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292화 (292/366)
  • 292화 선착 (2)

    미들로스 자치령의 도시에서 북동쪽 방향.

    눈이 내려앉은 두 개의 산과 사이에 있는 넓은 숲을 지나면 광활환 밀밭이 펼쳐져 있다. 자치령이 탄생하기 훨씬 전부터, 일대의 식량을 책임지고 있는 유구한 장소.

    그 중심에는 웰스 타운이라는 커다란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큰손, 제릭의 마차가 외곽으로 향했다.

    <투명화>를 사용한 채, 하늘 위에 떠 있던 베르덴이 거리를 응시했다.

    ‘평화로운 마을이군.’

    시민들 중 농부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데다가, 식량의 생산지인 덕분인지 굶주리고 있는 빈민도 보이지 않았다.

    사치스럽지 않은 풍족함.

    웰스 타운에 대한 베르덴의 감상이었다.

    히히힝───!

    이윽고 마차가 외곽의 목조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조심스럽게 내린 제릭이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 금속 자물쇠를 풀었다. 흙먼지가 묻은 쇠사슬이 끌리며 문이 개방되었다.

    벽면 곳곳에 피어난 거뭇한 곰팡이.

    조금만 세게 쳐도 벽이 뚫려 버릴 만큼 부패가 진행된 곡창이다. 누가 봐도 버려진 듯하나 바닥을 보니 그렇지 않았다.

    가득 쌓인 먼지 위에 새겨진 바퀴 자국과 상자의 테두리. 무언가를 끌고 옮긴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뭘 멀뚱멀뚱하게 쳐다봐? 도착했으면 어서 옮겨!”

    제릭이 명령하자, 마부들이 황급히 움직였다.

    마차에 실려 있던 물자가 하나둘씩 창고 구석에 쌓였다. 베르덴이 아공간에 수납했었던 페이버가 담긴 상자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순 작업이 끝나고 마차들이 마을 중심으로 떠났다.

    그렇게 곡창에는 제릭과 물건들만이 남았다.

    지면으로 내려가, 건물 내부로 들어선 베르덴이 <투명화>를 해제했다. 그를 본 제릭이 움찔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 이제 2시간 정도 지나면 물건을 가지러 올 겁니다. 귀찮고 지루하시겠지만 워낙 조심스러운 인간들이라서요. 평소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이곳에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약속 시간 그리고 장소에는 거래 당사자만 있어야 한다. 마차의 숫자나, 데려온 인력의 숫자도 정해져 있다.

    그보다 많아서도 안 되며 적어서도 안 된다.

    그게 규칙이었고, 제릭은 오늘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었다. 상대가 어떤 집단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위험해 보였으니까.

    괜히 심기를 거슬렀다간 국물도 없으리라.

    ‘하지만 이쪽도 마찬가지야……!’

    갑자기 찾아와 용병들을 전부 제압한 미친 마법사.

    만약 저항한답시고 개겼다가는 이렇게 멀쩡히 있지는 못하겠지. 어차피 말할 거 순순히 협조하는 게 최선이었다.

    당장 죽거나, 정보 발설로 나중에 책임을 묻게 되거나…….

    이제까지 모은 재산이나 들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당장 그럴 순 없겠지. 그러니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

    얼마 전까지 푼돈이나 벌며 살아왔던 제릭의 판단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앉을 자리가 없군요. 제가 상자를 몇 개 가져오겠습니다.”

    “필요 없다.”

    마력이 술렁이며 지형이 꿈틀거렸다.

    등받이까지 달린, 그럴듯하게 생긴 의자 두 개가 눈앞에 생겨났다.

    베르덴이 왼쪽 의자에 몸을 누였고, 쭈뼛거리던 제릭은 슬그머니 나머지 자리를 차지했다.

    베르덴이 굳게 닫힌 입구를 응시했다.

    ‘과연 어떻게 될까.’

    웰스 타운.

    솔직히 말해 세력 하나가 본거지로 삼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더군다나 켕기는 게 많은 제3의 세력이라면.

