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자치령으로 (2)
거대한 마차들이 가도를 질주하며 흙먼지를 일으킨다.
사적으로 개조하여 적재량을 극대화한 탓에 크기도 크고 무게도 장난이 아니다. 최소 말 세 필은 있어야 부드럽게 끌 수 있을 정도.
근지구력이 발달된 특수한 품종을 이용해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리고 길게 움직일 수 있다.
반대로 호위 병력이 탈 마필(馬匹)은 급작스러운 상황에 대비해 폭발적인 속도를 낼 수 있는 것들로 선별했다.
이런저런 유지비가 많이 들기야 하지만 필요한 소비였다.
한 번의 이동에 더 많은 짐을 실어 나를수록 수중에 들어오는 돈의 자릿수가 확연히 달라지니까.
수십 명으로 구성된 운송대.
이 근방에서 패드렐드는 밀매업계를 대표하는 상회와도 같았다.
하지만 결국 뒷세계에서 활동하는 이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접대용 마차 하나 사 놓을걸.’
금속과 나무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협소한 마차 내부는 먹구름처럼 칙칙함이 흘러 넘쳤다. 최대한 공간을 확보하고 청소를 했지만 짐마차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 밀매업을 하는데 호화로운 마차가 왜 필요하겠는가. 관리하기도 버겁고 쓸데도 없는데.
외부인을 태우는 건 기껏해야 시가에 따라 돈을 받고 불법 이민자들을 마을이나 도시에 데려다주는 게 전부다.
가끔씩 귀족이 찾아올 때도 있으나 딱히 신분의 의미는 없었다. 밀수꾼의 협곡에 왔다는 것 자체가 몰락하거나 몰락 예정이라는 뜻이었으니까.
개중에 패드렐드가 직접 상전으로 모셔야 할 영향력 있는 손님은 단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눈치가 보인다.
조용히 눈동자만 굴리던 패드렐드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이거 참, 누추해서 죄송합니다. 협곡에 이보다 좋은 마차는 없는지라…….”
“상관없다.”
베르덴은 익숙한 듯 벽에 등을 대었다.
고아원과 마탑의 일꾼으로 유년기를 보낸 그였다.
이제 와서 암흑가의 왕이니 명예 백작이니 따져 가며, 마차 하나에 유난을 떨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신분은 하나의 수단일 뿐.
베르덴이 마차의 틈새로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미들로스 자치령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했다. 그래도 현지에서 직접 활동한 적이 있는 너에게 듣는 게 보다 정확하겠지.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어떻지?”
“원래도 치안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꽤 심각합니다. 국소적으로 보면, 언데드 사태가 일어난 에스티리아 왕국 남부에 필적하거나 그보다 더 아래죠.”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마멘투스 상회주가 바깥에서 아인종에게 잡아먹히는 바람에, 자치령으로 향하거나 나가려 하는 상회들이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 탓에 식료품 가격이 몇 배나 올라 경기가 말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대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는 순간 돈을 빼앗으려는 무리가 접근할 정도니까요.”
“경비병은?”
“뇌물을 받고 못 본 척합니다. 자기들도 봉급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우니 뒷주머니를 찬 거죠. 뭐, 이것까지는 별거 아닌데…….”
패드렐드가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자치령에서 가장 비싼 무지갯빛 여관이 불에 타 버렸습니다. 주로 부유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터라 경비도 삼엄한 장소였는데 말입니다. 그 탓에 여관을 이용하던 손님들이 흩어졌는데, 소문을 듣자 하니 주머니가 무거운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놈들도 있다더군요.
무지갯빛 여관 전소, 마멘투스 상회의 죽음.
둘 다 보헤미른 마탑과 관련이 있어, 베르덴이 주목하고 있는 사건들이다.
“여관의 화재. 너는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라 보는군.”
“사고요? 하핫, 저도 무지갯빛 여관을 이용해 본 적이 있어서 아는 데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불씨가 될 만한 게 거의 없을뿐더러, 설령 우연히 불이 났다고 해도 금방 대처하는 게 가능했을 테니까요.”
물론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면 말이다.
“작금의 자치령의 상황. 여관의 화재가 일어났을 당시 경비의 부재, 비교적 안전하지 못한 장소에 있는 여관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자들을 습격하는 놈들까지. 적어도 제 관점에서는 사고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물론 까 봐야 알겠지만.
심증에 불과한 터라 슬쩍 말을 덧붙였다.
“그런 이유로 아인종을 토벌하러 온 모험가들 외에도, 다수의 용병이 자치령으로 유입되고 있습니다. 마차 호위나 신변 경호 의뢰로 한몫 챙기려는 속셈이겠죠. 사나운 놈들이라 제대로 시비가 붙으면 칼부림 나기 십상이라 분위기가 흉흉합니다.”
