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밀회 (1)
오른팔은 조각조각 부러졌다.
다행히 응급처치를 잘하기도 했고 자연 치유력이 빠른 덕분에 어긋나게 붙은 부위는 없었다. 다만 다른 부위가 문제였다.
왼팔의 신경은 큰 타격을 받았는지 부어 있다.
양다리의 관절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떤 과부하를 준 건지 상당히 무리가 가 있는 상태였으며, 전신의 근육에는 파열된 흔적이 역력했다.
레나 주교가 기겁했다.
“이거 보통 사람이었으면 기절은커녕 지금쯤 사경을 헤매고 있을걸요? 그런데 이렇게 멀쩡히 움직이다니…… 통증이 엄청날 텐데요?”
통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 충분히 견디고도 남았다.
수년간 실험체로 혹사당한 게 원인이었다.
기억 속에 강하게 새겨져 있는 당시의 격통과 비교하자면, 솔직히 말해 지금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런 걸로는 동요는커녕 끄덕도 하지 않는다.
베르덴과 같은 경우였다.
물론 이 사실을 레나 주교가 알 리는 없었다.
“대체 뭐 하다가 이런 거예요?”
베르덴과 아드리안이 서로를 바라봤다.
“대련을 좀…….”
“네? 대련이요?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아니, 것보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정신이상자가 분명해요. 멀쩡한 사람을 아주 누더기를 만들어 놨으니. 저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미친놈하고는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라잖아요?”
“…….”
베르덴은 입맛이 썼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드리안을 제압하려면 이런 식으로 거칠게 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으니까.
애초에 사지를 죄다 부술 생각이었던 터라, 이 정도면 그나마 최선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군께서는───”
“그래서 회복은 얼마나 걸립니까?”
아드리안이 뭐라 반박하려던 찰나, 베르덴이 선수를 쳤다.
“제 소견으로는, 틈틈이 치료를 받으면서 최소 한 달은 정양해야 해요. 당연히 주교인 제가 관리한다는 가정하에서요. 외상도 외상이지만, 전반적으로 심신의 안정이 필요해요.”
최소 한 달이라.
예상보다 긴 시간이긴 했으나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괜히 후유증을 남길 이유는 조금도…….
“하지만!”
레나 주교가 싱긋 웃었다.
“어디까지나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그렇죠.”
“그럼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없었으면 제가 괜히 말하지 않았겠죠. 제가 장난기는 있어도 다친 사람으로는 장난 같은 거 절대 안 치거든요.”
그녀가 양쪽 검지를 일자로 폈다.
“보호자분께 물을게요. 통상적인 치료 방법과 아주 고급스러운 치료. 둘 중 뭘 원하세요?”
아주 고급스러운 치료?
“어떤 차이가 있는 겁니까.”
“전자는 치유의 기적으로 제가 보살펴 주는 거구요, 후자는 의식을 통해 엄청난 기적을 발휘하는 거예요.”
레나 주교가 옷을 들췄다.
거기에는 끝이 둥그런, 은색의 정십자가가 번뜩였다.
아드리안이 반응했다.
“그 표식은…… 상위 주교?”
“정확해요. 그뿐만 아니라 저는 상위 주교 과정을 수료한 동기생들 중에서도 신성력이 제일 많은 걸로 유명했어요. 괜히 이 나이에 도시 국가에 파견돼서 부임하고 있는 게 아니랍니다?”
분홍빛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제가 쓸 수 있는 기적 중 가장 높은 걸 사용하면, 당신의 몸에 있는 외상과 내상은 며칠도 안 되어서 호전은 물론이고 완치까지 가능해요. 대신 여러 제약이 있기는 하죠.”
병을 치료할 수는 없다.
결손된 신체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심장이나 뇌와 같은 중요 장기는 치료할 수 없다. 그 외의 기타 등등…….
“다행히 당신의 경우에는 해당되는 제약이 전혀 없어요. 음, 운이 좋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제약 말고도 무시할 수 없는, 가장 치명적인 대가가 따르죠.”
