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초신성
사방에 만연하던 황혼, 그 어스름한 빛이 모습을 감췄다. 왕성의 하늘이 칠흑 같은 그림자로 물들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어둠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훤히 보였다. 빛이 있을 때보다 더욱 선명하게. 마치 끝없는 심연 속에 빠진 듯한 기분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마법적 현상.
형용하기 어려운 감각에 실리스와 에드몬의 마음이 방황했다. 미지에 대한, 순수한 공포에 몸과 영혼이 떨렸다.
그때, 어둠 속에서 회색의 빛이 태어났다.
“어…….”
처음에는 빛이 하나였다.
그것은 직후 둘이 되었고, 넷, 여덟, 열여섯…… 무서운 기세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눈을 한번 깜빡였을 땐, 이미 어둠과 빛이 어우러져 있었다.
생소한 전율이 이는 한편 익숙함이 기억을 간질였다.
수백, 수천 번이나 봐 온 풍경이 떠오른다.
푸른 하늘이 황혼에 저물고 나서야 드리우는 세상. 작은 빛들이 이정표가 되어 길을 밝히는, 아름다운 밤하늘.
‘뭐냐, 이 괴이한 마법은.’
레오닐이 미간을 좁혔다.
온몸을 두드리는 격통을 뒤로하고 안력을 높였다. 이건 본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의 지식으로 정체를 꿰뚫어 볼 수 없었다.
마녀의 마법…… 아니, 그 이상으로 종류와 위력을 판단하기 어려운 마법이다.
문득 기묘한 불안감이 꿈틀거렸지만 곧바로 억눌렀다.
하나만으로도 대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메테오 스웜>.
그것이 두 개나 합쳐진 파괴를, 고작 밤하늘을 만드는 마법으로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무의미한 발악을!”
레오닐이 [절체의 의지]를 다시금 기동했다.
영구적인 생명력 소모를 대가로, 마법에 의지를 담을 수 있는 아티팩트.
회오리치는 수많은 불덩이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완전한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붉은빛이 가까워지며 거센 열기가 촉각을 달구었다.
저 붉은 폭풍과 휩쓸렸다간 대부분의 사물은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
그런 와중에 베르덴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영성, 알헤나는 마력의 영역이 실체화된 천체의 요람.
이곳의 주인인 베르덴은 모든 저항력과 마력 재생 속도가 일제히 상승한다.
현재 그는 보호 계통의 부여 마법으로 이뤄진, 하나의 성벽을 둘러싸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나 그건 부가적인 효과일 뿐.
───!
베르덴의 곁에 자그마한 빛이 생성되었다.
찰나의 순간, 회색의 별무리가 그의 주변을 둘러쌌다.
그 모습은 더없이 찬란하고 경이로웠지만 이건 단순한 시각적 효과 따위가 아니다.
‘알헤나를 비추는 빛은 전부 성체(星體)의 일부.’
다시 말해 모두가 별.
스스로 나아가는 유성이다.
베르덴이 눈을 떴다.
지척에 드리운 화염을 향해 광채가 번쩍였다.
무수히 흐르는 별, 유성우(流星雨).
주위에 가득 찬 별들이 술렁인다.
그를 기점으로 밤하늘에 존재하는 별들이 기동했다.
쐐애애애액!
회색의 별꼬리가 어둠에 선을 긋는다.
셀 수 없는 궤적은 이내 폭우가 되었고, 베르덴에게 덮쳐 오는 화염 운석들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돌진했다.
그리고 충돌.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수십 개의 불덩이가 폭발했다.
부딪친 별들로 인해 촉발된 화염이 밤하늘을 불태웠다.
압도적인 광경이다.
대규모 전쟁터에서나 볼 법한 힘이 허공을 휩쓸었다.
끊이지 않는 폭음. 어느새 파괴된 화염 운석은 스물, 서른, 마흔에 이어 아흔. 그를 넘어 세 자릿수에 다다랐다.
레오닐이 숨겨 왔던 그리고 자제했던 아티팩트까지 사용하며 만들어 낸 마법이 서서히 무력화되고 있었다.
“……?!”
레오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뭐라 목소리를 내뱉기도 전에 회색의 빛이 가까워졌다. 마법전에서 비껴 난, 고작 십수 개에 불과한 별들.
평소의 레오닐이라면 간단히 막아 낼 수 있는 위력이며 숫자였다.
하지만 지금의 레오닐은 정상이 아니었다.
급격한 마력 소모와 마도의 반동, 마녀의 심장으로 인해 쌓인 부담 탓에 마력회로가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았다.
뒤늦게 불길을 생성해 벽을 만들었지만 화력이 부족했고 두께 또한 얇았다.
판단을 잘못했다.
