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299화 (299/366)
  • 299화 아드리안 (1)

    보헤미른 마탑이 보낸 정체 모를 검사.

    강제 마법진으로 정신을 조종당한 비공식 실험체는 쓰러졌다. 대지에 몸을 누인 채, 미약한 숨을 내쉬고 있다.

    깨어 있을 때보다 편안한 얼굴이다.

    “…….”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가라앉혔다.

    웰스 타운부터 여기까지.

    여러 광범위한 마법으로 인해 마력과 집중력을 상당량 소모했다. 특히나 대규모 <지형조작>의 비중이 절반 이상.

    나름의 피로감을 느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근방에 서식하던 짐승과 아인종은 진즉에 도망간 지 오래. 잔잔한 겨울바람이 일고 있는 새벽은 더없이 조용했다.

    그때, 상공에서 마력이 느껴졌다. 익숙한 기척이다.

    곧 지면에 착지한 에단과 레베카의 시야에 황폐화된 일대가 비쳤다. 어디를 둘러보든,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에단이 침을 삼키며 베르덴을 응시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상처 하나 없다. 애써 묻지 않아도, 일방적이고 압도적인 흐름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다가온 에단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애셔 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동시에 시선을 움직였다.

    그 끝이 의식을 잃은 검사에게 닿았다.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지만 아직 살아 있군요. 이만한 격전을 치렀음에도 목숨이 붙어 있다니, 확실히 예사 인물은 아닌 모양입니다.”

    단순한 감탄 따위가 아니었다.

    살려 둔 저의가 따로 있는 것인지 돌려 말하고 있는 거다.

    그에 베르덴은 질문으로 답했다.

    “혹시 응급처치를 따로 배운 적이 있나?”

    “예? 치료라면…… 저보다는 레베카가 적임자입니다.”

    “어, 나? 옛날에 배우기는 했는데…….”

    레베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이내 의미를 깨달은 그녀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자, 잠깐만요! 설마 저 미친놈을 치료하라는 건 아니겠죠?”

    “정확하군.”

    “아니, 제가 저 살인마 따위를 왜……! 그리고 저보다는 성직자에게 맡기는 게 훨씬 낫지 않아요?”

    “가능하면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기를 바라니까.”

    베르덴이 발로크의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봤다.

    놈의 목적은 동대륙에서 보헤미른 마탑을 적대하는 세력의 제거.

    다시 말해 두 마탑 지부의 수뇌부와 자치령주 그리고 켄드라스 일당의 섬멸이다.

    ‘그럼 그 명령을 이행한 뒤에 뒤처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은 자멸이다.

    강제 마법진의 명령으로 검사를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린다. 주변에 어떠한 목격자도 남기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럼 자치령주와 두 마탑에 보복을 가하고도 배후를 들키지 않을 터. 그렇게 생각하면 관련 없는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것도 어느 정도 앞뒤가 들어맞았다.

    ‘하지만 변수가 발생했다.’

    베르덴으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야 할 실험체가 살아남은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보헤미른 마탑…… 개중에서도 발로크 베시아스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동대륙에 공간 이동을 사용할지도 모른다.

    놈은 자신이 완성한 성과에 대한 실패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니.

    ‘지금 마주하는 건 시기상조다.’

    그러니 실험체가 생존한 사실을 최대한 숨겨야 한다. 그게 바로 당장 루아스교의 신성력을 빌리지 않는 이유였다.

    “부탁하지, 레베카.”

    “앗.”

    갑작스러운 말에 레베카가 흠칫했다.

    당황하고 있자, 옆에서 에단이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잠자코 수락하라는 뜻. 게다가 저렇게 부탁이라는 말까지 단호히 거절할 수도 없었다.

    “크, 크흠. 알겠어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 * *

    잠에 들면 몇 번이고 같은 꿈을 꿨다. 언제나 내용은 같았다.

    눈앞에 펼쳐진 과거와 그 오랜 시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자신. 거기에는 어떤 희로애락도 없었다.

    어두운 실험실을 바라봤다.

    벌써 수백 번이나 본 장면 중 하나였다.

    구속당한 아드리안과 불구가 된 노인.

    둘은 투명한 벽을 사이에 두고 갇혀 있다. 노인의 모습은 무척이나 피폐했지만 누군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설령 두 눈이 없다고 해도 여실히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스승님.’

    이름을 되뇌었다.

    그러자 벽 너머의 노인이 고개를 들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일어나거라, 아드리안.

    갑작스레 멀어지는 빛.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의식이 부상했다.

    * * *

    스르륵.

