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대관식 (2)
왕도의 수많은 저택 중 하나.
그 은밀한 장소에는 1왕자를 비롯한 비밀 사교회의 구성원들이 한데 모여 축배를 들고 있었다.
내전은 당연한 결말로 끝이 났고, 이제 발르그나가 왕위를 이어받는 과정만이 남은 상황.
너 나 할 것 없이 승리의 취해 최고급 와인을 연신 들이켰고, 평민은 감히 손도 못 대는 값비싼 음식들을 집어 먹었다.
북부의 마약상, 광인 톨라브.
그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끄윽! 전하. 오늘은 제가, 킥, 좋은 구경거리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구경거리라. 광대놀이라도 하려는 거냐?”
“광대…… 킥킥, 그러믄입죠. 원하신다면 광대가 한번 되어 보겠습니다! 뭘 어렵겠습니까? 곧 왕좌에 앉게 될 발르그나 전하를 위해서인데!”
톨라브가 딸꾹거렸다.
이미 와인은 몇 병이나 비우면서 거나하게 술에 취한 탓에, 안 그래도 피폐한 얼굴이 한층 더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식사용 나이프 네 개를 손에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부하인 엘을 벽 앞에 세웠다. 사과를 머리 위에 얹게 한 채.
“킥…… 움직이지 마라?”
광인이 술을 핥으며 팔을 휘둘렀다.
쉭───파박!
일제히 날아가 박히는 나이프.
그런데 정작 사과에는 하나도 꽂히지 않았고 엘의 몸뚱이를 파고들었다.
칼날이 무딘 탓에 치명상이 될 수는 없었지만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용병단장 게울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과는 멀쩡하다만.”
“나는 사과를 맞힌다고 한 적이 없는데? 안 그렇습니까, 전하? 키키키킥!”
톨라브가 박수 치며 저 혼자 낄낄거렸다.
대체 저런 게 뭐가 웃긴 건지.
역시나 마약에 중독된 미치광이의 머리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톨라브를 무시하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거상 다리오가 와인을 홀짝였다.
“그나저나 암상인이 불참할 줄이야.”
“로베르트 님도 마찬가지예요. 내전도 끝났으니 빈테르트도 지금쯤 여유가 꽤 있을 텐데. 혹시 로아프라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설계자 넬리타가 빈자리를 바라봤다.
언제나 중역을 맡아 왔던 두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물론 사전에 연락이 오긴 했지만, 할 일이 있다고만 할 뿐 자세한 이유는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칫.”
암상인이라는 단어에 게울이 혀를 찼다.
그는 아직 잊지 않았다. 비밀 사교장에서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 보낸 자롤프가 다른 용병들과 함께 실종된 것을.
분명 암상인과 그 말테드란 놈에게 당한 것일 터.
‘말테드……!’
게울이 고기를 우물거리며 원한을 곱씹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말테드의 정체가 베르덴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허수아비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1왕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되었다. 암상인이나 빈테르트나 이런저런 일로 바쁜 거겠지. 어차피 늦어도 대관식에서 보게 될 테니, 회포를 푸는 건 다음으로 미뤄도 상관없다.”
평소의 발르그나였다면 불쾌감을 잔뜩 드러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달랐다.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톨라브의 쓰레기 같은 광대놀음을 보고도 미소를 띨 만큼 기분이 아주 좋았다.
“하핫, 역시 전하께서는 아량이 넓으십니다.”
다리오가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사이 게울이 다가와 굽신거리며 발르그나의 빈잔을 채웠다.
“수하를 용서하는 것 또한 하나의 덕목 아니겠습니까. 왕위에 오르신 것, 경하드리옵니다, 발르그나 전하. 아니, 폐하.”
폐하.
이 얼마나 듣기 좋은 울림인가.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발르그나가 과거를 되돌아봤다.
어떻게든 차기 왕위를 손에 넣으려고 애를 쓰고 또 애를 썼다.
오직 정복왕이라는 허황된 꿈에 사로잡혀 있는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개중에는 루비넬리안 공작가를 멸문시킨 것도 포함되었다.
‘왜 공작가를 없애는 데 그토록 혈안이 되셨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뭐, 힘들긴 해도 나름 즐겁긴 했다.
공작가의 인간들을 사냥하는 건 생에 다시 없을 일이기도 하니까.
어찌됐든 더 이상 옛 왕성에 머물 필요는 없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왕도에 있는 진짜 왕성이 진정으로 자신의 소유물이 된다.
