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267화 (267/366)

267화 대답 (2)

“제가…… 왕이 되라고요?”

일순간 소리가 그쳤다.

후작의 대답에 실리스가 아연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분명하게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

“후작, 그건 최악의 선택이에요. 애초에 저는 시민들을 전부 죽이려고 했어요. 고작 제 분풀이를 위해서. 거기에는 당시에 태어나지 않았던 시민도 많았는데.”

실리스는 스스로를 직시했다.

그녀의 증오에는 최소한의 선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을 분별할 만큼 마음의 여유도 없었으며, 그럴 만한 생각도 없었다.

에스퍼렌사 후작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왕도 레티아는 멸망했을 것이다. 정신이 으깨진 시체가 쌓여 높은 산을 이루었겠지.

그리고 마녀의 심장을 이식한 레오닐을 제압하지 못해, 복수를 이루지 못하고 전멸하고 말았으리라.

“그리고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제 핏줄에는 마녀의 피 말고도 뭐가 흐르는지…….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결국 저 또한 제 아버지와 형제들과 같은, 에스티리아 왕가의 혈통이에요.”

에스티리아 왕과 그의 자식들은 악인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말 그대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과 실리스가 뭐가 다른가.

복수라는 목적만이 다를 뿐이다. 어머니의 원한을 갚고자, 대규모 학살을 일으키려 했던 그녀 또한 악인이었다.

카드드득.

입술을 짓씹은 실리스가 손등을 긁었다.

새빨갛게 이어진 선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후작이 손수건을 꺼내 실리스의 상처를 덮었다.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게 조금 강하게 압박했다.

“전하, 혈통은 많은 것을 잇게 하나 그것이 인간성마저 대변해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어요.”

“결국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왕자들 간의 내전을 일으킨 건요? 그 과정에서 죽은 사람들은…….”

“저희는 수많은 요인 중 몇 가지에 개입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시기의 차이를 불러왔을지언정, 결과적으로 내전은 언제고 벌어질 사건이었습니다.”

후작이 손수건의 양끝을 당겼다.

리본 매듭이 실리스의 팔 위에 놓였다.

“그리고 저는 선인이 아닙니다. 에스티리아 왕국을, 제 나름의 기준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일개 귀족에 불과합니다.”

후작은 지금껏 수많은 도적단을 처단해 왔다.

그의 검에 죽임을 당한 도적 중 사연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모두가 부모의 자식이었고, 어린 시절 혹은 도적이 된 순간에도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말하지 못할 억울함을 가졌던 이도 있었겠지.

하지만 후작은 자신의 살인에 후회하지 않았다.

위정자이며 지도자, 그것이 귀족의 마음가짐이니까.

모두가 행복을 누리는 건 빛의 신, 루아스조차 이뤄 내지 못한 이상향이다.

몸을 일으킨 후작이 뒤로 세 발자국 멀어졌다.

흔들림 없이 매듭지어진 리본을 보던 실리스가 후작과 시선을 마주했다.

“……훗날 제가 미쳐서 폭정을 일으킨다면, 그 결과는 후작조차 감당할 수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그 전에 막겠습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일정한 음정.

그건 순간의 감정에서 나오는 각오가 아님을 시사한다.

“전하께서 목숨을 구해 주신 아델과 플로나, 로리안. 그리고 세바스와 케미언. 다른 사람들도 저와 마찬가지입니다. 전하께서는 복수를 위해 끌어들였다고 하셨지만, 그것이 진심을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실리스 전하께서는 에스티리아 왕과 다른 분입니다.”

실리스의 얼굴이 경직됐다.

그를 응시하던 후작이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다.

“저 루벤 드 에스퍼렌사. 간신처럼 사익을 위해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지 않을 것이며, 신하이자 귀족 된 자로서 간언하고 행하겠습니다.”

깊게 고개를 숙였다.

심장 소리가 고요히 맥동했다.

“그러니 왕이 되십시오.”

……세간에서는 후작을 왕국의 빛이라 말한다.

그가 다스리고 있는 영지와 도시 라인스가 얼마나 평화로운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권세를 탐하지 않는 무욕함.

실리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왕위에 오를 수 있음에도 후작은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정도(正道)였으니까.

