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304화 (304/366)

304화 앞걸음

“이거 여간내기가 아니로군.”

매직 아이템 너머로 보이는 시야.

그 안에서 투명한 벽안과 시선을 마주친 건 결코 우연의 일치 따위가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존재를 발각당한 틸렌이 감탄을 내비쳤다.

“로아프라의 지배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범죄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괜히 왕이라는 칭호가 붙은 게 아니었나 보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뛰어난 통찰력이야.”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추켜세울 필요가 있나? 단순히 남들보다 예민한 마력 감각을 타고난 걸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 해도 놀라운 건 매한가지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하나 나는 그리 생각되지 않는군.”

틸렌이 슬며시 눈을 떴다.

목걸이의 빛이 가라앉자, 저택 내부가 아닌 도시의 전경이 보였다.

“우리 못지않아.”

“뭐?”

“직접 마력을 가늠해 본 건 아니지만 심상치 않은 존재감이야. 어리다고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네. 아무튼 간에 조사관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건 자명해 보이는군.”

“으음…….”

멜코니가 팔짱을 꼈다.

약간 심기가 불편했으나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는 안목만큼은 자신보다 틸렌이 더 우수했기에.

그 대신 이성적으로 상황을 바라봤다.

곧 결론이 내려졌다.

“이거 외통수로다.”

상대가 암흑가의 왕이라면 간단했을 터였다.

헙조하면 협조하는 대로 심문하면 될 것이고, 저항을 하려 한다면 마법으로 때려 잡으면 그만이었으니까.

명분은 마탑에게 있다.

설령 없다고 하더라도 상대의 생사여탈권을 임의로 결정할 만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귀족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에스티리아 왕국은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

아무리 마탑이라고 한들 그들의 입장과 권리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흠, 그나마 국력이 낮은 소국이라면 개의치 않겠건만…….”

“왕국이 동대륙에 끼치는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네. 그리고 왕국에는 있지 않은가, 특히나 경계해야 할 저력(底力)이.”

틸렌의 말에 멜코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궁정 마법사단장, 광염의 레오닐. 확실히 그자는 위험하지.”

레오닐의 힘은 멜코니와 틸렌 각각의 경지를 웃돈다.

6위계 상위 마도사를 감히 무시할 수 있는 건 오직 초월자뿐. 그리고 초월자는 마탑을 포함해 세계 전역 및 모든 종족을 통틀어도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 이 시점에서 레오닐과 적대하게 되는 건 가급적 피해야 되네. 자칫 상처가 더욱 벌어질수도 있으니.”

“그렇겠지. 역시 저자가 저렇게 당당한 태도를 보인 이유가 있었군. 에스티리아 왕가와 레오닐을 등에 업고 있었다니.”

물밑에서 보헤미른 마탑을 견제 중이었고, 그 결과가 지금이다.

그런 상황에 에스티리아 왕국과 마찰을 빚게 된다면 여러모로 낭패를 보게 될 터.

“……가급적 미들로스 자치령의 사태를 수습하는 데 집중해야겠군.”

“다른 건 어떻게 할 건가.”

“켄드라스 세력은 이대로 관계를 묻어 버리는 게 자연스럽겠지. 보헤미른 마탑이 생포했다고 해도, 우리를 특정할 수 있는 물증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니까.”

마탑 지부의 궤멸은 알다미아의 광대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심문을 통해 보헤미른 마탑이 지시했다는 걸 알 수는 있겠지만…… 딱히 사용할 기회가 없을 터였다.

결국 유의미한 증거는 없으니까. 켄드라스처럼 말이다.

사실 물증이 있다고 해도 역효과가 크다.

분명 자치령에서 일어난 사건을 여러 세력이 헤집게 될 테니. 이러한 일을 벌인 건 어디까지나 마탑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보헤미른 마탑과 함께 상처 입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치령을 뒤엎을 생각이었는데 고작 광대로 끝이라……. 마탑의 위신이 떨어지겠지만 감내할 수밖에 없겠어.”

“왕국의 귀족을 건드리는 건 위험부담이 크니.”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최대한 잡음 없이 마무리 짓는 게 그나마 최선이었다.

“그나저나 에스티리아 왕국이 상당한 전력을 손에 넣었군. 저런 인재는 마탑에 들어와야 하는 법인데. 아깝군, 아까워.”

멜코니가 입맛을 다셨다.

옆에 있던 틸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애셔 백작이라. 기억해 두도록 하지.”

* * *

“……협조 감사드리오.”

마탑에서 파견된 두 조사관은 알다미아의 광대를 데리고는 잠자코 물러났다.

아주 불만이 가득한 표정인데 수긍한 걸 보면, 모종의 마법 물품을 통해 실시간으로 상부의 지시를 받은 모양이었다.

그 상부라 추측되는 두 명의 마도사.

베르덴은 실질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그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걸로 마탑 건은 끝났군.’

물론 마탑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있다.

예를 들어 큰손, 제릭.

베르덴이 켄드라스 일당과 접촉하게 해 준 거래상이다.

