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266화 (266/366)

266화 대답 (1)

베르덴은 최고 귀빈으로서 이전에 없던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에드몬과 하루에 한 시간씩 마법을 논하며, 언제나처럼 자신이 가진 마도와 마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깊게 연구했다.

‘숫제 귀족이로군.’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레이의 용병이었는데.

이 같은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건, 순전히 준초월자라는 경지 덕분이었다.

점진적인 육체적 성장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수준.

다음 단계인 초월의 격을 얻기 위해서는 정신적 깨달음이라는 조건만이 남았다. 마도왕의 분신, 관리자의 조언이었다.

‘아직 그 깨달음이란 게 뭔지 감이 안 잡히긴 하지만.’

당연하게도 조급해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지금처럼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언젠가 이루리라 믿고 있다. 역천을 이룬 지 불과 2년도 안 된 사이에 여기까지 닿았으니까.

세계의 역사를 뒤져 봐도 유례없는 성장 속도라고 단언한다.

다른 마법사가 듣는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한낱 거짓말로 치부하겠지. 베르덴조차 경이롭다고 느낄 정도니.

‘하지만 이상할 것도 없지.’

지금의 베르덴은 순탄한 삶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고작 8살.

보헤미른 마탑의 일꾼이 되어 온갖 잡일을 해 왔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마법적 호기심을 충족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걸 가능케 하는 마법적 이해력과 집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18살의 성인이 되고 난 이후 7년.

직접적인 인체 해부를 제외한, 세계에서 금기시되는 무수한 실험을 당해 왔다.

[마탑을 위해 생명을 바쳐라]

마탑주의 강제 마법진.

그를 통해 내린 명령과 고통이 어제 일처럼 명확하게 떠오른다.

원하지도 않게 주입당한 지식과 억지로 뱉어 내야만 했던 결과물들. 날이 갈수록 몸이 망가져 시한부가 되었던 삶은 여전히 끔찍하다.

돌이켜 보기만 해도 마력이 크게 술렁였다.

‘발로크 베시아스.’

만약 그 이름 앞에 주저앉았다면, 끝내 버티지 못하고 체념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오래 버틴다고 해도 작년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겠지.

이용당할 대로 이용만 당해 마탑의 순위를 올리는 데 일조하고, 시체는 소각되어 흔적조차 사라졌을 것이다.

말 그대로 마탑의 소모품이 되어서.

‘……마탑주뿐만이 아니다.’

복수 대상은 한 명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마탑의 비공식 실험에 가담한 모두의 얼굴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나 베르덴에게, 평생이 가도 지워지지 않을, 깊은 흉터를 남긴 자들이 있다.

‘로벨린을 제외한 발로크의 직속 제자들.’

그 숫자는 총 세 명.

세 번째 제자를 제외한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한 인체 실험의 책임자였다.

먼저 첫 번째 제자.

그는 베르덴이 타고난 이해력을 탐했고, 고문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잔혹하게 베르덴을 소모품처럼 활용했다.

불과 3개월도 안 된 사이에 정신이 산산이 쪼개졌을 정도로.

그리고 두 번째 제자.

약물 실험의 권위자로서, 마력회로 확장제와 기억확장제를 만들어 낸 장본인.

결정적으로 베르덴에게 시한부 인생을 안겨 주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제자, 루커드 매니악스.’

놈은 수준이 부족해 비공식 실험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다중 연속성 이론을 강탈했다.

그렇게 베르덴의 결실이자 기회를 빼앗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베르덴이 비공식 실험체가 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또한 보헤미른 마탑의 원로회도 있다.

레오닐과 동급, 아니 그 이상으로 마법에 미친 늙은 괴물들.

마탑을 번영시킨다는 명목하에, 수백만 명의 목숨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희생시킬 수 있는 뒤틀린 자들이다.

“…….”

증오스러운 면면들이 기억을 감돈다.

절로 이마에 핏줄이 불거지며 부아가 치밀었다.

당장 눈앞에 있다면 갈기갈기 찢어발긴다고 해도 풀리지 않을 감정.

‘아니, 단순히 죽이는 걸로 끝내서는 안 되지.’