직전과 다른 진지한 음성이었다.
대체 어떤 대가가 따른다는 걸까. 귀를 기울이고 있자, 레나 주교가 검지와 엄지를 둥글게 말았다.
동그라미가 베르덴을 가리켰다.
“이거, 무지하게 비싸요.”
* * *
주교의 답은 속물적이었다.
“의식까지 해서 상위 기적을 사용하는 건, 진짜 진짜 엄청 힘이 들거든요. 거기다 제약도 많아서 태어나서 몇 번 쓴 적이 없기도 해서 준비할 것도 있고요. 사람이 노력을 했으면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아야 하는 법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헌금통 좀 채워 주세요.”
뒤에 서 있던 성직자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레나 주교님!! 그 가벼운 태도는 그래도 넘어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식으로 기적을 매매하는 듯한 발언은 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기적을 대가로 헌금을 받는 건 사실이잖아요? 우회적으로 돌려 말하느냐, 안 하느냐만 다른 거지.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교리에 적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막말로 대주교께서 오실 것도 아니잖아요. 그럼 뭔 상관이람?”
직설적인 화법에 성직자는 정신을 가누지 못했다.
‘……이런 교인은 처음이군.’
베르덴이 살면서 구축해 온, 성직자에 대한 관념이 깨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빙빙 돌리면서 은근히 말의 의미를 숨기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래서 얼마입니까?”
“이 정도요!”
레나 주교가 손가락을 펴 보였다.
앞자리를 확인하고 뒷자리를 가늠한 베르덴이 아공간에서 현금 다발을 꺼냈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헌금통이 울렸다.
“와, 허공에서 돈이 나오네요? 공간가방이나 마법은 아닌 것 같고…… 아티팩트인가요?”
“답할 필요가 있는 겁니까?”
“아니요, 그냥 엄청 부자인 것 같아서요! 덕분에 제가 풍족하게…… 흠흠, 아니, 루아스 님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의식에 들어갈까요? 지금하면 밤중에 끝나기는 할 텐데.”
“준비할 게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의 준비도 준비기는 하잖아요?”
미친 건가.
베르덴은 시선을 돌렸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지?”
“허락만 해 주신다면 지금 당장 하고 싶습니다.”
헌금에 너무도 많은 돈이 들었다.
그렇기에 아드리안은 한시라도 빨리 정상 컨디션을 되찾고 싶었다. 밍기적거릴수록 방해만 될 뿐이었으니까.
“알겠다. 그럼 후에 여관에서 보도록 하지.”
“나중에 뵙겠습니다, 주군.”
이내 베르덴이 교회를 나섰다.
흥미롭다는 듯 레나 주교가 눈을 빛냈다.
“흐흥, 주군이라. 엄청 괜찮은 사람을 모시고 있으시네요. 역시 저분 귀족이셨나요? 아니면 차림새를 보니 마탑 출신 마법사?”
“감히 추측하지 마라.”
아드리안이 차갑게 응대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여태껏 베르덴과 스승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존대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상대가 귀족이든, 주교든, 왕이든 간에.
“어머, 까칠해라……. 아, 그보다 말하다가 깜빡한 부작용이 하나 있어요.”
레나 주교가 잘게 떨었다.
“이 기적, 제가 직접 당해 본 적은 없는데요. 경험자 말로는 엄청 아프대요. 그래도 당신은 아픔을 아주 잘 참는 것 같으니, 괜찮겠죠?”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아드리안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다행히 휘두르는 일은 없었다.
* * *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베르덴은 자신의 방에서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싸늘한 추위에 얼음 조각이 둥둥 떠나니는, 샛노란 노을이 내려앉은 헤인강.
리버런그에서 가장 비싸기로 수위를 다투는 여관이라서 그런지 바깥으로 보이는 경치가 좋은 편이었다.
‘과연 언제쯤 올까.’
내일이라는 날짜는 정했지만 시간이나 장소를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는 건 찾아오겠다는 의미였을 터. 베르덴이 한동안 풍경을 즐기고 있자 근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입구…… 가 아니군.’
