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레오닐 (1)
왕가의 근위 기사단장, 카젠 드위트.
공공연히 왕가의 검을 대표하고 있는 강자로, 레오닐에 비해 급이 떨어지긴 하나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손꼽히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
무려 30년이 넘도록 제자리를 지켰기에 권력 또한 막강했다.
하지만 고여 있는 물은 언젠가 썩기 마련.
카아아앙!
날카로운 금속음 뒤로 검명이 낮게 울린다.
각기 다른 움직임을 구사하는 검사 둘이 맞부딪치자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몇 번이나 계속되는 칼부림에 곁에 있던 건물들이 내려앉았고, 바닥에는 수십 개의 검흔이 짙게 새겨졌다.
카젠 드위트.
에스퍼렌사 후작.
서로의 일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검의 길이상, 제자리에서 연격을 이어 나가는 건 불리하다. 그렇게 판단한 두 사람이 동시에 자리를 박차며 흐름을 끊어 냈다.
“허억, 허억…….”
카젠의 호흡이 어느새 거칠어졌다.
세차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으로 인한 노화, 단련을 게을리한 약화였다.
그에 반해 에스퍼렌사 후작은 고요했다.
마치 이 정도쯤은 별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
뒷골목 깡패들 간의 주먹다짐이라면 모를까, 강자에 위치한 두 사람에게는 현격한 차이였다.
“후작, 분명 당신의 실력은 나와 다르지 않았는데 어째서……!”
“많은 세월이 흘렀다.”
후작이 손등으로 볼을 훔쳤다.
묻어 있던 먼지가 닦여 나왔다.
“그동안 나는 귀족의 의무를 한시도 내려놓은 적이 없다. 그렇게 오늘 이날을 위해 많은 준비를 갖추었지. 그런데 카젠, 너는 도대체 뭘 했지?”
싸늘한 시선이 카젠을 관통했다.
“공화국과의 전쟁 이후, 지금까지 네가 한 거라곤 거머리처럼 왕가에 빌붙는 게 전부였다. 자제심 없이 폭력을 쓰는 걸 마다하지 않았고, 뇌물을 받고 또 여성을 강제로 범하여 죽였음에도 권위를 내세워 책임을 모면했다.”
“그, 그걸 어떻…….”
“그리고 왕가의 명령 아래, 루비넬리안 공작가를 멸문시키며 학살을 일삼았지. 그러고도 지금의 상황에 의문을 품는 건가? 갑옷 아래 두꺼운 지방을 두른 네가?”
카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반역자인 당신과는 다르게 나는 왕가에 충성했다. 위대한 에스티리아 왕가의 검! 왕가의 명령을 따르는 게 내 의무일진대, 그것을 이행한 것이 뭐가 나쁘다는 건가!”
“왕가의 검이라는 자가, 저열한 욕망의 책임을 왕가에 떠넘기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카젠 드위트.”
말이 가시가 되어 폐부를 관통했다.
반박할 수 없는 모욕에 카젠의 얼굴이 불게 달아올랐다.
손아귀에 쥐인 검이 심하게 떨렸다. 격한 흥분을 참지 못한 그가 지면을 부수며 돌진했다.
“닥쳐라!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위선자가!”
맞는 말이다.
후작은 왕국의 어둠에 무지했다.
멋모르고 끔찍한 평화를 누리는 시민들보다도 질이 나빴다. 그는 단순히 살아갈 뿐만 아니라 정도를 걷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으니까.
왕녀와 인체 실험의 희생자들은 뭐라고 생각했을까.
시체로 만들어진 산을 짓밟고,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은 채 정의를 부르짖는 후작을 바라보면서……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위선자가 따로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속죄하겠다.’
쩌적.
앞꿈치에 실린 힘이 폭발했다.
정면으로 쏘아져 나간 후작이 백색의 기운을 검에 집결시켰고, 카젠 또한 자신의 기를 전력을 다해 끌어모았다.
