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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찢는 천재마법사-271화 (271/366)

271화 준비 (2)

“야이 씨…… 좀 평범하게 깨우면 어디가 덧나냐?”

얼굴을 찌푸린 갈리아크가 이마를 긁적였다.

끝부분이 금속으로 장식된 술병에 제대로 얻어맞았지만 당연하게도 상처가 나기는커녕 불그스름해지지도 않았다.

타고난 용력과 그에 못지않은 신체 내구도.

철제 곤봉으로 후려쳐도 끄덕하지 않을 것이다. 이형종과 치고받으며 험난한 모험가 생활을 해 왔으니.

저런 불평은 단순히 인삿말에 불과하다.

털썩.

베르덴이 빈 의자에 착석했다.

근처에 굴러다니던 물통을, 냉기로 차갑게 식힌 뒤 가볍게 옆으로 던졌다.

궁시렁거리며 자세를 고친 갈리아크가 손을 뻗어 잡아챘다. 소파에 등을 누이고는 시원하게 물을 들이켰다.

“크으.”

한바탕 목을 축인 도살자가 양팔을 소파 머리 위에 걸쳤다.

탁상 위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는 느긋한 자세로 턱을 까딱였다.

“그래서. 일은 다 끝냈냐?”

“보다시피.”

빈테르트를 통해 베르덴을 표적으로 삼았던, 궁정 마법사단장 레오닐을 처리했다는 간단한 이야기.

물론 실리스나 마녀와 같은 왕국의 내막에 대한 건 제외했다. 그런 비밀을 떠벌릴 정도로 베르덴은 입이 가볍지 않았다.

이런저런 설명을 길게 이어 붙이는 게 귀찮기도 했고.

갈리아크는 자세히 묻지 않았다.

대신 낄낄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이야, 빈테르트도 모자라, 이제는 6위계 마도사까지? 너 솔직히 말해. 사람이 아니라 이형종이지? 꼴랑 언데드 하나한테 빌빌거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인간이라고 해야 할까.

관리자의 말대로라면, 준초월자에 들어섰으니 통상적인 인간의 범주를 반쯤 넘어섰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

깊게 생각해 봤자 바뀌는 건 없으니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그때 먼저 기절한 건 너 아니었나?”

“X발, 뒤지게 얻어맞으면서 기회를 만들어 줬더니 말하는 본새가 아주.”

우두둑.

머리를 기울인 갈리아크가 목 근육을 풀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도살자는 시원하다는 듯, 이어서 가볍게 팔을 뻗으며 몸을 풀었다.

약간 있던 숙취마저 그새 날아간 모양.

“어쨌든. 그럼 왕국에서 최강이라는 놈도 잡았겠다, 이제 여기서 눌러살 거냐?”

“아니. 이제 슬슬 떠날 생각이다.”

“왜? 진짜 왕은 못 돼도 암흑가에 눌러앉으면 평생은 놀고먹겠구만.”

“그럴 생각이었으면 이미 정착했겠지.”

단순히 편한 인생을 보내려고 한다면 선택지는 많았다.

리비안트 공국에 남아, 고위 귀족의 전속 마법사가 되기만 해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애초부터 그런 평화를 바란 적은 없었다.

베르덴의 진지한 태도에, 갈리아크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크하하하하! 그래, 그래! 그렇게 안주하며 사는 데에 대체 무슨 재미가 있겠냐? 근육이 약해지고 관절이 삐걱거릴 정도로 늙은 뒤라면 모를까, 이 젊은 나이에 안식처를 찾는 건 X신이지. 차라리 이 도끼로 내 머리를 쪼개는 게 더 낫겠군.”

갈리아크가 한손 도끼를 집어 들었다.

사람의 얼굴쯤은 간단히 움켜쥘 수 있는 커다란 손에 핏줄이 돋았다.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도끼가 들썩이며 회전했다.

근육질의 거체를 가졌음에도 뛰어난 손재주였다.

“그런데 왕국 떠나서 뭘 할 건데?”

“내가 할 일을 하러.”

“그럼 모험가는 아니겠구만. 그 정도면 미스릴 등급은 반쯤 생략하고 그 위까지 올라갈 수 있을 텐데. 씁, 아깝긴 하네.”

모험가 길드의 최정상, 흑요 등급.

존재 자체만으로 외부 세력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막강한 억제력이 되는 길드의 최고 전력이다.

그런 만큼 대우는 압도적일 터.

갈리아크가 슬쩍 떠봤지만 베르덴은 꿈쩍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모험가 길드에 속할 생각은 없었다. 안 그래도 이미 방주라는 조직에 속할 예정이기도 하고.

