡니까?”
“흐흠, 두 번째는 당연하게도 제가 함께해야 한다는 거예요. 대륙을 넘나들려면, 저도 당신과 함께 동대륙에서 중앙 대륙으로 갈 필요가 있다는 거죠.”
어깨를 보호하고 있는, 금속 견갑을 으쓱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이건 괜찮아요. 저도 조만간 중앙 대륙으로 향할 예정이었으니까, 시기를 조금 앞당긴다고 생각하면 되겠죠. 하지만 세 번째 조건이 문제예요. 바로 여기, 카일리언스죠.”
긴급 소집령 때문인가.
레이라는 부정하지 않았다.
“등급에 무관하게 모험가는 모험가로서의 의무는 지켜야 해요. 긴급 소집령은 그러한 예 중 하나죠.”
아인종 토벌에 참가하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의무.
또한 소집령이 끝나기 전까지는 오랜 기간 카일리언스를 벗어날 수 없다.
“만약 무시했다간 일시적으로 모험가 등급 권한이 중지되죠. 그게 지속되고 반복되면 결국 모험가 길드에서 퇴출당하고요. ”
모험가 길드는 보란 듯이 세계를 아우르는 조직 중 하나.
레이라와 같은 모험가가 다수 활동 중이며, 그보다 더욱 뛰어난, 가장 높은 흑요 등급은 길드가 가진 힘의 상징이다.
그리고 길드의 절대적인 원칙은 바로 통제.
미스릴 등급 이상의 모험가가 공간 이동진을 사용할 수 있듯, 등급에 따라 차별적이고 막대한 혜택을 쥐여 준다.
대신 모험가의 의무를 부여하여 행동을 강제한다.
자유롭되 자유롭지 않은 자, 그것이 바로 모험가다.
경청하고 있던 베르덴이 입을 열었다.
“그럼 위협이 되는 아인종을 몰살키시면 되는 겁니까?”
섬멸은 자신 있다.
눈을 빛내는 그를 보며 레이라가 턱을 당겼다.
“그 자신감은 작년하고 똑같네요. 하지만 비상 소집령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해요. 제가 리버런그에 온 건 아인종 때문만은 아니니까요.”
다른 이유가 있다.
이미 짐작한 바 있기에, 베르덴은 놀라지 않았다.
“어떤 일입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지금 카일리언스에서 발생하고 있는 아인종의 급증은 자연적인 게 아니에요. 인위적인 현상이죠.”
베르덴이 미간을 좁혔다.
아인종의 대량 출몰이 누군가의 소행이라니.
그가 알기로 짚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설마 글러트니……?”
섭취를 진화의 근간으로 여기는 글러트니.
방주의 배신자로, 현 인류를 멸하고자 하는 광기의 집단.
“충분히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글러트니는 아니에요. 그뿐만 아니라 방주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죠.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맡은 의뢰니까요.”
모험가 길드 외의 의뢰를?
“길드에서는 용병 행위를 금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허울뿐인 제약에 불과해요. 리비안트 공국과 에스티리아 왕국에 형성된 그레이란 의뢰 창구처럼요. 아무리 모험가 길드라고 해도, 그런 개인적인 것까지 억압하는 건 불가능하죠. 은밀하게 행해지는 의뢰라면 더욱.”
기밀을 요하는 의뢰.
그에 대해 언급했다는 건, 베르덴에게 그와 관련해 도움을 받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하나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도 무작정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의뢰주가 누구입니까?”
“…….”
레이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고민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숨기지 않고 밝혔다.
“빛의 여신을 숭배하는 교단, 루아스교.”
* * *
루아스교, 그 이름에 베르덴이 잠시 침묵했다.
의뢰주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거물인 것도 있지만…….
“빛의 교단과 아인종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흑마법사나 악마도 아니고.
베르덴의 머릿속에 자리한 큰 의문이었다.
“저도 자세한 내막은 몰라요. 제가 의뢰받은 건 어디까지나 카일리언스의 도시, 리버런그에 대한 조사에 불과하거든요. 모험가 길드를 통해 거래된 아인종의 사체가 정확히 처분되고 있는지 말이죠. 근데 난항을 겪고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짜증이 실렸다.
“어제 봤을 거예요. 전선에 나가서 토벌하느라 고생했다고, 길드장이 모험가들을 대접한다고 사사건건 붙어 다니는 거. 실상은 그런 게 아니라 저에 대한 감시였어요. 게다가 토벌 전선에서는 몇몇 고위 모험가들이 그런 시선을 보냈고요.”
