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252화 (252/366)
  • 252화 마녀 (3)

    첫 번째 의문이었다.

    “어째서 사라졌어야 할 기억이 실리스 전하께 전이된 겁니까.”

    “마녀의 기억은 단순한 정보의 집합체가 아닌, 감정과 지식을 담은 하나의 생명체. 그러한 기억에 의거해서 말하자면, 기억을 이어받은 건 순전히 제가 마녀의 재능을 타고난 덕분이었죠. 제 어머니보다 더욱 뛰어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도 그 재능 덕분입니까?”

    실험을 위해 왕비와 공작가를 죽인 왕.

    그가 자신의 딸이라고 해서, 어리다고 해서 실리스를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녀 또한 루비넬리안 공작가의 핏줄이었으니.

    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마녀의 기억과 마법 덕분에 실험체가 되는 건 피할 수 있었죠.”

    실리스는 마녀의 기억을 이어받으면서, 나이에 맞지 않은 통찰력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판단했다. 현재 자신의 힘으로는 저항하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그래서 위장을 결심했다.

    인위적으로 폭발을 일으켜 자신을 휩쓸리게 하고, 마녀의 마법으로 스스로의 정신을 가두었다. 다시 말해 인형 자체가 된 것이다.

    그리고 육체에는 외부 자극에 방어기제를 보이도록 암시를 걸어 두었다.

    누군가 건드는 순간 발작을, 정도가 심하면 심장이 멎도록. 그야말로 죽음을 불사한 은폐였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갑작스레 기억을 받은 어머니와는 다르게, 저는 마녀의 마법을 살필 기회가 있었어요. 몸에 깃든 마녀의 특성과 마력의 흔적을 지우는 방법까지.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죠. 공작가 전체를 실험체로 삼고도 실패했던 직후였던 것도 한몫했고요.”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실리스는 자조하듯 미소를 지었다.

    베르덴이 세 번째 질문을 이어 나갔다.

    “에스퍼렌사 후작가가 전하를 돕는 이유는, 공작가 또는 마녀와 관련이 있는 겁니까.”

    “아뇨, 그저 후작이 가진 죄책감 때문이죠.”

    실리스가 단언했다.

    “당대의 에스퍼렌사 후작, 루벤은 순수한 정의를 추구하고 있어요. 그런 사내가 왕국에서 일어났던 공작가의 억울한 멸망, 제 어머니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인체 실험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단순히 몰랐다고 해서 넘어갈 게 아니다. 적어도 후작의 성격으로는.

    “저는 그런 후작의 마음을 이용하기 위해 사실을 밝혔고, 당연하게도 후작은 제게 동참하는 걸 선택했어요. 일종의 속죄라고도 볼 수 있겠죠.”

    아무래도 좋을 일이지만.

    실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베르덴이 네 번째 의문을 전했다.

    “……암흑가 경매장에 출품된 [마녀의 가시왕관]. 구매자는 전하이십니까?”

    무력 100억 엘크에 팔렸던 아티팩트.

    그 이름에 담긴 마녀와 눈앞에 있는 마녀가 무관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실리스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베르덴의 앞에 있는 건 일개 왕녀 따위가 아니라 복수자였다.

    이제 마지막 질문만이 남았다.

    베르덴이나 실리스나, 서로가 무엇을 묻고 답할지 짐작하고 있었다.

    “레오닐이 실험을 하던, 심장 소리가 들려오는 푸른 수정. 그 정체는 무엇입니까.”

    “제 어머니, ‘레미엔의 심장’. 마녀의 마력이 담긴 근원이죠.”

    끼이익.

    실리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원을 거닐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까지 실험이 완전히 폐기된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설마 어머니의 심장을 남겨 두어 가공할 줄이야……. 그것도 수십 년에 걸쳐서. 애셔, 당신이 아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예요. 덕분에 계획을 앞당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죠.”

    실리스가 몸을 돌렸다.

    어둠을 등에 업은 그녀가 베르덴을 바라봤다.

    “저는 기억을 받았을 때부터 복수만을 고대해 왔어요. 어머니를 끔찍하게 살해한 아버지, 에스티리아 왕. 루비넬리안 공작가를 멸문시키는 데 일조한 귀족들. 어머니의 피와 살 덕분에, 멸망당하지 않고 평화를 누리고 있음에도 왕을 찬양하는 무지한 시민들까지.”