에단의 말에 따르면, 웰스 타운에 이변이 일어남과 동시에 마을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나름의 상황 판단이었겠지.

만약 마탑이 추적한다면 얼마 안 가 붙잡힐 것이다.

그리고 심문할 것도 없이 베르덴의 인상착의에 대해 발설하게 될 것이고, 마탑은 그에 대해 깊은 의심을 품게 되겠지.

그런데 그게 전부였다.

실리스 왕녀에게 받은 작위.

베르덴이 에스티리아 왕국의 명예 귀족임을 입증한 순간부터, 그는 상대에게 있어 일개 개인으로 치부될 수 없었다.

왕국과 척을 지려 하지 않는 이상, 억지로 조사를 강행하는 건 불가능.

‘뭐, 애초에 제릭을 찾지도 않겠다만.’

제릭은 아주 작은 부품에 불과하다.

말 그래도 거래만 중개했을 뿐, 켄드라스의 정체는 물론이고 마탑이 관여되어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애써 붙잡아 입막음을 할 이유가 없다.

그와 비슷한 이유로 웰스 타운을 들쑤시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다.’

손을 떼고 모른 척하며, 자치령의 사태를 수습하는 것.

죽은 자치령주를 대신할 귀족을 영주로 세운 뒤, 이전보다도 영향력을 더 넓혀 장래에 얻을 이익에 집중할 것이다.

예정에 없던 손해를 보기는 했어도, 결과적으로 보헤미른 마탑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니.

생각대로라면 아마 그럴 것이다.

마탑의 관점으로 이해득실을 따지는 건, 베르덴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담판은 그렇게 끝이 났다.

“…….”

베르덴이 뒷골목 세력을 호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패드렐드는 물론이고 이전에 모인 적이 있었던 뒷골목의 우두머리들이 저택에 찾아왔다.

베르덴이 말했다.

“정보 수집은 오늘로 마무리 짓는다. 그동안 수고했다.”

“아, 아닙니다. 저희가 뭐 한 게 있다고…….”

“진심인가? 그럼 성과급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습니다. 진짜로요. 밥도 제대로 못 먹었습니다.”

바텐더, 시아몬이 굽신거렸다.

곳곳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한껏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서 베르덴이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패드렐드의 부하들이 각자의 앞에 돈다발과 현물을 테이블에 가지런히 올려 두었다.

“꺄악…… 이게 얼마야…….”

대충 봐도 상당한 금액이었다.

그중 패드렐드와 함께 제릭의 소재를 찾는 데 도움을 준 티프에게 많은 금액이 떨어졌다.

정보에 대한 값이었다.

“크, 크흠.”

“와…….”

부러움이 담긴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래도 질시는 아니었다.

별개로 베르덴이 공통적으로 포상금을 주기도 했기에.

그만큼 자치령에서 얻은 성과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라리안 마탑과 화산섬의 마탑은 내가 설득했으니, 자치령주 건으로 억지로 구속해 심문하려 들지는 못할 거다. 그러니 안심하도록.”

과정을 모르지만 모두가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마탑의 조사관이 조용히 광대들을 데리고 저택을 나섰다는 건 이미 들었기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도중, 발다스가 손을 들었다.

“저, 그런데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감사합니다. 이제 미들로스 자치령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자치령주가 사라졌고 누군가 마탑을 건드렸다.

이 전례 없는 사태에, 뒷골목의 세력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숨죽이다 못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마탑의 텃세가 심해지게 되겠지. 새로운 영주를 세우고, 이전보다 영향력을 강화하려 들 테니까.”

“그럼…….”

“그래도 점차 거리의 상황이 좋아진다는 건 분명하다. 도시의 발전은 곧 마탑의 이익으로 연결되니.”

그것이 마탑의 긍정적인 효과였다.

어쩌면 대화재가 발생한 빈민가를 이대로 밀어 버리고 새로운 지구를 설립할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노동자로서 고용되어 돈을 벌 수 있으리라.

“물론 그만큼 치안이 엄격해질 거다. 그러니 새롭게 바뀐 거리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겠지.”

도둑질이 특기인 티프가 움찔거렸다.

그를 제외하면 다른 사람의 표정은 비교적 밝은 편이었다. 마탑은 무서워도, 자신들의 터전에 활기가 돌아온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그럼 이만 가 봐야겠군.”

“……!”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모두가 기립하고는 서둘러 뒤따르며 배웅에 나섰다.

패드렐드가 대표로 인사를 나누었다.

“후우,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군요. 아주 몇 년은 늙은 것 같습니다.”

“그런 것치곤 얼굴이 좋아 보이는데.”

“하하, 그거야 애셔 님께서 돈을 많이 주셨으니까요.”

그는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건 다름 아닌 패드렐드였으니까. 눈칫밥 먹으며 암흑가의 왕을 보필한 보람이 차고도 넘쳤다.

“그간 밀수꾼의 협곡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셔 님.”

패드렐드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부디 다음 만남을 고대하겠습니다.”

