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후일담 (1)
왕성 에스노렌엔 구둣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백금의 드레스를 입은 실리스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복도를 거닐었다. 인형으로 살아왔던 과거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히 발을 디뎠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듯 소란은 일지 않았다.
왕성을 지키는 병사와 기사, 심지어 재상 팔로란드까지, 제 발로 걷는 실리스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쿠웅.
실리스가 왕가의 침실에 들어섰다.
감히 누구나 접근할 수 없는 은밀한 장소. 사치로 가득한 호화로움 속에 에스티리아 왕과 1왕자 발르그나가 있었다.
의자에 마주 앉아 있는 두 사람.
시선을 대각선 아래로 향한 채 멍하니 눈을 뜨고 있다. 호흡과 깜빡임, 이 모두가 마치 기계처럼 규칙적으로 반복했다.
에스티리아 왕가의 피를 이은 자들이 한데 모였다.
잠시 말없이 공간을 바라보던 실리스가 다가와서는 작게 속삭이듯 목소리를 내었다.
“애셔가 떠났어요. 아바마마 그리고 오라버니.”
“…….”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실리스는 토해 내듯 한숨을 뱉어 냈다.
“새삼 이제야 끝이 났다…… 라는 기분이 드네요. 왕성이 이렇게도 넓은데, 단순히 한 명의 존재의 유무만으로도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니.”
마치 다크 워튼의 마탑주 같았다.
인형을 가장하고 있던 그녀를 단숨에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 그 서늘함은 여전히 감각 속에 남아 있었다.
확실히 마녀의 심장을 가진 레오닐과 비교해 보니, 넘을 수 없는 격의 차이가 존재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에 군림한다는 거겠죠. 고작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
“아바마마께서도 그런 비슷한 걸 바랐겠죠. 왕국을 넘어 대륙 전체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그 명성을 역사에 남길 위대한 왕이…… 어머니나 에스티리아 왕국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오라버니는 그런 아바마마에게 빌붙어 권력을 물려받고자 했고요.”
주제에 맞지 않는 과분한 욕심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 보이지 않는 피와 눈물은 강이 되어 흘렀다.
마음 같아서는 둘 다 죽이고 싶다.
그들이 비명 속에서 숨이 끊어지는 걸 보고 싶었다.
물론 직접 행동으로 옮길 생각은 없다. 실리스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고, 이 둘에게는 그에 걸맞은 역할이 있었으니까.
“이제부터 그 꿈을 바꿔 줄게요, 완전하게.”
실리스의 눈동자가 황혼으로 물든다.
가느다란 손끝에서 흘러나온 사특한 기운이 에스티리아 왕과 1왕자의 머리로 스며들었다.
이미 이지를 상실한 그들은 생각을 뒤덮는 꿈에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덜컥, 덜컥.
두 사람이 작게 발작했다.
머리가 떨리고 손과 발이 간헐적으로 움찔거린다. 육체가 온 힘을 다해 마녀의 마법에 저항했지만 소용은 없다.
주도권은 이미 빼앗긴 지 오래였으니까.
“으…… 어……!”
“끄윽…… 끅…….”
왕과 왕자의 주체가 상실한다.
하나 그들이 관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모두 실리스의 의지에 따라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음식을 먹는 것도, 걷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그리고 그 죽음까지도.
이게 그녀가 부여한 족쇄이며 형벌이었다.
그래도 두 사람에겐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내면이야 어떻든 겉모습만큼은 왕에 어울리게 살아가게 될 테니까.
실리스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그녀가 이룰 새로운 꿈이다. 마녀가 지배하는 에스티리아 왕국은 이전과는 달라질 것이다.
반드시.
* * *
오후의 날씨는 화창했다.
햇빛의 따뜻함과 겨울의 공기가 기분 좋게 어우러졌다.
칼리아는 앞에 놓인 차가 식는지도 모르는 채 오른손을 바라봤다.
푸른 보석이 박힌 팔찌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그를 응시하던 에스퍼렌사 후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그리도 좋으더냐.”
“선물을 받았는데 좋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너무 큰 의미는 부여하지 마라. 단순히 작별 선물일 가능성이 높으니.”