    아드리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조금씩 선명해져 가는 시야로, 아늑하고 따뜻한 공간이 비쳤다.

    ‘동굴…… 인가?’

    그렇다. 자그마한 동굴이다.

    자연적인 흔적이 없는 인위적인 흔적이 역력한 공동.

    근처에는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있으며, 아드리안 자신은 다소 푹신한 침낭에 누워 있었다.

    몸 곳곳이 식물 냄새로 가득하다.

    붕대가 오른팔 전체를 단단히 압박하고 있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일까.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걸까. 머리 안쪽이 강하게 지끈거리고 정신이 흐리멍덩하다.

    “깨어났군.”

    “……!”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각선 위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잿빛 머리칼과 벽안. 세간에서 보기 힘든 외모를 가진 사내가 흙으로 빚은 의자에 걸터앉아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다.

    흐릿해진 의식을 헤집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크윽……?!”

    극심한 격통이 신경을 강타했다.

    마치 칼날을 꽂아 저미는 것 같은 기분. 감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사내, 베르덴이 말했다.

    “애써 움직이지 마라. 무리하게 기예를 펼친 탓에 내부가 엉망이니까. 포션조차 함부로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포션은 효과가 큰 만큼 부담 또한 마찬가지.

    기력이 쇠한 환자에게 잘못 사용했다간 오히려 역효과다. 자칫하면 그대로 죽어 버리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래서 연금술을 택했다.

    에단은 웰스 타운과 숲을 오가며 필요한 재료를 구해 왔고, 베르덴과 레베카는 원기 회복을 돕는 약을 제조했다.

    효능은 미약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판단.

    그리고 부러진 오른팔은, 레베카가 직접 붕대와 부목으로 압박하듯 감았다. 조각난 뼈가 조금도 어긋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다.

    본인이 자신한 만큼 응급처치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사이 베르덴은 웰스 타운 광장에 있는 싱크홀을 메워 버렸다. 에단은 근처에서 주민들을 통솔하고.

    세 사람에게는 꽤나 밀도가 높은 시간이었다.

    아드리안이 잠자코 듣고 있었다.

    이내 하늘색 눈동자가 베르덴을 강하게 응시했다.

    “당신…… 은…… 누구…… 지……?”

    목소리가 어눌하다.

    다시 떨어지려 하는 의식을 겨우 붙잡았다.

    “글쎄,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까.”

    고민은 짧았다.

    “77번 실험체…… 라고 하면 알아듣겠나?”

    “7…… 7번……?”

    “너는 몇 번이었지?”

    느닷없이 번호를 묻는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건지 이해는커녕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누구보다도 저 의미를 알고 있다.

    본능적으로 머릿속에 숫자가 떠오른다. 아드리안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89번…… 89번…… 아드리안…… 첸버스.”

    “89번이라. 그렇다면 정신 지배 실험이 시작된 건 대략 9년 이하인가.”

    77번과 89번.

    베르덴은 낯선 동질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잠결에 스승님을 부르더군.”

    “…….”

    “아드리안 첸버스, 발로크 베시아스가 너에게 무슨 짓을 했지?”

    “발…… 로크…….”

    아드리안이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천장에 드리운 모닥불의 그림자가 거세게 일렁인다.

    “나는…….”

    정신은 아직도 몽롱하다.

    반대로 목소리는 서서히 선명해져 간다. 잠시 잊고 있었던 기억마저도 그러했다.

    과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줄곧 억압되어 왔던 무수한 감정이 들끓었다. 직후 아드리안이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스승님을 죽였다.”

    * * *

    발로크에게 사로잡힌 아드리안은 어둡고 공허한 장소에 갇혔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이유 모를 두통을 느꼈고, 찾아온 마법사에 의해 89번이라는 번호를 부여받았다.

    처음에는 그게 뭔지 알 수 없었으나 곧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1차 실험.

    시작은 약물이었다.

    뭔지 모를 마법사들이 찾아와, 팔과 다리가 마법진으로 구속되어 있는 아드리안에게 정체 모를 주사기를 꽂아 넣었다.

    ───윽……?!

    혈관을 타고 전해지는 냉기, 근육을 파고든 작열감.

    기존의 두통이 더욱 심해지다 못해, 머리를 도끼로 내려치기라도 한 듯 깨져 버릴 것 같은 감각이 엄습했다.

    그래도 견뎌 내야만 했다.

    같이 잡혀 왔음이 분명한 스승님을 찾아야 했으니까.

    오직 그 생각 하나만으로 모든 걸 감내했다.

