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279화 (279/366)
  • 279화 소집 (1)

    베르덴이 마탑의 첨탑을 뒤로했다.

    회색 로브로 가려져 있는 무표정한 얼굴은 평소보다 밝은 색채를 띠고 있었다.

    고작 보헤미른 마탑의 휘장 하나를 불태운 것만으로도 후련하고 또 홀가분했다.

    뭐라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가.’

    역천을 이룬 지 2년 가까이 지났다.

    그사이 베르덴은 준초월자의 경지를 거머쥐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그에 걸맞은 여러 아티팩트를 손에 넣기까지…….

    큼지막한 사건만을 돌이켜 봐도 밀도 높은 삶이었다.

    그런 시간을 경험하고 나서야, 보헤미른 마탑의 흔적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아무도 없는 지부에 불과하다고 해도 격하게 반응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한낱 분풀이는 자연스러운 본능이었다.

    베르덴은 더없이 개운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잠시 행선지를 고민했다.

    지부를 벗어나니 당장 갈 곳이 없었다.

    근처를 둘러봐도 약간의 흥미조차 느껴지는 게 전무했다.

    얼마 전까지 머물렀었던 왕국의 수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있는 게 없었다.

    곧 생각을 마친 베르덴은 자치령의 북쪽으로 향했다.

    패드렐드가 추천한 주점, 주저앉은 와이번으로.

    * * *

    자치령의 동쪽에는 오래된 주거 지역이 존재한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가난한 시민들의 보금자리.

    주위에 가득 들어차 있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낡은 건물들은 시야를 불쾌하게 만들었고, 크고 작은 길목들은 마치 하나의 미로를 연상케 했다.

    변두리의 성벽은 무정하다 싶을 만큼 철저하게 햇빛을 가렸다.

    복잡하고, 춥고, 캄캄하다.

    뭔가를 숨기고 지키며 거래하기에는 적합했다.

    “읏차!”

    인적 없는 거리에 개조된 마차들이 세워져 있다.

    호위들의 삼엄한 경비 아래, 밀수꾼들이 마차에서 내린 상자들을 건물 안으로 옮겼다.

    아래에 감춰진 넓은 지하 창고에 차곡차곡 밀수품이 쌓여 갔다.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패드렐드가 말했다.

    “작업이 끝나고 나면 알아서 쉬고 있도록 하세요. 저는 잠시 중심가에 갔다 올 테니. 저녁쯤에 확인하러 한번 들르겠습니다.”

    “습격범들은 어떻게 하죠? 묻어 버릴까요?”

    “오엘 이하 여섯 명은 어디 도망가지 않도록 가둬만 두세요. 만약 경고를 했음에도 도망치려 한다면 한둘 정도는 죽여도 좋습니다.”

    “옙, 맡겨만 주시죠.”

    명령을 내린 패드렐드가 마차에 탑승했다.

    마부와 경호 역할을 한 호위 둘만을 동행시키고는, 주거 지역을 벗어나 임대할 건물을 직접 수소문했다.

    가능한 비싸고 안락한 것으로.

    얼마 후, 패드렐드는 조건에 맞는 물건을 하나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거 괜찮은데…….”

    쇠사슬로 문이 잠겨 있는 고풍스러운 저택.

    외벽에 붙은 식물 덩굴이 얼기설기 엮여 있다.

    정원에 있는 메마른 분수대는 금이 간 걸로 보아 제대로 작동할 것 같지가 않았다.

    좋은 풍경이라고는 빈말로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자치령에서 이 정도면 최상급이지.’

    중개인에게 얘기를 듣자 하니, 마멘투스 상회의 소유물이었다가 상회주가 비명횡사한 뒤, 얼마 전에 매물로 올라왔다고 한다.

    타 지역에서 온 마멘투스 상회는 뒤늦게 자치령에 정착했음에도, 보란 듯이 자리를 잡는 데 성공했을 만큼 경쟁력이 있었는데…….

    ‘조만간 자치령에서 상회 하나가 사라지겠군.’

    이곳에 몇 개 없는 저택까지 내놓을 정도라니.

    상회주가 모든 권한을 쥐고 움직였기에 단합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그 한 명이 사라진 결과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뭐, 패드렐드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중개인에게 물었다.

    “청소는 되어 있습니까?”

    “물론입죠. 겉은 이래 봬도 저택 내부만큼은 관리하고 있습니다. 당장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 15일 정도 빌리도록 하죠. 기간을 연장할지는 추후에 전달하겠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패드렐드가 돈뭉치를 꺼내 중개인에게 전달했다.

    저택이니만큼 임대료가 비싸기는 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품속에 있는 보석 주머니만 잘 처분해도 훨씬 남는 장사였다.

    ‘게다가 도움을 받기까지 했으니.’

    설령 손해라고 해도 비용을 아끼는 건 멍청한 짓이다.

    과한 절약은 언젠가 막대한 손해로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상대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면 더더욱.

    어쨌든 이걸로 건물은 확보했다.