“……!”
칼리아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동요를 숨기지 못하는 모습에 에스퍼렌사 후작이 가볍게 혀를 찼다.
“쯧, 기껏 자리까지 만들어 줬건만, 거절당할까 두려워 제대로 말도 못 하다니. 검을 휘두를 때의 용맹을 그때도 보였으면 좋았을 것을.”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도 단계가 있는 법입니다.”
“도대체 언제 다시 만날 줄 알고. 늙어 죽을 때까지 단계만 밟을 건가?”
후작의 일침이 심중을 꿰뚫었다.
잠치 침묵하던 칼리아가 시선을 회피하며 차를 홀짝였다.
“그럼, 제가 찾으러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 걸 세간에서는 집착이라고 한다.”
“저는 지조에 가깝습니다.”
“네 생각이겠지. 애셔가 들으면 뭐라 생각할지 궁금하군.”
“아버지라고 해도 사람의 마음까지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성 한 번 만나 본 적 없는 너보다는 낫다.”
칼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뭐라 반박하려고 했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멍하니 입을 뻐끔거리다 홱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의 대화는 조금이지만 마음이 상했다.
후작과 그 여식.
이들은 고위 귀족이었으나 지금만큼은 평범한 부모와 자식이었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말들이 자연스레 나왔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마음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지도.
에스퍼렌사 후작은 이런 상황이 퍽 즐거웠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미련이 있다면 차라리 잡아 보기라도 했어야지.”
“……저는 걸림돌 같은 건 되기 싫습니다.”
애셔에게는 목표하는 바가 있었다.
응원해 주지 못할망정 앞길을 막아서려 하는 건 결단코 할 수 없었다. 칼리아는 언젠가 보았던,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는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렇다고 지금 제가 가진 힘으로는 도움을 주기도 어렵습니다. 많이 미숙하니까요.”
“그건 그렇지.”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께 부탁이 있습니다.”
서로가 시선을 마주했다.
검붉은 눈동자에는 확고함이 담겨 있었다.
“로아프라에 파견되는 중재자, 그 역할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
후작이 미간을 좁혔다.
일순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저의가 무엇이냐.”
“제 부족한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능력이라.”
단어를 한번 되뇐다.
생각을 마친 건 찰나였다.
“네가 성장하고 싶다면, 그 길은 무수히 많다. 나와 멜자르드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지. 아니면 오라비들처럼 서대륙에 유학을 가면 어떻겠느냐. 네 어미도 거기에 있으니 외롭지는 않을 텐데.”
“저는 아버지께 배우고 싶습니다.”
“흠…….”
후작이 팔걸이를 툭툭 두들겼다.
“사람을 다스리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빈테르트의 지배 아래에 있던 암흑가의 세력들은 더욱 그렇겠지. 하물며 로아프라는 특성상 에스퍼렌사 후작가를 경계할 터. 단순한 강경책이나 회유책은 먹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섣불리 적대하려 하지는 않겠지만…… 강하게 억압한다면 저마다 품고 있는 발톱을 휘두를 거다.”
“그래서 해 보려고 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칼리아의 각오는 굳건했다.
어려운 줄 알면서도 도전을 해 보겠다라.
자리에서 일어선 후작이 창가에 다가섰다. 저택의 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모한 결정이다.”
“반란을 일으킨 아버지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정확한 반박에 후작이 피식 웃었다.
역시 그의 성격을 짙게 물려받은 건 다름 아닌 칼리아였다. 그러니 저 고집을 억지로 꺾을 수는 없으리라.
뭘 해도 전혀 소용없을 테니까.
과거의 후작 또한 그러했다.
“좋다, 허락하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대신 로아프라로 파견되기 전, 내년 상반기까지 나와 멜자르드와의 대련을 통해 수준을 더욱 끌어올려야 할 거다. 적어도 암흑가에는 무력보다 더한 억제력은 없으니까.”
바라던 바였다.
칼리아가 미소를 머금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로아프라에 파견될 중재자가 결정되었다.
칼리아 드 에스퍼렌사.
그녀는 제자리에 멈춰 있지 않을 것이다.
