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301화 (301/366)
  • 301화 기꺼이

    지형을 조작해 만든 동굴 밖에서, 베르덴은 넓적한 바위에 앉아 풍경을 응시했다.

    동이 트고 하늘에 밝은 새벽이 드리운다.

    서늘함이 흐르는 겨울의 숲은 그저 차분했고, 이따금씩 새의 지저귐이 들려오기도 했으나 고요함을 해치지는 못했다.

    느릿하게 흐르는 시간.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덴이 말했다.

    “아직 움직이기에는 이를 텐데.”

    “그래도…… 마냥 누워 있을 수만은 없지.”

    아드리안이 비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검이 없는 검집을 지팡이 삼아 조금씩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해도 주저앉지 않았다.

    지금은 이 아픔조차도 반가웠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푸른색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계절과 새벽 특유의 냄새가 가득하다.

    청량하면서도 몽환적이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한기가 깃든 공기가 폐를 적셨다.

    “……하아.”

    숨결이 입김이 되어 흩어진다.

    강제 마법진의 분리는 성공했다.

    머리에도, 상반신에도 더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내면 속에서 속삭이던 명령도 이제는 들려오지 않는다.

    생각도, 감정도, 육체도 자유롭다.

    모든 억압에서 풀린 감각은 감히 형용할 수 없다. 이 같은 기분을 느낀 건 도대체 얼마 만인가.

    수십 번이나 정신이 끊어질 뻔했던 극통(極痛)을 감당한 보람이 있다.

    베르덴의 왼쪽에 위치한 바위에, 아드리안이 걸터앉았다.

    두 사람이 같이 겨울을 바라봤다.

    선선한 바람이 피부를 적신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아드리안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당신이 나를 살려 준 본의가 무엇인지.”

    이타심 뒤에 숨겨진 저의.

    그걸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가 대화 도중에 언급한, 복수라는 단어가 뇌리에 뚜렷하게 박혀 있었기에.

    “……당신은 어디까지 갈 거지?”

    “보헤미른 마탑을 무너뜨릴 거다.”

    분노와 증오.

    담담한 목소리였으나, 저 한마디에 모든 게 담겨 있다.

    어떠한 망설임조차 없는 결연한 각오다.

    조용히 그를 곱씹던 아드리안이 말을 이었다.

    “상대는 마탑이고, 그를 이끌고 있는 건 초월자다. 만약 실패한다면 죽거나…… 다시 그 지옥 속으로 들어가게 될 거다.”

    “두렵나?”

    “그럴 리가.”

    “마찬가지다.”

    직후 베르덴이 덧붙였다.

    “그리고 초월의 경지에 닿아 있는 건 놈만이 아니지.”

    “……!!”

    아드리안이 눈을 부릅떴다.

    당혹감과 함께 직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 아드리안은 중앙 대륙의 4강이었다.

    물론 그것이 중앙 대륙에서 네 손가락 안에 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으나, 세간에서는 초월자에 가깝다고 평가되었다.

    실제로 그의 검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단언컨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몸이 망가져 있다고 해도 그렇다.

    그런데도 아드리안은 패배했다.

    여러 기예를 발동하고, 끝내 절기까지 억지로 펼쳤음에도 검은 전혀 닿지 않았다.

    77번은 전력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것이 분명함에도.

    ‘초월자와 같은 압도적인 존재감은 없다.’

    그러나 현격한 강함이다.

    마력와 마법, 전부 기형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그뿐만 아니라 발로크의 최상위 마법진을 작성하거나 파훼할 수 있으며, 남다른 마법적 통찰력과 판단 또한 갖추고 있다.

    초월자가 아니되 초월의 지척이 닿아 있는 경지라.

    한 번도 들어 본 적은 없었지만 자연스레 믿게 된다. 어쩌면, 어쩌면 정말로…… 머지않아 한 명의 초월자가 탄생할지도.

    생각이 닿자, 아드리안의 눈에 희열이 차올랐다.

    ‘발로크, 발로크 베시아스.’

    미소가 번진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오만함이 괴물을 만들었구나.’

    기쁨과 기대감이 술렁인다.

    겨우 마음을 억누른 아드리안이 왼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당신을 따라가면, 발로크를 죽일 수 있나? 내 손으로?”

    “아니, 발로크는 내 몫이다. 그래도 약속하마. 원로들의 목은 너에게 주겠다고.”

    충분하다. 오히려 원하는 답이다.

    발로크는 아드리안의 힘으로는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초월자.

