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마탑들
한때 미들로스 자치령의 영토는 주변 국가들의 큰 관심거리였다.
여러 아인종이 서식하는 숲이 근처에 있어 모험가들이 활동하기에 적합했으며, 여러 국가와 밀접해 있어 교역 혹은 침략에 용이했으니.
그리고 산을 두어 개 정도 넘으면, 전통적으로 넓은 밀밭을 관리하는 ‘웰스 타운’이 있어 기초적인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영토 중심에 있는 유일한 도시를 손에 넣기 위한 분쟁은 반복해서 일어났다.
리비안트 공국이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 왕국, 공화국, 도시 연합 등의 정보전에 이은 국지전으로 인해 땅이 피로 물들었다.
수습하지 못한 시체는 짐승과 마수, 아인종의 먹이가 되었다.
회수하지 못한 철제 무기는 고블린, 오크, 코볼트 등이 탈취해서 사용했다.
영토 분쟁은 단순히 인간만의 것이 아니었다.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환멸이 난 귀족 하나가 외부 세력, ‘동대륙의 마탑’을 끌어들였다.
───달라는 대로 줄 테니, 이 빌어먹을 영토를 독립시켜 주시오! 제발!
거래를 제안받은 마탑들은 흡족해하며 수락했다.
그 결과 5위계 이상의 마법사 그리고 마도사들이 파견되었고, 곧 분쟁은 종식되었다.
시체 더미로 둘러싸인 영토는 미들로스 자치령으로 명명되어 타국과 분리되었고, 마탑과 거래를 한 귀족은 자치령주가 되었다.
그것이 이 도시와 땅의 기원이었다.
이윽고 초대 자치령주가 사망하고 자손은 그 자리를 계승했다.
그렇게 여러 대에 걸쳐 수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럼에도 당시 마탑과의 거래와 관계는 이어지고 있었다.
바로 지금까지도.
“후우…….”
당대의 자치령주가 들뜬 숨을 내쉬었다.
고급 와인으로 얼룩진 향취가 후각을 기분 좋게 자극했다. 그러고는 오랜 시간 조리된 찜 요리를 향해 나이프를 뻗었다.
별다른 저항 없이 부드럽게 칼날이 스며든다.
이내 잘라 낸 고기를 한 입 깨물자 육즙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며 달짝지근한 소스의 맛과 하나가 되었다.
그야말로 진미.
“역시 질 좋은 고기를 써서 그런지 확연히 다르군요. 두 분께서는 어떠십니까?”
“훌륭합니다. 혀가 만족스럽군요.”
“맛이 좋구려. 재료도 재료지만 특히 주방장의 솜씨가 돋보이는군.”
중년의 사내, 에즈라와 눈가에 주름이 진 여인, 몰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둘 다 4위계의 벽을 넘어선 5위계급 마법사.
역대 자치령주와 유착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화산섬의 마탑’과 ‘라리안 마탑’에 소속된 자들이었다.
종합적인 마탑의 순위는 각각 6위와 8위로, 비교적 낮은 서열에 속하기는 하나 설령 최하위라고 해도 마탑은 마탑이다.
그들이 미들로스 자치령에 끼치는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자치령주가 활짝 웃었다.
“하하, 마음에 드신다니 참 다행입니다. 이게 다 화산섬의 마탑과 라리안 마탑이 베푼 은혜 덕분이니,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준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치령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거 사양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음.”
마탑의 마법사들이 히죽거렸다.
귀족의 아부는 언제 들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에즈라가 말했다.
“그나저나 마멘투스 상회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확인해 보니 아직도 자치령에 있는 몇몇 땅과 건물에 대한 소유권을 쥐고 있어서 말입니다. 무지갯빛 여관도 마찬가지고요.”
“현재 처리 중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 둘 다 보헤미른 마탑이 꽤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어서 눈치가 좀…….”
“하아, 이미 몇 번이고 말하지만 보헤미른 마탑은 신경 끄시구려. 서대륙에서 블랙 아워와 전면전을 벌이느라 바쁠 텐데 상회 지분 하나하나 따질 시간이 있기나 하겠소? 쯧.”