“모험가 길드가 의심스럽다…… 그렇다는 건 도시의 상부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괜히 루아스교가 의뢰를 한 게 아니라는 뜻.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움직이기가 몹시 불편하죠. 이렇게 잠시 시간을 내서 당신과 얘기를 할 시간은 있지만, 도시의 숨겨진 부분을 조사하기에는 역부족이에요. 카일리언스 각 도시에는 시장을 지키는 수호자라는 직책도 있고, 모험가 길드에는 백금 등급 이상의 모험가도 있으니까요.”
그들의 이목을 속이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차라리 전부와 맞붙는 게 승산이 더 높을 정도로.
“……리버런그의 교회도 연관되어 있는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레나 주교나 다른 성직자들이 그럴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요.”
루아스교의 교인이라고 해도 인간.
악행에 가담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제게 직접 의뢰를 하신 루아스교의 일원은 현재 아인종 사태를 끝내기 위해 토벌 전선에 가 있어요. 얼마 전에 저와 접선해서, 모험가의 발길이 닿지 않은 루트를 전달했거든요.”
……그건 기밀 유출이 아닌가?
베르덴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기에 상관하지 않았다.
“워낙 대단하신 분들이니 곧 사태가 종식될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다만 제 쪽이 문제긴 하지만요.”
“그나저나 루아스교의 의뢰를 저한테 말해도 되는 겁니까?”
“어제 오늘 깊게 생각은 해 봤는데, 굳이 숨길 필요는 없을 거라고 판단했어요.”
레이라가 베르덴을 빤히 응시했다.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루아스교와 에스퍼렌사 후작가와 힘을 합쳐 언데드 사태에 대응했던 애셔, 당신이니까요. 심지어 그 일로 다크 워튼의 마탑주와 7인의 대주교 중 하나와 만나기까지 했으니…… 뭐, 말 다 했죠.”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같은 방주의 일원이기도 하고요.”
방주는 누구나 속할 수 없다.
그렇기에 최소한의 믿음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레이라가 오른손을 뻗었다.
“애셔, 당신이 저를 도와 리버런그에 대한 조사를 도와준다면, 그 대가로 벨디른 공화국에 있는 대륙 간 공간 이동진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 드릴게요. 물론 긴급 소집령이 완전히 끝나고 나서. 이거라면 서로 괜찮은 거래가 아닐까요?”
솔직히 말해, 나쁘지는 않다.
애초에 다른 수단은 마땅히 없었으니까.
‘어째서 루아스교가 아인종을 신경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이라를 돕는 건 합리적이라고 여겨진다.
확실하게 공간 이동진을 사용할 수 있기도 하고, 단독으로 미스릴 등급으로 승급한 고위 모험가와 보다 깊은 친분이 생기는 셈이니.
“좋습니다.”
베르덴이 레이라의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과 손등을 감싼 금속의 차가움과 손바닥 안쪽에 자리한 거친 장갑 가죽의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대신 조사 방식에 대해서는 ‘저희’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물론이에요. 방식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으니까요. 대신 시기는 방주 회의가 끝난 이후로 하는 게 어떨까요?”
“알겠습니다.”
베르덴이 수긍했다.
당장 움직였다가는 도중에 멈추게 될지도 몰랐으니.
굳이 시간에 제약을 걸 이유가 없었다.
악수를 끝낸 후,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럼 이제 하나 남았군요. 분명 방주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다고…… 아, 혹시 방주 회의에 대한 건가요? 하긴, 당신은 이번이 처음일 테니까요.”
베르덴의 의중을 파악한 레이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언뜻 거창해 보이기는 하지만 크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방주 회의라는 건 어디까지나 ‘선장’들을 위한 자리거든요.”
선장?
“방주 후보가 숱한 시련을 극복한 끝에 도달하는 위치예요. 저도 직접 본 건 한둘에 불과하지만, 후보에게 직접 시련을 제시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한, 실질적인 방주의 간부죠.”
감춰져 있는 방주의 전력이라.
베르덴은 내심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얼마나 강한지.
“그럼 방주 후보들은 뭘 하는 겁니까?”
“저희 후보들에게는 일종의 교류전이 펼쳐져요. 방주가 후보를 키우는 이유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죠?”
물론 알고 있다.
리스너가 말했었으니까.