그래,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마법사로서 쌓아 올린 자존심을 부수고, 놈들이 세상에 남긴 모든 것을 짓밟아 무너뜨릴 것이다. 그렇게 발로크가 이끌어 온 보헤미른 마탑을 집어삼킬 것이다.

때는 머지않았다.

이미 초월에 근접한 경지에 다다랐으니.

‘물론 당장 들이받을 생각은 없다.’

상대는 10개의 마탑 중 무력 2위에 해당하는 마탑이다.

여러 이유로 전력이 손상되었다고 하나, 베르덴 혼자 전면전을 치른다면 피해는 줄 수 있다고 할지언정 승산은 전무하다.

적어도 초월자가 아닌 지금은.

그러니 준비가 필요하다.

복수를 위한 본격적인 계획을 설계해야 한다.

그때,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아,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 있었군. 혹시 바쁘지 않다면 같이 시내로 갈…….”

다가오던 칼리아가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그녀의 검붉은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바깥을 바라보는 베르덴의 얼굴에서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어두운 감정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셔……? 무슨 일 있나?”

“아니, 아무 일도.”

순간 솟구치는 감정에 반응이 늦었다.

고개를 저은 베르덴은 어느새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시내 나들이라. 어차피 실리스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도 하니,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그럼 나가지.”

베르덴이 앞장서서 걸었다.

칼리아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향해 팔을 뻗다가, 금세 다시 거두고는 옆으로 따라붙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왕성의 복도를 거닐었다.

* * *

오랜 세월을 거친 기억들이 빛살처럼 지나쳐 간다.

이십 년이 넘도록 곱씹어 왔기에 이제는 무미건조해진, 직접 경험해 본 적 없는 고대 마녀들의 이야기다.

으레 세간에서 말하는 기억과는 다르다.

시간의 흐름에 깎여 나가 오직 핵심만이 남은, 일종의 정보의 집합체와도 같다. 고대의 마녀들이 느꼈던 감정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고대에 어떤 일들이 있었고, 그를 통해 마녀의 마법을 전수받는 게 전부였다. 역사서와 마법 이론서를 보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 전이된 기억은 다르다.

어머니, 레미엔.

그녀가 느꼈던 모든 고통과 참담한 심정이 아우성치고 있다.

한편에서는 어린 실리스를 사랑으로 돌봐 주던 어머니의 목소리와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서로 혼잡하게 뒤섞인 상반된 감정.

그것은 저주가 되어 달라붙었고, 실리스의 꿈을 구체화하는 데 일조했다.

그렇게 마침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저주는 사라지지 않았다.

꿈은 현실이 되었고, 현실은 곧 실리스의 악몽이 되었다. 삶의 근간을 상실한 그녀에게 이제는 뭐가 남아 있을까.

“…….”

실리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체온을 식히는 냉기가 느껴졌다.

상체를 일으키자, 그녀를 옆에서 간호하고 있던 플로나와 아델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어디, 어디 아프신 데는 없으세요?”

따뜻한 격정이 이는 목소리다.

두 사람과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던 어머니가 자연스레 상기된다.

실리스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 괜찮아요. 아티팩트를 무리하게 운용한 반작용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그보다 다른 건 어떻게 됐죠?”

조금 머뭇거리던 아델과 플로나가 입을 열었다.

왕성에 찾아온 엘프와 칼리아 일행.

비밀 사교회에 대한 세바스와 케미언의 복수.

애셔가 직접 나서서 왕국 마법성에 있는, 레오닐의 인체 실험 연구 자료를 전부 색출해 불태운 것까지.

“……그렇군요.”

얘기를 듣고 있던 실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이곳은 그녀가 평생을 갇혀 있던 탑이었다. 햇빛이 반사되지 않는, 금속 창살 너머로 구름이 가득 낀 하늘이 보였다.

공허한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던 실리스가 말했다.

“에스퍼렌사 후작을 불러 주시겠어요?”

* * *

“전하, 무탈하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정복을 갖춰 입은 후작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붉고 선명한 머리칼이 흔들거렸다. 실리스는 제자리라는 듯 휠체어에 앉아 햇빛을 맞고 있었다.

“후작은 어떠세요?”

“보다시피 멀쩡합니다. 또한 다른 모두도, 전하의 덕에 순조롭게 정신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염려 마시옵소서.”

“……다행이네요.”

