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카일리언스 (3)
잿빛의 머리칼과 투명하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는 특유의 벽안.
다양하고도 강력한 원소 마법을 구사하며, 방주라는 같은 조직에 속해 있는 마법사.
여러모로 모습이 달라지긴 했으나, 그 외모는 잊기 어려웠다.
“……애셔?”
순간 떠오른 이름에 입술이 달싹였다.
워낙 작은 소리였던 터라, 그 이름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 그녀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도 알지 못했고.
자연스레 고개를 돌린 레이라가 생각에 잠겼다.
그에 대한 소식은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리비안트 공국에서 방주와 함께 글러트니의 송곳니를 처단했다든가,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발생한 언데드 사태를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든가…….
비교적 최근에는 로아프라라고 하는 거대한 암흑가를 제패했다는 것까지.
방주와 모험가 길드를 통해 얻은 정보였다.
‘그런데 왜 저 사람이 리버런그에 있는 거지?’
따로 방주에서 들은 이야기는 없는데.
어쩌면 단순히 우연히 마주친 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까.
깊게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과하게 멋을 추구한 마차가 다가오더니 레이라의 앞에 멈춰 섰다.
벌컥.
문이 열리며 수려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라 언니 아니었으면 이렇게 빨리는 못 끝냈을걸요? 애초에 그러기는커녕 도중 모험가들이 크게 다쳤을 거예요”
“음, 확실히. 검술뿐만이 아니라 파티를 이끄는 데도 일가견이 있을 줄은 몰랐지.”
“괜히 미스릴 등급이 아니라니까.”
모험가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하, 겸손하시군요. 오늘은 리버런그의 안전을 위해 힘써 주신 분들을 위해 성대하게 자리를 준비했으니까요. 아주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오늘은 길드장과의 식사 약속이 있다.
미리 예정되어 있던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부자연스럽게 자리를 이탈하기에는 ‘눈’이 너무도 많았다.
카일리언스에 온 건 비단 아인종 토벌만이 이유가 아니었기에.
레이라의 의식이 베르덴에게 향했다.
이미 서로를 인식한 상황.
그때, 베르덴이 살짝 고개를 틀었다.
“내일 일정이 어떻게 되지?”
“교회에 가서 기도드리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요즘 들어 날씨가 차니, 여관에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즉흥적으로 아드리안이 맞장구를 쳤다.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한 대화였으나 레이라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말할 때, 푸른 눈동자가 스치듯 그녀를 지나쳤기에.
내일이라.
마침 저녁에 시간이 빈다.
“…….”
레이라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전부였다.
직후 두 사람이 레이라 일행의 옆을 지나치고는 근처에 있던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그렇게 서로가 엇갈리며 내일을 기약했다.
“자, 그럼 가시죠.”
길드장의 안내에 따라 모험가들이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두 블럭 정도 떨어진, 건물째로 빌린 식당에서 호화스러운 잔치를 벌일 생각에 레이라를 제외한 모험가들이 들떠 있었다.
파멜라가 살며시 다가왔다.
갈색의 단발머리가 흔들거렸다.
“저기, 레이라 언니. 혹시 방금 지나간 남자, 보셨어요?”
누굴 말하는 걸까.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하얀 로브를 두른 사람 말인가요?”
“네! 와, 저는 저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봤어요!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고 엄청 눈에 띄던데, 분명 귀족이겠죠?”
마법사 아니랄까 봐 호기심이 가득하다.
바로 곁에서 듣고 있던 파멜라의 동료, 지델이 머리칼을 위로 쓸며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너무 호들갑 떠는 거 아니야? 얼핏 보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던데. 나도 제대로 꾸미면 저 정도는 될걸?”
“에라이.”
덥수룩한 수염이 특징인 모험가, 기드너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이봐라. 아무렇지 않게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데, 도대체 내가 널 어떻게 믿냐? 다시 말하지만, 그 마차는 네가 잘못 본 거야.”
“거, 진짜라니까 그러네. 뭐, 아무튼 내가 못난 얼굴은 아니잖아. 진심으로 생긴 거는 내가 더 남자답지 않냐?”
“……마법 쓰기 전에 조용히 해 줄래?”