맺힌 검기가 기예로 화한다.
충돌하는 순간 두 사람 중 하나는 죽을 것이다.
적어도 카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무거운 바스타드 소드를 다루며, 어지간한 힘 따위로는 막을 수 없는 강렬한 일격에 특화되어 있었으니.
‘아무리 체력에서 차이가 난다고 해도, 근력은 내가 위다!’
강하게 발을 디딘 지면에 커다란 금이 갔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은 칼날, 강력한 기예가 단두대처럼 떨어졌다.
단칼에 쪼개질 후작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카젠이 투구 안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카앙.
기세에 비해 보잘것없는 금속음.
후작이 갑작스레 기를 거두며, 카젠의 일격을 바람처럼 흘려 보냈다.
백영白影. 잔상이 된 후작이 미끄러지듯 발을 놀렸다. 빈틈을 포착한 그의 검이 카젠의 투구 아래에 맞닿았다.
“엇.”
백색의 검이 선을 그었다.
촤아아악!
깨끗하게 잘려 나간 카젠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바닥에 부딪히자 투구가 날아가며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눈은 죽음을 거부하듯 여전히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어 육중한 갑옷을 착용한 몸뚱이가 쓰러졌다.
“후우.”
후작이 검을 털었다.
식지 않은 피가 흩뿌려졌다.
카젠의 약점을 파고들어, 단칼에 본 승부는 그의 승리로 끝났다.
‘정신체를 죽인 것뿐이지만.’
실제로 죽지는 않았더라도, 카젠의 정신은 막대한 충격을 입었을 것이다.
놈이 가진 나약한 정신력으로는 도저히 버티지 못할 정도로. 그건 죽음 자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욱신.
후작이 자신의 상체를 살폈다.
조금 깊게 베인 어깨 부근에서 피가 배어났다.
역시 정면에서 근위 기사단장의 기예를 완전히 흘려 내는 건 무리였다. 이 또한 나중에 정신적 피해로 변환되겠지.
그리고 그것조차 마녀의 마법으로 완화될 터.
결과적으로 카젠은 완패한 것과 다름없었다. 왕가의 검이라고 하기엔 싱거운 최후였다.
“각하, 무사하십니까.”
“허허허, 그 카젠도 각하에게는 안 되는군요.”
갑옷 곳곳에 검흔이 새겨진 멜자르드가 다가왔다.
옆에서는 에드몬이 카젠의 시체를 스태프로 툭툭 찌르고 있었다.
붉은 신념 기사단과 함께인 두 사람의 뒤에는 근위 기사단과 주축을 잃은 궁정 마법사단의 정신체가 즐비했다.
“전부 계획대로 된 모양이군.”
“예, 이제 하나만이 남았습니다.”
마지막은 당연하게도 레오닐.
<위괴의 악몽>에서 정신이 붕괴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그 레오닐이니까.
‘그래도 정신력이 상당히 깎여 나갔을 터.’
정신착란을 일으킨 다른, 상위 궁정 마법사들을 전부 죽이느라 마력도 소모했을 것이다. 그를 상대하기 위한 전력은 충분하다.
이제 악몽이 풀리고 놈을 죽이면 끝이 난다.
때마침 소규모 비행정 하나가 날아왔다.
실리스 왕녀의 곁으로 가는 것이 다음 차례였다.
갑자기 정신이 반응했다.
정체는 가엾은 실험의 희생양, 로리안이었다.
───각하,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일이지?
───왕녀 전하와 정신 연결이 끊겼습니다.
───……!
예정에 없던 사태다.
단순한 우연 따위가 아닐 터.
그렇게 판단한 후작이 기사단을 이끌고 비행정에 탑승했다. 곧장 왕녀가 있는 꼭대기 섬, 에스노렌으로 향했다.
그리고 왕성의 중심에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말았다.
이죽거리는 레오닐과 그에게 목이 잡혀 괴로워하고 있는 실리스를.