* * *
“지나갑니다! 지나가!”
“야! 거기 무너지지 않게 조심해!”
도시 아세른.
사람이 많이 오가는 중심가에서 수십 명의 인부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평수가 넓은 5층짜리 건물을 드나들며, 외관과 내부 인테리어 작업에 한창이었다.
공사 현장의 맞은편에 있는 카페.
바깥이 훤히 보이는 테라스에 자리를 잡은 페르네가 티타임을 즐겼다. 한낱 빚쟁이에서 값비싼 건물의 주인이 된 여유로움이었다.
그와 더해서 에스퍼렌사 후작가에 영입된 정보상. 앞으로 돈이 부족할 일은 없을 터였다.
‘사람 하나 만났을 뿐인데.’
고작 1년도 안 된 사이에 이렇게 되어 버렸다.
심지어 그녀뿐만 아니라 왕국 전체에 걸쳐 영향력을 끼쳤다.
다사다난하기도 했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을 때도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즐거웠다. 작별 인사를 건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때가 그리웠다.
“애셔 님은 지금쯤 어디에 있으려나…….”
생각해 보니 목적지를 안 물어봤다.
전에 서대륙 신문이나 동대륙의 정보를 구해 달라고 했던 걸 보면, 대륙을 이동하려는 걸지도 모르겠다.
뭐가 됐든 잘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 참.”
문득 잊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애셔 님을 소개해 준 페일 선배에게 편지를 안 썼네.’
딱히 보내지 않더라도 상관없지만 기분의 문제였다.
어떻게 보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니까. 만약 도움을 받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삶은 누리지 못했으리라.
그때, 품속에서 푸른빛이 반짝였다.
그를 본 페르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래 있으니까 갑갑하다고? 그래, 나도 마침 나가려고 했어. 그런 김에 산책이나 하고 갈까?”
불규칙적으로 빛이 명멸했다. 격한 긍정이라는 의미였다.
뭐라 말로 표한할 수는 없지만…… 최근 들어 블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보다 직관적으로 말이다.
‘더 친해졌다는 거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페르네가 카페를 떠났다.
* * *
리비안트 공국의 북부 그레이.
온갖 정보상들이 비밀리에 의뢰를 받고 연결하는 음지는, 매우 혼란스러운 몇 달을 보낸 끝에 마침내 정상화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정상에는 한 사내가 있었다.
“후우, 드디어 쉴 수 있겠군요.”
정보상 페일.
베르덴이 처음으로 만난 그레이의 정보꾼이다.
본래 남부의 터줏대감이었던 그는 난잡해진 상황 속에서 활동 범위를 넓혔고, 그 결과 북부에 단단히 뿌리를 박는 데 성공했다.
북부와 남부를 아우르는 정보상.
현재 공국의 그레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건 페일이었다.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눌러 어루만진다.
정보상 간의 알력, 귀족과의 거래, 의뢰를 수행할 인력의 관리 등. 푹 잠을 자 본 지도 오래되었다.
‘애셔 님이 있었다면 편했을 텐데.’
페일은 잿빛 머리의 사내를 떠올렸다.
공국을 어지럽게 만든, 가드란 후작가의 멸문에 일조한 마법사.
에스티리아 왕국에 있는 후배, 페르네에게 소개장을 써 준 이후로 영 소식을 듣기가 어려웠다.
‘뭐, 당연한 거겠죠.’
에스티리아 왕가는 공국과 물질적인 외교를 하면서도 정보의 단절을 강경하게 추구했으니.
물론 하고자 한다면 그 틈새를 파고들 수는 있지만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고.
그대로 최소한의 정보는 접하고 있다.
왕국에 일어난 언데드 사태. 그리고 내전이 끝나고 1왕자의 대관식을 마쳤다고. 아마 공국 이상으로 혼잡했으리라.
그만큼 의뢰도 많았을 테고.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출입을 허락하자 페일의 측근, 붕대를 두른 사내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죠?”
“페일. 님에게. 편지. 가. 왔습니다.”
“네? 편지요?”
고개를 갸웃거린 페일이 봉투를 받았다.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편지. 뒷면을 살피자 아래에는 ‘옛 후배’라는 이름의 발신인이 적혀 있었다.