실리스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마녀의 마법은 정신을 부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회복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인간의 내면으로 구체화된 세상, 꿈.

그 꿈을 다루는 것이 마녀가 가진 특별함이다.

“이제 그간의 여정이 끝난 거나 다름없네요. 암흑가의 왕 그론드와 레오닐은 죽었고, 에스티리아 왕과 발르그나를 비롯한 자들의 정신은 전부 제 통제하에 있으니.”

“비원을 이루신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당신의 힘이 없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거예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실리스가 피식 웃었다.

목소리며 태도며, 언제 어디까지나 한결같은 남자다.

백금의 눈동자가 고개와 함께 옆으로 기울었다. 다른 왕성 구역에 비해 한없이 열악한 탑의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기, 후작.”

“말씀하십시오.”

“제가 계획이 성공했다고 자만하고 왕성에서 복수를 하던 그때, 갑자기 애셔가 찾아와서 묻더군요. 복수를 이룬 다음에 무엇을 할 거냐고.”

“…….”

“당시에 답을 하지 못했던 저는, 레오닐의 패색이 짙어진 그때야 결론을 내렸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꿈을 꾸면서도 다시 생각해 봤지만, 역시 대답은 같더군요.”

목소리에는 체념이 짙었다.

“모르겠다. 그게 제가 내놓은 답이에요.”

왕성은 장악했다.

더 이상 인형을 연기하며 휠체어를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 버렸다.

버려지다시피 한 이 왕성의 탑도, 창살 너머의 저 갑갑한 풍경도.

복수를 바라며 살아온 날들이 삶,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제 꿈을 꾸는 시간은 지나 버렸다.

익숙했던 세상이 더없이 생소하게 느껴진다. 평생의 목적을 상실하니 어둠에 덩그러니 놓인 듯했다.

실리스로서는 이 방황을 이겨 낼 수가 없었다.

“후작, 저는 지금까지 당신을 이용해 왔죠. 너무도 염치없지만, 그래도 물을게요. 이제 저는 뭘 해야 하죠?”

실리스가 눈을 반쯤 감았다.

의지를 상실한 여인이 거기 있었다.

“이대로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자들을 전부 자살시키고, 저마저 죽어 더러운 에스티리아 왕가를 멸망시킬까요?”

에스티리아 왕, 발르그나, 실리스, 노스램드 공작가와 데본 공작가.

왕가의 피를 조금이라도 이은 자들이 전부 죽는다면 왕가는 끝이다. 그럴 만한 힘이 실리스에게 있었다.

“실리───”

“아니, 그럼 왕국 전체에 큰 혼란이 찾아오겠죠. 왕가의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귀족들이 사분오열되어 거대한 내전을 벌일 테고요.”

실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후작이 직접 이 왕위에 앉을 수 있어요. 전력도 충분할뿐더러 인망까지 드높은 당신이라면…… 당대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가주라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죠. 국가 전체가 불안정해지는 건 피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현 왕가보다는 잘 다스릴 거예요.”

후작이 무언가 말하려 했다.

실리스는 여지를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전쟁이 싫으신가요? 그럼 에스티리아 왕과 발르그나를 꼭두각시로 부릴 수 있게 한 다음, 저는 왕국을 떠나 숨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뜻 택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한다면 아델과 플로나 그리고 로리안이 따라오겠죠. 저는 마지막 남은 루비넬리안 공작가의 핏줄이기도 하니, 세바스와 케미언도 동행하려 할 테고요.”

가느다란 손이 주먹을 쥐었다.

투명한 피부 위로 푸른 혈관이 비쳤다.

“이제 와서 제멋대로지만……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더 이상, 후작 당신을 포함해 모두가 절 왕녀로 모시며 고생을 자처하길 원하지 않아요.”

실리스가 앞을 바라봤다.

스스로 조력자를 자처한 사내가 경청하고 있었다.

“후작, 저는 대체 뭘 해야 할까요?”

목소리가 흩어져 사라진다.

침묵에 가까운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실리스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이미 중심을 잃고 불안정해진 마음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후작은 달랐다.

강인한 색채를 띠고 있는 붉은 눈동자는 미동조차 없이 올곧았다. 그의 마음은 결연했고, 태도는 단호했다.

“왕이 되십시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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