패드렐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와중에 자치령주나 귀족은 그저 관망하면서 제 잇속만 챙기고 있고요. 미들로스 자치령이 이렇습니다. 여행 지역으로는 절대 추천하지 못한 만큼 최악이죠.”
밀매상으로서의 솔직한 평가였다.
“그렇다면 음지에서 활동하는 조직의 몸집도 커졌겠군.”
“맞습니다. 이 업계에 오래 발을 담근 제가 봐도 이례적일 정도로요.”
“이례적이라…….”
베르덴이 본래의 목적을 상기했다.
미들로스 자치령으로 향하는 이유는, 동대륙에서 보헤미른 마탑에 적대하는 모종의 집단과 접촉하기 위함이다.
세력의 기반으로 삼을 가치가 있는지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하니.
‘하지만 그들을 찾아내려면 정보가 필요하다.’
여기서 베르덴은 로아프라의 지배자라는 신분을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 악명의 무게는 왕국만이 아니라 동대륙의 뒷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으니까.
로베르트에게 들은 대로라면, 자치령의 조직들은 베르덴의 명령 혹은 부탁을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온갖 정보를 모아 줄 수족이 되어 줄 터.
‘내가 직접 뛰어다닐 필요 없이.’
그런 면에서 패드렐드는 안내자로서 적합한 인물이었다.
밀매상이 쌓은 명성은 베르덴의 신분을 증명할 공신력을 갖고 있었으니까. 흩어져 있는 조직들을 불러 모으기도 쉬울 테고.
혼자 움직이는 것보다는 효율적이리라.
여러모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가치는 충분했다.
* * *
미들로스 자치령으로 향하는 길은 순조로웠다.
아인종에 대한 소문이 거짓은 아닌 듯, 모험가들이 몇 차례 토벌을 마친 숲에서 몇몇 아인종 집단이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습격을 가하는 일은 없었다.
패드렐드의 운송대의 규모가 크긴 했으니까.
본능에 따라 위험을 직감한 놈들은 슬그머니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쿠르르르릉.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 우렛소리가 들려온다.
굵은 빗발이 흙과 나무를 적셨다. 느닷없는 겨울비로 인해 마차가 감속했다.
어두워진 가도를 질주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모포를 두른 패드렐드가 슬쩍 바깥을 살폈다.
“이제 곧 자치령의 도시에 도착하겠군요. 다행히 이 날씨에 야영을 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악천후 속에서 잠을 청하는 건 결코 좋은 경험이 아니었다.
곧 도시에 있는 여관에서 여독을 풀 생각에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조용히 명상을 하고 있던 베르덴이 눈을 떴다.
“패드렐드.”
“말씀하십시오.”
“이 근방에 도적이 있나?”
도적?
패드렐드가 고개를 저었다.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없을 겁니다. 지금 상황에 바깥에서 머물면서 도적질을 했다가는 아인종한테 당할 테니까요. 그리고 주기적으로 토벌을 하러 오는 모험가들한테도 금방 발각될 거고요.”
“그렇다면 도적은 아니란 말이군.”
“?”
베르덴이 몸을 일으켰다.
마부석으로 나간 그가 주위를 바라봤다.
굳이 <마력 감지>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여실히 느껴진다. 은연중에 감도는 적의와 살의가 말이다.
‘그리고 마력까지.’
베르덴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쿠구구구……!
갑작스레 가도 위에 <석벽>이 솟아 올라왔다.
화들짝 놀란 마부가 고삐를 당겼지만 완전히 멈추기에는 거리가 부족했다.
“이, 이런!”
호위가 가도를 벗어나며 충돌을 피했다.
하지만 선두에 있던 마차가 벽에 처박히는 건 피할 수가 없었다. 뒤에 있던 마차들이 서로 뒤엉켜 난장판이 되는 것도.
바깥으로 머리를 내민 패드렐드의 동공이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지형 조작>
베르덴의 마안이 명멸했다.
길을 막고 있던 벽이 세로로 갈라지며 양옆으로 활짝 열렸다.
아슬아슬하게 충돌을 피하는 데 성공한 마차가 곧이어 멈춰 섰다. 대열이 흐트러졌지만 큰 문제는 없다.
흥분한 말들이 울부짖으며 투레질을 한다.
단검을 빼 든 패드렐드가 소리쳤다.
“습격이다! 마법사가 있으니 주의해라!”
갑작스러운 상황에 호위들이 눈을 부릅뜨며 사방을 경계했다.
밀수꾼들은 마차에 붙어 밀매품이 든 상자의 곁을 지켰다. 조직적인 움직임이었다.