이런 걸 쓸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필체군요.’
아무래도 잘 지내는 것 같다.
페일이 과거를 떠올리며 봉인을 풀었다.
[페일 선배에게.]
편지지 바깥에 쓰여 있는 수신인.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페르네 특유의 습관이다.
작게 웃음을 머금은 페일이 조심스레 편지를 열었다.
[애셔 님 소개해 줘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글씨가 빼곡하게 차 있다.
소름이 느껴질 정도로, 대부분의 내용이 감사로 가득하다.
표정이 굳은 페일이 눈을 깜빡였다.
“뭐죠, 이거?”
* * *
미들로스 자치령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리고 길도 험한 편이며, 최근 아인종 범람으로 인해 전혀 안전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호위 없이 마차로 움직이는 건 목숨을 운에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베르덴은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다.
마차를 이용하지 않고 하늘로 움직이면 되며, 혹여 아인종이 습격한다고 해도 상처 하나 없이 대처할 능력도 갖추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 혼자 움직일 수는 없다.’
로베르트의 정보에 적혀 있던, 미들로스 자치령에 있는 세력.
그들을 이용해 정보를 수집하려면 베르덴의 신분을 증명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혼자서도 가능하기는 하나 여러모로 번거로울뿐더러 적잖은 시간이 걸릴 테니.
말인즉슨 안내자가 필요하다.
그와 더해서 자치령까지의 길을 단축시킬 수 있는 사람이 말이다.
베르덴은 적한한 인재를 한 명 알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한번 만나 본 적도 있었다.
‘암상인 클란드. 아니, 세바스의 의뢰였었지.’
칼리아에 의해 플리쉬르 백작이 구속당했을 당시.
그 관계자 중 조합의 일원이나 귀족의 기사 등 도망친 몇몇 이들에게서 특정 물건들을 가져와 달라는 의뢰였다.
보수로 4억 엘크를 받은 기억이 선명하다.
이윽고 밀수꾼의 협곡에 도착했다.
왕국 북쪽 미들로스 자치령과의 국경에 가장 인접한 장소.
‘전에 봤을 때와 변함없군.’
겨울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깊은 산맥이라서 그런지 다른 장소보다 싸늘한 공기가 흐른다.
추위를 막기 위해 두터운 가죽옷을 입은 자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화아아아악!
베르덴이 급격하게 고도를 낮췄다.
정문을 무시하고 협곡 입구로 들어서는 장소에 곧바로 착지했다.
난데없는 등장에 당황한 시선들이 모여들었고 이내 모든 밀수꾼이 무기를 겨냥했다.
“비, 비상! 침입자다, 비상!”
베르덴이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아인베르의 후드(Hood)가 빛이 되어 사라졌다.
“……어?”
잿빛 머리칼, 벽안 그리고 외모가 무수한 시야에 비쳤다.
그를 본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이전에 본 적이 있기도 하지만 이후의 소문 또한 들려온 지 오래였다.
그론드를 죽이고 로아프라의 왕좌에 앉은 마법사의 정보에 대해서. 그리고 왕으로 불리기 싫어하는 새로운 지배자에 대해서.
“밀매상 패드렐드는 안에 있나?”
베르덴이 나지막이 물었다.
뭐라 대하기 어려운 존재감이 공기를 가라앉혔다.
본래 밀수꾼의 협곡에 기약 없이 찾아온 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척살한다.
보안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특히나 협곡의 우두머리인 패드렐드가 불청객을 혐오했기 때문이었다.
밀수꾼의 협곡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관례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네, 애셔 님. 지금쯤 협곡 아래에서 자고 있을 겁니다. 당장 멱살 잡고 데려오라고 전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내가 직접 가지.”
“앗, 그러십니까. 그럼 제가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콧수염 난 밀수꾼이 굽신거렸다.
어느새 협곡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열려 있었고 이미 경비병들은 무기를 거두었다. 그저 웃으며 베르덴을 환영했다.
세금을 지불하지 않고 자치령과 왕국을 오가는 밀수의 전문가들. 이들에게 눈치란 곧 생명 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