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256화 (256/366)
  • 256화 꿈 (1)

    “네, 네, 네가 어떻게?!”

    발르그나가 경악성을 터트리며 말을 더듬었다.

    너무도 깜짝 놀란 터라 위엄과 체면을 차릴 겨를도 없었다. 주춤거리는 그의 등 뒤로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어……? 분명 왕녀님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신다고 하지 않았나?”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

    의문을 품는 건 시민들만이 아니었다.

    기사와 병사들, 특히 근위 기시단은 실리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왕성에서 휠체어에 옮겨 다니는 걸 몇 년이나 봐 왔었는데 저렇게 멀쩡히 움직이다니. 그녀의 눈동자에는 선명한 생기가 깃들어 있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 여기 한 명 더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레오닐은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정말로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

    기현상이 벌어진 하늘, 후작의 이상 행동, 정신을 차린 실리스 왕녀, 광장을 휩싼 침묵까지.

    바로 눈앞에 펼쳐진 일련의 상황들이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실리스가 일어섰다.

    수많은 눈동자가 한데 모였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

    레오닐의 신경이 바짝 날을 세웠다.

    왕녀가 뭘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어도, 저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다. 경험에 의거한 본능이었다.

    생각은 곧 행동으로 변환되었다.

    스태프를 꺼낼 시간조차 아까워 손을 내뻗었다.

    “……!”

    뒤에서 느껴진 살기에 곧장 방어 마법을 펼쳤다.

    난폭한 화염에 뒤덮인 손이, 그의 목을 노린 검날을 잡아 세웠다.

    흉수의 얼굴을 본 레오닐이 눈을 부릅떴다.

    “메, 멜자르드……?!”

    에스퍼렌사 후작의 오른팔.

    기습은 하나 더 이어졌다.

    콰아아앙! 옆에서 날아온 폭풍의 구체가 몸을 강타했다.

    공중으로 날아간 레오닐이 비행으로 제동을 걸었다.

    익숙한 마력과 마법이다. 곧바로 시전자를 찾아낸 그의 시야에 한 노인이 비쳤다.

    ‘에드몬까지? 분명 저들은 왕도 바깥에서 호위를 맡고 있어야 할 텐데?’

    게다가 둘이 전부가 아니었다.

    인파 속에 숨어 있던,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붉은 신념 기사단이 나타나 순식간에 광장 중심을 점령했다.

    아델의 특이 형질, [비닉].

    글러트니에 의해, 후천적으로 얻은 그의 마력은 사물의 존재감을 감춘다.

    레오닐이 애써 의식하지 않는다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후작가의 기사단이 갑자기 왜……!”

    “제길, 뭔지는 몰라도 일단 제압하고 생각해!”

    “안 돼! 자칫하면 귀빈들께서 위험하시다!”

    근위 기사단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단상 위에는 발르그나, 재상, 공작과 같은 최중요 인사들이 있었으니까. 저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최소 절반 이상은 죽는다.

    같은 이유로 궁정 마법사들 또한 마법을 쓰는 걸 주저했다.

    “으음……!”

    긴박한 대치 상황.

    지켜보던 레오닐이 미간을 좁혔다.

    “후작. 아니, 실리스 왕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

    “일단 왕녀께서 정신을 차린 건 차치하고……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하십시오. 인질도 풀어 주시고. 여기서 멈추면 나를 공격한 건 참작해 드리겠습니다.”

    실리스가 움직임을 멈췄다.

    ‘이유를 모른다라…….’

    그래, 그렇겠지.

    그녀에게는 어제처럼 선명하지만, 저들에게는 이미 20년이 훌쩍 지난 이야기다. 당시를 곧바로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할 터다.

    레오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럴 것이다.

    “레오닐 베르타나스.”

    실리스가 냉소했다.

    섬뜩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당신의 정신력은 마법만큼이나 대단할까?”

    “그게 무슨 뜻…….”

    사아아아아악.

    실리스의 눈동자가 황혼으로 물들었다.