    노골적으로 감시하는 시선은 찾지 못했다.

    혹시 지하에 어떤 구조물 같은 것이 있나 싶어서 마력 감지를 사용해 봤지만, 딱히 잡히는 것도 없었고.

    ‘외부 마력을 차단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뭐가 됐든 간에 여기서 실마리를 잡아야만 한다.

    미들로스 자치령에서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했다. 이제 슬슬 성과를 얻을 차례였다.

    …….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낯선 인기척이 다가왔다.

    끼이이익.

    곡창이 열리며 세 명의 그림자가 들어섰다.

    부드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로브를 입은 마법사 무리. 가장 앞에 선, 비쩍 마른 사내가 충혈된 눈동자를 움직였다.

    제릭 그리고 베르덴.

    사내의 입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다.

    “약속에 없는 손님이…… 있군.”

    * * *

    베르덴의 마법적 감각이 반응한다.

    식량 창고에 찾아온 자들의 구성은 4위계 하위 한 명과 3위계 중위 두 명. 이곳 마을의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경지이며 모습이다.

    ‘정답이군.’

    보헤미른 마탑의 적대자들.

    마침내 제3의 세력과 접촉했다.

    사내의 고개가 위협적으로 기울었다.

    “제릭…… 이게 무슨 의미지?”

    “그, 그러니까 이쪽이 다, 당신들과 거래를 하고 싶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약속은 지키라고…… 하지 않았나?”

    한순간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사내를 비롯한 세 사람에게서 닥쳐 오는 살기에, 제릭이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힘없는 자의 비애였다.

    그때, 베르덴이 말했다.

    “듣자 하니 연초를 비싸게 매입한다고 하더군. 내가 가진 양이 꽤 되기도 하고, 따로 제의할 것도 있어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다.”

    “불청객은…… 받지 않는다.”

    “그거야 물건에 따라 다르겠지.”

    베르덴이 종이 막대기를 하나 던졌다.

    기껏해야 검지 손가락만 한 크기. 가볍게 잡아챈 사내가 뭐라 말을 하려다가, 그 정체를 알아채고는 눈썹을 씰룩였다.

    “이건…… 페이버?”

    당장 코에 갖다 대었다.

    쓰으읍. 특유의 쓴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슬쩍 베르덴을 흘겨 본 사내가 페이버를 입에 물었다.

    손가락 끝에서 피어오른 불길이 심지를 태우는 걸 보고는, 있는 힘껏 들이마셨다.

    “흡……!!!”

    검은 연기가 폐에 스며들자, 자연히 몸이 비틀렸다.

    일시적으로 확장된 혈관과 가속하는 혈류.

    깨어난 감각이 뇌를 사정없이 강타했다. 단번에 끝까지 페이버를 태운 사내가 입술을 핥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동자가 한층 더 붉게 물들었다.

    “확실한…… 진품이군. 뒤에 있는 저 상자들…… 전부 페이버인가?”

    “직접 확인해라.”

    사내가 <염동력>을 펼쳤다.

    페이버로 인해 증가한 마법 연산 속도.

    상자 하나가 날아가 그의 발 앞에 놓였다. 즉시 뚜껑을 잡아 뜯듯 치워 버리자, 페이버의 향취가 물씬 풍겨 왔다.

    어느새 적의는 사라졌다.

    사내에게서 남은 건 흥미와 관심이었다.

    “여길 찾아온 목적이…… 뭐지?”

    파는 게 목적이었다면 제릭을 경유했을 터.

    설마 수수료 아깝다고 직접 찾아온 것도 아닐 것이다. 고작 푼돈에 목숨을 거는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무엇보다 이만한 양의 페이버를 갖고 있다는 건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반증.

    베르덴이 말했다.

    “너희 쪽 머리와 독대를 희망한다.”

    “이유는.”

    “말 그대로 거래를 위해서다. 예를 들자면 페이버의 주기적인 공급이라든가.”

    사내가 전보다 크게 반응했다.