실리스는 한동안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고개를 숙인 후작은 몇 분이 지났음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강건한 태도는, 어린 실리스가 처음으로 그에게 비밀을 밝혔을 때와 같았다.

확실히, 후작은 왕국의 빛이었다. 불변했다.

실리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콰직. <염동력>을 일으켜 걸리적거리는 창살을 떼어 버렸다.

창가로 걸어가 바깥세상을 내다봤다. 오랫동안 봐 왔던 풍경을 시야에 담은 그녀의 얼굴은 조금 홀가분해진 듯했다.

“그러고 보니, 후작. 조언이 필요한 게 하나 더 있는데요.”

“말씀하십시오.”

“암흑가의 왕을 처리해 준 애셔가 레오닐마저 무너뜨려 저희의 목숨을 구해 줬는데, 이 빚은 도대체 뭘로 갚으면 좋을까요?”

어깨를 한차례 들썩인 후작이 생각에 잠겼다.

적당히 나열해 봐도 너무나 거대한 업적이었다. 그를 치하하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고민이 깊어져 간다.

그사이 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걸 주는 건 어떨까요?”

“그거라면…….”

“왕가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그거’요.”

가장 깊은 곳이라.

그 순간 후작이 눈을 부릅떴다.

“저, 전하, 그것은 초대 에스티리아 왕가로부터 내려오는───”

“언제는 저보고 왕 노릇 하라고 했잖아요?”

실리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눈을 끔뻑거리던 후작이 미소 지었다.

왕가의 보물고에 대한 권한은 어느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오직 왕위에 올라선 자의 것이었다.

“예, 그랬지요. 확실히 그거라면 애셔의 공적에 걸맞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렇죠?”

“하지만 그걸 사용할 수 있도록 하려면 특수한 매개체를 제련하고, 그 위에 각인을 이식할 수 있는 아주 뛰어난 장인이 필요합니다.”

인력이 필요하다.

하나 이미 해결된 요소다.

“장인 있잖아요? 후작의 저택에.”

……! 그래, 있었다.

레오닐의 실험에 의해 혹사당했던 장인. 외수, 라이너스 볼티모그. 그는 아직 후작의 저택에 강제로 머물고 있었다.

“이참에 ‘에스티리아의 보물’을 되살려 보도록 하죠. 탐욕스러운 왕들 덕분에, 왕가의 보물고 안에는 재료든 돈이든 충분하고도 남으니. 제작 의뢰와 운반까지, 전부 후작에게 일임할게요.”

존재의 권위가 깃든 목소리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에스티리아 왕과 왕자들과는 격이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오늘 이후로 왕국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에스퍼렌사 후작이 예를 갖추었다.

“맡겨 주십시오, 폐하.”

* * *

레오닐은 죽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 소식은 에스퍼렌사 후작의 저택까지 닿았다.

“이야, 드디어 왕국을 떠날 수 있겠구나!”

라이너스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후작가에 머무는 생활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본래 에스티리아 왕국에 온 건 단순히 길을 거쳐 가기 위해서였다.

한때 라이너스는 백금 등급 모험가였다.

그러나 오른팔을 잃은 지금은 전투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스승인 드워프에게 배운 전투 망치를 잘 다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보다 안전한 경로인 왕국을 이용하려 했다.

치안은 차치하더라도 험지를 지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겸사겸사 매직 아이템을 제작해 부족한 여비를 채우기도 하고.

가끔 욕심 그득한 귀족이 잡아 두려고 하지만, 라이너스는 대처의 전문가. 굳이 싸우지 않고도 도망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암흑가 경매장에서 납치를 당해 레오닐한테 끌려갈 줄이야……!’

거의 10년 가까이 왕국에 잡혀 있었다.

왕국을 여행길로 삼은 걸 얼마나 후회했던가. 이제 에스티리아라는 이름만 들어도 신물이 날 정도였다.

그나저나.

‘설마 애셔가 레오닐을 잡을 정도로 강했을 줄이야.’

아무렇지 않게 궁정 마법사들을 압도하는 광경.

세상을 뒤져도 찾아보기 힘든, 귀한 재료들로 스태프를 제작해 달라는 의뢰까지.

범상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경악스러웠다.

“흠, 마법사라…….”