베르덴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하늘로 솟구치듯 날아오르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미들로스 자치령을 떠났다.

“드디어 떠나셨군…….”

“어휴, 이제야 좀 마음이 편하네.”

“나는 들어가서 술이나 한잔해야겠어.”

“돈도 엄청 벌었겠다, 이참에 모여서 연회나 할까?”

“음, 그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뒷골목의 세력들이 한데 모여 떠들었다.

긴장이 가셔서 그런가,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화합이었다. 저게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뭐, 썩 나쁘지는 않았다.

패드렐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티프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이봐, 패드렐드.”

“네? 왜 그러시죠?”

“혹시 밀수꾼의 협곡 이용할 때, 단체로 이용하면 돈 좀 깎아 주나?”

밀매상 패드렐드.

그는 밀입국의 전문가이기도 했다.

“단체 손님은 언제나 환영이랍니다.”

* * *

겨울숲 한가운데에 인위적인 동굴이 놓여 있다.

그 위에 도착한 베르덴이 마법진을 해제하고는 고도를 낮춰 지면에 착지했다.

직후 동굴 안쪽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훤칠한 키와 지팡이 역할을 하고 있는 창.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아드리안은 푸른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주군.”

“기다리는 동안 잘 쉬었나.”

“예, 덕분에 편안히 보냈습니다.”

동굴 주변은 마법진이 철저하게 보호했다.

육포와 같은 건조 식품과 물은 나름 만족스러운 식사가 되었고, 아드리안은 조용히 명상에 잠길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육체보다도 정신이 문제였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환청과 충동 등.

정신 지배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여러 악영향이 남아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굴복하는 일은 없으리라.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기에.

“이전에 말했다시피 먼저 교회가 있는 가장 가까운 대도시, 아니 국가로 향할 거다. 최소 주교급 성직자가 아니라면 완치는 요원할 테니. 이동 수단은 이거다.”

베르덴이 손을 옆으로 뻗었다.

아공간에 저장되어 있던 거대한 마차 한 대가 나타났다.

네 개의 동일한 바퀴가 달린 것으로, 패드렐드를 통해 개조한 물건이었다.

“상당히 특이한 구조로군요.”

“무게중심을 일정하게 맞춘, 편의성을 극대화한 마차다. 직접 타 보니 어지간한 충격은 안으로 거의 전해지지도 않더군.”

“그렇습니까. 그런데 말은 어디에…….”

“말은 없다.”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조종은 내가 직접 할 거니까.”

마력이 마차 전체를 감싼다.

이내 <염동력>을 발동하자, 마차가 움직임과 동시에 문이 열리며 탑승을 종용했다.

“거리가 상당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다. 넘치는 게 마력이니까.”

전문적으로 운송업을 하는 이들을 고용할 수도 있다.

과거 리비안트 공국에서, 길드의 의뢰를 받고 모험가 이리스와 함께 언데드 토벌에 나섰을 때처럼.

하지만 그건 여러모로 불편함이 있다.

아드리안의 정체를 감추는 것도 그렇고, 언제 습격해 올지 모르는 아인종을 경계해야 하는 탓에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될 테니까.

그럴 바에 둘이서 움직이는 게 나았다.

“그리고 말 관리도 귀찮고.”

베르덴에게 마법이란 몸의 일부.

이내 그가 푹신한 마부 자리에 올라탔다.

곧장 채비를 갖춘 아드리안이 마차에 승차하고는, 운전석 바로 뒤쪽에 몸을 누였다.

“일단은 하늘을 이용해 움직일 생각이다. 로브에 내장된 기능이 체온을 유지시켜 주긴 하겠지만, 혹시라도 몸이 불편해 아래로 내려가고 싶다면 언제든 말하도록. 그럼 육로를 이용할 테니.”

거대 마차의 무게를 높이 띄워 옮기는 것.

동시에 바람을 조작해 호흡을 유지하고 외부 기류를 차단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없는 극히 섬세한 기술이다.

물론 베르덴은 가능하다.

오래 지속하면 부담이 있기는 해도 결국 피로감에 불과하다.

“알겠습니다, 주군.”

아드리안이 동의했다.

베르덴이 마력을 번뜩였다.

사선으로 나아가며 점차 고도를 높였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아래로 드넓은 산맥의 풍경이 가득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높군.’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천생이 검사였기에 이렇게 높이 올라온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더군다나 마차를 타고서.

조용히 침을 삼켰다.

창문에서 고개를 멀리한 아드리안이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땅이 그리웠다.

하나 출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내려가자고 할 수 있겠나.

‘그래, 이런 사소한 걸로 실망을 안겨 드릴 수는 없다.’

사람에겐 염치란 게 있는 법이다.

그러니 최대한 견디기로 결심했다. 버티다 보면 익숙해질지도 모르고.

아드리안은 복잡해진 생각을 정리하며 명상을 시도했다.

그런 그를 태운 마차는 서쪽에 위치한 푸른 상공을 시원하게 질주했다.

도시 연합 국가, ‘카일리언스’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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