‘피해야 했는…….’
이미 늦었다.
유성이 화염을 관통했다.
* * *
이제까지 버텨 왔던 로브가 짓밟힌다.
왕국 최고의 대장장이과 마법 물품 제작자가 탄생시킨 걸작이 무자비하게 찢겨 나갔다. 액세서리로 만든 보호막도 마찬가지였다.
육체를 수호하는 모든 수단이 빛을 잃었다.
더는 막아 낼 방도가 없다.
기껏 할 수 있는 건, 마녀의 심장을 지키는 것뿐.
퍼버버버버버버버벅!
왼쪽 약지가 잘려 나간다.
왼쪽 팔뚝의 근육이 파열되며 뼈가 드러났다.
복부에 위치한 장기의 태반이 뒤집혔다.
오른쪽 무릎이 박살 나고 발가락 네 개가 날아갔다.
마지막으로 왼쪽 눈이 터져 나갔다.
“끄아…… 악…….”
피 끓는 소리가 목 안에서 기어 나왔다.
급류처럼 쏟아지는 격통에 레오닐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이런 고통은, 이런 마법은 난생처음이었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레오닐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내가, 진 건가.’
암전하는 의식 속에서 현실을 떠올렸다.
더없는 무력감과 허탈감이 정신을 휘감았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눈이 제멋대로 감겼다.
이대로 잠에 든다면 그대로 영원한 안식에 들 것이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은 더 버틸 수 없었다.
그때, 레오닐의 시야에 베르덴이 담겼다.
만신창이인 그에 비해 너무도 멀쩡해 보였다.
투명한 벽안과 마주쳤다.
무정함만이 일렁이는 눈빛. 레오닐을 적수로 여기지 않는 시선이다.
차라리 비웃기라도 하면 모를까…… 저 앞에서는 살아온 인생의 의미가 상실되는 걸 느꼈다.
무의미한 삶.
그것이 레오닐을 일깨웠다.
‘……인정 못 해.’
순간 꺼져 가는 불씨가 거세게 타올랐다.
어느 때보다 짙게 드리운 증오와 분노가 뒤섞였다.
세월에 흐릿해진 기억이 떠오른다.
어릴 적, 한계 위계가 6위계 상위라고 측정되었을 땐 기뻐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도 보기 드문 재능을 타고난 것이니까.
그러나 재능은 세월이 흘러 저주가 되었다.
지금까지 레오닐은 두 명의 초월자를 만났다.
한 명은 그를 하찮게 내려다보았고, 다크 워튼의 마탑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극심한 모멸감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레오닐은 반항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너무도 강대한 존재감에 침묵하는 게 전부였다.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
초월자의 최소 조건 중 하나, 7위계.
레오닐은 한계는 6위계 상위였다. 빌어먹을 그 한 단계가 부족했기에 영원히 초월자가 될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올라가려 해도 닿을 수 없던 경지.
‘그런 내게 기회가 찾아왔다.’
마녀의 심장.
우역곡절 끝에 이식에 성공해 초월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토록 열망해 왔던 소망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에, 이 세상 전부를 가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모든 게 무너지고 있다.
초월에 이르지도 않은, 낯설고 어린 마도사에게.
이게 현실인가?
‘인정 못 해.’
초월자인 내가 죽는 건가?
‘인정 못 해.’
이게 그토록 바란 꿈의 종착지라고?
‘인정 못 해.’
그래, 인정할 수 없다.
이것이 결말이라면 마땅히 거부하겠다.
자신의 평생이 누군가의 거름이 될 운명이라면 저항하겠다.
‘애셔.’
레오닐 베르타나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마도사는 특별하다.
그의 반의반조차 살아오지 않았음에도 이만한 경지. 저 넘쳐흐르는 재능은 초월자까지 이어져 있을 게 분명하다.
‘용납할 수 없다.’
저열한 질투라고 해도 좋다.
자신이 갖지 못한 걸, 남도 갖지 못하게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니.
그러니.
‘네놈만큼은 죽여 버리겠다.’
놈의 생명을 여기서 끊으리라.
놈이 초월을 거머쥐지 못하게 하리라.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다.
레오닐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남아 있는 핏줄이 불거진다. 송곳니를 드러낸 그가 최후의 함성을 내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마녀의 심장과 레오닐의 심장이 공명한다. 맥박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요동쳤다.
폭발적인 마력에 더는 견디지 못한 심장이 터져 나갔다. 그를 따라 마력회로마저 붕괴되며 뜨겁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레오닐을 둘러싼 거대한 화염의 장막.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있는 지점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베르덴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멸할 생각인가?”
“누구도…… 나를 그딴 눈으로 볼 수 없다……!!”