조용히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다락방의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천장의 일부가 열리며 레이라가 베르덴이 있는 방에 착지했다. 가볍게 바람을 일으켜 피어오른 먼지를 바깥으로 날려 버렸다.
“아, 고마워요.”
“왜 거기서 나오는 겁니까?”
“그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요. 굳이 변명하자면 어제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한 이유와 같아요.”
툭툭. 레이라가 갑옷을 털었다.
“어쨌든 반가워요, 애셔. 그런데 어딘가 피곤해 보이시네요?”
“……교회에 가니 피곤한 주교가 있더군요.”
“아, 레나 주교 말이군요.”
“알고 계십니까?”
레이라가 투구를 톡톡 두들겼다.
“그럼요. 전에 얘기했다시피 이 안에 있는 저주를 완화하려면 주기적으로 교회에서 축복을 받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몇 번 만났는데…… 확실히 다른 주교님에 비해서는 남다른, 아니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기는 하죠. 리버런그에서도 유명해요.”
아무래도 레나 주교는 도시의 유명인사인 모양이다.
“그 저주는 아직 해주하지 못한 겁니까?”
“안타깝게도 그렇네요. 제가 찾고 있는 악마도 그림자도 보지 못했고요. 혹시 예전에 했던 거래, 기억하고 있나요?”
물론 기억하고 있다.
───가능성은 적겠지만…… 혹시 악마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면 모험가 길드를 통해 보내 주세요. 세간에 퍼져 있는 게 아니라면 사소한 거라도 좋아요. 그렇게 해 주신다면 돈이든 뭐든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죠.
하지만 거래가 이뤄지는 일은 없었다.
단 한 번도 악마에 대한 정보를 얻은 적이 없었기에.
“에스티리아 왕국에는 악마가 전혀 없더군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 우연히 그리고 쉽게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인사는 이쯤 해 두죠.”
레이라의 기세가 일변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마법사 애셔. 이런저런 소문은 들었는데…… 확실히 공국에서 봤을 때와는 달라졌네요. 전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장비였다.
로브하고 액세서리 전부…… 소울 트리에게 마법을 퍼붓던 당시와 그야말로 격이 달라졌다.
특히 백금의 로브와 기묘한 반지 그리고 목걸이에서 미증유의 힘이 느껴졌다.
설마 전부 아티팩트인 걸까.
다만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분위기가 차원이 달라.’
처음에는 인지하지 못했다.
하나 이제 제대로 마주하니 알 수 있었다.
안력과 기감을 높였으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전무했다.
파도 하나 없는 고요한 망망대해를 맞닥뜨린 듯한 기분…… 그래, 이건 방주의 장로를 대했을 때와 비슷했다.
그건 경지의 차이였다.
서로 깨우친 힘이 다름에도 압도적인 격차.
‘분명 4위계 마법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기억과 비교해서 현격하게 달라진 모든 것.
베르덴을 가늠하려 하던 레이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된 거죠?”
고대의 시련에 대해서는 모르는 건가.
베르덴은 마도왕의 무덤, 아니 마도왕의 실험실을 떠올렸다.
지금의 경지를 이룩할 수 있었던 건, 관리자와의 마법전이 아주 큰 비중을 차지했다.
“뭐,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말하면 길다.
숨길 것도 많았고.
“……그런가요. 궁금하긴 하지만 묻지는 않을게요.”
레이라가 호흡을 내쉬었다.
긴장되어 있던 몸을 억지로 완화시켰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저를 만나자고 한 거죠? 그리고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로아프라를 손에 넣었다고 들었는데 카일리언스에는 어쩐 일로……?”
여러 가지가 함축된 의문이었다.
베르덴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레이라, 당신에게 물어볼 게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부탁할 것도.”
“모험가로서, 아니면 방주의 일원으로서. 둘 중 어떤 것에 해당되는 거죠?”
“전자는 방주로서, 후자는 모험가로서입니다.”
“모험가로서 부탁할 거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단 들어 보기나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