    모든 게 증오스럽다.

    하지만 이젠 참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한둘이 아니에요.”

    실리스가 손짓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두 사람의 환영이 허공에 떠올랐다.

    “암상인 클란드. 그의 본명은 세바스로, 과거에 루비넬리안 공작가의 집사였고 케미언은 그 제자였어요. 둘은 불타는 영지와 저택에서 겨우 탈출해 살아남았죠.”

    다음엔 세 사람이 떠올랐다.

    “아델, 플로나, 로리안. 이들은 글러트니의 실험 도중에 죽어 그대로 땅속에 묻혀 있던 걸 제가 되살렸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깊은 잠에서 깨운 셈이죠.”

    실리스는 에스퍼렌사 후작을 통해, 글러트니의 실험실을 찾았다.

    이미 신임 재상과 함께 사라졌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뭔가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런 와중에 세 명의 아이를 발견했다.

    부모 형제와 함께 잡혀가 실험을 당해 죽은 것으로 보였지만, 기이하게도 시체가 전혀 썩지 않았다.

    벌레가 장기를 파고들지도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들의 심장에 이식된 마녀의 마력 덕분에 특수한 가사 상태에 이른 것.

    그 사실을 깨달은 실리스는 곧장 마력을 촉발시켜 아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후 그들은 후천적인 특이 형질을 손에 넣었다.

    폐기되었던 글러트니의 실험체가, 실리스의 손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이들이 제가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죠.”

    실리스가 환영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길에는 애정과 다정함이 가득했다.

    “그런 의미에서 애셔, 저는 당신에게 협조를 구하고 싶어요.”

    “복수를 도와 달라는 겁니까?”

    “복수를 도와 달라…… 그래요, 분명 당신이 나선다면 큰 힘이 되겠죠. 하지만 저는 변수를 좋아하지 않아요. 신뢰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평생의 염원을 맡기는 건 결코 있을 수 없죠.”

    실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베르덴과 시선이 교차했다.

    “저는 당신이 개입하는 걸 원치 않아요.”

    쿠구구궁.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이곳 정신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바깥?’

    화아아아악!

    기묘한 감각을 느낀 베르덴이 곧장 마력을 방출했다.

    실리스가 제지하려 했지만 무시했다.

    압도적인 마력량에 의해 실리스의 정원이 단번에 산산조각 나 흩어졌고, 그와 동시에 베르덴의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로리안, 클란드, 케미언.

    그들의 육체가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미 실체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기에 손을 쓸 방법은 없었다.

    쿠구구구……!

    진동이 서서히 커져 가고 있던 그때, 귓가에 실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요. 그저 제 복수를 마치기 전까지 로아프라 전체를 봉인할 뿐. 본래 그론드를 가두기 위한 계획이지만, 아무리 그론드를 죽인 당신이라고 해도 마녀의 봉인을 풀 수는 없을 거예요. 제가 직접 해제하지 않는 이상.

    실리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럴 수밖에 없는 제 결정을 부디 이해해 주세요. 당신이 복수심이란 감정을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목소리가 멎었다.

    클란드 일행의 모습 또한 자취를 감췄다.

    베르덴이 바깥으로 나섰다.

    흔들리는 지축 너머, 무지갯빛으로 이뤄진 막이 로아프라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 * *

    “쿨럭, 쿨럭!”

    “……! 전하!”

    실리스가 숨을 토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신계에서 촉발된 충격이 전신을 난도질하는 듯했다. 투명한 위액을 연신 토하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다.

    “괜찮으신가요, 실리스 전하?! 에스퍼렌사 후작에게 연락이라도……!”

    “저는…… 괜찮아요, 플로나. 조금, 조금만 쉬면 나을 테니까.”

    플로나가 다급히 실리스를 부축해 옮겼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실리스가 거칠게 호흡을 내쉬었다. 머리는 어지러웠고, 이마에 손을 얹자 체온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설마 정신계가 한순간에 무너질 줄은…….’