    연초는 유통이 문제일 뿐 재료만 있다면 제작이 가능하다.

    하지만 페이버는 아직 배합법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치밀한 분석을 끝내고 결론을 내리기 전까지는, 지금으로서는 오직 중앙 대륙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

    이미 연초 종류에 중독이 된 이들에겐, 안정적인 페이버의 공급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일 터.

    ‘물론 거짓말이지만.’

    베르덴은 그럴 능력도, 생각도 없다.

    페이버는 저들의 우두머리와 접촉하기 위한 미끼일 뿐.

    제3의 세력을 기반으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를 판단하기 위해서, 우호적으로 다다가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었다.

    무작정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보다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에.

    “공급…… 이라…….”

    사내가 중얼거렸다.

    몇 번이나 입맛을 다시며 페이버를 응시했다. 조금은 긴 고민을 끝낸 그가 질문을 던졌다.

    “네…… 이름이 뭐지?”

    “애셔.”

    베르덴의 벽안이 명멸했다.

    “가서 로아프라에서 왔다고 전해라.”

    * * *

    아그작. 아그작.

    과일을 씹어 먹는 소리가 공동을 울렸다.

    사람 몇 명이 앉아도 될 정도로 넓은 상석에, 거대한 체격을 지닌 사내, 켄드라스가 비스듬히 앉아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바구니를 비운 그가 트림했다.

    “꺼억, 적당히 먹을 만하네. 어쨌든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켄드라스가 턱을 내렸다.

    흉터가 남아 있는 목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느닷없이 찾아온, 로아프라 출신의 애셔가 페이버의 공급책이 되고 싶다 했다고? 하펜, 내가 이해한 게 맞아?”

    “맥락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사내, 하펜이 다가왔다.

    직전에 받아 온 페이버를 켄드라스에게 건네고는, 마법으로 자그만 불꽃을 피웠다.

    검은 연기를 들이마신 켄드라스가 몸을 움찔거렸다.

    우직! 순간 근육이 맥동하며 한쪽 팔걸이가 작살났다. 정신이 번쩍 뜨이며, 몸속에서 주체 못 할 힘과 기운이 끓어 넘쳤다.

    “품질이……! 하아, 꽤 좋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흠, 글쎄.”

    켄드라스가 입가를 문질렀다.

    “화산섬의 마탑 그리고 라리안 마탑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인물에겐 관여하지 말라고 했지만…… 페이버를 주기적으로 구할 수 있는 놈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불청객은 죽이는 것도 원칙이긴 하지만 배짱 좋게 직접 찾아오기도 했으니 넘어가도록 할까.”

    그리고.

    “오늘밤에 있을 연회도 가기 싫었는데, 뭐, 시간 죽이기로는 충분하겠군. 세드워디와 팔린에게 알아서 놀라고 전하고, 그 애셔란 놈도 내 앞으로 데려와.”

    “그럼 약속을 어긴…… 제릭의 처우는?”

    “나중에 바꾸든가 해. 그딴 잔챙이 신경 쓸 때가 아니니까.”

    고개를 숙인 하펜이 물러났다.

    홀로 남은 켄드라스가 자신의 철퇴를 들고는 붕붕 휘둘렀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철퇴에서 붉은 화염이 일기 시작했다.

    페이버로 강화된 감각이 여실히 느껴진다.

    그나저나.

    “소문으로 듣던, 새로운 암흑가의 왕이 찾아왔다라…….”

    그것도 페이버의 공급책이 되고 싶다며.

    상당히 흥미롭다.

    가볍에 몸을 푼 켄드라스가 히죽 웃었다.

    * * *

    해가 저물고 달이 천공에 떠올랐다.

    그동안 베르덴은 제릭이 지내는 여관에 머무르고 있었다.

    간단히 조촐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시계 바늘이 두 바퀴 돌 때쯤 페이버를 넘겼던 사내, 하펜이 찾아왔다.

    “여기에…… 타라.”

    창문은커녕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 감옥과도 같은 마차.