“파멜라, 네가 아직 뭘 몰라서 그래. 요즘 사람들은 저런 곱상한 얼굴보다 사납고 거친 인상을 선호한다니까? 레이라 씨, 솔직히 말해서 아까 그 사람보다 제가 더 낫지 않아요?”
레이라가 뒤를 돌아봤다.
물끄러미 지델의 얼굴을 보던 그녀가 짧게 답했다.
“아니요.”
* * *
레스토랑의 꼭대기 층 창가.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는 어두운 저녁의 전경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베르덴과 아드리안은 미들로스 자치령에서 카일리언스로 오기까지, 이렇다 할 식사를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끼니는 건조 식품으로, 도중 방문한 마을에서는 빵과 수프로 요기를 했다.
다른 것도 주문할까 했지만, 뒤에 있던 손님이 고기를 먹고 토악질을 하는 걸 보고 바로 그만두었다.
안 그래도 베르덴은 입맛이 까다로웠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꽤 마음에 드는군’.
몇 시간 동안 끓인 양파 수프와 갓 구운 빵.
싱싱한 샐러드와 노릇노릇하게 구운 생선, 핏물이 흐르는 스테이크, 시원한 음료.
싼값은 아니었으나, 그 가격에 비해서도 질이 좋은 편이었다.
아드리안도 비슷한 감상이었다.
“……주군, 하나만 더 시켜도 되겠습니까?”
얼마 전까지 실험체였던 그였다.
이렇게나 호화로운 요리를 맛보는 건 문자 그대로 수년 만이었다. 감탄과 식욕을 멈추기가 어려웠다.
“먹고 싶은 만큼 먹어라. 너에게 준 돈이니까.”
“감사합니다.”
구명(救命), 치료, 식사, 여관 등.
여러 은혜를 입었고 또 입고 있음에도, 아드리안은 오직 감사만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달라질 것이다.
육체만 멀쩡히 회복된다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아무리 못해도 지금처럼 돈을 축내며 살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아드리안은 어서 내일이 오기를 고대했다.
“그보다 미스릴 등급 모험가와도 연줄이 있으신지는 몰랐습니다.”
“음…….”
연줄이라…… 고 하기엔 애매하긴 하다.
방주에 소속된 것과 이전에 딱 한 번 같이 토벌에 나선 것 외에는, 지금껏 딱히 교류랄 게 없었으니까.
방주의 후보.
백금 등급 모험가.
선혈처럼 새빨갛고 선명한 기를 다루는 검사.
자신의 부모를 죽인 악마를 찾고, 투구로 감춰진 얼굴에 서린 악마의 저주를 해주하고자 하는 여인.
그것이 베르덴이 아는 ‘레이라’라는 인물의 전부였다.
물론 외견상으로는 작년과 차이점이 있다.
장비의 형태는 비슷하나 그 수준이 한층 더 높아졌다. 백금이 아닌 미스릴로 만들어진 플레이트를 목에 걸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띄었다.
‘그나저나 왜 카일리언스에 있는 걸까.’
단순히 모험가로서 아인종을 토벌하러 온 건가.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걸까. 어쩌면 소울 트리 때처럼 모종의 시련을 마주하려 하는 걸지도 모른다.
뭐, 어쨌든.
‘마침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었는데 잘됐군.’
방주 회의.
분명 레이라도 참석할 것이고, 전부터 참석해 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몇 가지 묻고자 한다.
방주 회의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시작되는지, 언제 끝나는지 말이다.
어차피 겪게 될 일이지만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면 카일리언스의 일정을 보다 알맞게 조정할 수 있을 테니.
베르덴이 레이라와 약속을 잡은 이유였다.
그때,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정도 등급의 모험가면, 벨디른 공화국에 있는 공간 이동진을 재가동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용도 비용이고, 모험가 길드와 도시 양쪽에서 허가를 받는 등 여러모로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돼서 반드시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뭐?
“그야 모험가 길드, 기밀 조항에 미스릴 등급 이상의 모험가는 허가에 따라 대륙 간 공간 이동진을 임의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가…….”
아드리안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저, 이걸 위해서 약속을 잡으신 거 아니었습니까?”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아무리 베르덴이라고 해도 모험가 길드의 기밀 조항에 대해서 알 턱이 없었다.