* * *
실리스는 어린아이처럼 무력했다.
마녀의 마법으로 정신을 흔들고 부수려고 했지만 심장의 맥동이 그를 전부 상쇄시켰다.
필사적으로 황혼의 세계를 조작해 죽이려도 했으나 역시 마찬가지. 강맹한 화염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인정해야만 했다.
눈앞의 초월자를 당해 낼 방법이 없다고.
“끅…… 끄윽……!”
주름진 왼손이 실리스의 목을 움켜잡았다.
조여 오는 숨통이 괴롭다. 마녀의 신체 능력은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기에, 어찌할 수 없는 힘이었다.
레오닐이 바란다면 실리스는 죽는다.
물론 그에게는 살기 같은 건 없었다. 당연했다. 어떤 마법사가, 세상에 마지막 남은 마녀를 죽이려 할까.
이 미지의 보고를.
“아직도 내가 초월자에 이른 것이 경악스러운 모양이로군.”
실리스가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어, 어떻게 위계 증폭을…… 그건, 불가능할 텐데……!”
“호오, 그건 마녀가 가진 고대의 기억에 기반한 의문인가? 그래, 먼 과거에는 그랬을지도 모르지. 이 나조차 왕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도, 무려 수십 년을 바친 끝에 완성했으니. 그런데 너는 특별한 마법사이면서, 마법사라는 족속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보군.”
레오닐이 입가를 비틀었다.
“마법사란 의심하고 탐구하여, 누구도 가 본 적 없는 길을 찾고, 또 걷는 개척자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다고 해도 현재, 그리고 미래에는 기어코 가능케 하는 존재.”
“…….”
“그 눈으로 똑똑히 보아라, 왕녀. 이게 마법사다.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마법은 언제나 진보한다. 과거의 기억에 매몰되어 있는 건 스스로를 도태시키는 자들뿐이지.”
잠시 손에 힘을 풀었다.
“다시 한번 권하겠다, 실리스 왕녀. 나와 손을 잡아라. 그렇게 한다면 마녀의 혈통을 재건시켜 주마. 그래, 이 왕국도 주마. 에스티리아 왕도, 1왕자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 주마.”
“네 목숨까지 준다면…… 긍정적으로 고려해───큭?!”
“이런. 이 상황에서도 복수에 눈이 멀어 있는 건가? 이미 물 건너간 것을. 그리고 내가 한 거라곤 네 아비의 명령을 따라 왕비를 해부하고, 그 심장을 연구한 게 전부다. 전자라면 뭐,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후자는 좀 억울하군. 어차피 썩어서 사라질 걸, 더 유용하게 쓰겠다는 건데.”
레오닐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비웃음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애초에 그는 부모의 유품을 소중히 한다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가치가 있다면 팔 것이고, 무용하다면 버릴 것이다.
실리적이고 효율적인 면에서는 그게 옳았으니까.
“또한 이대로 너마저 죽게 된다면 마녀의 명맥은 완전히 끊기겠지. 그 허무함은 여기 있는 어미에 대한 불효가 아닐까?”
심장의 빛이 실리스의 얼굴을 핥았다.
이번에는 그냥 조롱이었다.
울분을 참지 못한 실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녀의 피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마음을 꺾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지만, 레오닐은 여유로웠다.
어차피 시간은 자신의 편이었고, 어떤 사태가 발생하든 그를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음?’
그러다 저 멀리 소규모 비행정 한 척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후작가의 지원 병력인가?’
마녀를 설득하느라 바쁜 와중이다.
방해물이 끼어드는 건 반갑지 않았다.
화르르륵!
스태프에서 방출된 화염 광선.
직선의 궤적에 놓인 비행정이 단숨에 관통되었다. 고작 소규모 비행정의 보호 마법진으로는 막을 수 없는 위력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비행정이 몸을 뒤튼 탓에, 동력원이 아슬아슬하게 비껴 나갔다. 화재에 휩싸인 비행정이 기울며 섬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순간, 하늘에서 세 명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쉬익!
