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마녀 (2)
1왕녀, 실리스 리벤 디 에스티리아.
어릴 적 천재라 불릴 정도로 영특했지만 폭발 사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뇌가 손상된 불운의 왕녀. 평생을 휠체어 위에서 죽은 듯이 살아가는 그녀를 인형이라고 사람들은 멸칭한다.
그녀에게 남은 거라곤 극도의 자기방어기제뿐.
‘내가 알고 있는 건 그게 전부인데.’
당장 눈앞에 있는, 자신을 실리스라고 소개한 여자는 소문과 판이하게 달랐다. 휠체어는커녕 멀쩡하게 두 발로 서 있었으며 백금의 눈동자는 명확한 총기를 띠고 있다.
마력이 느껴지는 걸 보아 마법사임은 분명하지만…… 안개가 낀 듯 흐릿하기에 자세히 감지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평범한 인간은 아닌 모양.
어쩌면 실리스 또한 특이 형질 보유자일지도 모른다.
찰나의 순간 판단을 마친 베르덴이 마찬가지로 예를 갖추었다.
“애셔라고 합니다.”
실리스가 잠깟 멈칫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담담하시군요. 조금 더, 놀라워할 줄 알았는데.”
“나름 그런 것에 익숙한 편입니다.”
뜻밖이긴 하나 딱 그 정도뿐.
정체를 숨기고 있는 왕녀에 대해 알고 경악하기에는, 베르덴이 살아온 인생은 역동적이었으며 충격적이었다.
마도왕의 무덤에서 마도왕의 분신인 관리자와 마법전을 벌인 이후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런가요…… 그렇군요.”
작게 수긍한 실리스가 손을 휘저었다.
비어 있던 정원 한가운데에 새하얀 식탁과 두 개의 의자가 나타났다.
식탁 위에는 김이 피어오르는 차와 그릇에 가지런히 진열된 과자들이 보기 좋게 놓여 있었다.
“일단 앉으시죠. 대화가 길어질 테니.”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앉았다.
실리스가 먼저 찻잔에 손을 얹자 베르덴도 행동을 같이했다.
차를 맛보고 과자를 음미했다. 정신계임에도 현실과 거의 다르지 않은 감각이 느껴지는 것에 베르덴은 내심 흥미를 가졌다.
“…….”
그런 베르덴을 실리스가 응시했다.
아직 의심과 경계를 거두지 않았음에도 저 태연함은, 결코 실리스를 얕보기 때문이 아니었다. 언제든 이 공간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확신일 터.
이 남자, 쉽지 않다.
타인의 정신계임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실체를 가졌다.
실리스가 여태껏 봐 왔던 누구보다도 강인한 정신력이 느껴진다. 상정했던 것보다 더 어려운 상대임을 직감한 그녀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곧 차분함을 되찾은 실리스가 입술을 떼었다.
시작은 가볍게.
“먼저 애셔, 당신에게는 감사를 전하고 싶어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당신 덕분에 저희는 많은 걸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깨닫지 못했던 레오닐의 실험에 대해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방해물이었던 암흑가의 왕, 그론드의 처리까지.”
“감사를 바라고자 한 건 아닙니다.”
베르덴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의 벽안이 푸른빛으로 명멸했다.
“그보다 이 자리를 만드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본론을 원한다.
실리스도 바라는 바였다.
“당신에게 협조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협조?”
“어렵다고 하면 어려운, 간단하다고 하면 간단한 부탁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다만 그 전에 당신이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레오닐의 실험이 무엇인지, 왜 제가 인형으로 살아왔는지 등…… 첫 시작은 무려 2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죠.”
27년 전이라.
짐작 가는 건 있었다.
‘벨디른 공화국과 에스티리아 왕국 간의 전쟁.’
리비안트 공왕이 말하길.
왕국의 횡포로 전쟁이 발발했고 부패한 왕국은 공화국을 감당해 내지 못했다.
몇몇 이들이 필사적으로 분투했으나 결국 연이은 패배로 인해 열세에 몰렸다. 그러던 순간, 낯선 사내가 신임 재상으로 등용되었다.
정체불명의 마법사들이 나서면서 전황은 급변했고, 역으로 왕국이 공화국의 영토를 침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진실은 참혹했다.’
방주의 리스너가 말하길.
신임 재상은 글러트니의 일원이었다.
그는 왕가에게 직접 허가를 받았고, 왕국의 국민 및 공화국의 포로들을 이용해 인체 실험을 자행했다.
인명 피해의 숫자는 무려 만 단위.
왕국의 승리는 피로 점철되어 있다.
