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조우 (2)
“뭐? 복수? 복수라고? 카하하하하하하하!”
켄드라스가 손바닥으로 무릎을 때리며 폭소했다.
거칠어진 숨소리와 연신 들썩이는 어깨. 어찌나 웃어 대는지 험악한 얼굴이 아주 벌겋게 달아올랐다.
도중에 말실수를 한 적이 없는데, 도대체 무엇에 자극된 걸까. 연유를 알 수 없으니 당황스럽기보다는 불쾌함이 앞섰다.
눈가를 작게 씰룩인 베르덴이 왼손을 식탁 위에 올렸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지?”
“그걸 진심으로 몰라서 묻는 거냐? 카하하하! 이거, 암흑가의 왕이라더니 세상 물정 모르는 마법사였군!”
켄드라스가 무의식적으로 흉터를 어루만졌다.
세월이 지났음에도 이따금씩 쿡쿡 찔러 온다. 통증과 함께 마법에 목이 반쯤 찢겨 나갔던 순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탑…… 그것도 보헤미른 마탑에 복수라니.”
세상에 군림하고 있는 10개의 마탑은, 그 자체로 힘이며 억제력이다.
최하위 마탑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세계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마법사들이 한데 모여 오랜 세월 발전시킨 기술력과 전술.
또한 마탑의 주요 구성원만이 익힐 수 있는 마법진, 고유 마법 및 마력 운용법은 마탑의 격을 더욱 높인다.
개중에서도 보헤미른 마탑은 무력 서열 2위.
특히나 마탑주, 발로크 베시아스 휘하에 있는 직속 부대들은 차원이 다르다.
원소 마법으로 섬멸력을 갖추고 있고, 마법진으로 여러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하며, 고속 비행과 같은 기동력까지 보유하고 있다.
세 눈의 추종자에 속해 있던 켄드라스는, 그 집단이 가진 파괴력을 경험한 바 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정밀한 마법 폭격은 그야말로 공포.
압도적인 힘 앞에 저항 따위는 무의미하다. 마법사든, 전사든 구분 없이 죄다 시체조차 찾지 못하고 소멸하는 광경은 더없이 끔찍했다.
켄드라스가 죽지 않은 건, 같은 조직에 속해 있던 자들을 미끼로 던진 것과 뒤따른 행운 덕분이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고작 원한 따위에 남은 인생을 쏟아붓겠나? 그리고 요즘 세상에, 그딴 하잘것없는 이유에 시간과 돈, 그리고 묵숨을 내다 버리는 머저리가 어디에 있다고.”
말투가 거슬린다.
“……그런데 왜 보헤미른 마탑을 자극한 거지? 네 말대로라면 숨죽이고 사는 게 정상 아닌가.”
“당연히 그렇지. 하지만 여기는 동대륙이고 지금 내 뒤에는 화산섬의 마탑과 라리안의 마탑이 있다. 보헤미른 마탑의 영향력을 없애려고 안달 난 놈들이. 그러니까…… 이건 사업이란 거다.”
“사업?”
“그래, 사업.”
켄드라스가 주먹을 쥐었다.
“마탑들은 각자 이룩한 업적과 성과를 내세우며 선의의 경쟁을 부르짖고 있다. 하나 미들로스 자치령과도 같이 기회만 보이면 주저하지 않고 물밑에서 서로를 물어뜯지. 우리는 그 첨병으로 고용된 거고. 예를 들자면 전쟁에 참가한 용병단이라고도 할 수 있으려나. 물론 수입적인 측면에서는 비교가 안 되지만.”
“들어 보니 더욱 이해가 안 가는군. 마탑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손을 잡다니. 두 마탑이 목적을 이룬 뒤에 너희들을 살려 둘 것 같나?”
쓰임새를 다한 사냥개는 처분되기 마련이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여러모로 거슬릴 뿐만 아니라, 도리어 주인을 물어 버릴 수도 있으니.
“마탑의 생리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군. 혹시 마탑 출신이냐?”
“말 돌리지 마라.”
“카하하하, 예민하긴. 뭐, 네 말대로 그럴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일 뿐이다. 지금은 달라. 보헤미른 마탑은 블랙 아워와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까.”
켄드라스가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만능의 발로크 베시아스. 암월, 다히트 웨스로웰. 무려 초월자가 이끄는 세력 간의 총력전이다. 객관적으로 보헤미른 마탑의 승산이 더 높긴 하지만 함부로 예단할 수는 없지. 하나 그 전쟁에서 누구 하나 멀쩡히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건 명백하다…… 특히나 동력원을 상실해 버린 보헤미른 마탑이라면.”
