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단서 (1)
작금의 자치령의 행복도는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시민들의 삶이 열악해질수록, 상업은 축소되고 그들에게 붙어 기생하는 세력들 또한 힘들어진다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가져온 정보의 가치에 비례해서 성과급을 지급하겠다는 베르덴의 말은 하나의 법이 되었다.
“남서쪽에 있는 시장 지역은 어떻게 됐지? 누가 갔어?!”
“그게 티프가…….”
“그, 눈치 빠른 도둑놈……! 그 새끼가 탈탈 털어 가기 전에 가서 샅샅이 수색해! 당장!”
수백을 훌쩍 넘는 인원이 다급하게 움직인다.
평범한 시민, 경비병, 기사, 귀족 등을 찾아 조심스럽게 혹은 과감하게 묻고 또 캐냈다.
각자가 추구하는 방법대로 온갖 정보를 구하려 애썼고, 하다못해 제법 그럴듯한 소문이라도 손에 쥐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다.
물론 정보를 꾸며 내 돈을 받으려는 무리도 몇몇 있을 법했다.
그러나 이 중에 고의로 정보를 조작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유는 하나, 죽기 싫었으니까.
암흑가의 왕이라는 위명은 막강하다.
그와 더불어 앞서 두 조직이 주제 모르고 까불다가 완전히 박살 났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정보를 찾던 중 자연스레 알게 된 소식.
“마담 네레인이 북동쪽 언덕 거리로 향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죠?”
“먼저 선수를 쳤나……. 어쩔 수 없지. 그럼 우리는 남동쪽 3번 구역으로 향하지.”
“거긴 시아몬이 갔는데요.”
“X발!”
그렇기에 경쟁은 치열했으나 이렇다 할 분쟁은 없었다.
행동에 나선 여덟 세력들이 선착순이라는 암묵적인 규칙을 정하여, 사전에 활동 지역이 서로 겹치는 걸 차단했으니.
간혹가다 말싸움이 번지는 게 전부였다.
불필요한 마찰로 흐름이 끊기는 건 윗분의 심기를 거슬리게 할 게 분명하다는 걸 모두가 인지하고 있다.
그 대신 보다 중요하고 은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평생 하지 않았던 세력 간의 협력을 선택하기도 했다.
“돈이다! 돈!”
말로만 듣던 로아프라의 정점을 향한 두려움.
물리적인 형태를 갖추지 않는 정보로 막대한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감이 서린 공기. 실제로 돈다발을 쥔 채 기뻐하는 반응들까지.
며칠이 지나도 과열된 분위기는 식지 않았다.
몰래 뭔가를 하는 것에 서투른 세력이 대놓고 움직였더니, 이제는 자치령의 거주민마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정도였다.
그렇게 자치령 전체가 오랜만에 들썩이기 시작했다.
베르덴이 의도한 대로였다.
그런 와중에 낯빛이 하얗게 질린 두 사람이 있었다.
발다르와 프랭키.
주점에서 베르덴에게 덤빈 두 조직의 우두머리. 둘은 어두운 방 안에서 술을 들이켜며 음울한 대화를 나누었다.
“X부럴, 왜 하필이면 그때, 그 주점에 왕이 나타난 거지? 어쩌면…… 그래. 밀매상이 일부러 그런 상황이 벌어지도록 유도한 게 아닐까? 우리 X되는 꼴 보려고?”
“듣자 하니 그냥 우연이던데. 패드렐드가 자치령에 온 당일이었으니 제대로 들은 것도 없을 테니까. 애초에 우릴 적대시할 이유도 없고.”
“하핫, 그럼 그냥 운이 안 좋아서 암흑가의 왕에게 찍혔다고? 진짜 빌어먹을 인생이네.”
남 탓도 하고, 긍정적인 생각도 해 봤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브로디가 시비를 건 것도, 그걸 말리지 않고 구경하고 있었던 것도, 결국 무기를 빼 들고 덤빈 것도 전부 두 사람이 자초한 일이었다.
그저 평소처럼 행동했을 뿐인데…… 상대를 너무도 잘못 만났다.
벌컥벌컥.
단번에 술병을 비운 발다르가 입가를 닦았다.
“어이, 프랭키. 이대로 죽치고만 있을 거냐?”
“……뭐 어쩌자고.”
“우리도 나가서 할 일을 해야지, 분위기를 따라서.”
프랭키가 자조했다.
“하, 이 X랄이 났는데 무슨 할 일. 차라리 자치령에서 어떻게 도망칠지 궁리나 하는 게 더 생산적일걸?”
“명령을 무시하겠다고?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하겠다니, 그게 더 악수인 것 같은데.”
