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마녀 (1)
칼리아는 라인즈에 머물며 로아프라에서의 연락을 기다렸다.
도중 몇 번이고 기사단을 이끌고 암흑가에 쳐들어갈까 했지만…… 결국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애셔는 칼리아를 훨씬 상회하는 강자였으니까.
심지어 오랜만에 만난 그의 전력은, 예전보다도 사뭇 달라졌다. 마법 하나로 소규모 비행정을 단번에 침몰시킬 수 있을 정도로.
‘섣불리 도우려 했다간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겠지.’
그러니 그저 기다릴 수밖에.
단신으로 간 것에 약간의 걱정이 들긴 했지만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주검의 영광이 소환한 강대한 언데드.
칼리아가 어찌할 수 없었던 존재를 압도하던 마법사의 모습은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른다.
솔직히 말해, 칼리아는 애셔가 패배하는 모습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던 그때, 마침내 소식이 찾아왔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이른 시간이긴 하나, 칼리아는 당장 기사단을 이끌고 로아프라에서 왔다는 두 사내를 만났다.
갈리아크와 가일.
그리고 칼리아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애셔가 로아프라를 제압했다고……?
순간 당황해 체면조차 차리지 못했다.
아니,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나 빨리 빈테르트를 패배시킬 줄이야. 그것도 역대 최강이라 불리던, 암흑가의 왕 그론드를 포함해서.
경악스러웠다.
이건 믿음과 별개의 문제였다.
‘잠깐, 설마 함정인가?’
타당한 의심이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현재 라인즈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샘웰과 샤를로트 그리고 에이든이 갈리아크의 신분을 증명해주 었으니까.
애셔를 도와, 노예였던 남매를 구해 준 인물이라면서.
확실히 애셔에게서 직접 들었던 정황과 맞아떨어졌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였다.
똑똑.
“칼리아 님, 곧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상념에 잠겨 있던 칼리아가 눈을 떴다.
직후 벨로스의 갑판으로 나가자, 안내를 맡고 있는 빈테르트의 소규모 비행정 너머로 대도시 아우로플이 보였다.
저 아래에 로아프라가 있다. 여태껏 불가침조약으로 인해 발을 디디지 못했던 암흑가가 코앞이었다.
“하일레, 너는 2, 3분대를 지휘해 벨로스를 지켜라. 허락 없이 접근하는 자는, 그게 누가 됐든 간에 적으로 간주하도록.”
“네, 칼리아 님!”
“나머지는 나와 함께 로아프라로 입성한다. 그리고 페르네와 카란스는…….”
“나는 형제를 만나러 가겠다.”
카란스가 페르네를 흘겨봤다.
그가 부탁을 받은 건 페르네의 호위. 당연히 카란스가 가는 길에 그녀 또한 함께여야 한다.
페르네가 상관없다는 듯 확답했다.
“저도 로아프라로 내려갈게요.”
카란스의 강함은 익히 알고 있다.
품속에서 호위를 자처하는 블루도 있었다. 또한 로아프라가 애셔에게 제압당했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근거들이 합쳐진, 정보상다운 판단.
“물론 칼리아 님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요.”
“상관없다. 너 하나쯤 지켜 줄 여력은 충분하니.”
후우우웅.
이윽고 빈테르트의 비행정과 벨로스가 연이어 착륙했다.
아우로플에서 마중 나온 마차들이 줄지어 도착했다.
갈리아크와 가일이 신호를 보내자, 칼리아와 베스파를 포함한 백결 기사단 1분대 그리고 카란스와 페르네가 지면으로 내려갔다.
갈리아크가 선두에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내 할 일은 다 했으니까 먼저 가서 쉰다. 아이고, 삭신이야.”
“알겠습니다, 갈리아크 님.”
갈리아크가 먼저 떠났다.
마차를 끌고 온 빈테르트의 일원이 가일에게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칼리아를 보며 공손히 마차를 가리켰다.
“새로운 왕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곧장 로아프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새로운 왕이라…….
생소한 명칭을 곱씹으며 칼리아 일행이 마차에 탑승했다.
베스파와 백결 기사단은 말에 올라타 마차를 감싸듯 대형을 갖추었다. 아직 적지가 아니라고 판명은 나지 않았으니, 현명한 대처였다.