라이너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마법사란 족속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몇몇 사람에게는 라이너스가 드워프 스승에게 파문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직접 파문을 당한 적은 전혀 없었다.

흔하다면 흔한 이야기다.

라이너스 볼티모그.

다른 드워프 제자들을 제치고 인간 장인으로서, 스승에게 어엿한 대장장이로 인정받기 위해서 아주 구하기 힘든 소재를 직접 구하러 나섰다.

혼자는 무리였기에 동료들을 구했다.

모험가는 아니었지만, 라이너스 못지않은 실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잡았…… 다!!

격한 전투 끝에 괴물을 쓰러뜨렸다.

목표로 하던 소재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은 채로 말이다.

하지만 고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몰래 뒤에서 작당한 동료들이 라이너스의 뒤통수를 쳤다.

전위를 맡느라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고, 마법사가 날린 마법을 피하지 못해 오른팔을 잃었다.

도주하는 놈들을 보며 라이너스가 소리쳤다.

────야이, X새끼들아아아아아!

깊은 숲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오는 짐승들이 느껴진다.

그렇게 라이너스는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만, 행운과 의지로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나와 보니 동대륙이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앞길이 막막했다.

모험가도 아닌 놈들에게 배신당했다고 길드에 하소연할 수도 없었고, 팔을 잃은 상태로 스승에게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래, X발. 팔 한쪽으로 해 보지, 뭐.

은행에 남아 있는 자금을 탈탈 털어 동대륙에 어딘가에 은거했다.

고되고 기나긴 훈련 끝에 라이너스는 특별한 제련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 고생을 떠올리니 절로 치가 떨렸다.

그것이 헛되지 않도록,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애셔에게 작별 인사는 해 두고 싶은데.”

그렇다고 왕성으로 가기는 애매하다.

뭐, 나중에 인연이 되면 만날 거라 믿었다.

라이너스는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이제 못다 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다시금 대륙을 건너, 스승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드워프들의 영역으로 갈 것이다.

고작 한 팔로, 오브를 이용한 스태프마저 제련하는 데 성공했다.

본의 아니게 너무 많이 돌아가게 되긴 했지만, 어찌 됐건 이 정도라면 기술적으로는 드워프 장인에 이르렀을 터.

스승에게 인정받기 전까지, 그는 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떠날 수 없었다.

“예? 제작 의뢰 말입니까?”

후작가의 대장간.

비행정을 타고 온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탁월한 실력을 가진 장인이 필요하다. 라이너스, 네가 적임이겠지.”

“하오나…….”

“거절은 받지 않겠다.”

후작이 으름장을 내놨다.

강경한 태도에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설마 날 잡아 두려는 건가? 이런 X발.’

라이너스가 몰래 눈동자를 굴렸다.

어떻게든 도주할 방법을 떠올리고 있자, 후작이 금속 주괴와 보석을 각각 하나식 꺼내 보였다. 그를 본 라이너스의 사고가 정지했다.

장인의 안목이 둘의 정체를 단번에 꿰뚫었다.

“오, 오리칼큠하고 다힐르 산 루비?!

최상위 금속 중 하나인 오리칼큠은 미스릴을 넘어서는 마력 금속.

그리고 다힐르 산 루비는 천연 마력과 루비가 수백 년에 걸쳐 빚어진 끝에 생성되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인 보석이다.

후작이 팔짱을 끼었다.

“의뢰자는 에스티리아 왕가. 왕가의 대장간을 빌려줄 테니, 그곳에서 이 두 가지와 왕성에 있는 ‘보물’을 주 소재로 삼아 하나의 아이템을 제작하는 게 의뢰다. 설계도는 왕도로 가서 보여 주도록 하지.”

“그럼, 저, 보수는…….”

“돈을 달라면 돈을 줄 것이고, 다른 걸 원한다면 왕가의 보물고까지 개방할 용의가 있다. 뭘 선택하든 자유지만…… 한번 손을 댄 이상, 반드시 완성시켜야 한다.”

거짓이 아닌 진담이다.

라이너스가 보석과 주괴를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고민은 매우 짧았다.

“수락하겠습니다.”

“좋다. 그럼 바로 왕도로 출발하지.”

“예, 각하. 한데…… 대체 어떤 걸 만들면 되는 겁니까?”