“X발, 그럼 우리가 뭘 할 수가 있는데? 다른 새끼들이 자치령 전역을 뒤지고 있는 마당에 주워 먹을 거라도 있을까? 기껏 구해 봤자 중복된 거겠지. 그냥 조용히 넘어가 주길 바라며 닥치고 있는 게…….”
“확실히 중복되면 의미 없겠지. 괜히 눈에 거슬릴 수도 있고. 하지만 만약 아무도 찾지 않은 지역이 있다면?”
순간 프랭키가 멈칫했다.
“뭐? 어디?”
“자치령의 지하 수로.”
발다르가 손가락으로 병마개를 따며 말을 이었다.
“몰래 확인해 보니 아직 누구도 들어가지 않았더군. 분명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던 거겠지. 그런 곳에 들어갈 바에, 차라리 사람 하나 붙잡고 물어보는 게 더 얻는 게 있을 테니까.”
“미친,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 그 더럽고 위험한 곳을 굳이 왜 찾아가? 그리고 들어가려고 해 봤자 시궁쥐, 렛츠. 그 새끼가 독 뿌리고 X랄 염병 할 텐데. 그거 감당할 수 있냐?”
“아니, 그건 루아스교의 성직자나 해독 포션이 없는 한 무리지. 아쉽게도 우리에겐 둘 다 없고. 하지만 너도 알 텐데? 꽤 전부터 시궁쥐가 실종되었다는 거.”
술을 들이켠 발다르가 입가를 비틀었다.
“지금 지하 수로는 비었다.”
“하지만 렛츠가 없어도 그 안에는 오물하고 이형종이…….”
“그래서? 우리에게 선택지가 있나?”
두 사람은 그날 주점에서 죽임을 당했어도 변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드넓은 아량으로 결국은 이렇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험한 말을 내뱉었던 브로디까지 말이다.
다만 그 자비가 언제 거두어질지는 모를 일.
“당장 내일이라도 목이 잘릴지도 몰라. 도망치려 했다간 그게 오늘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쓸모를 입증해야 한다. 내 말이 틀렸나?”
틀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정론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프랭키가 이내 한차례 턱을 까딱였다.
“……장화를 준비해 오지. X나 긴 걸로.”
* * *
정리된 서류들이 매 시간마다 찾아와 방 한편을 차지했다.
세 자릿수나 되는 인원이 필사적으로 움직이며 얻은 정보의 양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 확실하지도 않는 것들이 다수 섞여 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베르덴은 그러한 정보를 전부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
글씨 하나조차 잊지 않는 특유의 기억력. 다른 사람이라면 혼자서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졌다.
대조하며 분석한다.
베르덴 자신의 주관 대신, 자치령의 주민들의 시야에서 입각해 최대한 객관적인 논리를 통해 정보를 취사했다.
‘먼저 무지갯빛 여관.’
아쉽게도 그와 관련된 정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화재가 발생한 날, 여관의 경비를 맡았던 자들이 마치 실종이라도 된 듯 죄다 사라졌으니.
당시 부랑자가 몇몇 기웃거리긴 했지만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라고 한다. 마땅한 주거 지역이 없는 부랑자는 어디에서 발견되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사고가 아니라는 건 분명해 보이지만 명확한 건 없다.’
의심스럽지만 당장은 넘어갈 수밖에.
행동을 취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다음으로 마멘투스 상회.
이건 나름대로 수확이 있었다.
‘대부분은 쓰레기지만…… 몇 개 쓸 만한 게 보이는군.’
네레인은 사창가를 이용해 부유한 고객 및 귀족을 유혹했고, 티프는 도둑질에 이골이 난 자신의 세력을 이용해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나마 전문적인 정보 수집 활동.
그렇게 ‘마멘투스 상회 그리고 자치령주의 연관성’에 대한 단서를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요약하면 총 세 개.’
하나, 마멘투스 상회주는 사망하기 전, 자치령주와 개인적으로 수차례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그를 목격한 이의 말에 따르면 상회주의 얼굴은 굉장히 복잡했다고 한다.
둘, 마멘투스 상회주의 측근이 동쪽 주거 지역에 들락거린 적이 있었다.
로브를 두른 건장한 사내 둘이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자세가 꼿꼿한 것이 마치 ‘기사’ 같았다고. 시간이 지나 건물을 나온 측근의 얼굴은 매우 밝았다고 한다.
상회주와는 정반대로 말이다.
그리고 측근은 상회주와 같이 사망했다.
셋, 현재 상회가 소유한 모든 것이 빠르게 처분되고 있다. 어디선가 외압이 들어온 것처럼.
그렇게 급하게 팔린 땅과 건물 그리고 여러 지분의 일부는 자치령주가 구입하여 그의 손에 들어갔다.
