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268화 (268/366)
  • 268화 국보 (1)

    은은한 웃음이 입가에 감돈다.

    백색의 드레스를 입은 실리스의 표정은 대관식날, 여러 정신체를 고문하고 있던 그때보다도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복수를 이뤘기에 생겨난 여유인가, 새로운 목표를 가진 것에 대한 설렘인가.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녀가 진심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지켜 준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라.’

    타인의 조언으로 시작된, 새로운 목표이자 꿈이다.

    하나 그것을 구체화한 건 실리스 본인이다. 다른 길을 걷고자 마음먹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 의지는 확고했다.

    베르덴은 실리스의 결정을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

    언젠가 같거나 비슷한, 아니면 완전히 반대되는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여정은 실리스와 달리 끝나지 않았다. 고작해야 발을 뗀 정도에 불과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게 전부인가요?”

    “다른 반응이라도 보였어야 됐나?”

    실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만…… 적어도 제 대답이, 당신이 듣고자 했던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죠.”

    “나는 정답을 들으려고 온 게 아니다.”

    베르덴은 답하지 않았다.

    그러한 침묵은 하나의 답이 되었다.

    ‘저만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루지 못했다니.’

    적어도 왕가를 멸하고자 했던 실리스보다 높은 이상임이 틀림없다.

    실리스는 눈앞의 사내가 일으킬 파란에 대해 생각했다.

    그 결과는 정확히 짐작할 수 없었다. 무엇을 하든 간에, 대륙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큰 충격을 안길 테니까.

    단신으로 왕국의 최강자를 쓰러뜨린, 실리스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초월자에 가까운 존재.

    반드시 세상에 군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두려워할지언정 멀리해서는 안 된다.

    강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타산적인 판단 이전에, 실리스에게 있어서 그는 은인이었으니까.

    로아프라의 봉인 때와 같은 실수를 다시금 일으킬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것이 틀렸다는 걸 이미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반대로 가 볼 생각이다.

    “애셔, 당신이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는 몰라요. 적어도 당신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중요하리라는 것 외에는.”

    하지만.

    “저희가 줄 보수라면 분명 도움이 되겠죠.”

    실리스가 자신 있게 말했다.

    대체 뭘 주려고 하길래 저렇게 당당한 걸까. 보수를 받기 위해 행동한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뭐, 준다니 받을 수밖에.

    애써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보수를 선보이기 앞서서, 당신이 마땅히 챙겨야 할 게 있어요.”

    실리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왕좌의 뒤편에서, 고급스러운 장식이 새겨진 팔찌가 날아왔다.

    <감정>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마법 물품을 보는 안목이 있다면 예사 물건이 아니라는 건 한눈에 눈치챌 수 있다.

    더군다나 저 팔찌는, 이전에 한번 본 적 있던 액세서리였다.

    “레오닐의 아티팩트인가.”

    “왕도 전역을 조사한 결과, 외딴 골목에 떨어진 걸 지나가던 시민이 주웠더군요. 당시 거의 붕괴된 왼팔과 함께 떨어져 있었다는 증언도 확보했고요. 그래서 소정의 대가를 지불하고 합법적으로 되찾았죠. 직접 보시겠어요?”

    실리스가 확인을 권했다.

    시선을 고정한 베르덴이 <감정>을 사용했다.

    ‘이름은 절체의 의지. 수명을 희생하는 대가로, 일정 시간 투사체 마법에 대한 제어권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아티팩트.’

    생각해 보면 무궁무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마법 화살을 조작해, 본래라면 닿을 리 없는 표적을 손쉽게 저격할 수 있게 되니까.

    특히나 레오닐처럼 메테오를 조작해 위치를 임의로 변경하는 건, 전쟁에서는 하나의 재액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수명이 감소된다는 게 문제다.

    7위계 공성 마법조차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음에도, 레오닐조차 사용을 주저했다면 반작용이 크다는 의미일 테니까.

    정확한 수치가 알려져 있지 않았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내가 쓸 일은 없겠군.’

    베르덴은 단칼에 흥미를 끊었다.

    시한부 인생을 살아왔던 그였기에 수명과 관계된 건 무척이나 꺼려졌다.

    만약 직접 사용한다고 해도 애매하긴 하다.

    수명을 소모한 것 이상으로, 현재 베르덴이 가진 전력을 넘어선 효용성을 얻을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으니까.

    의문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인 견해였다.

    실리스가 말했다.

    “역시, 만족스러운 성능이 아닌가 보네요.”