    막으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방대한 마력량은 감히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의 정신력 또한 실리스의 것을 훨씬 상회했다.

    마법이나 매직 아이템으로 외모를 속인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런 외견만으로도 판단하자면, 실리스와 비슷한 나이거나 더 어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강함을 손에 넣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나처럼 특이 형질을 이어받은 걸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실리스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뭐가 됐든 간에 로아프라 봉인 계획은 성공으로 끝이 났다.

    실제로 애셔가 자신을 도우려고 했다 해도 지금의 결정에 후회 따위는 없었다. 이로써 거대한 변수를 배제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플로나.”

    “네, 전하.”

    “모두에게 전달하세요. 로아프라의 봉인은 성공했다고.”

    그리고.

    “대관식을 준비하라고.”

    앞으로 한 걸음.

    때는 눈앞까지 다가왔다.

    * * *

    “로, 로아프라가……! 이 진동은 뭐야? 설마 또 지진이야?!”

    “승강기가 작동을 안 해! 안 한다고!”

    “대체 저 빛은…….”

    로아프라가 술렁거린다.

    주민들의 아우성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이윽고 진동이 멎었지만 혼란은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심화되었다.

    마력이 끊겼는지 승강기는 작동이 되지 않았다.

    암흑가에 사는 마법사들이 하늘 높이 비행했지만 무지갯빛 막에 막혀 나갈 수가 없었다.

    검으로 베든, 방망이로 때리든, 마법을 사용하든 꿈쩍도 하지 않았다.

    로아프라는 거대한 규모를 가진 지하 도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이 공황에 빠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암흑가가 넓다고 해도, 지하에 갇혔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그런 와중에 베르덴은 차분했다.

    마녀의 마법으로 이뤄진 봉인을 둘러보며 마법적으로 분석했다.

    ‘공간이 분리되었군.’

    최상위 속성인 공간 마법은 결코 아니다.

    로아프라를 둘러싼 막은 현실과 현실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었다.

    <강뢰>

    콰과과광!

    베르덴의 마법에 적중당하고도 멀쩡했다.

    충격을 버티거나 흡수한 게 아니라, 어딘가로 보내 버리는 듯한 감각.

    마녀가 꿈을 다루는 존재라고 했으니…… 눈앞에 있는 장막은, 일종의 가상의 경계일지도 모른다.

    공간 자체에 간섭하지 않는 한 넘을 수 없는 선.

    ‘마녀의 마법이라.’

    베르덴 자신에게 향하는 마법이라면 충분히 대처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설마 암흑가 전체를 타깃으로 삼았을 줄은 솔직히 말해 예상하지 못했다.

    이처럼 예외적인 특이 형질을 접한 건 처음이었으니.

    ───애셔어어어!

    밑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칼리아, 로베르트, 페르네, 카란스, 갈리아크 등이 한데 모여 있었다.

    로아프라에 일어난 이상 사태를 인지한 것이리라.

    고도를 낮춰 지면에 착지했다.

    “애셔 님, 지금 로아프라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페르네가 물었다.

    떠오르는 의문들은 집약시킨 질문.

    뭐라고 답해야 할까.

    일이 이렇게 됐으니 내막을 밝혀도 상관없지만, 당장 이야기하기에는 구성이 복잡하고 대화가 길어질 터였다.

    생각을 마친 베르덴이 상황을 요약했다.

    “로아프라가 봉인됐다.”

    “뭐?”

    “여기 있는 전부가 갇혔다고 볼 수 있겠군.”

    베르덴은 이런 걸 가지고 농담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난데없는 소식에 웅성거림이 커졌다. 목발을 짚고 있던 갈리아크가 자신의 이마를 때렸다.

    “X발. 역시 애셔, 저 새끼하고 엮이면 이렇다니까.”

    그건 좀 억울했다.

    어차피 베르덴이 아니었더라도 벌어질 상황이었다.

    물론 그가 없었다면 애초에 갈리아크가 로아프라에 남아 있지도 않았을 테지만.

    “흠, 봉인이라. 이유는 나중에 묻기로 하고. 빠져나갈 방법은 있는 건가, 애셔?”

    기대 어린 시선들이 향해 온다.

    당연하다는 듯이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있다.”

    무려 두 가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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