    그런 존재가 나락으로 처박히는 걸 곁에서 볼 수만 있다면, 스승의 팔과 다리를 앗아 간 원로들을 벨 수 있다면 만족한다.

    ‘……아버지.’

    피가 이어지지 않은 유일한 가족.

    기억 속에 남은 그를 떠올리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스승은 말했다.

    아드리안의 탓이 아니라고.

    하지만 아드리안의 잘못이었다.

    오랫동안 스승을 고통스럽게 한 것도, 끝내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유도당해 스승의 심장을 찌른 것도 전부…….

    아드리안이 패배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니.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하나 속죄만큼은 할 수 있다.

    놈들의 피와 고통으로, 자신의 원한과 스승의 영혼을 달래리라. 그걸 위해서라면 남은 삶 따위 전부 바칠 수 있다.

    “77번. 자세히는 모르나, 보헤미른 마탑에는 발로크 외에도 강대한 마법사들이 즐비하다고 알고 있다. 그 전부를 감당할 수 있는 건가?”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지금의 나로서는 역부족이지. 그래서 세력을 갖출 생각이다. 그런 이유로 미들로스 자치령에 찾아온 거고.”

    “그러니까 다른 동료는 없다는 거군.”

    “네가 그 첫 번째가 되겠지.”

    “……그런가.”

    아드리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듣지 못했는데.”

    “베르덴. 외부에서는 애셔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가명은 보헤미른 마탑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위장.

    그런데도 본명을 밝혔다는 건, 아드리안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베르덴.’

    속으로 이름을 되뇌며 아드리안이 일어섰다.

    절뚝거리며 베르덴의 앞까지 다가가 멈춰 섰다.

    “정말로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마직막까지 이용만 당하다 스러질 목숨을 구원받았다.

    복수를 꿈꿀 기회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하자며 손까지 내밀고 있다.

    어찌 붙잡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아드리안 첸버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검 대신 검집을 땅에 박았다.

    기사의 맹세.

    어릴 적, 스승에게 배운 유일한 예법이다.

    혹시라도 귀족이나 왕가 또는 황가의 검이 되어, 기사단의 일원으로 살아갈 생각이 있다면 배워 둬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말과 함께.

    아드리안의 장래를 위해 알려 준 수많은 가르침 중 하나였다.

    평생 쓸 일이 없을 거라 여겨 왔다.

    스승을 제외한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도 싫었고, 어디에도 소속될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

    가만히 지켜보던 베르덴이 몸을 일으켰다.

    귀족과 기사 사이에서 볼 법한 구도.

    겉으로도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베르덴에게는 정당성이 있었다.

    다른 신분으로는 에스티리아 왕국의 명예 백작이기도 했으니까.

    영지는 없어도 기사를 영입할 자격은 갖추고 있다.

    “기꺼이 환영하마.”

    하지만 이대로 끝내는 건 허전할 터.

    비어 있는 검집을 보던 베르덴이 레인디아를 기동했다.

    아공간에 잠들어 있던 검을 소환했다. 짙은 남색을 띠고 있는 도신, 그 중심에는 4개의 혈조가 어우러지고 있다.

    마검 케덴스.

    로아프라에서 그론드에게 빼앗은 마법을 베는 검.

    툭. 툭.

    케덴스로 아드리안의 양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칼날을 직접 손으로 잡아, 손잡이를 앞으로 향했다.

    “이건…….”

    “받아라. 앞으로는 네 것이다.”

    아드리안이 얼떨결에 검을 받아 들었다.

    검사답게 저도 모르게 검을 살피자, 기묘한 힘이 느껴진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건 아티팩트임이 분명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검집에 딱 들어맞지는 않아 불편하겠지만 잠시 참아라. 도시에 가면 새로운 걸 제작해 줄 테니. 그리고 이건 지팡이로 쓰도록.”

    베르덴이 기다란 창 하나를 건넸다.

    그론드의 금고에서 가져온 무기 중 하나였다.

    ‘역시.’

    자력으로 발로크의 손아귀를 탈출하는 데 성공한 능력과 기지(機智).

    심지어 아티팩트조차 아무렇지 않게 하사하는 재력도 갖추고 있다. 이제 보니 착용하고 있는 로브, 반지, 스태프 등 예사롭지 않은 게 없었다.

    ‘역시 다르다.’

    스승을 잃고 정신을 지배당한 자신 따위와는 정반대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마검을 움켜쥔 아드리안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주군.”

    ……주군?

    베르덴이 눈을 깜빡였다.

    생소한 호칭이기는 했지만…… 뭐, 그뿐이다. 딱히 어떻게 부르라며, 이래라저래라 강요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사이 창을 지지대 삼아 아드리안이 기립했다.