    이제 자치령의 조직들을 소집하기만 하면 급한 일은 끝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측근, 메드핀이 찾아왔다.

    누추한 마차가 아니라 흑색으로 도색된 고급 마차가 저택 앞에 정지했다.

    패드렐드가 턱을 쓰며 마차를 훑어봤다.

    “호,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군요. 전보다 안목이 늘었습니다.”

    “승차감은 외관보다 더 좋을 겁니다. 비싼 만큼 돈값은 하더군요.”

    “잘했습니다, 메드핀. 그럼 애셔 님을 모실 마차도 준비가 됐고…… 가장 중요한 뒷골목 건은 어떻게 됐죠?”

    “셋 빼고는 모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대부분의 조직들은 패드렐드 님의 소집에 응할 거라고 예상됩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죠. 구미가 당기는 글을 써 보냈으니 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자치령의 세력들은 상하가 아닌 거래 관계.

    이유 없이 오라고 호출하면 절반 이상이 반발하며 거부할 게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아프라에 대한 언급을 하는 건 피해야 한다.’

    그랬다가는 절반은커녕 대부분이 소집에 응하지 않을 테니까. 자존심이고 뭐고 지레 겁먹고 몸을 숨기려 하겠지.

    강압적인 태도는 역으로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다.

    이렇듯 다루기가 까다롭다.

    그래서 희귀한 밀수품이 있다며 미끼를 던졌다.

    중앙 대륙에서 들여온 검은 연초, 페이버.

    그들의 흥미를 돋우기에는 충분한 물건이었다.

    물론 따로 판매처가 있어, 자치령 뒷골목에서 처분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애초에 판다고는 안 했으니.’

    약간의 기만행위이긴 하나 어쩔 수 없다.

    뭐가 됐든 로아프라의 지배자를 기다리게 하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나중에 그가 떠나고 난 뒤가 걱정이긴 하지만 감안해야 한다.

    패드렐드는 미래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내였다.

    “그런데 셋이 소집에 불참한 사유가 뭐죠?”

    “하나는 자리를 비웠는지 연락이 닿지 않았고, 나머지 ‘프랭키 패거리’와 ‘무쇠 주먹’은 서로 전쟁 중이라 바쁘답니다.”

    “둘이 전쟁이요? 왜요?”

    “소문을 들어 보니, 이번에 무쇠 주먹이 전직 용병 출신들을 영입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놈들과 프랭키 패거리가 제대로 시비가 붙었고요. 아직 죽은 사람은 없지만 경상자가 꽤 나온 걸로 봐서는 분위기가 꽤 험악한 것 같습니다.”

    흔하디흔한 사건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자존심 싸움이다.

    누구 하나가 숙이고 들어가면 곧바로 끝날 일이지만, 그랬다가는 자치령에서의 영향력이 축소될 테니.

    유치하지만 둘 다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뭐, 그래도 아예 사생결단을 낼 생각은 없는지, 오늘 협상을 한다고 합니다.”

    “오늘이라. 그나마 다행이군요. 지켜보고 있다가 협상이 끝나는 대로 연락책을 보내면 되겠습니다. 연락이 닿지 않은 하나는 내버려 두세요. 어차피 전부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패드렐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협상 위치가 어디라고 하죠?”

    “자치령의 북쪽에 있는 주점, 주저앉은 와이번이라고 합니다.”

    “아하, 주저앉───”

    멈칫.

    말을 멈춘 패드렐드가 눈을 깜빡거렸다.

    “X발, 어디라고요?”

    * * *

    주저앉은 와이번.

    자치령에서 평판이 좋은 주점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주점 전체를 점거한 이들이 서로를 노려본다.

    그들이 가진 장비의 수준은 절대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런 조잡함이 기세를 더욱 흉악하게 만들고 있었다.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원, 그 안에서는 두 사람이 하나의 테이블을 두고 앉아 있었다.

    무쇠 주먹, 대머리 발다르.

    어두운 거리의 골칫거리, 프랭키.

    뒷골목의 일부를 영유하고 있는 두 조직의 우두머리가, 당장이라도 상대를 죽일 듯이 시선을 마주했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내 부하들이 입은 육체적,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 230만 엘크만 내놔라. 그럼 전쟁은 여기서 끝이다.”

    “230만 엘크는 얼어 죽을. 정신이 나갔니? 어디서 근본도 없는 용병 새끼들 데려와서 이 사달을 낸 게 누군데.”

    프랭키가 옆을 쏘아봤다.

    팔이 부러진 전직 용병이 움찔했다.

    “나도 마지막으로 제안하지. 네가 직접 용병 새끼들 죽탱이 날리고, 보상금으로 150만 엘크 주고 끝내.”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을 병신으로 만들라고? 그럼 영입하는 데 썼던 돈은 네가 줄 건가? 그리고 보상금이라니. 딱 봐도 더 다친 건 우리 쪽 애들인데.”

