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303화 (303/366)

303화 뒷걸음 (2)

화산섬의 마탑과 라리안 마탑은 미들로스 자치령과 아주 긴밀한 관계였다.

주위를 둘러싼 국가들의 분쟁과 날이 갈수록 위험해지는 아인종.

그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는 미들로스 자치령을 독립시켜 주는 대신, 영토에 대한 여러 지분과 협조를 약속하는 상호 간의 거래.

먼저 두 마탑은 지부를 세웠다.

고고한 첨탑 아래, 도시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연마다 적지 않은 금액을 받아 챙겼다.

마법 연구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고, 마탑의 자금책이 될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모험가 길드를 거치지 않고, 아인종의 사체를 별도의 비용이나 절차 없이 손에 넣기도 했다.

영향력을 넓히는 건 순조로웠다.

이따금씩 두 마탑 간에 불협화음이 있긴 했으나 잡음에 불과했다.

이권을 두고 피 튀기는 전쟁을 펼치지 않고, 멀쩡히 자치령에 자리를 잡고 깊숙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보헤미른 마탑이라는 위협적인 경쟁자가 불쑥 손을 뻗었지만…… 솔직히 말해 지금은 문제없었다.

여러 거대한 사건으로 그들이 서대륙에 정신이 팔린 사이 손을 썼다.

보헤미른 마탑에 적대하는 자들을 규합시켜, 암암리에 지원하며 불청객이 내린 뿌리를 자르고 뽑아냈다.

사실상 승리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망해 버렸다.

“보헤미른 마탑을 견제하라고 보냈던 에즈라와 몰리 그리고 지부장을 비롯한 수뇌부가 하루아침에 몰살될 줄이야. 자치령주는 실종되었지만…… 죽었으리라 생각하는 게 합리적일 테지.”

“그래. 그리고 자치령주는 젊었던 터라 아직 자식이 없다. 부모도 일찍 죽은 데다가 친척도 없지. 영주의 자리가 붕 떠 버렸다. 이제까지 거래를 지속해 온 가문의 씨가 마르다니, 몹시 유감이군.”

“한마디로 제대로 당한 거 아니겠나. 이게 우연일 리가 없을 테니.”

미들로스 자치령의 산맥의 정상.

그 위에 자리를 잡은 두 마도사가 도시를 내려다보며 대화를 나눴다. 사태의 심각성과 달리 평온한 목소리였다.

나름 타격이 있다는 건 인정하다.

하나 마탑 전체로 보면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었고, 위 두 사람은, 마탑의 관점을 헤아리는 것이 허락된 존재들이었다.

그러는 사이, 두 명의 조사관이 나타났다.

각각 화산섬의 마탑과 라리안 마탑에서 파견된 자들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시신을 가져왔습니다.”

조사관이 공간가방을 개방했다.

차갑게 얼린 토막 난 고기 조각을 바닥에 가지런히 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몸이 절단되어 죽은 마법사들의 시체였다.

“흐음, 아주 예리하고 재빠른 검기에 당했군.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은데.”

“현장에 5위계 마법 <붉은 이빨>과 <어스 클로>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만 그 외에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는군. 어떻게 생각하나, 틸렌?”

“뻔하지 않나, 멜코니. 당연히 기습이었겠지. 마법을 연산할 시간만 있었다면 공간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을 테니까. 그리고 5위계 마법이라면, 뒤늦게 깨닫고 저항을 시도한 건 에즈라와 몰리뿐이라는 건가……. 짧은 사이에 이만한 학살을 벌이는 검사라.”

생각해 봤지만 딱히 짚이는 건 없었다.

“켄드라스 쪽은 어떻게 되었지?’

“연락을 시도해 봤으나 응답은 없었습니다.”

“죽은 것이로군. 뭐, 자치령주를 납치당한 시점에서 정해진 수순이기는 하지.”

“말씀만 하신다면 곧장 웰스 타운을 수색해 보겠습니다.”