다그닥, 다그닥.
별다른 검문검색도 없이 아우로플의 성문을 넘었다.
미리 확보된 가도를 거침없이 질주하자 곧 지하도의 입구에 도착했고, 계단을 내려가 마력 승강기에 탑승했다.
움직이는 유리창 너머로 지하 도시가 보인다. 칼리아는 홀린 듯 거리를 바라봤다.
‘여기가 로아프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마냥 끔찍한 장소일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었다. 마치 대도시의 밤거리를 보는 듯했다.
다만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건물을 재건하고 있는 광경과 저 멀리 보이는, 무너진 잿빛의 왕성.
저건 평소의 로아프라에서 볼 법한 풍경이 아닌 건 분명했다.
“설마 애셔가 그런 건가?”
“……지금은 많이 재건된 상태입니다.”
가일이 조심스레 수긍했다.
한결같이 점잖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간접적으로 이해가 될 정도.
특히 페르네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쿠웅.
그사이 승강기가 지면에 도달했다.
천천히 로아프라에 발을 디디는 순간, 익숙한 존재감을 가진 사내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 형제여!”
반가움이 가득 담긴 카란스의 인사.
베르덴.
그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상태였다.
예상은 했지만 그렇기에 헛웃음이 나왔다. 누구도 건들지 못한 암흑가를 홀로 쳐들어가 놓고 이리도 멀쩡할 줄이야.
옆에서 가일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분부하신 대로 일행분들을 모셔왔습니다.”
“수고했다.”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이 베르덴과 마주했다.
함박웃음을 짓는 카란스를 제외하고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건 알고 있지만 여기는 대화를 나눌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따라와라.”
베르덴이 가리킨 장소에는 빈테르트의 왕성이 있었다.
* * *
베르덴은 언제나 그랬듯 간결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세세한 점은 배제하고 중요한 부분만 일목요연하게.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칼리아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놨다.
“그러니까 애셔, 네가 이곳의 왕이 되었다는 거군.”
정치력이든 재력이든 의미 없다.
로아프라의 왕좌는 오직 가장 강한 존재에게만 허락된다.
권좌를 빼앗고 싶다면, 과거 그론드가 그랬듯 직접 왕위를 찬탈하면 된다.
그런 전통을 따라, 현 암흑가의 주인은 베르덴이 되었다.
‘애셔 님이 암흑가의 왕이라니!’
문득 페르네가 과거를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당시에는, 그가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 될 줄은…… 아니, 대단한 인물인 줄은 꿈에도 몰랐었는데.
지금은 마도왕의 아티팩트를 손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단신으로 왕국의 그림자를 제패했다. 왕국이 아니라 세계 단위의 강자로 우뚝 선 것이다.
돌이켜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술렁였다.
베르덴이 말했다.
“명목상 그렇게 여겨지고 있긴 하지만 로아프라에 군림하며 살 생각은 없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고작 암흑가 하나 다스리자고 쌓아 온 힘이 아니니까.”
로아프라의 규모는 꽤나 큰 편이었다.
이곳을 다스린다면, 그론드처럼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으리라. 그리고 범죄계에서의 영향력 또한 상당하겠지.
‘하지만 세력이 가진 힘 자체는 별 볼 일 없다.’
왕국이 아니라 세계 기준에서는.
예를 들어 보헤미른 마탑의 전투 부대와 맞붙는다면, 빈테르트를 포함한 암흑가는 며칠 이내에 전멸하고 말 것이다.
아티팩트를 두른 그론드가 있었다면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마탑의 간부들이 나선다면 시간문제일 뿐.
그런 이들을 끌고 다니는 건, 베르덴으로선 짐이나 다름없었다.
동력원의 폭주와 블랙 아워와의 전쟁으로 인해 보헤미른 마탑의 전력이 손실된 건 사실이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10개의 마탑 중 종합 평가 4위, 무력 평가에서는 공동 2위에 위치한 마탑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고작 암흑가라…… 그런데도 오만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게 신기할 따름이군. 뭐, 확실히 너라면 그렇겠지. 그런데 라인즈로 오지 않고, 우리를 이곳으로 부른 까닭이 있나?”