    단순히 보는 그대로 죄수 운반용은 아닌 것 같다. 아주 미세하게 마력이 느껴지는 걸 보아, 어떤 종류의 마법진이 안쪽에 새겨진 듯한데…….

    ‘보안을 위해서인가.’

    아무래도 상관없다.

    베르덴은 별다른 말없이 마차에 탑승했다.

    쿠웅. 철컥.

    바깥에서 문이 단단히 잠겼다.

    베르덴의 주위로는 새까만 어둠만이 가득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었는지 마차가 덜컹거리는 진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름 아늑하기는 하다.

    물론 이대로 순순히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저기 있군.’

    베르덴이 곧바로 숨겨져 있던 마법진을 발견했다.

    종류가 다른, 고도의 은폐 마법진 두 개가 서로 겹쳐져 합성된 상태. 언뜻 봐도 세간에서는 보기 드문 수준이며 조합이었다.

    두 마탑 중 한 곳에서 새긴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손끝에서 마력의 실을 뽑아냈다. 마법진의 파훼는 베르덴의 주특기 중 하나였다.

    쩌적, 쩌저적.

    완전한 파괴가 목적이 아니니 요추를 부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마력이 흐르는 경로를 파고들어, 일부 기능으로 향하는 마력을 일시적으로 차단했다.

    그와 동시에 마차 밖에서 소리와 진동이 느껴졌다.

    ‘준초월자가 된 이후로, 파훼가 더 빨라진 것 같은데.’

    두 번의 역천을 거쳐 완성된 육체.

    그에 내재된 마법적 감각이 한계를 벗어났기 때문이리라.

    베르덴은 새삼 자신의 경지를 실감하며 감각을 집중했다.

    마도왕의 마력 운용법으로 활성화된 마력이 은밀하게 뻗어 나가자, 어떤 창고로 보이는 건물 안에 들어와 있는 게 느껴졌다.

    더욱 범위를 넓히니 웰스 타운의 어딘가로 보이는 공간이 감지되었다.

    ‘바깥이 아니라 마을 안이라…….’

    목소리가 들려온다.

    ───켄드라스 님의…… 손님이다.

    ───예, 확인했습니다, 하펜 님.

    안경을 쓴 마법사가 벽 속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이제껏 감지되지 않았던 바닥이 주저앉으며, 지하로 향하는 길이 생겨났다.

    켄드라스를 포함한 세력이 숨어 있는 본거지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마력감지를 피할 수 있었지? 그러한 의문은 곧바로 해소되었다.

    마차가 그 길을 따라 지하로 직행하자, 베르덴의 마력 파장이 강하게 일그러졌다.

    ‘……이래서 못 찾았군.’

    이제 보니 마력을 차단하는 장치가 도처에 깔려 있다.

    조금만 떨어져도 외부에서는 파악하는 게 지극히 어려울 정도.

    심지어 강도가 약하긴 하나, 그 영향력은 지하 내부까지 확실하게 미치고 있다.

    ‘그래도 아케인으로 강화된 <마력감지>를 완전히 방해하는 수준은 아니다.’

    다만 안으로 진입하면서 감지 가능한 범위가 대폭 축소되었다.

    지금 타고 있는 마차 이상으로 마탑의 손길이 강하게 닿아 있어서 그런지, 확실히 마법적인 보안만큼은 예상보다도 철저했다.

    그만큼 이 세력이 두 마탑에게 있어서 적잖은 쓸모를 갖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정체불명의 검사와 알다미아의 광대.

    이런 방책 덕분에 자치령주를 납치한 놈들에게 아직 습격을 받지 않은 걸 테니.

    끼이익, 쿠웅.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들어온 입구가 닫혔다.

    베르덴이 탄 마차가 거칠게 질주하며, 먼 옛날에 만들어진 웰스 타운 고대 지하로 향했다.

    보헤미른 마탑의 용병, 소사이어티, 베르덴.

    제3의 세력을 쫓는 세력들 중, 목표물의 본거지에 선착(先着)한 건 베르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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