    “아티팩트라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니까. 오히려 자신에게 적합한 걸 손에 넣는 경우가 드물지.”

    “이런 게 없어도 강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겠죠. 하지만 이 아티팩트의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당신. 그래서 말인데, 만약 필요 없다면 왕가에서 매입을 제안하고 싶어요.”

    “……왕가에서? 달리 쓸데가 있는 건가.”

    “그런 게 없어도 아티팩트는 귀하니까요. 수명을 소모품으로 사용한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쓸 수 없는 것도 아니고요. 보유하고 있으면 언제든 쓸 날이 오겠죠. 없어도 보물고를 장식할 수 있으니 큰 상관은 없고요. 어떻게 하실래요?”

    고민하고 말 것도 없다.

    저 팔찌를 갖고 있어 봤자 애물단지가 되리라는 건 자명하니.

    “제안을 받지.”

    “좋아요. 값은 섭섭지 않게 쳐드릴게요.”

    실리스가 마력을 움직였다.

    허공에 떠 있던 절체의 의지가 구석에 안착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군요. 왕가에서 지급할 세 개의 보수. 레오닐의 아티팩트와 달리, 이번에는 기대해도 좋아요.”

    아티팩트 이상이라는 건가.

    저렇게 말하니 기대감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리스가 마력을 조작했다.

    이번에는 글씨가 적혀 있는 증서와 메달이 각각 하나씩 날아와 그녀의 손에 쥐였다.

    날카로운 방패를 본뜬 표식.

    둘 다 왕가의 상징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윽고 실리스가 선언했다.

    “애셔, 당신에게 에스티리아 왕국의 명예 백작 작위를 하사할게요.”

    * * *

    귀족은 신분제도를 지배하는 특권층.

    시대가 발전하면서, 옛날처럼 영지에서 무자비한 폭정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

    일반 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고귀해진 자신을 상상했을 만큼, 귀족이란 계급은 누구나 노력해서 닿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베르덴의 반응은 영 시큰둥했다.

    “어머, 마음에 안 드시나요?”

    “쓸모가 없으니까.”

    명예 백작.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최대로 줄 수 있는 명예 작위로, 세습이 불가능하고 다스릴 영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물론 여러모로 백작위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 에스티리아 왕국에 한해서다. 조만간 왕국을 떠날 베르덴에게 있어서는 불필요했다.

    미약하게 불쾌감을 드러냈다.

    “작위로 나를 왕국에 귀속시킬 생각이라면───”

    “에이, 설마. 그런 발칙한 의도는 전혀 없어요. 어디까지나 당신에게 귀족 신분을 주려고 한 게 전부니까요. 애초에 당신을 붙잡으려고 했다면 작위는 백작 이상, 그와 더불어 영지까지 같이 하사했겠죠.”

    실리스가 작게 손뼉을 쳤다.

    “아, 혹시 그런 걸 바라셨나요? 왕국에 적을 둘 생각이시라면, 비옥하고 넓은 영지를 드리죠. 거기다 궁정 마법사단장이라는 자리에다가 공작위까지. 당신이 원하신다면 전부 가질 수 있어요.”

    진담과 농담이 섞인 제안이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걸 알면서도, 혹시라도 수락한다면 진짜로 모든 권한을 쥐여 주겠다는 의미였다.

    물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미안하지만 거절하지.”

    “음, 그럴 줄 알았지만…… 조금 아쉽긴 하네요. 당신이 왕국에 자리를 잡는다면 아주 든든할 텐데.”

    실리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진심이었다. 이내 아쉬움을 털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작위를 하사한 건 이것 때문이에요.”

    실리스가 봉투 하나를 꺼냈다.

    흰색 바탕에 녹색의 그림으로 고급스럽게 장식된 그것은, 마법적 처리로 상하지 않게 상태가 보존되고 있었다.

    봉인 인장에는 왕가의 상징이 아닌 다른 그림이 찍혀 있다. 그를 목격한 베르덴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아티슨 마탑의 표식?”

    “바로 알아보네요. 맞아요. 이건 아티슨 마탑에서, 경매를 통해 국가에 배정하는 ‘대규모 비행정’ 제작의 허가권이에요.”

    비행정은 아무나 제작할 수 없고 누구나 소유할 수 없다.

    자칫하면 사회에 큰 혼란을 초래할 테니까. 특히나 중간 규모 이상 혹은 군용으로 만들어진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공성용 마법진을 보유하고 있는 비행정은 순식간에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니.

