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270화 (270/366)

270화 준비 (1)

마석등이 어둠을 밝히는 복도를 거닐었다.

칼리아와의 대화를 마친 베르덴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홀로 있는 공간에 적적함이 감돌았다.

조용히 중심에 선 그가 오른손을 들었다.

보랏빛이 일렁이는 에스티리아 왕국의 상징. 약 1세기 만에 제 모습을 되찾은 국보가 새로운 주인을 반기고 있었다.

베르덴이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레인디아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미 아티팩트의 각인은 직접 경험했다.

달리 긴장하거나 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의지와 감각이 통일되는 순간, 레인디아가 기동하며 빛을 발했다.

───!

보랏빛의 운무가 베르덴의 전신을 감쌌다.

뜨겁거나 차갑지도 않았고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허전함이 가득한 공허만이 느껴지고 있었다.

끝이 없는 공간을 인식한 베르덴이 주먹을 쥐었다.

파아아앗.

미증유의 힘이 내면으로 들어온다.

영혼 각인. 일순 가라앉은 의식 속에서, 내면에 분명하게 새겨진 왕가의 표식이 보였다.

스르륵.

베르덴이 천천히 눈을 떴다.

레인디아의 빛이 사라진 장소엔 어둠이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

‘이게 끝인 건가.’

아인베르와 다르게 착용자를 선별하지는 않는 모양.

레인디아의 소유권이 귀속되었다는 게 자연히 인식되었다.

이제 베르덴이 죽거나 각인을 스스로 해제하지 않는 한, 레인디아는 영원히 베르덴의 것이 된다.

전신에 두르고 있는 마도왕의 아티팩트와 마찬가지로.

‘설마 이런 걸 준비했을 줄이야.’

기대하고 있으라더니.

실리아도 참으로 과감한 선택을 했다. 그를 받아들인 에스퍼렌사 후작도 그렇고.

차라리 국고를 털어 거액의 돈으로 지불한다면 모를까, 고대 아티팩트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을 선뜻 내놓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베르덴이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당장 착용한 장비들을 둘러봤다.

체내에 깃든 마핵.

오른손에는 레인디아.

왼손에는 혹한의 반지(모조품)와 룬의 반지, 엑시드.

허리춤에 있는, 공국의 로든마이어 백작에게 받은 단검.

목에는 뇌익의 아뮬렛이 장착된 삼원색의 중심이 있으며, 메이벨의 귀걸이는 일체화되어 모습을 감추고 있다.

그리고 전신을 보호하는 아인베르와 스태프, 오리엔트까지.

그뿐만이 아니다.

공간가방에는 마검 케덴스, 방패 플로티드와 블랙 아워의 나침반이 보관되어 있다.

6위계 대지 마법까지 기록한 마법서 또한.

‘……멀리도 왔군.’

과거와는 현격하게 달라졌다.

공간 이동으로 처음 동대륙에 발을 디뎠을 때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이 베르덴이 내린 선택이고 결과였다.

빠르게 세월을 돌이켜 봤다. 감회가 새롭다.

그때도, 지금에 이르러서도 후회되는 결정을 한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뭐, 어쨌든.’

새로운 아티팩트를 손에 넣었으니 이제 시험해 볼 차례. 사용법은 각인을 통해 머릿속에 전해졌다.

베르덴의 의지에 따라 레인디아가 기동했다.

목표는 눈앞의 거울. 그러자 테두리가 명확하게 드러남과 동시에, 어두운 보랏빛이 은은하게 빛나며 물체를 집어삼켰다.

거울이 방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럼에도 베르덴은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다시금 의식을 집중하자, 사라졌던 거울이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와 있었다.

등록한 물건을 저장하고 꺼낸다.

아주 간단한 메커니즘이다. 보관에 관련된 제한 사항은 공간가방이나 공간 수납 기능과 동일했다.

베르덴이 몇 번의 실험을 더 했다.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판단한 그가 오리엔트를 손에 들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레인디아에 등록된 스태프가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아주 편리하군.’

아공간(我空間).

말 그대로 자신만이 다룰 수 있는 금고를 손에 넣은 셈.

그뿐만 아니라 공간의 제한이 없기까지 하니…… 공간가방의 완전한 상위 호환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걸로 그론드의 금고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되었다.

지금까지 계획에 두었던 자금 운반의 방법들은 미련 없이 전부 철회했다.

아무리 기막힌 생각이 떠오른다고 한들 레인디아의 역할을 감히 대체할 수는 없을 테니까.

베르덴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림자에서 벗어난 그가 창가에 다가서서 오른손을 뻗었다. 달빛에 반사된 루비의 붉은빛이 은은하게 명멸한다.