    두근, 두근, 두근.

    강렬한 울림이 맥동한다.

    [마녀의 가시 왕관].

    오로지 여성만이 착용 가능하며, 마법사별로 각기 다른, 특수한 마력 형질을 일시적으로 부여하는 아티팩트.

    장시간 착용 시, 서서히 이지를 상실함과 동시에 마력회로가 뒤틀려 폭주해 사망한다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건 적임자가 아니기 때문에 생기는 반작용.’

    이것은 오직 마녀만을 위한 귀물이다.

    이제는 거의 멸종해 버린 고대의 마녀들이, 자신들의 왕을 위해 만들어 낸 전용 아티팩트.

    가시 왕관에서 자라난 가시들이 관자놀이에 닿았다.

    끝에 핏방울이 살짝 맺히며 미증유의 힘이 마력회로에 뿌리 내린다. 직후 실리스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마녀의 마력이 전신을 휘감았다.

    형용할 수 없는 힘에 전율이 일었다.

    ‘마녀의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것과는 차원이 달라.’

    겨우 흥분을 억눌러 가라앉힌 실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 막강한 힘을 첫 번째로 사용할 상대는 이미 정해져 있다.

    복수의 가장 큰 방해물이자, 어머니의 심장을 가공한 레오닐 베르타나스.

    실리스가 안광을 번뜩였다.

    <위괴의 악몽>

    “?!”

    황혼의 하늘 아래, 레오닐을 둘러싼 공간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그의 곁에 있던, 상위 서열에 있는 궁정마법사들까지.

    병력 배치 상황은 전부 숙지하고 있다.

    이것이 대관식을 기다린 이유다. 위험 요소에 속한 자들을 최악의 악몽에 가두어 단번에 쓸어버리기 위해서.

    레오닐이 눈가를 씰룩였다.

    ‘왜 나를 여기로 날려 버렸나 했더니. 이걸 위해서였나.’

    “당장 마법을 파훼하라.”

    궁정 마법사단장이 명령했다.

    그의 곁에 있는 건 5위계 이상 마법사로 이루어진 왕가의 무력 집단. 함정이든 뭐든 정면에서 깨부수면 그만이었다.

    ‘고작해야 왕녀의 마법 따위.’

    그런데 불가능했다.

    “가, 각하! 마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돌파 또한 불가합니다!”

    궁정 마법사들이 당황했다.

    보다 못한 레오닐이 강력한 화염 폭발을 일으켰지만 마찬가지였다. 마치 발생한 충격이 어딘가로 날아간 듯한 감각.

    ‘도대체 뭘 준비한 거지?’

    불투명한 공간이 점점 다가온다.

    마법의 진행을 막을 수 없다. 애초에 이 마법이 무엇인지조차 모르─── 아니, 잠깐.

    ‘이게 왕녀가 한 짓이라면…….’

    순간 레오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뇌리를 강타하는 기억. 오래전에 잊고 있었던 그녀의 핏줄이 무엇인지 이제서야 떠올랐다.

    설마.

    “마녀……!!! 어떻게 그 힘이 너에게!”

    정확히 정체를 꿰뚫어 봤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바뀌는 건 없다.

    레오닐은 서둘러 마법에서 빠져나가려고 연신 마법을 캐스팅했지만 무의미했다.

    “실리스! 이런 제기───!”

    그가 팔을 내뻗는 장면을 끝으로, 공간이 닫혔다.

    마치 증발하기라도 한 듯 레오닐과 상위 궁정 마법사들이 왕도에서 사라졌다.

    * * *

    “레, 레오닐 각하가…….”

    차가운 정적이 감돌았다.

    왕국 최강이 당했다. 고작 한 수에. 그 사실에 근위 기시단도, 남아 있는 궁정 마법사단도 아연했다.

    “하아, 하아…….”

    실리스가 숨을 몰아쉬었다.

    가진 마력의 태반 가까이를 바친 탓에 전신에 탈력감이 일었다.