───애셔 님,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인류라는 나약한 ‘종’을 위한 집단이지, 모든 인간의 수호자가 아닙니다. 저희가 하는 일은 후보를 찾아 시련을 마주하게 함으로써 보다 뛰어난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것. 결코 방패막이 되어 인간을 평화 속에서 도태시키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시련을 통해 강해진다.
그러한 이념을 갖고 있는 방주는, 인류를 이끌 구원자의 육성이 목적이다.
“그렇기에 후보들은 언제나 증명이 필요해요. 그저 시련을 얼마나 극복했는지 수를 헤아리는 게 아니라, 그로부터 무엇을 얻었는지가 중점이죠.”
물론.
“교류전에서 실망스러운 결과를 보인다고 해도 이렇다 할 제재 같은 건 없어요. 이후, 시련을 통해 성장하여 이후에도 증명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도태되고 말겠죠, 시련 도중에 죽음으로써.”
방주는 성장할 기회를 부여한다.
그리고 후보는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더없이 간단하면서도 살벌한 방식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베르덴이 재차 물었다.
“방주 회의는 며칠 동안 이어집니까.”
“길지는 않아요. 긴급 소집령 중에, 제가 자리를 비워도 문제없을 만큼요. 그리고 회의장으로 이동하는 방식은…….”
레이라가 베르덴을 흘긋 바라봤다.
“그건 말 안 할래요.”
“……?”
“미리 말하면 재미없으니까요”
그녀가 작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공국에서 대화를 나눴을 때도 생각한 거지만, 이 여자 은근히 장난기가 있다.
“어쨌든 머지않아 방주에서 마중을 나올 거예요.”
레이라가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이 창가 너머의 하늘을 가리켰다.
“이제 슬슬 움직이려 하겠죠.”
* * *
새해가 밝아 온다.
어두운 밤하늘을 헤친 태양빛이 고고한 하늘 가득히 드리웠다.
따스한 햇살이 가득하면서도 차가운 기류가 선선히 흐르는 풍경. 사방에 구름이 만연한 세상을 한 사내가 굽어보았다.
“어느덧 이 시간인가…….”
사내는 최근을 돌이켜 보았다.
방주는 언제나처럼 철혈의 규칙에 따라 세계의 정세를 살펴왔다.
여러 시련이 발생했고 그에 도전한 여러 후보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죽거나 좌절한 이들이 있으나, 기어코 극복하여 성장한 이들이 있다.
또한 그를 거듭하여 선장이 된 자들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각자가 바라는 목적을 이루며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약한 인류를 강하게 이끌 인재들.
방주는 오직 인류를 위해서 조직되었다.
다만 사내를 강하게 자극하는 건 따로 있었다.
‘애셔.’
레이라와 함께 소울 트리라는 시련을 압도한 마법사.
공국에 숨어 있는 글러트니의 박사와 다섯 번째 송곳니를 처단한 인재.
공국에서 이룬 과업은 그야말로 파격적.
그렇기에 사내와 방주의 선장들 그리고 장로와 회의를 거친 끝에, 규칙을 비틀어 애셔에게 새로운 제안을 건넸다.
일정 시간 내에 고대의 시련을 극복한다면, 방주의 의무 대부분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시련과 보상을 부여하겠노라고.
‘우리는 실패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게 당연했으니까.
마도왕의 무덤을 찾을 수 없다고 여겼다.
고대의 시련을 찾는 데,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설령 찾더라도 도전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이미 여러 후보도 실패하여 죽었다고 위험성을 경고했기에.
더군다나 그는 너무도 젊었다.
당시의 애셔는 특출나다고 해도 4위계 마법사.
고작 그 정도로 마도왕과 관련된 시련에 도전할 만큼 무모하고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자기 판단을 할 거라 믿었다.
방주의 목적은 애셔의 가능성을 관측하는 것뿐이었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어떤 성장을 이룩하는지…… 현명한 판단 아래 시련을 포기하고, 그러한 좌절을 어떻게 이겨 나가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예측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한 끝에 5위계에 도달했다.
그것만 해도 놀라울 정도인데, 마도를 이루지 않은 상태에서 에스티리아 왕국에 있는 고대의 시련 ‘마도왕의 무덤’에 도전하기까지.
그럼에도 보란 듯이 극복하여 살아남아, 현재 카일리언스에 있다.
여태까지 고대의 시련에 도전한 자는 적지 않다.
모두가 스스로를 강자라고 생각하는, 다수의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극복해 내는 데 성공한 훌륭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개중에서 살아남은 자는 거의 없다.