동력원의 폭주는 감춰진 사실.
아직 그 소문은 세상에 훤히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켄드라스는 확신을 품고 있다.
화산섬의 마탑 혹은 라리안 마탑을 통해 관련 정보를 손에 넣은 것일 터.
“…….”
베르덴은 침묵했다.
그 태도에 켄드라스가 입가를 비틀었다.
“호오, 동력원에 대한 이야기에도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암흑가의 왕이라더니, 이름값은 한다는 거냐? 아니면 역시 마탑 출신? 어쩌면 소속일 수도 있겠어.”
“그래서 요점이 뭐지?”
“말인즉슨 보헤미른 마탑이 사냥꾼에서 사냥감이 되었다는 거지.”
동력원의 복구는 가능성조차 예상할 수 없다.
당연한 사실이다. 설계를 통해 무한한 마력의 집합체를 제작할 수 있었다면, 이 세상에는 마탑의 동력원이 즐비했을 테니까.
또한 손상된 전력을 회복하려면 족히 수십 년은 지나야 할 터.
그동안 다른 마탑들은 발전할 것이고 보헤미른 마탑은 자연히 퇴보하게 되겠지. 머지않아 최하위 서열까지 곤두박질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과연 둘 중 누가 승기를 쟁취할 것인가?
그것에 의미는 없다. 패자는 모든 걸 잃을 것이고, 승자도 잃게 될 테니.
“전쟁이 끝나는 즉시 보헤미른 마탑의 급격한 하락세가 시작된다. 다른 마탑들은 인정사정없이 놈들의 영역을 침범할 거고, 그 기회를 발판 삼아 나는, 우리는 위로 올라설 것이다. 때가 되면 동대륙을 벗어나 그리운 중앙 대륙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켄드라스가 입술을 할짝거렸다.
“일이 다 끝나면 두 마탑이 우리를 처분할 거라고? 글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아무리 망해 간다고 한들 보헤미른 마탑이니, 그 과정은 최소 15년 이상 진행될 텐데?”
보헤미른 마탑의 추격을 뿌리친 적 있는 켄드라스다.
그런 그에게 15년이라는 긴 시간이 주어진다면, 두 마탑의 손아귀를 벗어날 방도쯤은 몇 개쯤 마련할 수 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긴 해야겠지. 그런데 세상이 다 그런 거 아니겠나? 하다못해 모험가조차 목숨을 내걸고 토벌을 행하는데.”
“…….”
“대충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겠지? 그나저나 말은 길어졌는데, 아직도 네가 왜 나를 찾아왔는지 답을 못 들었군. 음…… 아무래도 좋으려나. 어차피 중요한 건 내 용건이니까.”
“용건?”
“그럼 내가 심심해서 이곳에 너를 들인 줄 알았나? 뭐, 아주 없지는 않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따로 있다. 바로 암흑가의 왕이라는 칭호에.”
흑갈색 눈동자가 벽안을 응시했다.
“애셔,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 없나?”
* * *
웰스 타운의 지하에서는 자주 연회가 열린다.
마탑과 자치령주가 부족함 없이 세력의 돈, 물자, 장비 등을 지원해 주고 있었으니까. 남의 돈을 물 쓰듯 낭비하는 건, 그 자체로 쾌락이었다.
술과 고기가 끊이지 않는다.
혹여 부족해질 것 같으면 자치령주를 통해 얻으면 그만. 부족함이 없는 잔치는 언제나 지루한 즐거움이 넘쳐 났다.
연회의 끝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쿠구구구.
육중한 문이 열린다.
활기찬 소란이 멈추며 무수한 시선들이 입구에 집중되었다.
“……누구야, 저건?”
누군가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질서 없이 웅성거린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금속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아드리안이 하늘색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두 사람을 포착했다.
세력을 이끄는 세 명의 지도자 중 두 명인 세드워디, 팔린. 자치령주가 심문 도중 내뱉었던 인상착의와 정확히 일치했다.
팔린이 에일을 들이켰다.
이내 입가를 훔치며 턱을 치켜들었다.
“본 적 없는 자인데…… 너는 뭐지? 켄드라스가 보낸 건가?”
“…….”
아드리안은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녹이 슬어 있는 검 자루에 손을 올렸다.
예민한 감각이 공간을 장악한다.
눈앞에서 수십 명이 그를 경계하고 있고, 몇 층 아래에도 십수 명의 무리가 감지된다. 그중에는 위험을 감지할 수 없는 ‘기이한 존재’ 또한 있었다.