그건 에스퍼렌사 가문 특유의 색채를 자연스레 연상시켰다.

“……다음이라.”

베르덴은 스스로를 신뢰한다.

다만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에스티리아 왕국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를 당장 확신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때는 애셔라는 가명 뒤에 숨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베르덴은 그날을 고대하며 한동안 밤하늘을 바라봤다.

* * *

다음 날 아침, 베르덴은 로아프라로 향했다.

물론 아직 에스티리아 왕국을 떠날 생각은 아니었다. 애초에 작별 인사는 하고 가겠다고 말하기도 했고.

로아프라에 방문하는 목적은 총 네 가지.

그론드의 금고, 빈테르트, 갈리아크. 그리고 차후의 목표를 확실하게 결정하기 위함이었다.

그를 위해 페르네가 준비한 ‘해외 정보’까지 전부 챙겨 왔다.

‘다른 사람과 동행해도 상관없긴 하지만.’

후작가의 비행정을 움직이기에는 번거롭다.

베르덴이 전속력을 낸다는 가정하에, 늦어도 나흘이면 왕도 레티아와 로아프라를 왕복 가능하기도 하고.

여러모로 혼자 움직이는 게 효율적이었다.

이윽고 대도시 아우로플에 도착했다.

소란을 예방하기 위해 근처에 착지하고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멀리서 다가오는 베르덴을 목격한 경비병들이 화들짝 놀라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당장!”

이미 밤은 깊었다.

비상시 외에 성문은 열리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당연하게도 베르덴은 예외였다. 그는 여전히 로아프라의 지배자였으니까.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해도 다른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렇게 도시로 들어가는 건 처음이군.’

베르덴은 고아원에서 자라 왔다.

세간의 시선으로 봤을 때, 하잘것없는 출신이었으나, 그런 그가 이제는 고위 귀족과도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아니, 명예 백작 작위를 받았으니 실제로 귀족인가.’

고아원의 원장님이나 로벨린이 보면 뭐라고 할까. 문득 궁금해진다.

무사히 아우로플에 입성한 베르덴이 지하도로 내려갔다.

VIP 전용, 고속 마력 승강기에 탑승해 로아프라에 도착하자 빈테르트의 일원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검은손 로베르트가 베르덴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애셔 님.”

“별일은 없었나?”

“네, 불법 노예에 대한 건은 완전히 해결되었고, 로아프라의 복구 작업은 절반 가까이 진행된 상황이에요. 그 외에 보고드릴 만한 사건은 전무합니다.”

베르덴이 <마력의 눈>으로 로아프라 전역을 살폈다.

암흑가다운 활기가 어느 정도 돌아와 있었고, 범죄 세력들은 복구 작업에 한창이었다.

“확실히 순조로워 보이는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잿빛 왕성으로 나아갔다.

활짝 열린 암흑가의 거리를 지나던 도중, 곁에 다가온 로베르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왕도에 가신 건 어떻게 됐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실리스 왕녀, 마녀, 반란 등.

그런 내막에 대해 로베르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암흑가의 왕이, 레오닐과 에스티리아 왕가를 적대하고 있다는 것쯤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특이 형질을 잡으라고 의뢰를 내건 것이 그 둘이니까.

사라진 로아프라의 이상 사태.

부름을 받고 로아프라를 떠난 백결 기사단과 칼리아 일행.

‘전부 애셔 님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해.’

로베르트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베르덴이 간단하게 말했다.

“레오닐은 죽었다.”

“……!”

로베르트가 흠칫했다.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심지어 농담일 리도 없었다.

다수의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그론드마저 압도한 존재가 아니던가.

‘그렇다는 건…….’

그녀의 앞에 있는 건 그저 새로운 지배자가 아니었다. 6위계 마도사를 짓밟은, 에스티리아 왕국의 정점에 선 존재.

떨리는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단순히 힘의 격차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앞날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대체 그가 이끄는 암흑가는 어디로 향하게 될 것인가.

그런데 그에 대한 베르덴의 답은 예상 밖이었다.

“나는 로아프라를 지배할 생각이 없다. 곧 왕국을 떠날 거니까.”

로아프라에 군림하는 건 큰 메리트가 없다.

동대륙 최대의 암흑가라고 한들 마찬가지다. 세계라는 거대한 무대에 비해서는 한없이 협소했으니까.

“네? 그, 그럼 저희는───”

“당황할 필요는 없다. 로아프라에 만연한 범죄들을 당장 소탕하지는 않을 테니까.”

암흑가의 왕이라는 방패막이 사라졌다.