이후 방주에서 직접 글러트니를 전멸시키자 전쟁의 불씨가 순간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인체 실험에 대한 진실을 깨달은, 당시의 리비안트 공작이 독립을 선언했다. 소강상태에 이르렀던 전쟁은 그렇게 끝이 났다.
여기까지가 전쟁의 전말.
베르덴이 정보를 상기하며 답했다.
“27년 전이라면 전쟁을 말 하시는 겁니까.”
“정확해요. 뭐, 당신이라면 알고 있을 수밖에 없겠죠. 왕국에 오기 전, 공국에서 소울 트리란 이형종을 토벌해 도시를 구하고, 추악한 죄를 저지른 가드란 후작가를 멸문하는 데 일조했으니.”
실리스가 간단히 전쟁을 요약해 설명했다.
베르덴이 알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글러트니에 대한 얘기가 없을 테니 오히려 적을 터였다.
그때였다.
“그 왕국이 전세를 역전할 수 있었던 건 그 남자, 글러트니라는 정체불명의 집단에 속한 신임 재상의 힘이었죠.”
“……!”
순간 베르덴의 마음속에 파문이 일었다.
지금까지 글러트니의 존재를 아는 건 방주의 일원들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실리스는 방주에 속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들지도 않았을 테니까. 깊은 의문 속, 실리스가 말을 이었다.
“애셔, 혹시 왕국의 4대 공작가에 대해서 아시나요?”
“……알고 있습니다.”
데본 공작가.
리비안트 공작가.
노스램드 공작가.
루비넬리안 공작가.
이 중 리비안트 공작가는 독립을 해 공국을 세웠다.
그리고 루비넬리안 공작가는 전쟁이 끝난 이후, 반란 혐의로 인해 멸문당하고 말았다.
“신임 재상이 왕국에 찾아온 건, 제 외가인 루비넬리안 공작가 때문이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먼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그 핏줄 때문에 말이죠.”
“핏줄이라면…….”
“지금은 잊혔지만 고대의 기억에 의하면 이렇게 부르더군요.”
실리스가 찻잔을 내려놨다.
작은 울림이 공간 전체에 퍼져 나갔다.
“꿈을 다루는 존재, ‘마녀’라고.”
실리스가 마력을 일으켰다.
화창했던 정원이 삽시간에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런 심연 속에 배경과 인물들이 비쳤고 그녀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마치 연극처럼.
* * *
먼 옛날, 동대륙에는 마녀가 살고 있었다.
꿈을 다루며, 정신만이 아니라 현실 자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마법적 존재.
그들은 재능이 있는 여성 후손들에게 피와 기억을 유전시키며 독자적인 마법 지식을 축적해 왔다.
하지만 영원한 건 없었다.
변화하는 세계 속, 어느 순간 기억 전이가 끊긴 마녀는 힘을 잃었다.
오직 그 피만이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고, 그렇게 왕국의 4대 공작가 중 하나인 루비넬리안 공작가로 귀결되었다.
당연하게도 마녀의 혈통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공작가의 초대 가주조차.
아무리 피를 이었다고 한들, 기억을 이어받지 못하면 마녀의 특성은 깨어나지 않는다. 그저 재능 있는 마법사가 되는 게 전부일 뿐.
마녀가 가진 마력과 마법은 잊힌 지 오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전쟁이 벌어졌다.
공화국의 군세에 밀린 왕국은 멸망을 앞두고 있었다.
부패한 귀족들은 제 살길을 찾으려 했고, 평범하고 무능한 왕은 공황에 빠졌다.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났다.
───저에게는 왕국의 위기를 타파할 방도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폐하를 위대한 정복왕으로 만들 힘이 있죠.
───정복왕……?
왕은 흥미를 가졌다.
───대체 그 방법이 무엇이냐?
───그저 폐하의 아주 작은 용기가 필요한 일일 뿐입니다.
남자가 요구한 건 실리스의 어머니인 네 번째 왕비, 레미엔.
루비넬리안 공작가의 독녀였다. 에스티리아 왕은 고민 끝에 남자를 신임 재상으로 등용했다.
───……받아들이지.
이유는 간단했다.
왕국을 멸망시킨 우둔한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평범하기에 무능한 왕.
다른 형제들이 있었다면 왕위를 빼앗겼을 게 분명한 운 좋은 왕. 이런 식으로 은연중에 무시당해 왔던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왕은 자신의 아내를 바쳤다.
그녀에 대한 사랑보다도, 후세에 기억될 자신의 무능함이 두려웠다.
───폐하는 왕국을 위해 옳은 선택을 하신 겁니다.
왕가의 허락이 떨어졌다.
신임 재상은 글러트니에서 오래도록 보관해 온 마녀의 기억을, 정신이 반쯤 깨어 있는 레미엔에게 주입했다.