두 개의 검기가 쇄도한다.
레오닐이 무정하게 실리스를 내던지고, 화염구로 대응했다. 불꽃이 가라앉자, 실리스 곁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에스퍼렌사 후작, 멜자르드, 에드몬.
후작가의 최고 전력.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기 그지없군, 에스퍼렌사 후작. 덕분에 대관식에서는 꽤나 당황스러웠다. 왕관의 운반자가 설마 마녀와 관련된 아티팩트를 가지고 올 줄이야.”
“그랬다니 다행이군.”
“그래, 오늘만이 아니지. 1왕자의 성에 있는 비밀 실험실을 부순 것도, 해외에 있는 내 연구실을 파괴한 것도, 그 연구실을 정리하러 보낸 3석차 브릭 메드워가 실종된 것도. 그리고 공간을 이동하는 나를 왕국의 금지, 빛이 들지 않는 동굴로 보낸 것도…… 음, 생각해 보니 많이도 당했군. 설마 그 고고한 에스퍼렌사 후작이 몰래 활개를 치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레오닐이 당시의 짜증을 떠올렸다.
그러다 미소를 짓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지난 일이니 대충 넘어가지. 뭐가 됐든 간에, 너희들은 마녀도, 특이 형질도 아니라 여기서 처분해 버릴 생각이니까.”
레오닐이 마녀의 심장을 조작했다.
세계가 비틀리며 미증유의 기운이 세 사람을 덮쳤다. 정신체인 그들을 실체화시켜,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죽이기 위한 준비였다.
물론 실리스가 두고 보지 않았다.
마녀의 가시왕관의 힘을 빌려, 레오닐의 수작에 저항했다. 가까스로 강제로 실체화가 되는 것을 막아 냈다.
“저항할 마력이 남아 있었나. 무의미하게도.”
레오닐의 불평을 뒤로했다.
다시금 마력을 끌어모은 실리스가 정신계를 나가는 입구를 열었다.
“전하? 이건…….”
“하아, 하아······ 지금, 레오닐은 초월자예요. 이유를 설명할 때가 아니니 묻지 말고 어서 벗어나세요. 당신들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
초월자?
순간 당황했지만 잠깐이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먼저 나가십시오.”
“제가 나가면 이 세계는 붕괴돼요. 당장 현실로 가면 레오닐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어요. 그러니 제가 시간을 버는 동안…… 서둘러 왕국을 떠나세요.”
이건 실리스의 실책이었다.
레오닐이 마녀의 심장을 이식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대가를 최소화하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레오닐은 대화를 전부 듣고 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에스퍼렌사 후작이 도망이라. 그건 효율 이상으로 좋은 볼거리겠군. 나가고 싶다면 막지 않겠다. 어차피 조금이나마 삶을 연명하는 게 전부일 테니.”
레오닐은 도주를 종용했다.
초월자가 가진 오만함이었다. 그러자 세 사람이 실리스를 지키듯 기와 마력을 드러냈다.
이게 당연하다는 듯이.
“허허허, 마법의 초월자와 생사결이라. 마도사로서 이런 경험을 놓칠 순 없지요.”
“각하, 놈의 우측은 제가 맡겠습니다.”
흔들림 없는 각오였다.
실리스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붉은 안광을 빛낸 후작이 단언했다.
“전하,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놈을 베고 돌아올 테니.”
바깥으로 나가는 입구가 닫혔다.
왕성의 중심에는 한 명의 초월자와 네 명의 인간만이 남았다.
“그래, 그게 선택이라면 존중하겠다. 아무리 어리석다고 할지언정.”
곧 사라질 용기와 충성심을 본 레오닐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자, 과연 너희들은 불타 죽을 때 어떤 비명을 지를까.”
무척 기대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