시기적으로 운이 좋았다.
왕위 계승이 결정되자마자 에스티리아 왕이 병상에 누워 버리고 말았으니까.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고 했으니 이상할 건 아니었다. 듣자 하니 최근에는 사물을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라고.
‘마지막에는 좋은 선물을 주시는군.’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왕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그 빈자리는 다름 아닌 발르그나의 차지가 될 것이다.
행복한 상상을 이어 가던 중,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빈테르트가 아주 거슬려.’
물론 암흑가의 조력이 매우 컸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후로 빈테르트의, 특히 암흑가의 왕의 입김을 무시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처럼 압박하지는 못할 터.
왕위에 오르는 순간, 왕가의 전력, 바로 그 레오닐이 자신을 지켜 줄 테니.
‘그론드여, 내 특별히 승리의 지분은 나눠 주마.’
하지만 권위를 빼앗는 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발르그나가 입가를 비틀며 술잔을 기울였다.
* * *
로아프라에 거주하는 38살, 바피엔.
3위계 하위 마법사인 그는 나름대로의 평탄한 삶을 살고 있었다.
로아프라가 아무리 범죄 세력의 온상이라고 해도, 모든 조직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건 아니었으니까.
대충 변두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집단에 들어가 마법사다운 노릇이나 할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혼자 살아가기엔 나쁘지 않은 수익이었다.
그랬는데.
‘대체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문득 정신을 차린 바피엔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슬쩍 시선을 던지니, 안면이 있는 암흑가의 마법사들이 일정 간격으로 로아프라를 둘러싸고 있었다.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죄다 바람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것.
‘게다가.’
사이사이에 하얀 갑옷을 착용한 낯선 사람들이 보인다.
그 유명한 백강 칼리아의 수족인, 백결 기사단의 마법사들이었다.
‘빈테르트에서 기사들의 지시에 따르라고는 듣긴 했는데.’
뭐라고 했었더라?
로아프라 전체를 둘러싸는 바람의 고리를 만든다고 했었지, 아마?
바피엔은 의아함을 숨기지 않았다.
당최 그걸로 뭘 하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지금 로아프라에 일어난 이상 사태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거부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로아프라의 새로운 지배자의 명령이니까.
바피엔은 그 사냥에 나서지 않았지만 인지하고 있었다.
암흑가에 군림하던 그론드를 죽인 존재가 얼마나 막강한 마법사인지. 바피엔의 수준으로는 감히 가늠하는 것조차 무리일 정도다.
그러니 까라면 깔 뿐이다.
로아프라는 강자가 곧 법이니까.
“저기 저분이…….”
“그래, 그론드를 죽인 마법사야.”
들려오는 소란에 바피엔이 눈동자를 굴렸다.
저 멀리 낯선 사내가 걸어오고 있다.
잿빛 머리와 벽안. 분명 말로맏 듣던 새로운 왕임이 분명하다.
“허…….”
자세히 보니 어린 데다가 굉장히 잘생겼다.
입고 있는 옷도 가치를 헤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빈테르트를 압도할 정도로 엄청나게 강하기까지 하다니.
너무도 비합리적인 존재처럼 느끼지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세상 참.”
X같이 불공평하다고.
* * *
“말씀하신 대로 마법사들을 배치해 놨어요.”
“기사들을 통해 지시도 내렸다. 네가 신호만 한다면 일제히 마법을 발동할 거다.”
페르네와 칼리아가 차례로 말했다.
베르덴의 시야에 로아프라 가장자리에 자리한 마법사들이 비쳤다.
“일 처리가 빠르군.”
“뭐, 이 정도쯤이야. 그런데 애셔, 무슨 수단을 쓰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 나가는 방법 외에는 없는 건가?”
“그래, 개인으로 한정된 터라 어쩔 수 없다.”
베르덴이 생각한 두 번째 방법.
바로 아인베르를 통한 공간 이동이다. 그거라면 저 장막을 부수지 않고도 그대로 통과하는 게 가능할 테니까.
당연하게도 1인용이다.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베르덴이 두 사람에게 다가섰다.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였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성으로 들어가라. 필요한 조치는 해 두었으니.”
베르덴은 로아프라의 억제력이다.
그렇기에 만약 그가 자리를 비운다면 빈테르트가, 로아프라가 다른 마음을 품을 수도 있다.
눈여겨봐야 할 강자는 없지만 숫자가 많으니 칼리아 일행만으로 무사히 대처하는 건 어려울 터.