    “그러게 누가 시비 걸라고 했냐? 누가 칼 들고 협박했어? 원인 제공은 너네가 했잖아, 어? 머리카락이 없어서 대가리가 안 돌아가니?”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 너겠지. 저번에 술 취해서 깝치다가, 나한테 처맞고 턱 으스러진 건 잊었나? 한 번 더 쪼개 줄까?”

    “쪼개 봐, X신아. 그 전에 손목을 확 잘라 버릴 테니까.”

    삽시간에 공기가 가라앉았다.

    찾아온 정적. 분위기를 감지한 몇몇이 무기에 손을 얹었다.

    협상이 결렬되는 순간 곧바로 칼부림이 일어날 거라는 건 자명했다.

    “제발, 바깥에 나가서 해…….”

    주점의 주인이 얼굴을 감쌌다.

    자신의 가게가 보상도 없이 박살 나 버릴 거란 생각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 아들인 종업원은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끼이익.

    주점의 문이 열렸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로 모여들었다.

    “…….”

    가게에 들어선 베르덴이 고개를 들었다.

    한 테이블에 앉은 대머리 남자와 입술에 흉터가 난 사내. 그리고 험상궂은 자들이 주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게 보였다.

    ‘사람이 많군.’

    감상은 그게 전부였다.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긴 베르덴이 바의 구석에 착석했다.

    가게 주인과 닮은, 종업원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말했다.

    “요리를 잘한다고 들었는데, 가장 잘하는 걸로 하나 부탁하지.”

    “네, 네?”

    “재료가 없으면 다른 걸로도 상관없다.”

    “아니, 재료는 충분한데요…… 혹시 저기 안 보이세요?”

    종업원이 슬쩍 손으로 가리켰다.

    그 방향을 따라가자 베르덴을 응시하는 무수한 눈동자가 있었다.

    짜증이 뒤섞인,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

    베르덴이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다.

    “뭐가 문제지?”

    “엇, 그러니까, 그게…….”

    “어이.”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턱이 뾰족한, 상당히 얄밉게 사내가 서 있었다.

    몸에는 솜옷과 싸구려 가죽조끼를 걸치고 있었고, 왼손으로는 끝부분에 금속을 덧댄 나무 곤봉을 쥐고 있었다.

    바닥에 침을 뱉은 그가 으르릉거렸다.

    “너 뭐냐? 오늘은 무쇠 주먹하고 프랭키 패거리 간의 협상이 있으니까, 주점에 아무도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전혀 못 들었다.

    그리고 무쇠 주먹하고 프랭키 패거리가 뭔데.

    대답이 없자, 사내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너 바깥에서 온 외부인이구나? 그러니까 겁도 없이 여길 찾아왔지. 아니, 그런데 들어왔을 때 딱 안 느껴졌냐? 이대로 들어가면 X될 거다 싶은 거? 혹시 눈치란 게 없는 건가?”

    위기감이라고는 일절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애초에 안중에도 없었다. 주점에 모인 무리는 그 정도에 불과했다.

    베르덴이 물었다.

    “용건이 뭐지?”

    “하, 새끼. 말하는 거 봐라? 그냥 보내 주려고 했더니……!”

    사내가 턱을 까딱였다.

    “당장 주머니에 있는 거 내놓고 꺼져, 멀쩡하게 돌아가고 싶다면.”

    느닷없는 협박이다.

    그러자 주인이 다가와 말렸다.

    “이, 이보게, 브로디. 외부인이지 않나. 모르고 온 걸 테니까 한 번만 넘어가 주게. 내가 술 한잔 살 테니…….”

    “술은 무슨. 저리 안 비켜?!”

    “억!”

    “아버지!”

    힘에 밀려난 주인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툭툭 팔을 턴 사내, 브로디가 나무 곤봉을 다잡고는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환호성이 들려왔다.

    “크하하하! 어이, 브로디! 살살해, 살살!”

    “아니야, 더 해! 더 하라고! 그 몽둥이로 두들겨 버리란 말이야!”

    협상의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몇몇은 휘파람을 불며 더한 폭력을 종용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발다르와 프랭키는 그 과정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봤다.

    결국 서로 전쟁을 벌였다간 둘 다 손해였으니까.

    지금은 잠시 열을 식힐 차례였다.

    주점 주인과 종업원은 걱정스러운 눈길을 베르덴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브로디가 흥분하며 히죽거렸다.

    “어이, 모두 기다리잖아. 빨리 안 움직여? 아니면 X발, 그냥 한 대 맞고 내놓을래? 응?”

    정제되지 않은 언어다.

    가만히 듣고 있던 베르덴이 가볍게 웃었다.

    주점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건 흔한 광경이다.

    바깥에서 도적에게 급습당하는 일도 찾아보면 허다하다.

    하지만 베르덴에게는 그 모든 게 생소했다.

    패드렐드와 움직이다가 습격을 받은 것도, 지금 이 주점에서 벌어지는 상황도 전부.

    설마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 줄이야.

    “꽤 신선하군.”

    “무슨 개소───”

    터엉!

    손끝에서 터져 나온 충격파.

    눈을 부릅뜬 브로디가 주점 입구로 튕겨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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