하나의 액세서리로, 과거에 형태를 잃은 반지.

고대 아티팩트라 불렸던 그것은, 약 100년 전에 분해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그 설계도와 주요 구성체 하나만이 남아 있다.

다시 말해.

“에스티리아 왕국에 전해 내려오는 ‘국보’의 재현이다.”

* * *

실리스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먼저 급하게 찾아갈 필요는 없다.

안정이 되면 저쪽에서 알아서 부를 테니까. 그렇게 며칠이 지나 사람이 찾아왔다.

“애셔 님, 실리스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로리안이 직접 안내를 맡았다.

그의 특이 형질인, 정신감응으로 연락할 수는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베르덴에 대한 예우를 위해서였다.

화창한 햇빛이 조사하는 복도를 지났다.

베르덴이 로리안을 따라 도착한 장소는 왕성의 탑이 아닌, 알현실. 왕녀 실리스는 왕좌의 정면, 계단 아래에서 뒷모습만을 보였다.

베르덴이 안으로 들어서자, 로리안이 깊게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그 정중한 태도는 실리스를 대할 때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존경과 감사가 깃든 예법이었다.

쿠웅. 문이 닫히고 알현실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앞으로 걸음을 옮긴 베르덴이 실리스와 거리를 두고 제자리에 섰다.

실리스가 얼굴을 살짝 돌리며, 시선만을 흘겼다.

“로리안의 저 깍듯한 모습은 저 외엔 보여 주지 않는데…… 이전에 둘이 대면했던 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그건 로리안에게 묻는 게 좋겠군.”

통곡의 기사가 남긴 유품은 로리안의 것이다.

베르덴은 그들의 과거를 멋대로 떠들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보다 오늘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건가?”

복수를 이룬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대관식 날의 질문이 다시금 실리스에게 향했다.

“물론이죠. 애초에 당신을 부른 이유도 답을 하기 위해서니까요. 그리고 세 가지 보수를 주기 위해서이기도 하고요.”

베르덴이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 가지 보수라니.

사전에 듣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의문을 입에 담기 전, 실리스가 먼저 목소리를 내었다.

“먼저 질문에 대한 답변부터 하자면…… 모른다. 당시에는 그게 제가 내놓은 답이었죠. 물론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실리스가 움직였다.

천천히 알현실을 돌며 말을 이었다.

“방황이 견디기 어려워, 에스퍼렌사 후작에게 조언을 구했죠. 이제부터 저는 뭘 하면 되냐고……. 그랬더니 제가 왕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네요. 엇나간다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바로잡아 주겠다는 각오와 함께.”

타인의 조언이라.

베르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후의 인생을, 다른 사람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뜻인가.”

“그런 의존과는 달라요. 분명하게.”

단연(斷然)한 의지.

그녀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저는 타인에게 제 삶을 전가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저를 따라와 준 사람들을 위해 살기로 했어요. 고통받았던 그들을 지켜 줄 수 있는 에스티리아 왕국을 만들기 위해. 저는 스스로 왕이 되기로 했어요.”

발소리가 멎었다.

베르덴과 조금 더 가까워진 실리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백금의 머리칼이 어깨를 타고 사르르 흘러내렸다.

“이게 당신의 질문에 대한 제 답이에요. 만족하셨나요?”

만족이라는 단어가 나올 것도 없었다.

애초에 충족감을 느끼기 위해 한 질문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어떤 거죠?”

“어떻게 왕이 되려는 거지?”

대관식은 끝났다.

표면상으로는 발르그나가 왕위에 앉게 되겠지.

그 전에 왕을 교체하는 것도 방법이겠으나 어려움이 있다. 아직 세간에는 실리스가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갑자기 발르그나 대신 실리스가 왕위에 오른다면 큰 혼란이 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두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

지금 생각하는 게 맞다는 듯, 실리스 싱긋 미소 지었다.

“왕위에 앉지 못했다고 해서 왕이 될 수 없는 건 아니죠.”

백금의 눈동자가 황혼으로 물들었다.

“왕관을 쓴 인형과 그 인형을 조종하는 마녀. 둘 중 에스티리아의 왕권을 행사하는 주체는 누구일까요?”

실리스 리벤 디 에스티리아.

현 에스티리아 왕가의 절대적인 실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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