    어떤 마탑도 따라올 수 없는 제작 기술을 가지고 있는 아티슨 마탑.

    시간이 흐른다면 모르겠으나, 지금으로서는 오직 그곳만이 대규모 비행정을 제작하는 게 가능하다.

    “알다시피 대규모 비행정을 소유할 수 있는 국가는 세계에도 몇 없죠. 그리고 이 허가권은 오직 에스티리아 왕족 혹은 귀족만이 쓸 수 있도록 설계된 거구요. 이 정도라면 당신의 마음에 들 만한 보수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대규모 비행정을 관리할 수 있는 건 최소 백작위 이상. 세계적인 합의에 의해 정해진 규율이기에 예외는 없다.

    말인즉슨, 방금 명예 백작이 된 베르덴에게 자격은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개인에게 대규모 비행정 허가권을 내준다라. 보수가 너무 과한 거 아닌가? 내가 비행정을 악의적으로 운용했다간 왕국에 큰 피해가 갈 텐데.”

    “그럴 거라면 이렇게 경고도 하지 않았겠죠. 그보다 저는 대규모 비행정의 허가권을 주었을 뿐, 제작비는 당신이 해결해야 될 문제예요. 물론 에스티리아 왕국에 들어온다면 무리해서라도 자금을 마련해 줄 용의가 있지만요.”

    마지막 말은 흘려들었다.

    ‘……개인 비행정이라.’

    그론드의 금고를 탈탈 털어도 자금이 턱없이 부족하다.

    현재로선 딱히 필요도 없고, 그래도 훗날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건 분명하다. 대규모 비행정은 그 자체로 큰 전력이니까.

    “그럼 고맙게 받지.”

    “천만에요.”

    베르덴이 명예 백작 증서와 그를 인증하는 왕가의 메달 그리고 아티슨 마탑의 허가권을 공간가방에 챙겨 넣었다.

    예정에 없던 큰 선물이기에 만족감은 배가되었다.

    ‘이렇게 되니 궁금해지는군.’

    직전의 보수가 이 정도다.

    그럼 마지막 세 번째 보수가 대체 무엇일까.

    그러나 당장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세 번째 보수는 여기 없어요. 아직 제작 중에 있어서요.”

    ……제작 중?

    의문을 표하는 베르덴을 향해 실리스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백금의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답하는 모습.

    직전보다도 분명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론드의 금고 문제와 별개로 조금 더 왕성에 남아 있을 이유가 생긴 것 같다.

    * * *

    그 시각, 칼리아는 에스퍼렌사 후작과 단둘이 대면하고 있었다.

    벌써 몇 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아직까지 자신이 불려 온 이유를 알지 못했다. 처음의 인사를 제외하면 대화조차 없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조심스레 홀짝이며 생각에 잠겨 있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적적한 고요함이 감돈다.

    그때, 후작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칼리아.”

    “아, 네, 아버지.”

    다급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를 지켜보던 후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최근 애셔와 어울려 다니더구나.”

    칼리아의 눈동자가 순간 당황으로 물들었다.

    이내 손가락으로 턱을 긁적이며 시선을 회피했다.

    “애셔만이 아니라 페르네와 카란스와도 동행하고 있습니다만…….”

    “둘이 같이 다니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는데.”

    칼리아는 입을 닫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럴 때는 그냥 조용히 하는 게 답이었다. 어설픈 심리전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에.

    물론 딱히 의미는 없었다.

    성격 면에서, 칼리아는 다른 오라비들보다 후작의 성향을 짙게 물려받았으니까.

    노련한 귀족이자 아버지인 후작에게 자식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것쯤이야 간단했다.

    “그런 의미에서 너에게 시킬 게 있다.”

    “……예?”

    칼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굳이 따지자면 시간은 그리 많지 않겠지. 하나 어려운 건 아니다. 오히려 아주 간단한 일이지.”

    궁금증은 더욱 깊어졌다.

    이렇게 애매모호한 명령은 익숙하지 않았다.

    “거절하고 싶다면 거절해도 좋다. 굳이 네가 해야 될 일은 아니니.”

    그렇다면 검을 쓸 일이 없다는 뜻.

    하나 굳이 그녀를 지목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먼저 듣겠습니다.”

    칼리아의 말에 후작은 사양하지 않고 내막을 밝혔다.

    진중한 목소리가 방 안에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설명이 끝난 후, 그 의중마저 파악했을 때. 칼리아는 아버지가 준 기회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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