“필요 없다. 긁어 부스럼이 될 뿐이니.”

범인은 보헤미른 마탑임이 분명하다.

물증도 뭣도 없지만, 심증이 확증이었다.

그들이 아니고서야 자치령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켄드라스 일당만 콕 집어서 없애려고 하는 집단은 없었으니까.

보헤미른 마탑과 직접적인 마찰은 피해야 한다.

자칫하면 피해가 막심하니까.

그러기 위해서 켄드라스를 고용한 것이고, 그들과의 연결 고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손을 써 온 것이었다.

긴급 연락에 반응이 없다면 즉, 사망.

그럴진대 괜히 찾아 나서서 모습을 드러낼 이유가 없었다.

“동대륙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참으로 과격하게 나왔어.”

“보헤미른 마탑주, 발로크는 마법사 우월주의로 유명한 자인데 검사를 보냈다라…… 외부에서 고용한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추적할 흔적도 남기지 않는 걸 보면 보통내기가 아니야. 조사관, 그 외에 특이 사항은 없었나?”

“……두 가지가 더 있습니다.”

조사관이 말을 이었다.

경청하고 있던 멜코니와 틸렌이 입맛을 다셨다.

“사건이 벌어진 뒤의 흔적이라. 그리고 이제껏 보고를 받은 바에 의하면 그 ‘애셔’라는 자의 짓임이 분명할 터.”

“왜 그랬냐가 쟁점인가.”

보헤미른 마탑과 두 마탑 사이에 낀 암흑가의 왕, 애셔.

여러 경우의 수를 고려해 봤으나, 그 존재와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 시점에 미들로스 자치령에 찾아왔는가.

그리고 어째서 뒷골목의 세력을 이용해 자치령주의 뒤를 밟았는가 등.

“보헤미른 마탑의 끄나풀…… 이라고 하기엔 앞뒤가 맞지 않는군. 사태가 발생한 후에 성에 들이닥친 게 납득이 가지 않아.”

“고민해 봐야 뭘 더 알 수 있겠나. 심문하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로아프라의 지배자.

그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나 이들은 그런 것에 위축될 자들이 아니었다.

화산섬의 마탑의 원로.

안드라노브(Andranov)의 1인, 멜코니 블라우드.

라리안 마탑의 위원회.

오색(五色) 중 청(靑)을 담당하는 틸렌 하우겐.

6위계 이상인 마탑의 전력 중 하나다.

이들이 부여받은 임무는, 보헤미른 마탑이 깊게 관여하고 있다면 은밀히 증거를 수집하고 피해 없이 마탑으로 복귀할 것.

그게 아니라면 상황에 따라, 관련자들을 전부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하고자 한다면 미들로스 자치령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쯤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남은 특이 사항 하나는 뭔가?”

“그, 그게…….”

머뭇거리며 입을 열자, 듣고 있던 멜코니와 틸렌이 눈을 깜빡였다.

“……뭐? 원하는 걸 알고 싶으면 직접 오라고?”

“…….”

“허, 참. 살다 살다 이런 건 처음이군. 와서 굽신거리는커녕 오히려 허리를 꼿꼿이 세워 버리다니. 대체 무슨 배짱이지?”

“둘 중 하나겠지. 마탑을 얕보고 있거나, 마탑을 그렇게 대할 만한 근거가 있거나.”

두 사람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그래도 불쾌감은 없었다. 보다 호기심이 동했다.

대체 뭘 가지고 있길래 감히 두 마탑의 조사관을 오라 가라 하는지.

“놈이 원하는 대로 해 주거라.”

틸렌이 허락을 내렸다.

“우리는 여기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

목걸이를 장식하고 있는 사파이어가 빛났다.

* * *

을씨년스러운 자치령의 저택.

두 명의 조사관이 겁에 질린 안내역을 따라 복도를 거닐었다. 여기저기 낡아 빠져 있는 풍경은 참으로 한심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내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이 저택의 주인과 마주했다.