말인즉슨 로아프라에는 에스퍼렌사 후작가가 찾아올 확률이 매우 높다는 뜻. 정도를 표방하는 그들이 범죄 세력을 지켜보고만 있을 리가 없겠지.

자칫하면 로아프라에서 작은 전쟁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여기까지가 로베르트의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베르덴이 암흑가의 왕의 자격으로 에스퍼렌사 후작과 대화를 마쳤다.

“로아프라가 아무리 범죄 세력의 온상이라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실질적으로 암흑가에 거주하고 있는 민간인이 훨씬 많다. 거기서 범죄자들만 골라 싹 쳐내는 건 한낱 이상향에 불과하지.”

민간인들을 이주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로아프라의 불법 노예를 풀어 주는 데도 그만한 고생이 들었는데, 그보다 훨씬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 건 여건상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

그와 더해서 주민들의 주거 환경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에도 큰 반발이 일 테고.

“그래서 지배가 아닌 협력 구조를 선택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중재자와 로아프라의 대표가 힘을 합쳐, 이곳 암흑가를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관리하게 되겠지.”

“……애셔 님이 떠나면, 그 대표는 누가 되는 거죠?”

“당연히 로베르트, 네가 되겠지.”

로베르트는 빈테르트의 3대 간부 중 하나.

하지만 단순히 범죄 규율만으로 살펴볼 때 그나마 정상참작이 가능했다. 그녀가 주로 관여한 건 빈테르트의 자금 관리였으니까.

그녀가 빈테르트에 들어온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왕국에 남아 있는, 과거의 은원과 어떠한 연관도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면죄부를 줄 수는 없지만, 로아프라의 대표직을 맡기에는 그녀보다 더한 인재가 없었다.

“그러니 갑자기 잡혀서 사형당할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 안심해도 좋다.”

“배, 배려 감사합니다……!”

로베르트가 침을 삼키며 목을 어루만졌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서늘한 칼날이 파고든 것처럼 피부가 찌릿거렸다.

그러는 사이 잿빛 왕성에 도착한 두 사람이 깊은 지하로 내려갔다.

그론드의 금고를 개방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저번에 확인했던 막대한 재산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공간가방으로 수납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양.

“저, 부하들을 불러 올까요?”

“아니, 필요 없다.”

베르덴이 오른손을 내밀며 움직였다.

레인디아가 기동한다. 공간 속성이 가진 특유의 보랏빛이 지폐, 금괴, 보석, 마법 장비나 물품들을 감쌌다.

문제없이 등록된 그것들이 죄다 아공간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베르덴이 주변을 한 바퀴 돌았을 때, 금고에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로베르트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경악했다. 그런 반응을 뒤로한 베르덴이 흡족한 듯 레인디아를 어루만졌다.

‘이제 다음이다.’

옆으로 고개를 향했다.

“로베르트, 로아프라의 영향력은 어디까지 뻗어 있지?”

“아, 예. 해외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동대륙 전반에 걸쳐 있습니다. 로아프라는 동대륙 최대의 암흑가이니까요. 워낙 이 바닥이 소문이 빠른 터라 그론드가 죽었다는 소식도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애셔 님의 인상착의도…….”

“그거 잘됐군.”

베르덴이 손을 뻗었다.

아공간에서 꺼낸 서류 뭉치를 로베르트에게 건넸다.

“그 안에는 여러 해외 국가가 기록되어 있다. 거기서 활동하고 있는, 뒷세계의 세력들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서 나에게 넘겨라, 가능한 빠르게.”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로베르트가 즉시 뒷짐을 지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애셔 님.”

“그래, 맡기지.”

당장의 용건은 마쳤다.

텅 빈 금고를 나선 베르덴이 우뚝 멈춰 섰다.

“아, 그런데 갈리아크는 지금 어디에 있지?”

* * *

무너진 잿빛 왕성의 상층부.

혹여 베르덴의 부재 도중, 빈테르트가 칼리아 일행을 배신할 것을 대비해 마법진으로 안전 지역을 만들어 놓은 장소.

성 안으로 들어서자 술과 기름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베르덴이 시선을 옮겼다.

도살자 갈리아크가 소파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커어어어어!”

흉악한 코골이 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적진이 될 수 있는 장소에서 저렇게 무방비한 모습이라니.

살기를 갖고 다가간다면 곧장 옆에 있는 훼월로 상대의 머리를 깨 버리려 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도 편해 보였다.

“……이러라고 마법진을 설치해 둔 게 아닌데.”

베르덴의 눈가가 씰룩였다.

마력을 움직이자 빈 술병이 갈리아크의 머리로 날아갔다.

“그만 일어나라.”

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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