    ‘성공했다.’

    계획대로였다.

    레오닐과 그 수하들은 악몽 속에서 정신이 무너질 것이고, 착란으로 인해 서로를 죽이게 될 것이다.

    이성이 완전히 파괴되어 재가 되어 버릴 때까지.

    혹여 그때까지 살아남는 자가 있다면 후에 죽이면 될 뿐이다.

    방해물을 치웠으니 이제 다음이다.

    “후작.”

    “예, 전하.”

    에스퍼렌사 후작이 발르그나에게 다가갔다.

    뒷걸음질 치는 1왕자보다 한 발짝 빠르게 움직이며,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커억?!”

    발르그나의 다리가 무너졌다.

    1왕자인 만큼 전반적으로 교육은 되어 있었으나 후작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기절한 발르그나를 끌어, 겁에 질린 재상에게 던졌다.

    그 순간, 바스타드 소드를 든 기사가 소리쳤다.

    “에스퍼렌사 후작! 그만 멈추시오!”

    “카젠.”

    왕실 근위 기사단장, 카젠 드위트.

    그가 검을 다잡으며 강하게 윽박질렀다.

    “후작,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는 거요?! 폐하께서 직접 차기 왕으로 결정하신 발르그나 전하를 공격하다니. 이건, 이건 반역이오!”

    “반역이라…….”

    스르릉.

    후작이 검을 빼 들었다.

    붉은 눈동자가 핏방울처럼 반짝였다.

    “왕국을 위하는 것이 반역이라면, 나는 기꺼이 행하겠다.”

    “후작! 당신이 정녕!”

    더 대답하지 않았다.

    카젠 또한 왕녀의 복수 대상이었으니.

    그가 해 온 잔혹한 짓을 알기에 경멸이 어린 시선만을 보냈다.

    후작이 높이 검을 들고는 허공에 내리그었다. 그것이 신호였다.

    은폐하고 있던 후작가의 함대가 일제히 나타나며 왕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미, 미친…… 설마 비행정까지……!”

    단순한 반역 수준이 아니다.

    이건 왕녀와 후작이 현 왕가에 전쟁을 건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젠의 투구 안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함대가 무사히 성벽을 넘었다.

    계획했던 무대의 틀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제 마녀가 움직일 차례였다.

    ‘마침내.’

    실리스가 정면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무수한 눈동자가 그녀와 마주한다. 이대로 마녀의 마법을 발동한다면 복수가 시작된다.

    저들은 피로 얼룩진 평화가 아닌, 본래 겪어야 할 멸망과 고통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

    실리스가 순간 멈칫했다.

    앞으로 한 발만 나아가면 끝인데, 미처 해결하지 못한 망설임이 그녀를 잠식했다.

    모든 게 거슬린다.

    녹아 버린 아이스크림을 손에 쥔 채, 어머니에게 안겨 있는 여자아이도. 아버지의 다리 뒤에 숨은, 겁먹은 남자아이도.

    앞으로 있을 참상을 보지 않기 위해, 애써 고개를 돌리고 있는 에스퍼렌사 후작도.

    실리스의 눈에는 보였다.

    시민들의 몸에 덕지덕지 붙은, 어머니를 비롯한 희생자들의 피가. 그들은 잔혹한 평화를 누리며 살아왔다.

    무지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증오한다고 해서 벌할 생각은 없다.

    그저 그들이 누려 왔던 평화만을 다시 빼앗을 뿐인데…….

    생각이 깊어진다.

    오래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결국 실리스는 정해야만 했다.

    이내 두 눈을 질끈 감고 내민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부정형의 악몽>

    번쩍이는 하늘의 황혼.

    그에 비친 왕도가 꿈에 잠들었다.

    * * *

    베르덴은 왕도 레티아에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에스퍼렌사 후작을 따라 다크 워튼의 마탑주 라인델 넥스레온과 조제프 대주교를 만났고, 당연하게도 그때의 강렬한 기억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그 안에는 자연스레 왕도의 풍경 또한 담겨 있었다.