전도유망한 후보들이 목숨을 잃었고, 심지어는 그에 도전한 선장 또한 사선(死線)을 넘지 못한 채 쓰러졌다.
그러한 시련을 극복한 건 실로 수십 년 만의 일이었다.
‘무엇보다 마도왕과 관련된 시련을 극복한 건 애셔가 처음.’
유일한 존재.
그래서 더욱 기대된다.
방주 회의…… 그 교류전에서 무엇을 보여 줄 것인지. 베일에 감춰진 마도왕의 무덤에서 무엇을 보고 또 얻었을지.
사내가 주먹을 쥐었다.
호흡을 길게 내쉰 그가 장로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시간이 되었다.”
사내, 방주의 주인이 명령했다.
“방주 회의를 소집하라.”
* * *
새로운 해가 찾아온 카일리언스의 거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시내에 나와 수북이 쌓인 눈과 추위 그리고 햇빛을 맞이했다.
그 한편에서는 루아스교에서 나온 레나 주교와 성직자들이 신성력을 선보이며 종교를 찬미하고 있었다.
“루아스 님, 만세! 새해, 만세! 모두들, 빛의 가호가 함께하길 바라며 같이 기도해요!”
“루아스시여……!”
여러모로 시끌벅적했다.
그러는 동안 아드리안은 여관에 머물렀다.
“후우.”
한쪽 팔로 체중을 지탱하는 묘기.
근육과 신경에 정신을 집중하며 균형을 유지해, 신체 감각을 되살리고 있었다.
한 치의 흔들림이 없는 부동의 자세.
이윽고 검지손가락만으로 물구나무서기를 유지했다. 기를 일절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신체 능력이었다.
잠시 후, 베르덴이 방에 들어섰다.
“많이 회복되었나 보군.”
“오셨습니까, 주군.”
가볍게 몸을 푼 아드리안이 제자리에 섰다.
“레나 주교…… 가벼운 행동과 말투와는 다르게 신성력과 기적만큼은 진짜더군요. 지금 속도라면, 며칠 뒤에 완벽히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부 주군 덕분입니다.”
역시 상위 주교라는 건가.
설마 그러한 부상을 고작 며칠 만에 정상으로 되돌릴 줄이야.
‘하기야 대주교는 결손된 신체마저 수복할 수 있으니 이상할 건 없나.’
심지어 헌금통을 꽉 채워 주기도 했고.
그 정도는 해 줘야, 몇억 엘크나 되는 돈을 낸 보람이 있겠지.
‘그럼 아드리안의 회복 문제는 끝났으니…….’
빈 의자에 걸터앉은 베르덴이 말했다.
“아드리안. 며칠 뒤, 내가 자리를 비워야 할 일이 있다. 그동안 네가 해결해 줬으면 하는 게 하나 있는데.”
맡길 임무가 있다.
아드리안이 즉각 대답했다.
“하명하십시오.”
“리버런그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방주에 대한 건 제외하고, 레이라와 나눴던 대화에 대해 설명했다.
루아스교, 모험가 길드, 도시의 상부, 아인종까지.
글자 하나 놓치지 않고 경청하고 있던 아드리안이 경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어떤 식으로 진행하면 되겠습니까.”
“네 재량에 맡기겠다.”
아드리안은 전 중앙 대륙 4강.
활동 경험만 따지면 베르덴을 아득히 상회한다. 일일이 지시를 내릴 필요는 일절 없었다.
“맡겨 주십시오.”
아드리안이 자신했다.
그는 베르덴의 행적을 묻지 않았다.
무슨 일로 도시를 떠나는지, 정확히 언제 돌아오는지에 대해서. 왜냐하면 애초부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이를 세간에선 신뢰라고 부른다.
* * *
아드리안에게 대략적으로 사정에 대해 언질도 해 두었겠다, 베르덴은 리버런그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방주에서 어떤 식으로 접근할까 생각하면서.
‘갑자기 공간 이동을 이용해 비행정째로 나타나지는 않을 테고.’
무엇보다 방주의 희외장으로 어떻게 이동할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이 자연스레 일기 시작했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여러 가정에 대해 상상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정장을 입은 흑발의 사내가, 베르덴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작게 한숨을 내쉰 베르덴이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지?”
“아, 이런. 벌써 들켜 버렸군요. 자연스럽게 다가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예전보다 감각이 예리해지신 것 같습니다.”
사내가 작게 웃으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하하,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애셔 님.”
방주의 리스너.
공국에서의 인연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