모험가가 될 생각도 없었을뿐더러 미스릴 등급 모험가와 친분이 있었던 적도 없었으니까.
……레이라를 만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 * *
다음 날, 정오가 지난 시각.
베르덴과 아드리안은 예정대로 리버런그의 교회로 향했다.
어제 만났던 성직자가 두 사람을 환영했다.
“반갑습니다. 늦지 않게 오셨군요.”
“주교께서는 안에 계십니까?”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두 분을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를 따라 교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리창 너머로 따스한 햇빛이 내리쬐는 복도를 지나자, 주교의 개인 기도실에 도착했다.
똑. 똑. 똑.
성직자가 경건하게 노크를 하고는 문을 열었다.
벽면의 중심에 걸린 거대한 정십자가, 그 아래에 여인이 꿇어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작게 울리던 성가가 나지막이 가라앉았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뒤를 돌았다.
‘내가 아는 주교와는 사뭇 다르군.’
어두운 분홍빛의 중단발 머리칼, 화사한 피부.
주교라는 직급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만큼 젊은 여인이었다.
겉모습만큼은 베르덴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여인, 레나 주교가 살며시 턱을 들었다.
교회에 방문한 손님들을 본 그녀가 방긋 웃으며 양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리버런그의 교회를 주관하고 있는 레나 주교라고 해요! 다른 교회처럼 나이 든 사람일 줄 알았는데 저처럼 젊은 사람일 줄 몰랐죠? 아하하, 표정이 딱 그래요! 저를 처음 본 사람들은 다들 그렇더라고요.”
“……?”
한없이 가벼운 말투.
성직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만류했다.
“저, 주교님. 제발, 체통을 좀 제발……!”
“왜요. 솔직히 다른 주교분들처럼 무게 잡고 딱딱하게 말하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낫잖아요? 저하고도 어울리고? 안 그래요, 모두들?”
레나 주교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성직자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껏 접하지 못한 교인의 자유분방한 태도에 베르덴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드리안이 작게 말했다.
“아무래도 다른 교회를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헌금은 제가 회수하겠습니다.”
“어머, 교회에는 환불 규정 같은 거 없는데요? 그리고 그런 말 하면 여신 루아스께서 천벌을 내리실 거예요.”
레나 주교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래도 이해는 해요. 저처럼 젊은 사람이 주교가 되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래 봬도 실력은 어느 주교와 비교해도 못지않아요.”
그녀가 앞으로 걸어왔다.
로브의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아드리안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쪽이 기적이 필요하신 분 맞죠? 발소리도 그렇고 서 있는 것도 그렇고, 몸을 가누는 게 약간 불편해 보이던데.”
“……!”
날카로운 눈썰미다.
괜히 주교는 아니라는 건가.
“뭐, 척하면 척이죠. 그럼 치료에 들어가기 앞서서, 신체의 부상 정도를 확인해 보려 하는데. 괜찮으시겠죠? 헌금 내주신 보호자분?”
아드리안을 슬쩍 본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금방 끝나는 간단한 작업이지만요.”
레나 주교가 손을 뻗었다.
동시에 내면에서 신성력이 피어올랐다.
“기든 마력이든 가라앉히세요. 방해되니까요.”
화아아아악.
따스한 황금빛 물결이 아드리안을 감쌌다.
깊은 온기를 담고 있는 선명하고 광활한 빛이었다. 베르덴이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만난 주교들보다 더욱.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다.
점차 빛이 가라앉으며 레나 주교가 눈을 떴다.
“일단 확인은 했는데…… 저, 너무 궁금해서 그런데 혹시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아드리안을 향한 질문이었다.
“뭐지?”
“도대체 어떻게 걸어 다니세요?”
거의 반병신인데?
“일찍 출발한다고 했는데 벌써 와 계셨군요.”
리버런그의 모험가 길드장.
가볍게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한 그가 레이라와 모험가들의 면면을 살폈다.
“모두들 이번 토벌,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치신 분들은 없어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듣자 하니 레이라 님이 이번에도 큰 활약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에이, 그 정도 수준이 아니죠!”
백금 등급 모험가, 파멜라가 턱을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