    “저건…….”

    그런데 그때 봤던 경치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지평선의 끝에 있는 왕도는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불길함이 느껴지는 연보라색의 빛이 내부에서 발광한다.

    마치 황혼으로 이뤄진 장막을 두른 듯했다.

    ‘실리스의 마법인가.’

    로아프라에 이어, 이번엔 왕도라.

    아무리 사전에 준비를 했다고 하지만 하나같이 비정상적으로 광범위한 마법들이다.

    효율이나 성능 그리고 위력 등 다른 건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그 규모만큼은 베르덴을 확실히 넘어섰다.

    어쨌든 발견했으니 지체할 이유는 없다.

    로아프라를 봉인했던 장막과는 결이 다른 듯하나…… 가까이서 확인해 보지 않는 이상 어떤 성질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공간을 분리시키는 것일 수도 있으니.

    그러니 마찬가지로 아인베르를 이용해 넘어갈 수밖에.

    <순광>

    세 개의 광환을 소모했다.

    빛에 휩싸인 베르덴의 몸이 공간을 뛰어넘어 왕도로 돌입했다. 광채의 기둥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가 곧바로 주변을 파악했다.

    왕도는 어떻게 됐는지, 왕녀가 어떤 마법을 사용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오리엔트를 들고 마력회로를 활성화한 베르덴은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

    하지만 그럼에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건 경악에 가까웠다.

    눈앞에 펼쳐진 황혼의 세계.

    여러 갈래로 갈라진 왕도 레티아는 섬의 군락으로 변화했다. 그것도 하늘에 떠 있는 상태로.

    * * *

    베르덴은 텅 빈 왕도의 거리에 멈춰 섰다.

    섣불리 움직이기 전에 이 마법적 현상을 분석하는 게 먼저였다. 왜냐하면 이건 정도를 훌쩍 넘어섰으니까.

    ‘공간 전체가 뒤틀렸다.’

    베르덴이 서 있는 장소는 가장 아래에 있는 섬, 왕도의 성문이 있는 입구 부근이다.

    고개를 들어 보니 다른 하늘섬들이 허공에 고정되어 있다.

    섬 밖으로는 황혼으로 물든 광활한 공간이 방향과 무관하게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뭐가 됐든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왕도 전체를 뒤엎을 정도라니.

    ‘위력만 따지면 초위 마법이라 해도 믿을 정도군.’

    하나 그렇기에 괴리감이 들었다.

    정신계로만 만나긴 했지만, 실리스에게서 초월자의 기운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아티팩트를 사용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초월의 격은 무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제 스스로 쌓아 올려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이 마법은 대체 뭘까.’

    고민해 봤지만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베르덴은 생각을 끊고 발걸음을 옮겼다. 근처를 둘러본다면 이 세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

    잠시 후, 베르덴이 왕도의 광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지금까지의 거리와 달리 비어 있지 않았다.

    무수한 인파로 가득했다.

    대관식을 보기 위해 모인 시민, 병사, 기사 등. 여러 직업군의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바닥에 쓰러져 눈을 감고 있었다.

    ‘……죽은 건가?’

    베르덴이 사람 한 명의 용태를 살폈다.

    호흡을 확인했다. 상당히 얕긴 해도 정상에 가까운 상태였다.

    심장 또한 비교적 미약하지만 멀쩡하게 박동하고 있다.

    그런데 기척이 매우 옅게 느껴진다.

    마치 죽은 듯이 잠에 들었다고나 할까.

    지속해서 관찰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몇몇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했고, 전부 동일한 가사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 끝에서 베르덴은 이 세계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긴 현실이 아니군.’

    한없이 그에 가까운 정신계다.

    마법으로 인해, 현실에 현현한 정신적 세계였다.

    마녀는 꿈을 다루는 마법적 존재.

    다시 말해 이곳은 실리스가 만들어 낸 꿈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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