“네. 알겠어요, 애셔 님!”
“아, 음,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꼭 참고하도록 하지.”
베르덴이 근처에 있는 카란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엘프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단검을 꺼내 보였다.
베르덴이 그론드의 금고에서 꺼낸 마법 물품.
마력을 불어넣어, 최대 1m가량의 물리적 칼날을 형성하는 단검이다. 성능부터가 기존에 쓰라고 줬던 단검과는 차원이 다를 테지.
이건 카란스에게 주는 보수였다.
‘다음으로 갈리아크.’
고개를 향하자, 갈리아크가 갑옷을 탕탕 두들겼다.
베르덴에게서 저렴하게 구입한, 새로운 갑옷을 입은 모습.
부상은 여전하지만, 워낙 몸이 튼튼하니 쉽게 당하는 일은 없을 거다.
더 이상 볼일은 없다.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그들을 일별한 베르덴이 하늘로 치솟았다.
상공에서 로아프라를 훤히 내려다보며 가볍게 턱짓했다.
왼쪽은 로베르트, 오른쪽은 칼리아가 담당해 지휘를 시작하자, 명령을 들은 마법사들이 로아프라의 벽을 겨냥해 마법을 발동했다.
<에어 레일>
수십 개의 바람의 길이 형성된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기에 서로 연결되었고, 곧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로아프라의 벽을 타고 도시 전체를 둘러싼 바람의 고리.
서서히 고도를 낮춘 베르덴이 주저 없이 그 기류 속에 몸을 던졌다.
화아아아악!
베르덴이 경로를 따라 휩쓸리듯 빨려 들어갔다.
도중 <비행주파>로 속도를 높였음에도, 이미 형성된 기류에 의해 자연스레 궤도가 틀어져 벽과 충돌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베르덴이 로아프라 주위를 회전하던 중, 속도의 기준점에 이르자 하나의 광환이 베르덴을 감쌌다.
한층 더 폭발적으로 가속화된 속도.
‘여기서 기류를 강화한다.’
베르덴이 마도를 발동했다.
폭발하듯 터져 나간 바람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광환을 만들기 위한 밑 작업. 그로 인해 마법사들이 만든 바람의 길이 폭풍의 고리로 변질되었다.
“끄으으윽…… 끄아아아아악!”
“크읍……!”
사방에서 고통 어린 신음이 들려온다. 기사단도 마찬가지.
베르덴의 마도가 뒤섞인 탓에 <에어 레일>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특히나 마력회로가 욱신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신 줄을 놓는 사람은 없었다.
백결 기사단은 애초부터 정신이 단련되었고, 로아프라의 마법사들은 단순히 새로운 왕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강자에 대한 굴복이었다.
쇄애애애애액!
두 번째 광환을 두른 베르덴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폭풍의 고리를 따라 잔상을 남기는 빛무리만이 그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뿐.
사람들이 빛의 고리를 바라봤다.
로아프라에서 보지 못하는 광채에 의식을 빼앗겼다.
‘이제 됐다.’
속도가 목표 지점에 다다른 순간, 마침내 세 개의 광환이 형성되었다.
곧장 시선을 로아프라의 중심으로 향했다.
마력 승강기 꼭대기에 있는, 장막 너머에 위치한 바깥 공간으로.
<순광>
화아아아악!
빛의 기둥이 베르덴을 감쌌다.
어둠을 찢어발기는 빛에 사람들이 눈을 가렸다.
로아프라는 항상 어둑해서 그런 건지, 마치 지하 도시에 태양이 떠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빛과 함께 베르덴이 사라졌다.
직후 폭풍의 고리가 흩어지고 지친 마법사들이 주저앉았다. 기절한 사람도 몇몇 보였다.
백결 기사단의 마법사들은 몇 번 호흡을 고르고는 제자리로 복귀했다.
짝짝.
갈리아크가 손뼉을 쳤다.
잠자코 있으려고 했지만 구경꾼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빛을 통한 공간 이동이라니.
“와, X나 멋지네.”
* * *
밤이 찾아온 왕도의 거리.
여느 시민과 다를 바 없는 행색의 사내가 정처 없이 걸었다. 그렇게 왕도 외곽에 도착한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섰다.
눈앞에 왕도의 성벽이 드리웠다.
쿠드드득───쿠득.
자그마한 틈새에 기이한 형태로 가공된 마석을 억지로 끼워 넣었다.