보헤미른 마탑은 자치령의 실질적인 장악을 노리고 있다. 서대륙과 중앙 대륙에 이어 동대륙까지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야욕.
미들로스 자치령의 기득권을 노리는 화산섬의 마탑과 라리안 마탑이 적대시하는 건 당연했다.
‘보헤미른 마탑이 블랙 아워에 신경을 쏟는 지금이 기회.’
놈들이 자치령에 뿌리 내린 기반을 뽑아내 근절하고, 서둘러 그 빈자리를 차지해야만 한다. 자치령에 대한 이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애초에 그를 목적으로 에즈라와 몰리가 파견된 것이다.
대륙에 걸친 마탑 간의 경쟁.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여도, 물밑에서는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누가 중재한다고 해서 말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시간을 단축시켜 보겠습니다, 두 분만 믿고.”
자치령주가 곧장 수긍했다.
일개 영주로서는 보헤미른 마탑을 배제하고 두 개의 마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최선이고 더 이득이니까.
젊은 나이에 자치령의 주인이 된 사내는 그저 자신의 안위만을 바랐다.
* * *
자치령의 거리는 왕국과 공국의 비해서는 확실히 뒤떨어져 있었다.
층수가 높은 건물은 몇 개 없었으며 노후화된 건물은 한둘이 아니었다. 조금만 살펴보면 곰팡이가 낀 벽면이 시야에 비쳤다.
뭐랄까. 마치 타운급의 마을을 그대로 가져다가, 대도시 수준으로 영역을 넓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발전하지 않는 도시라…….’
지나쳐 가는 시민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러면서도 좁은 골목길과 가능한 멀리 떨어져서 걷고 있었다.
치안이 좋지 않다고 여겨지던, 페르네가 거주하는 도시 아세른이 더없이 안전해 보일 정도였다.
터벅, 터벅.
길을 걷던 베르덴의 시야에 한 건물이 들어왔다.
마멘투스 상회.
상회주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피해가 매우 컸는지, 건물 안이 무척이나 고요했다.
지나가다 슬쩍 보니 고작해야 사람 한두 명이 입구를 오갈 뿐이었다.
우울한 자치령과 하나 된 분위기다.
아무래도 조만간 완전히 문을 닫을 듯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무지갯빛 여관도 볼 수 있었다.
뼈대의 절반이 채 남지 않은 전소된 건축물. 검게 그을린 잔해가 미약한 탄내를 풍기며 거리를 한층 더 어둡게 장식했다.
‘고작해야 급조한 울타리로 출입을 금지한 게 전부라니.’
불에 탄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음에도 치울 기미가 없어 보인다.
일부러 방치하기라도 하는 건가?
뭐가 됐든 전체적으로 거리를 바라봤을 때, 미들로스 자치령주와 귀족들은 도시 관리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에스퍼렌사 후작가가 보면 뭐라고 할까.
괜스레 그런 생각을 하며 나아가던 끝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
보헤미른 마탑의 지부가 코앞에 있다.
블랙 아워와의 전쟁으로 인해 죄다 서대륙으로 돌아간 탓인지,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구석에 쌓인 거미줄은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음을 의미했다.
입구에 다가선 베르덴이 손잡이를 잡았다.
금속 자물쇠와 보호 마법진으로 잠겨 있지만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콰득! 마법진은 요추가 박살 나며 한순간에 파훼되었고, 잠금장치는 <염동력>을 버티지 못하고 뜯겨 나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케케묵은 먼지 냄새가 가득했다.
바람을 일으켜 간단히 공기를 정화하고는 1층의 중심에 자리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다급하게 지부를 나갔는지 바닥에는 여러 서적과 필기 도구, 마석을 이용한 마법 물품 등이 굴러다녔다.
이윽고 베르덴이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기다란 휘장이 지부의 벽을 장식하고 있다.
어두운 진홍색 바탕으로, 동서남북에서 뻗은 황금의 곡선이 가운데로 모여들며 중심에 타원을 형성한다.
모든 원소를 아우른다는 의미를 가진, 보헤미른 마탑 고유의 상징.
자연스레 감정이 끓어오른다.