레오닐의 남은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더 이상 이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생명을, 모든 것을 연로로 삼아 불을 지피고 있다.
오직 한 명을 죽이기 위해서.
물론 베르덴은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강뢰>
한 줄기 벼락이 몰아쳤다.
하나 레오닐이 두른 화염을 뚫기에는 부족했다.
이제까지 봤던 어떤 화염보다도 짙은 밀도. 어지간한 마법으로는 표면을 깎는 게 전부일 터.
‘그렇다면 더욱 강한 힘으로 부순다.’
쿼드라 캐스팅.
마도와 혼돈이 뒤섞인다.
<카오스>
암자색의 구체가 화염과 격돌했다.
이내 폭발하며 안에서 다양한 원소 마법들이 쏟아져 나왔다.
충격에 견디지 못한 화염 장막의 일부가 물러나며 곧 레오닐의 몸이 드러났다.
6위계 이상으로 이루어진 마법들이 그를 찢어발겼다.
‘이제 끝───’
순간 베르덴이 움찔했다.
여전히 불길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다.
“너만큼은…… 너만큼은…….”
레오닐이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전신이 난도질당하고 왼팔과 오른 다리가 통째로 날아갔으며, 곳곳에 깊게 파인 상처에서는 뼈가 드러났다.
그런데도 아직도 죽지 않았다.
“반드시…… 죽이, 겠다……!”
화염에 더욱 거세게 타오른다.
진즉에 끊어졌어야 할 생명 줄을, 마지막 일념으로 붙잡고 있다.
베르덴과는 종류가 다른, 기형적인 정신력이다. 그만큼은 초월자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레오닐이 말했다.
직전과는 달리 아주 선명하게.
“나는, 초월자다.”
초위 마법.
<광화의 일륜>
거대한 화염의 광원이 추락한다.
스스로를 장작으로 삼아, 작은 태양이 된 레오닐.
비교적 느린 속도였지만, 모든 역량을 화력에 치중한 것인지, 그 안에 담겨 있는 파괴력은 가늠하기 어려웠다.
‘나 혼자라면 피할 수 있겠지만…….’
베르덴이 아래를 흘겨봤다.
저 밑에는 실리스와 에스퍼렌사 후작가 일행이 있다. 거기서 더 내려가면 왕도로 이루어진 섬들이 고정되어 있다.
‘위치상 전부 죽겠군.’
막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이다.
실체화된 실리스는 즉사, 정신체로 이루어진 모두는 정신이 붕괴되어 대부분 영혼이 죽어 버릴 것이다.
애초에 레오닐을 바깥으로 끌어내려 했던 목적이 무엇인가.
마법전에서 발생할,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피해와 희생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걸 이제 와서 내다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베르덴이 고개를 들었다.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온 태양이 더욱 거대해져 있다.
‘초위 마법이라.’
편법이긴 해도 초월자는 초월자라는 건가.
심지어 자신이 가진 생명을 다 바쳐 탄생시킨 마법.
“역시 시험 상대로는 적당하군.”
가볍게 웃은 베르덴이 마안을 빛냈다.
심장에서 방출된 마력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거기서 현재 남아 있는 마력을 태반 가까이 소모하자, 유성으로 소모된 회색의 별들이 전부 재생했다.
베르덴은 성신 마법을 손에 넣은 이후, ‘유성’을 개량하려 했다. 당시에는 과도한 마력 소모를 줄이기 위해서.
그러나 수천 번의 시도를 통해서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뭔가 잡힐 듯했지만, 셀 수 없는 경우의수 사이에서 운 좋게 정답을 찾는 건 무리였다.
애초에 정답이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이 정도 마력 소모야 문제없지만.’
그래도 여유가 있을 때면 실험을 이어 나갔다.
이제까지 했던 노력이 아깝기도 했고, 다른 방향으로 성신 마법을 개량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으니까.
그런 베르덴이 마도를 개척했다.
아직 절반의 마도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막힌 길을 뚫기에는 충분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별은 총 세 개.’
각자 완성된 마법이었다. 그걸 마도 <무한>이 내포한 가능성을 이용해 관계를 비틀고 엮어 내었으며 끝끝내 연계시켰다.
그렇게 두 개의 마도가 합쳐져, 새로운 별의 마법을 탄생시켰다.
베르덴이 왼손을 폈다.
그러자 마력이 기류가 되어 알헤나의 밤하늘을 움직였다.
어둠에 깃든 무수한 별들의 궤적이 직선이 되고 곡선에 이르러 원의 궤도를 그렸다. 모든 별이 거대한 흐름을 형성했다.
이내 공간이 뒤틀렸다.
소용돌이치는 별의 흐름이 빨려 들어가듯 손아귀에 모여들며, 서로 융합해 하나의 별이 되었다.