    검집을 차고 마검을 납도했다. 길이가 맞지 않아, 도신의 일부가 드러났으나 너무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환영 인사는 이렇게 간단히 끝이 났다.

    “한데 주군, 다음 행선지는 정하셨습니까?”

    “글쎄, 지금 고민 중이다.”

    왕국과 자치령에서 얻은 정보로 아드리안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 본래 예정에 있었던 켄드라스 일당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성과였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고작 둘만으로는, 보헤미른 마탑의 전력에 비할 수 없으니.

    그렇다고 단순히 강함과 숫자만을 기준으로 세력을 불릴 수는 없다. 같이 뜻을 함께할 적합자들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하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레이셴 테일로드.”

    아드리안이 말을 이었다.

    “발로크의 제자가 지금 중앙 대륙에 와 있습니다.”

    * * *

    발로크 베시아스의 두 번째 제자, 레이셴 테일로드.

    40대를 넘은 지 오래임에도 10대의 외견을 갖고 있는 존재로, 특수한 마도를 개척한 6위계 마도사다.

    마탑주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기에 마법진의 전문가.

    특이 사항으로는 보헤미른 마탑의 비공식 실험 중 약물 실험 분야에 있어서 1인자이며 절대적인 권위자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발로크를 잇는 미치광이라는 뜻.

    레이셴은 공식적인 외부 활동을 제외하고 거의 마탑에 살다시피 한다.

    놈이 만들어 낸 갖가지 약물로 인해 시한부 인생을 살았었기에, 그 습성은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중앙 대륙에……?’

    현재 블랙 아워와 전쟁 중이라 갈 일이 없을 텐데.

    그리고 동력원의 폭주로 인해 소멸해 버린 실험 자료를 복구하느라 바쁘기도 할 테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유일한 명령권자인 발로크에게서 어떤 임무를 받은 것일 터.

    그런 베르덴의 예상은 적중했다.

    “중앙 대륙에서 누군가를 찾는다고 들었는데, 흥미는 가지만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고 온종일 투정을 부리더군요.”

    정신 지배를 당하고 있던 얼마 전.

    아드리안은 서대륙에서 동대륙으로 공간을 이동하기까지, 곁에 있었던 레이셴의 모든 말과 행동을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를 찾는다라…….”

    따로 짚이는 건 없다.

    하나 레이셴이 직접 움직일 정도면 예사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아드리안도 자세히는 듣지 못했기에, 상세한 정보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레이셴이 마탑을 벗어났다는 것.

    발로크마저 신경 쓸 만한 누군가가 중앙 대륙에 있다는 것.

    생각에 잠겨 있던 베르덴이 눈을 빛냈다.

    “아직 보헤미른 마탑을 직접적으로 건들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게 되면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겠군.”

    마탑의 비호를 벗어난 레이셴.

    놈은 베르덴의 복수 대상 중 하나였다.

    “지금 시점에 레이셴을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목적은 어디까지나 세력 구축이란 건 잊지 않는다.

    다만 부가적인 목표로, 레이셴을 겨냥하는 건 선택지로서 매혹적이었다.

    곁에 있던 아드리안이 침을 삼켰다.

    주저 없이 마탑주의 제자를 죽이겠다는 말에 전율이 흘렀다.

    “일단 행선지는 중앙 대륙으로 정하도록 하지. 하지만 무리하게 움직일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럴 수도 없고.”

    중앙 대륙으로 향하는 공간 이동진은 벨디른 공화국에 있다.

    그런데 페르네가 수집한 국외 신문에서, 어떤 문제가 생긴 탓에 일시적으로 가동이 중단되었다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방주 회의에 참석도 해야 하고.’

    곧 리스너와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니.

    서둘러 봤자 의미는 없다.

    “그리고 아드리안, 네 치료가 최우선이다.”

    강제 마법진은 분리했으나 부상은 남아 있다.

    좋지 않은 몸으로 기예와 절기를 펼치는 등 과격하게 움직였으니, 대도시에 가서 성직자를 만날 필요가 있다.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런 거 하나하나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당장 레이셴을 처리하지 못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죽게 될 테니까. 시간은 우린 편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주군.”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후 두 사람의 의식이 위로 향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마력과 기척.

    그래, 미들로스 자치령에도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하루 뒤에 돌아왔습니다, 애셔 님.”

    소사이어티의 일원, 에단과 레베카.

    아드리안의 마법진을 제거하기 위해, 베르덴이 잠시 다른 곳에 보냈던 둘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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