‘전부 죽여야 한다.’
마법사와 전사로 이루어진 집단.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불리하나 주저하거나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적에게 둘러싸여도 겁먹을 것 없다. 상대의 인지능력을 속일 수만 있다면 너의 털끝조차 건드릴 수 없을 테니. 아드리안, 오늘 너에게 가르쳐 줄 것은, 그 움직임이다.
어릴 적 들었던 목소리.
스승의 가르침은 영혼에 새겨져 있다.
끼이이이익.
서서히 닫히는 연회장의 출구.
마지막으로 보인 틈새로, 아드리안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애셔,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 없나?”
켄드라스의 제안은 예상밖이었다.
미약하게 변하는 베르덴의 표정을 본 켄드라스가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로아프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자치령에 자리를 잡은 이상, 애써 에스티리아 왕국에 갈 일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지배자가 이렇게 눈앞까지 찾아오니 자연스레 생각이 달라지더군.”
로아프라는 범죄의 온상이다.
거대한 지하 도시에 형성된 시장의 규모는 무지막지하다. 루아스교가 경계시하는 연초는 구하기 어려워도, 그 외의 것은 원한다면 손에 넣을 수 있다.
암흑가의 경매장에서는 때로 아티팩트까지 상품으로 올라오기도 하니. 그에 비해 웰스 타운의 지하는 협소하고 척박하기 그지없다.
베르덴이 말했다.
“그러니까 나를 통해 로아프라를 근거지로 삼고 싶다는 건가?”
“그럴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너에게도 나쁘지는 않을 거다. 동대륙 최대 암흑가의 주인인 너와 마탑에서 지원을 받고 용병 노릇을 하고 있는 나. 이렇게 말해도 뭔가 감이 안 잡히나?”
“전혀 안 잡히는데. 애초에 내가 네 밑으로 들어가서 뭘 얻을 수 있지?”
“뭐긴, 바로 목숨이지.”
켄드라스가 의자 옆에 놓여 있던 철퇴를 붙잡았다.
“네가 상당히 강한 마법사라는 건 알고 있다. 나름 왕이라는 칭호를 달고 있으니 말이야. 하지만 무수한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중앙 대륙에 비할 바는 못 되지.”
중앙 대륙.
세 개로 구분된 대륙 중 가장 거대한 땅이다.
“로아프라의 지배자? 암흑가의 왕? 그딴 허명에 지레 겁을 처먹는 건 수준 떨어지는 놈들뿐이다. 그래도 그 악명 하나만큼은 퍽 마음에 들어. 대도시 하나를 꿀꺽 삼킬 수 있는 것도 그렇고. 페이버를 가져왔다는 건, 이후에도 그만한 양을 가져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쿠웅!
철퇴로 바닥을 두드렸다.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리며, 하펜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베르덴을 크게 둘러쌌다.
“애셔, 너는 그론드란 놈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찬탈했다고 하지? 그러니까 선택해라. 나에게 칭호를 빼앗길지 아니면 내 밑에 들어올지.”
더 이상 대화는 없다.
힘을 위시한 협박이 베르덴을 겨냥했다. 켄드라스는 칼끝을 내밀며 복종을 강요했다.
톡. 톡. 톡.
베르덴이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들겼다.
“……쓸 만한 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시간 낭비 했군.”
켄드라스는 기회주의자이자 음습한 야심가다.
심지어 보헤미른 마탑에 대한 복수심조차 없다. 오직 이득을 따라 움직이는 족속이다.
베르덴이 찾던 인재와는 다르다.
저런 자가 세력을 이끄는 자들 중 하나라니…… 다른 지도자들도 직접 보고 판단하려고 했지만 기대감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솔직히 짜증이 치민다.
‘미들로스 자치령에 온 건 실수였나. 괜한 헛걸음을───’
그때, 감각이 번뜩였다.
“……?”
베르덴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지하에 가득한 마력 차단 장치 때문에 <마력감지>가 닿지 않았으나, 룬의 반지로 강화된 감각은 분명하게 무언가에 반응했다.
그 기묘한 기류를 눈치챈 건 켄드라스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의문을 내뱉은 순간, 거대한 진동이 지하를 울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굉음이 위쪽에서 반복해서 들려왔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앙!
천장이 박살 났다.
쏟아지는 피와 시체 조각들.
그 사이에서 무차별적으로 빗발치는 자색의 검기 속에서, 외견을 감춘 누군가가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기예, 신월(新月).
보랏빛 초승달이 쇄도한다.
정확히 베르덴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