이쯤 되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자치령주와 마멘투스 상회 간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걸 말이다.
그것도 아주 부정적인 의미로.
‘이건 심증만으로 충분하다.’
미들로스 자치령은 마탑들의 개입으로 독립된 영지.
하나 자치령이 형성된 이후에 손을 뻗은 보헤미른 마탑은, 그 힘과 권력으로 억지로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전전대의 자치령주로서는 거절할 수가 없었겠지.
현재에 이르러 자치령은 두 세대를 거쳐 그의 아들에게 넘어갔다.
본래라면 보헤미른 마탑과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어야 정상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랬다면 보헤미른 마탑이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마멘투스 상회가 이렇게 삽시간에 무너져 내리지 않았을 테니까.
무지갯빛 여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자치령주가 보헤미른 마탑을 버리고, 다른 두 마탑과 손을 잡았다는 뜻인가.’
자치령을 만드는 데 일조한 화산섬의 마탑과 라리안 마탑.
동대륙에 영향력을 뻗치고 있는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보헤미른 마탑이 손을 뻗는 걸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을 터.
그러니 보헤미른 마탑에 발생한 악재를 틈타, 그들의 영향력을 지워 없애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물론 두 마탑이 공식적으로 보헤미른 마탑과 반목하려 들진 않을 테니…….’
분명 제3의 세력을 이용하는 게 틀림없다.
보헤미른 마탑과 적대시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베르덴이 찾는 모종의 집단이 말이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장 유력한 가설이다.’
베르덴이 즉시 패드렐드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애셔 님.”
“지금부터 마멘투스 상회와 관련된 정보를 위주로 수집한다. 작은 정보라고 해도 성과급을 지급한다고 전해라. 그리고 너는 믿을 만한 자들을 모아 비밀리에 감시망을 만들도록.”
“감시망이요? 누굴 감시하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우리.”
강가에 숨은 물고기를 잡는 건 어렵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에 있다면 더더욱 그렇겠지.
그래서 상대가 다가올 수 있게 미끼를 던졌고, 사방에는 넓게 그물을 쳤다.
놈이 조금이라도 움직여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빠져나갈 수 없도록.
과연 자치령주가 잡힐까, 두 개의 마탑이 잡힐까, 제3의 세력이 잡힐까.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애셔 님, 미행이 붙었습니다.”
입질이 왔다.
* * *
“……뒷골목 놈들은 어떻게 됐지?”
“아직도 마멘투스 상회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상회주의 무덤이라도 찾아 파헤칠 기세더군요.”
자치령주가 미간을 좁히며 이마를 짚었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의 골을 아프게 하는 건, 골목에 널린 쓰레기들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존재였다.
로아프라의 정점.
새로운 암흑가의 왕이라 불리는 마법사 애셔.
‘대체 그자가 자치령에는 무슨 볼일이지? 아니, 그것도 뒷세력을 이용해서 뭘 알아내려는 거야?’
어째서 암흑가의 권좌에 앉은 작자가 마멘투스 상회에 대해서 캐내는 것일까. 그것도 이렇게 대놓고 말이다.
아마 자치령의 권위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말이겠지.
진짜 왕도 아닌 자가, 정식 귀족이자 영주인 자신을 능멸하다니, 불쾌감이 치솟았지만 그보다 강한 의문이 들었다.
갑자기 찾아와 저러는 이유를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이렇게 방해가 들어올 줄이야.
안 그래도 두 마탑이 빨리 일을 처리하라고 닦달하고 있는 마당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정신이 혼미했다.
기사, 렌티하가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기사단을 이끌고 직접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처리? 누굴?”
“그 가짜 왕 말입니다. 한낱 암흑가에서 군림하고 있는 자가 감히 영주님의 뒤를 캐다니, 자치령의 법으로는 사형해도 충분한 사유이지 않습니까.”
자치령주의 표정이 괴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기사 또한 귀족은 귀족이었다. 그 선민의식은 시야를 가리기도 한다.
그에 반해 자치령주는 상대가 가진 위험성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아무리 과장된 소문이라고 치부한다고 해도, 이렇게 단시간에 뒷골목 전체를 장악하여 움직이게 할 정도면 결코 간단한 존재는 아니었다.
“멍청한 소리는 그쯤 해 둬라, 렌티하. 괜히 로아프라의 왕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니까. 이건 너는 물론이고, 나 혼자서 감당하거나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자치령주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그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멀리 두 개의 첨탑이 시야에 비쳤다. 판단이 어려울 때는, 자신과 비슷한 권위를 지닌 타인에게 선택을 넘기는 게 책임을 피하기 쉽겠지.
“두 마탑과 상의하도록 하자. 그러니 둘을 불러라.”
자치령이 술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