“어떤 새끼들이 감히…….”
멈칫한 패드렐드가 몸을 돌렸다.
“아, 감사합니다, 애셔 님. 하마터면 코앞에서 마차를 잃을 뻔했군요. 덕분에 참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패드렐드는 솟아오르는 궁금증을 억눌렀다.
베르덴이 말했다.
“놈들이 노리는 건 네 화물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런 모양입니다. 그 외에는 달리 이유가 없으니까요. 마차에 계시죠. 놈들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패드렐드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을 겪은 게 한두 번은 아니라는 거겠지.
하지만 굳이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생포할 필요는?”
“네? 아, 예. 가능하면 한 대여섯 명 정도…….”
레인디아를 기동했다.
아공간에서 꺼낸 오리엔트를 손에 쥐고는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마력감지>
마도왕의 아케인으로 단점을 최소화한 기초 마법.
미세한 마력의 파동이 일대를 뒤덮었음에도 눈치챈 이는 없었다. 다시 말해 일정 수준에 오른 마법사는 없다는 의미.
저위계 마법사 몇 명과 경장 갑옷, 쇠뇌와 활, 검으로 무장한 집단이었다.
‘마차를 자빠뜨린 뒤 화살을 쏴 댈 생각이었나.’
숫자는 꽤 된다.
어차피 상관은 없지만.
베르덴이 하늘을 향해 스태프를 뻗었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작은 번개들이 빗살을 가르며 먹구름을 관통했다.
* * *
<석벽>으로 마차의 대열을 무너뜨리고 신호를 보낸다.
직후 가도의 양옆에서 패드렐드의 밀수꾼들을 벌집으로 만들고 습격하여 화물을 통째로 빼앗는 간단명료한 작전.
그리고 패드렐드가 데려온 귀족이 있다면 산 채로 사로잡아 비싼 걸 죄다 빼앗은 뒤 여흥거리로 삼다가 죽일 생각이었다.
부유함과 권력을 타고난 자들을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 기회는 살면서 거의 없었으니까.
여러 밀수꾼과 범죄자가 서로 힘을 합친 터라 전력은 충분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풀숲에 몸을 숨긴 오엘이 작게 중얼거렸다.
근처에서 소란이 들려오는 걸 보면 예정대로 마차는 멈춘 것 같은데…… 마법사가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동료들도 영문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어떻게 하지?”
“글쎄…….”
오엘이 쇠뇌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비가 내리는 어두운 숲.
습격하기에 알맞은 날씨이긴 했지만, 상대와 마찬가지로 시야를 제대로 확보하기 어려웠다.
입맛을 다시던 오엘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응?”
갑자기 번쩍거리는 무언가가 아래에서 위로 쏘아져 나갔다.
직후 회색 구름 사이로 모습을 감추는 순간 푸른 전류가 번쩍였다. 일순 어둠을 몰아내는 빛에 시선을 빼앗겼다.
마법에 깊은 지식이 없는 그들에게는 그저 장관일 뿐이었다.
쿼드라 캐스팅.
<낙뢰>
지상을 강타하는 네 개의 벼락.
그와 동시에 번개의 파도가 비에 흠뻑 젖은 습격자들을 덮쳤다.
비명은 없었다.
* * *
4위계 전격 마법, <낙뢰>.
오리엔트와 같은 마법 물품으로 강화된 위력과 범위다.
착탄 지점의 근방에 있던 놈들은 즉사했지만 잔류 번개에 휩쓸린,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놈들은 살아남았다.
손쉽게 적들을 배제한 베르덴이 오리엔트를 수납하며 등을 돌렸다.
패드렐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끄, 끝난 겁니까?”
“우측으로 가면 풀숲 사이에 여섯 명이 기절해 있을 거다. 알아서 회수하도록.”
베르덴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 남겨진 패드렐드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이내 심호흡을 한 패드렐드가 지시를 내렸다.
호위들이 당장 숲으로 들어갔다.
‘그론드를 죽인 마법사, 애셔.’
솔직히 말해 긴장은 했어도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험악함과는 거리가 엄청나게 먼 수려한 외모.
밀수꾼의 협곡에서 급류를 조작하거나 마법진을 사용한 건 대단하긴 했어도, 그 강대한 힘이 피부로 확 와닿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더는 아니었다.
제자리에서 상대방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
무려 네 개의 벼락으로 습격자들을 전멸시키다시피 한 살상력은 본 적이 없었다.
‘……이제야 실감이 나는군.’
자신이 동행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쏴아아아아───!
거센 빗발이 머리를 때린다.
겨울의 한기가 더욱 깊게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