마녀의 기억과 혈통이 연결되며 격렬히 반응했다.
예상대로였다.
왕비 레미엔은 마녀의 재능을 타고났다.
오직 한 명에게만 전할 수 있는, 마녀의 기억을 이렇게나 쉽게 받아들이는 걸 보면.
히죽 웃은 신임 재상은 레미엔의 피와 마력을 추출했다.
깨어난 마녀의 힘에는 마력을 증폭시키고 또 변질시킬 수 있는 특성이 깃들어 있다.
이를 이용해, 적국의 포로를 재료로 삼아 마력 증폭제를 제작했다.
그리고 글러트니의 마법사들에게 전장에서 사용하라고 명했고 실험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강력한 마법 폭격으로 인해 전세는 단번에 뒤집혔다.
───그럼 다음이로군.
신임 재상은 레미엔의 장기와 신체 조각을 떼어 냈다. 물론 죽음에 이르지 않을 정도로만.
그의 목적은, 후천적인 특이 형질을 탄생시키기 위한 마력 변질 실험.
숫자가 필요한 사안이기에, 포로만이 아니라 왕국의 시민들까지 암암리에 확보해 실험체로 삼았다.
만 단위 사람들이 해부되어 죽어 나갔다.
진행은 무척이나 순조로웠다.
하지만 실험은 순간 끝이 나 버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에 의해, 신임 재상을 비롯한 글러트니의 모든 것이 쓸려 나갔다. 실험체도, 실험 자료도 전부.
그 와중에 리비안트 공작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전선이 밀려났다. 결국 왕국은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인체 실험에 대해 알게 된 공작을 입막음하기 위해, 공국을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끝났어야 했다.
───승리가 코앞이었는데! 감히, 감히 일개 공작 따위가! 공화국 따위가!
타국을 압도하는 힘.
역사에 기록될 위대한 정복왕.
주위 귀족들에게서 향해 오는, 우러러보는 시선.
에스티리아 왕은 힘과 명성에 집착했다.
그 변화로 인해 무능과 평범함은 아집이 되었다.
왕은 궁정 마법사들을 시켜 억지로 실험을 계속해 나갔다. 신임 재상도, 관련 자료도 없었지만 막무가내로 강행했다.
───폐하, 이러다가는……!
───닥치고 계속하란 말이다!
그 결과 레미엔은 분해되었다.
───실리스…….
산 채로 죽어 가는 사이 남긴 유언은 하나뿐인 딸의 이름이었다.
실리스의 어머니였고, 네 번째 왕비였던 그녀는 이내 형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보다 끔찍하고 허무한 죽음이 또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성과는 없었다.
글러트니의 기술력이 없는 그들은 마녀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다. 고작해야 마력 증폭에 대한 것 외에는.
───실패했다고? 아니, 아니야.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 재상이 말했었다. 레미엔은 특별한 핏줄을 타고났다고……!
말인즉슨 그녀의 집안에 비밀이 있다는 뜻일 터.
에스티리아 왕은 뒤에서 주도해, 루비넬리안 공작가에게 반란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실제로 리비안트 공작이 공국을 세웠던 전례가 있기에 가능했던 일.
현재 1왕자의 수족으로 있는, 암상인을 제외한 비밀 사교회원들과 다른 두 공작가를 이용해 철저히 평판을 깎아내렸고 증거를 위조했다.
돈과 영토를 준다고 하자, 그들은 누구보다도 왕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것을 빌미 삼아 루비넬리안 공작가를 멸문시켰다.
몰래 사로잡은 공작가의 핏줄들을 이용해 인체 실험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결과는 같았다.
왕은 절규했고 마녀는 사라졌다.
……하지만 마녀의 명맥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레미엔이 죽음으로써 자취를 감춘 기억은, 그녀의 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으니까.
고통과 죽음.
그 전부를.
* * *
실리스가 구현한 연극이 막을 내렸다.
어둠이 걷히자 산뜻한 분위기를 가진, 꿈의 정원이 돌아왔다. 공간의 변화를 뒤로한 베르덴이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관리자에게 들은 적이 있다.’
특이 형질 중에는 드물게 혈통과 기억으로 유전되는 것들이 있다고. 아무래도 실리스 왕녀가 그 경우에 해당하는 모양이었다.
어째서 글러트니에 대해 알고 있는지 이해가 간다.
실험을 당하던 어머니의 기억이 전해지면서, 그 이름을 접한 것이리라. 그에 반해 방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게 그 반증이었다.
다만 명확하지 않은 점들이 있다.
톡톡. 손가락으로 팔을 두들기던 베르덴이 물었다.
“총 다섯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실리스가 질문을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