“……!”

그리고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찬란하기 그지없는 백금의 로브와 액세서리.

어느 모로 보나 하나같이 예사롭지가 않다.

두 사람은 마탑에 종사하는 만큼 남들보다 좋은 장비를 갖추었고, 그만큼 안목이 깊은 편에 속했음에도 가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특히 저 로브는.

거슬리는 건 하나 더 있었다.

‘경지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기색을 가늠해 봤음에도 느껴지는 바가 없다. 감지가 아예 실패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는 건 셋 중 하나다.

상대가 마력을 깨우치지 못했거나, 아니면 모종의 매직 아이템으로 차단했다든가, 자신들과 비슷한 경지에 위치한다든가.

처림새를 보아 첫 번째는 아닐 터였다.

애초에 소문을 들어 보면 마법사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엇비슷한 경지이거나 매직 아이템이라는 건가.’

상위 경지라는 건 고려하지 않았다.

얼굴에 주름 하나 없는 청년이 감히 그럴 리가 없었으니까. 5위계 마도사라는 것만 해도 충분히 놀라울 정도였다.

상식에 근거한 판단이었다.

“원하는 걸 알고 싶다면 직접 와라……. 새파랗게 어린놈이 상당히 건방진 초대장이더구나.”

“흠, 저 나이에 암흑가의 지배자라는데 오만해지는 거야 당연하겠지.”

두 조사관이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베르덴의 허락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자, 그럼 가진 것부터 꺼내 보도록.”

한없이 교만한 태도.

마탑 특유의 선민의식과 마법사 우월주의가 물씬 느껴지는 말투를 쓰는 자를 마주하는 건, 베르덴으로서도 오랜만이었다.

익숙하기에 개의치 않는다.

베르덴이 조사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

존경 하나 없는 무성의한 어투에 조사관의 심사가 뒤틀렸다.

미처 화를 내뱉기도 전, 문이 열리며 허름한 넝마를 걸친 두 사람, 매시와 데보니가 끌려왔다. 치료를 했으나 상처의 흔적이 역력하다.

뭔가 싶어, 얼굴을 자세히 응시하던 조사관 하나가 반응했다.

“……광대?”

“음? 갑자기 광대라니?”

“알다미아의 광대. 기억 안 나나? 예전에 국제 범죄자로서 소탕되던 도중 단장인 알다미아하고 측근 몇몇이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다고 들었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을까.

문득 자치령의 빈민가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재를 떠올렸다.

“이자들이 방화를 저지른 범인?”

“내가 직접 잡았지.”

조사관 하나가 피식 웃었다.

“뭔가 했더니 사태를 일으킨 당사자를 데리고 있었군.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현장에 들이닥친 너라면 알 텐데. 마탑 지부의 수뇌부들을 죽인 건 저런 쓰레기들이 아니라는 걸. 그런 의미에서 하나 묻지. 왜 사태가 발생할 당시 성으로 향했지?”

“그날 자치령주와 약속이 있었다. 그런데 대화재가 일어났음에도 성채는 아무런 반응이 없더군.”

“그래서 찾아갔다? 그걸로는 불충분해.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뒷골목 패거리들을 시켜 자치령주의 뒤를 조사하기도 했다는 걸 포함해서.”

만족 못 한다.

조사관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니 순순히 협조하도록.”

“사태를 주도한 건 광대들이다. 저 둘을 심문하면 충분할 텐데.”

“감히 마탑의 행사를 방해하는 건가? 고작 암흑가의 우두머리 따위가? 뭐가 됐든, 너를 포함해 모두가 조사 대상이다.”

으름장이었다.

마탑은 설득보다는 힘을 위시한다.

그게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었으니까. 마탑에서 파견된 조사관은 회유보다는 강압이 더 효과적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그마치 지부장과 마탑에서 따로 파견한 마도사가 살해당했다.