새까만 공간 속에서 회색빛이 고요히 명멸했다.
“…….”
베르덴이 말없이 왼팔을 뻗었다.
공간을 관통하며 전진하는 작은 별.
닥쳐 오는 레오닐의 붉은 태양에 비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나, 내면에는 별의 정수가 담겨 있다
‘이건 초월자를 상대하기 위한 비장의 수단.’
마침내 별과 태양이 마주했다.
그 순간, 둘 사이에서 생겨난 자그마한 섬광이 모든 빛을 흡수했다. 무저갱과도 같은 깊고 어두운 그림자가 세상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 없다.
눈앞의 어둠은 잠깐에 불과할 테니.
스스로가 흐름이 되어 격류가 된 별은, 그 끝에서 찬란한 빛을 남긴다.
별의 폭발, 초신성(超新星).
────!
항거할 수 없는 회색의 빛이 터져 나온다.
알헤나의 밤하늘이 삽시간에 걷혔고, 너머에 있는 황혼의 하늘마저 회색으로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별과 태양에서 발생한 힘의 파장이 뻗어 나갔다.
그리고 세상이 붕괴했다.
* * *
구름이 느릿하게 흐르는 자연.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정적을 찢어발겼다.
───콰과과과과광!
날아온 사물에 왕성의 일각이 무너졌다.
사람 형태의 그림자는 순식간에 지붕을 부수고, 7층에서 1층까지 복도와 계단을 무너뜨렸다.
뻥 뚫린 천장 위로, 조금은 서늘한 공기와 따스한 햇빛이 내리쬐었다.
건물 잔해로 형성된 작은 언덕.
그것이 한번 들썩이더니 굉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그 안에 있는 작은 크레이터에 베르덴이 누워 있었다.
“…….”
여러모로 몰골이 엉망이었다.
잿빛 머리칼에 먼지가 가득히 묻었고, 왼쪽 턱 끝에는 찰과상이 생겼다. 아인베르도 일부지만 손상되기까지 했다.
볼 안쪽이 찢어졌는지 입맛이 쓰다.
퉷. 베르덴이 피를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초신성을 쓰려면 거리를 좀 더 벌려야겠군.’
위력이 예측치를 한참이나 벗어났다.
심지어 초위 마법의 폭발력과 전혀 상쇄되지 않고 오히려 합쳐졌기에 더더욱.
역시 이론만으로 아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건 차이가 있었다.
새로운 지식을 쌓은 베르덴이 바깥으로 나섰다.
마력 소모와 부상 탓에 몸이 나른했다. 그런 그를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과 바깥 공기가 환영했다.
이곳은 실리스의 정신세계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정신계가 충격을 버티지 못한 모양이군.’
예상 범주 내였다.
<마력의 눈>
베르덴이 하늘에서 왕도 레티아를 내려다봤다.
1왕자 발르그나, 에스퍼렌사 후작과 에드몬 등을 포함한 사람들이 광장에 쓰러져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비행정 함대도 잠잠했다.
아직 정신을 차린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역시나 정신체가 손상되지는 않은 것 같다.
잠에 든 사람들의 얼굴이 더없이 편안한 걸 보면.
‘내버려 둬도 문제는 없겠지.’
베르덴이 등을 돌려 왕성의 중심으로 향했다.
정신계에서 태반 이상이 붕괴되었던 왕성 에스노렌은 멀쩡했다. 조용히 흐르는 바람이 피부를 간질였다.
그때, 베르덴이 걸음을 멈추었다.
산산조각 난 가도 위, 피 웅덩이에 잠겨 있는 레오닐이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놈의 몸 상태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하반신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가슴까지 내려오던 수염은 탈색된 채로 절반도 남지 않았다.
레오닐을 구성하는 건 머리와 오른팔이 붙어 있는 상반신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조직이 와해되어 뼈와 장기가 드러나 있었다.
저런데도 숨이 붙어 있는 걸 보니, 생명력 하나만큼은 경이로웠다.
하얗게 변해 버린 눈동자.
레오닐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는…… 초월…… 자다…….”
“아직도 초월자 타령인가.”
레오닐의 오른팔은 여전히 스태프를 쥐고 있었다.
몸이 실시간으로 갈려 나가는 도중에도 마녀의 심장을 지킨 것이다. 초월자의 경지에서 내려오지 않기 위해서.
포기하지 않는 끈기, 그를 넘어선 광기의 집착.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바친, 간절한 열망.
수많은 인체 실험을 통해 타고난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레오닐의 집념.
베르덴이 손을 내밀었다.
“가치 없군.”
콰직.
두 개의 푸른 빛살이 레오닐의 머리와 심장을 동시에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