“뭐, 싫음 말고.”

흥, 코를 씰룩인 갈리아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충 쓰레기를 옆으로 치우고는, 베르덴에게서 싼값에 구입한 방어구를 착용했다. 훼월과 한손 도끼를 각각 등과 허리춤에 매었다.

“지금 떠날 건가?”

“조만간 길드한테 징계받은 것도 끝나니까. 지금쯤 여유롭게 휴가 보내고 있는 고드하고 네리엔 찾아서 재결합해야지.”

갈리아크는 사람다운 모험가다.

약자를 멸시하고 적에겐 자비가 없는 거친 성격. 하지만 강자에게는 호의를 보이며 자신의 동료는 곧잘 챙긴다.

도살자라는 흉악한 이명이 붙기는 했어도 제 사람은 챙길 줄 아는 사내였다.

“아, 그러보 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 그 드레이큰이라는 놈은 어떻게 되는 거냐? 네가 떠나면 자연히 에스퍼렌사 후작가가 이곳으로 올 테니까…… 빈테르트 간부로서 사형인가?”

“당장 죽지는 않을 거다.”

타락한 모험가, 드레이큰.

그는 이번 내전에 참가해 1왕자 발르그나를 돕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거의 로아프라에 처박혀 지내 왔다.

적어도 왕국에서는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뜻. 로베르트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다.

물론 차후에 어떤 행동을 하는지 지켜봐야겠지만 반드시 처형대에 올라갈 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지?”

“잠깐 보고 가려고 하는데, 어차피 죽을 거라면 내가 직접 목을 잘라 주려고 했지. 그 새끼도 한때는 모험가였으니, 응? 동업자 마인드로다가.”

갈리아크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오우거도 저런 얼굴은 아닐 것 같은데.

“아니면 됐고. 그럼 난 이만 갈 테니까, 잘 지내라고. 객사는…… 아니, X발. 저 새끼가 객사할 리가 없나.”

갈리아크가 중얼거리며 입구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아당기던 순간, 베르덴이 마력을 일으켰다. 갈리아크가 며칠간 어질러 놓은 쓰레기들이 한곳에 모였다.

“배웅은 이걸로 대신하지.”

“허이구, 황송해라.”

갈리아크가 대충 손을 휘저었다.

낮은 웃음소리와 묵직한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 * *

중상을 입은 드레이큰은 한동안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만 했다.

전신을 얻어맞은 탓에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파괴되기도 했지만, 회복이 지연된 건 복용한 마약 때문이었다.

신체 강화와 정신을 안정시키는 효과.

대신 강한 중독성과 후유증을 남기는 부작용.

지금까지는 워낙 신체도 강인했기에 이렇다 할 문제를 느껴 본 적은 없었으나, 약해진 현재로선 그 대가를 피할 수 없었다.

독한 술이라도 마신다면 통증이 덜할 텐데.

치료를 맡은 루아스교의 성직자가 엄금이라고 했기에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겨우 몸을 일으키는 데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서야 목발을 짚고 겨우 걷는 수준까지 되어, 오래만에 바깥에 나가 볼 생각이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아직도 빌빌거리다니. 생각보다 약골이구만?”

난데없이 갈리아크가 나타났다.

드레이큰의 퀭한 눈동자가 앞을 향했다.

“……여긴 무슨 일이지?”

“아직 안 가져간 게 있어서.”

갈리아크가 목을 가리켰다.

목적은 드레이큰이 차고 있는 미스릴 플레이트. 황당했지만 저항해 봤자 곧장 중상자가 될 뿐이다.

드레이큰에겐 다시금 전투를 벌일 여력이 없었다. 아직은.

투둑.

플레이트가 걸린 목걸이를 뜯었다.

잠시 바라보고는 주저 없이 상대에게 내던졌다.

“가져가라.”

“순순히? 재미는 없긴 한데…… 흠, 어쩔 수 없지.”

갈리아크가 입가를 비틀었다.

불법 플레이트, 그것도 미스릴 플레이트를 손에 넣었다. 이걸 길드에게 가져다주면 아주 큰 실적이 될 터.

여러 번 사고를 쳐 여러모로 평판이 깎이기는 했지만, 이게 있다면 만회는 물론이고 단번에 뒤집을 수 있겠지.

백금 등급을 벗어날 날이 그리 머지않았다.

드레이큰이 말했다.

“뭐가 그렇게 기쁜 거지?”

“전직 미스릴 등급을 잡고, 내가 더 강해졌다는 게 증명되었으니까.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더 강해졌다라. 하, 의미도 없는 걸 추구하는군.”