이대로 부드럽게 넘어갔다간 체면이 말이 아니다.

마탑이라는 이름값을 해야만 했고, 그건 반드시 철저한 조사와 보복으로써 이루어져야만 했다. 그건 마탑만이 아니라 지배 세력의 생리였다.

하지만 베르덴 또한 지배자였다.

“조사 대상이라. 내가 알기로, 마탑에서 타국의 귀족을 멋대로 심문할 권리는 없는 걸로 아는데.”

“네놈이 무슨…….”

베르덴이 증서와 메달을 꺼냈다.

<염동력>으로 들어 두 사람의 앞에 놓자, 선명히 인장이 찍혀 있는 증서와 날카로운 방패를 본뜬 표식이 조사관의 눈동자에 비쳤다.

* * *

날카로운 방패는 에스티리아 왕국의 상징.

두 조사관이 태연한 척,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메달과 증서의 진위를 확인했다.

결론은 진품이었다.

다시 말해 앞에 있는 건 로아프라의 지배자이면서도, 에스티리아 왕국의 명예 백작이기도 하다는 뜻.

에스티리아 왕국에 있어, 명예 백작은 단순한 백작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외부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 작위.

영지의 유무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저 자체로 에스티리아 왕가에서 그만큼 신경을 쓰는 존재라는 걸 의미했으니까.

‘와, 왕가가 왜……?’

로아프라는 음지이자 왕국의 그림자다.

에스티리아 왕가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건 굳이 샅샅이 살펴보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암중에서일 뿐이다.

암흑가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외교적으로 악영향이 끼칠 테니까. 굳이 그걸 감당하면서 작위를 줘야만 하는 이유가 없었다.

‘아니, 저자는 그론드가 아니다.’

그론드의 자리를 빼앗은 찬탈자다.

그렇다는 건…….

‘설마 저 애셔라는 자는 에스티리아 왕가의 명령 아래, 그론드에게서 로아프라를 빼앗은 건가?’

그래,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고서야 공식적인 작위를 줄 리가 없었다.

조사관이 조심스레 증서와 메달을 놓았다.

베르덴이 다시 회수하고 나서야, 그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작께서 미들로스 자치령에서 무슨 볼일로 오셨소.”

말투가 얌전해졌다.

그리고 경계심이 느껴졌다.

“내가 마탑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나?”

“자치령주가 납치되었고 수뇌부가 몰살당했소. 이건 아주 심각한 사안이오. 그냥 묵비권을 행사한다고 해서 넘어갈 일이 아니란 말이오!”

“그래서 내가 방관했나?”

베르덴이 턱을 괴었다.

“대화재를 가라앉히고, 화재를 일으킨 범인을 잡았다. 그리고 죽이지 않고 너희들에게 인계하고 있지. 여기서 뭘 더 해야 하지?”

“그러니까…….”

“너희들에게는 날 구속하거나 심문할 명분이 없다.”

평소의 마탑이었다면 힘으로 억눌렀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덴은 명실상부한 에스티리아 왕국의 귀족이었다. 그리고 알다미아의 광대를 생포하여 신변을 넘겨주기까지 했다.

자세한 배후에 대해서는 심문 과정을 통해 알아내면 된다.

물론 납득되지 않는 부분은 있다.

사태 발생 후, 도시를 떠나 어디로 갔느냐, 왜 자치령주의 뒤를 조사했나 등 말이다. 그럼에도 억지로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귀족은 귀족이었다.

“항의하겠다면 정식으로 에스티리아 왕가에 말하도록.”

비단 조사관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도시 바깥의 산맥에서 저택을 바라보고 있는 두 마탑의 일각을 겨냥한 쐐기였다.

베르덴은 말하고 있다.

얌전히 꺼지든가.

아니면 내려와서 덤비든가.

물론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머릿수가 많을수록 생각이 많아지고, 잃을 게 많을수록 망설이는 법이니.

특히 하위 서열 마탑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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