날이 밝다고 해도, 자세히 들여다본다고 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철저하게 숨겼다.
화아아아악.
할 일을 마친 사내가 이내 마력으로 흩어졌다.
인기척은 사라지고, 그가 있었던 흔적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이와 같은 일이 외곽의 성벽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실리스의 측근, 플로나.
그녀는 글러트니의 실험으로 후천적인 특이 형질 [인형사]를 손에 넣었다.
단순히 인간과 구별할 수 없는, 말 그대로 마력으로 이뤄진 인형을 만드는 것이, 플로나가 가진 힘이었다.
본래라면 기껏해야 두 개밖에 조종하지 못한다.
하지만 로리안의 [정신 감응]이 매개체가 된 덕분에 수십 개의 인형을 뜻대로 움직이는 게 가능해졌다.
그 대가로 정신력의 소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하아, 하아…….”
굵은 땀방울을 흘린 플로나가 휘청거렸다.
의식은 흐릿하지만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마쳤다.
───전하, ‘악몽’의 기반이 완성되었어요.
───대관식 ‘잠입’ 준비도 문제없습니다.
정신을 집중해 보낸 사념.
플로나만이 아니라 아델도 마침 끝낸 모양이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실리스가 반응했다.
───고생했어요. 이만 쉬세요. 플로나, 아델.
───알겠습니다.
───네, 그럼…….
플로나의 연결이 끊겼다.
분명 기절하듯 잠에 든 것이리라.
이로써 모든 준비는 끝났다.
“…….”
실리스가 창살 너머로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달은 가려졌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새까만 밤하늘 사이사이 박힌 별들이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기대와 불안이 뒤섞였다.
복수의 마침표를 찍는 것과 혹여 실패라도 하지 않을까라는 복잡한 심정.
이러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건 비단 실리스만이 아닐 것이다.
진심으로 모시던 루비넬리안 공작의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이 되거나 왕가의 실험체가 되는 걸 보고만 있어야 됐던 세바스와 케미언도.
왕가의 허락의 의해, 자기 자신과 가족들이 글러트니의 실험체가 되어야만 했던 아델과 플로나 그리고 로리안도.
‘전부 같은 마음이겠지.’
그런데 실리스의 심중에는 하나의 이물이 박혀 있다.
그것은 마치 응어리가 맺힌 듯 거슬리고 또 신경 쓰였다.
이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이 불편함은 바로 죄책감이란 감정이었다.
‘……에스퍼렌사 후작.’
후작은 단호하지만 이타적인 인물이었다.
여타 왕국의 귀족들과는 달리 부와 권세만을 탐하지 않고, 귀족으로서 영지를 지키며 왕국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고 했다.
그래, 그는 존경받을 만한 위인이다.
그래서 후작을 이용했다.
남다른 인간성과 내면에 깃든 죄책감을 자극해 조력자로 삼았다.
그러한 과정에서 보다 평화로운 복수를 하자는 그의 설득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어머니의 심장에 대해 알게 된 순간 그 계획은 폐기되었다.
결국 후작은 말을 잇지 못하고 실리스의 분노에 수긍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왕국을 멸망시키고 싶다.
어머니, 레미엔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사라졌을 나라였으니까.
모두가 누려 왔던 평화로운 삶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어야 정상이었다.
하나 마음을 다잡을수록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 전에도, 지금에 이르러서도.
한결같이 자신만의 정도를 추구하며, 왕국을 위하려 하는 에스퍼렌사 후작의 진심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으니까.
‘차라리 힘을 빌리지 말았어야 했나.’
그랬다면 복수를 준비하기까지 최소 10년 이상이 더 걸렸거나, 끝끝내 복수를 다하지 못하고 죽을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마음만은 편했을 텐데.
지끈.
머리가 아프다. 심란하다. 모든 게 복잡하다.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악착같이 살아왔을 때는 증오만이 보였는데. 이런 기분 따위 느낀 적 없었는데.
정작 복수를 이룰 순간이 되니 갖가지 것이 눈에 아른거렸다.
‘대체 뭐가 뭔지…….’
문득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워진다.
그와 동시에 산 채로 해부당하는 어머니의 절규가 귓가를 맴돌았다. 마지막 순간에 실리스를 떠올리며 죽은, 사무친 기억까지.
이날, 실리스는 잠에 들지 못했다.
몇 번이고 고뇌를 반복하며 마지막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복수의 종착지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