    숫자를 더해 가는 실험 속에서, 어떻게든 탈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정신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그렇게 며칠, 몇 주가 넘어 시간의 흐름이 아득해질 때쯤, 발로크가 찾아오더군. 스승님의 팔을 앗아 간 원로 한 명을 데리고서.”

    아드리안을 굽어보는 시선.

    강자와 약자를 명확히 구분하는 구도였다.

    ───발로…… 크……!!

    ───보고받은 대로 아직 멀쩡하군. 역시 중앙 대륙 4강이라 이건가. 소문으로는 5위계 저주 마법에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라고 하더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정신력이 뛰어나.

    흥미가 깃든 안광이었다.

    그건 인간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스승님은…… 어디에 있지……?

    ───자신의 안위보다 스승을 걱정하는 건가. 참으로 눈물겹군. 흠, 좋다. 내 질문에 답해 주면 알려 주도록 하지.

    발로크가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헤미른 마탑의 원로, 안젤로가 다가와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89번, 이게 몇 개로 보이지?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이다.

    설마 조롱이라도 하는 건가. 순간 느껴진 두통에, 표정을 일그러뜨린 아드리안은 단어를 씹어 뱉었다.

    ───……하나.

    ───역시 그렇겠지. 그럼 이제 내 차례로군.

    발로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공간 전체에 마력이 깃들더니, 정면에 있는 벽이 투명해졌다.

    그 너머에 사람이 있었다.

    오른팔과 왼 다리가 없는, 남은 왼팔과 오른 다리가 마력의 쇠사슬에 묶인 노인이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실루엣이다.

    ───……스승님?

    ───아드…… 리안…….

    스승이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눈밑은 퀭했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것인지 수척했다. 구석에는 아드리안의 검이 잠들어 있었다.

    무언가 끊어지는 걸 느낀 아드리안이 소리를 질렀다.

    ───스승님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너와 같은 실험을 행했지. 어지간한 이형종이라도 버티기 어려운 양의 약물을 주입했는데도, 네 스승답게 제법 버티더구나. 너와는 다르게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지는 것 같지만 말이야.

    발로크가 수염을 쓸었다.

    다시금 마력이 사라지며 벽이 불투명해졌다. 스승의 모습과 목소리마저 한순간에 사라졌다.

    ───89번, 궁금하지 않느냐? 과연 다음에 만났을 때는 네 스승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 또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잊을 수 없는 속삭임이다.

    아드리안의 핏발 선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분노와 증오 그리고 무력감이다.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도대체, 도대체 왜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이미 말했을 텐데. 차기 실험을 위한 적합한 재료가 필요했고, 네가 그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라고. 저 늙은 검사는 부차적인 요소지.

    ───그딴 걸 물은 게 아니다!!

    ───나도 알고 있다. 이 실험의 목적을 묻는 거라는 건.

    발로크가 이죽거렸다.

    ───한낱 실험체에게는 과분한 답이다.

    발로크와 안젤로가 자리를 떠났다.

    기척이 사라지고 다시금 어둠이 드리웠다.

    베르덴이 물었다.

    “그 이후로 실험이 계속되었겠군.”

    “그래. 그리고 그와 별개로 불규칙적으로 반대편을 보게 해 주더군. 그럴 때마다 참담하게 변하는 스승님의 모습이 보였다.”

    언젠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스승의 비명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언젠가는 모습만이 비쳤다.

    소리 없는 비명이 눈동자에 담겼다.

    과거를 말하는 아드리안이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기억을 읊으면서 흐릿했던 의식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베르덴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로가 찾아왔다.”

    ───89번, 손가락이 몇 개로 보이지?

    이따금씩 해 오는 물음이다.

    놈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은 살의를 드러내며 답했다.

    ───13개.

    ───그렇군.

    다시 혼자가 되었다.

    뭔가 이상했지만 그런 데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한다.

    얼마 안 가면 스승님이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

    하나 도처에 설치된 여러 구속 마법진이 행동을 억제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마법진을 부수기 위해 여러 발상을 거듭했다.

    기회는 단 한 번이었기에 신중히 때를 기다렸다.

    “그런데 때마침 그 기회가 찾아오더군.”

    세 자릿수에 육박한 약물 실험.

    곁에 실험을 진행할 세 명의 마법사들만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빈틈을 찾으려고 하자, 문득 오른팔을 구속한 마법진이 약해져 있음을 감지했다.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본능은 이성보다도 빨랐다.

    ───콰직!

    “의심했어야 했는데.”

    아드리안이 허탈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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