드레이큰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확실히 너는 강자의 수준에 있다. 최소한 지금의 나보다는 그렇겠지. 하지만 이 세상에는 불가해한 것이 득실거린다. 그론드를 압살한 애셔란 마법사처럼…….”

드레이큰은 유망한 모험가였다.

세상을 주유하며 여러 아인종과 이형종을 토벌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깨닫고 말았다.

목숨을 바쳐도 닿을 수 없는 경지와 미스릴 등급인 자신을 벌레처럼 죽일 수 있는 막강한 존재들에 대해서.

그래서 로아프라를 찾았다.

그론드라는 막강한 강자, 나름 괴물이라고 할 만한 재능과 힘을 가진 지배자가 다스리는 지하 도시에.

세상과 어느 정도 단절된 장소.

한낱 벌레가 아닌, 드레이큰이 인간이자 강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공간. 그렇게 믿었기에 망설임 없이 빈테르트에 들어갔다.

당당히 경비 계열의 수장 자리를 꿰차고 권력자로서 군림했다. 가끔씩 떠오르는 악몽을 마약과 술로 단단히 억누르면서.

“우리 같은 범인은 한계가 명확하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결국 지배자들의 발끝도 따라갈 수 없는 운명. 그럴진대 강해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하, 이 새끼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갈리아크가 안광을 번뜩였다.

살기와 경멸이 어린 시선이 드레이큰을 직시했다.

“타락한 모험가니 어쩌니 하더니, 그냥 겁먹은 쥐새끼였잖아? X발, 그런 새끼가 어디서 감히 나한테 훈수질이야?”

“이해하지 못할 거다. 너는 초월자를 마주한 적이 없을 테니까.”

“초월자고 자시고. 야, 이 X신아. 원래부터 세상은 약육강식이야. 하지만 약자가 언제까지고 약자라는 법은 없지.”

갈리아크는 힘 자체를 숭상한다.

어릴 적부터 형성된 사고방식. 남다른 육체를 가졌던 갈리아크는 더한 강자가 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피가 끓어오를 정도로 치열하게.

“투쟁은 인간의 근간이다. 고블린에게 괭이를 휘두르는 농부조차도 갖고 있지. 그걸 상실하고 너처럼 살아가라고? 차라라 초월자한테 들이받고 뒈지는 게 낫지. 에라이, 괜히 기분만 더러워졌네.”

퉷. 바닥에 침을 뱉은 갈리아크가 등을 돌렸다. 이내 밖으로 나선 그는 당당히 지상으로 향했다.

홀로 남은 드레이큰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뜨겁게 살아왔던 과거를 상징하는 미스릴 플레이트가 사라졌다. 이제 와 미련은 없지만 왠지 모르게 목덜미가 허전했다.

* * *

갈리아크가 떠나고 난 후, 베르덴은 잿빛 왕성의 지하로 향했다. 한때 그론드가 안식처로 즐겨 사용했던 방에 들어갔다.

빈테르트, 금고, 갈리아크.

로아프라에 온 지 하루 만에 위 세 가지 용건을 끝마쳤다.

이제 마지막 목적인 차후의 계획을 수립할 차례.

생각에 잠긴 베르덴이 현재의 목적들에 대해 순차적으로 정리했다.

‘먼저 1순위, 보헤미른 마탑.’

역천을 이룬 베르덴의 궁극적인 목표다.

이제까지 목숨을 걸고 가파르게 성장해야만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놈들이 가진 최상위 전력은 마탑주와 그 제자들. 그리고 원로회.

아무리 베르덴이 유례없는 성장 곡선을 타고 있다고 해도, 그들이 쌓아 온 탑은 결코 얕봐서는 안 된다.

‘그리고 2순위, 블랙 아워.’

최초의 구성원.

현인, 하르칸 다제스트.

베르덴에게 성신 속성을 부여하고, 성신 마법에 대한 전부를 넘겨준 그는 세상을 위해 블래 아워를 막아 주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베르덴은 하르칸에게 빚을 졌다.

그러니 그가 더 이상 세상에 없다고 해도 약속은 지킬 생각이었다. 그게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역시 쉽지는 않아.’

보헤미른 마탑에 비해 전체적인 전력은 뒤떨어지는 편이나,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아래로 여길 수는 없다.

다히트 웨스로웰.

현 블랙 아워의 지도자 또한 초월자였으니까.

죽음의 마법사들이라 불리는 만큼, 다히트를 곁에서 보좌하는 이들 또한 강력한 전력을 지니고 있다.

보헤미른 마탑. 그리고 블랙 아워.

어느 하나 베르덴이 단신으로 맞서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니.’

똑똑.

───애셔 님, 요청하신 자료들을 가져왔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반을 만들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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