조용히 눈을 감아 인내하며 베르덴이 사고를 전환했다.
마멘투스 상회, 무지갯빛 여관 등은 보헤미른 마탑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기에 큰 사고를 당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당연히 우연의 일치는 아니겠지.
보헤미른 마탑주, 발로크 또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거기서 마탑주가 택할 수 있는 대응은 총 세 가지.’
인력을 파견하고 다시 영향력을 회복하거나, 무시로 일관하거나, 범인을 찾아 소리 소문 없이 지워 버리거나.
첫 번째는 배제해도 상관없었다.
자치령에 내린 기반이 피해를 입은 마당에 느긋하게 움직일 이유는 없을 테니까.
보헤미른 마탑은 온화한 조직이 아니다.
두 번째는 셋 중 가장 현실성이 있었다.
동력원을 상실한 것도 그렇고, 아무리 다른 마탑들이 조력한다고 한들 블랙 아워와의 마법전은 지속해서 벌어질 테니까.
여력이 없다면 당장 자치령에 일어난 사건을 무시할 수밖에 없을 터.
‘그리고 세 번째 대응책은…….’
주관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바로 마탑주의 성격 때문이다.
발로크가 가진 특유의 자존감은 감히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낸 자들을 결코 용서하거나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탑의 전력이 아닌 다른 세력을 고용해서라도.
어쩌면, 조만간 자치령에 폭풍이 닥쳐올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랬으면 좋겠군.”
베르덴이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역천의 마법진이 새겨진 마안이 번뜩였다.
화염에 휩싸인 휘장과 그 위에 새겨진 보헤미른 마탑의 상징이 삽시간에 타오르며 소멸했다.
단순한 분풀이.
텅 빈 지부를 찾은 목적이다.
‘마탑주가 무엇을 꾸미든 상관없다.’
앞길을 막는다면 역으로 무너뜨릴 뿐이다.
물론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은밀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베르덴은 발로크의 상상을 벗어난 존재였다.
등을 돌린 베르덴이 지부를 나섰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차갑게 식은 재가 휘날렸다.
* * *
동대륙의 북쪽 변방 어딘가.
누구도 살지 않는 험지에 방대한 마력이 방출되며 보랏빛 물결이 굽이쳤다. 직후 바닥에 마법진이 떠오르며 공간이 열렸다.
그 안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로크의 두 번째 제자, 레이셴.
그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장발을 머리 위로 묶고, 금속 마스크와 철제 갑옷으로 신체를 가린, 녹슨 검을 찬 사내가 시야에 비쳤다.
“여기가 동대륙이야. 스승님이 명령하신 거 정확히 기억나지?”
“알다미아의 광대. 자치령주. 적대 세력. 목격자. 몰살. 자멸.”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 안에는 어떠한 감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그 광대들하고 만난 다음에 지시대로 따르면 돼. 아, 혹시 누가 덤벼들면 반드시 죽여 버리고 목격자도 없애. 이해했어?”
“네.”
“진짜? 상대가 여자나 아이라고 해도 죽일 거야?”
“네.”
사내는 동일한 답변을 내놓았다.
마스크 위로 뚫린 두 개의 구멍에는, 주체의 의지를 상실한 하늘색 눈동자만이 선명하게 빛났다.
그를 본 레이셴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와, 아무리 정신을 붕괴시키고 그 위로 마법진을 엮었다고 해도…… 설마 그 천검의 반발력을 무시하고 세뇌에 성공할 줄이야. 내 스승님이지만 인격 모독이 참 심하시다니까.”
한층 더 스승을 존경하게 된다.
발전을 저해하는 도덕과 윤리를 무시하고, 오직 자신과 마법만을 위하는 향상심.
그야말로 레이셴이 추구하는 마음가짐이었다.
“……나도 더 본받아야겠어.”
레이셴이 굳게 다짐하며 공간 마법진 위에 올라탔다. 빛이 발광하며 마법진과 함께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숲속에는 홀로 남은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전(前) 중앙 대륙 4강.
천검, 아드리안 첸버스.
과거 초월에 근접했던 검사가 미들로스 자치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