“부탁할 일이 하나 있다.”
“부탁?”
마침 로베르트가 들어왔다.
그녀가 손에 들린 서류를 베르덴 앞에 가져다 두었다.
“애셔 님, 말씀하신 불법 노예 명단입니다.”
“불법 노예라면…… 설마.”
칼리아의 의문에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덴이 자신을 대신해 갈리아크를 연락책으로 삼은 건, 로아프라에서 할 두 가지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로아프라의 재건.’
범죄 조직이라면 모를까, 민간인들도 사는 거리를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무너지고 뒤틀린 지형은 <지형조작>으로 제 모습을 회복시켰고, 주저앉은 건물은 로베르트의 관리하에 실시간으로 재건축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불법 노예.’
솔직히 말해 베르덴은 암흑가의 제도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노예 자체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들, 그들 전부의 삶을 책임질 이유도 여유도 없었으니까.
애초에 베르덴은 선인도 혁명가도 아니다.
하지만 사정이 달라졌다.
───로베르트, 이곳에 인체 실험을 하는 자들이 있나?
───……예, 있습니다.
로아프라는 온갖 범죄자로 득실거린다.
개중에는 선을 넘는 마법사들도 당연히 있다. 과거 뤼잉 코스타가 베르덴에게 에이든과 샤를로트 남매를 선물로 주려고 했듯.
───전부 찾아라.
베르덴은 빈테르트를 움직여 모든 불법 노예를 색출해 냈고, 인체 실험을 행한 자들을 직접 처단했다.
용서를 구하는 자도, 저항을 하는 자도 있었으나 베르덴의 철퇴에는 예외란 없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확보한 노예가 문제였다.
볼일이 끝났다고 제자리로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버려 뒀다간 인체 실험이 되풀이될 환경이 금방 조성될 테니까.
그래서 결정했다.
이참에 불법 노예를 완전히 철폐하기로.
왕이 되고자 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지금은 베르덴이 로아프라의 지배자. 당연하게도 반대는 없었다.
“이미 빈테르트의 재정으로 값을 치렀고, 개인에게 줄 재산도 준비되어 있지만 주거가 문제다. 숫자가 꽤 되는 데다가 로아프라에 그대로 살라고 둘 수도 없으니.”
“음, 그건 그렇지.”
칼리아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이름으로 아우로플의 시장과 협업해 영지민들의 이주를 맡는다라. 확실히 이건 귀족의 전문 분야지. 좋아, 이건 내게 맡기도록.”
“고맙군.”
“감사를 전할 필요는 없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
일명 노예 해방.
칼리아에게 있어선 아주 옳은 일이었다. 그녀가 베르덴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어 베르덴은 페르네와 로베르트에게 칼리아를 조력할 것을 말했다. 그리고 카란스에게는 지금처럼 호위를 맡아 줄 것을 부탁했다.
“저에게 맡겨 주세요, 애셔 님.”
“차질 없이 진행하겠습니다.”
“간단한 일입니다, 형제여.”
흔쾌한 대답이었다.
그때, 칼리아가 물었다.
“애셔,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어떤 거지?”
“혹시…… 왕국을 떠날 생각인가?”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베르덴이 답했다.
“그럴 때가 가깝긴 하지만 당장은 아니다.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 * *
레오닐은 모종의 실험을 위해 특이 형질 보유자를 찾고 있으며, 베르덴을 그 해당자라며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이를 미끼로 삼는다면 레오닐과 만날 수 있을 터.
‘하지만 애매하다.’
로베르트의 말에 따르면, 그론드가 직접 특이 형질 보유자를 궁정 마법사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레오닐이 나서서 데려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말인즉슨 놈과 바깥에서 만나기는 어렵다는 뜻.
‘어떻게 위장을 통해 레오닐 앞까지는 갈 수 있겠지만…… 곤란한 건 마찬가지다.’
왕도를 마법전의 무대로 삼았다간 인명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지도 몰랐으니까. 가능하면 주변에 사람이 없는 장소로 레오닐을 끌어내야 한다.
그러나 명확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베르덴의 고민이 깊어질 찰나,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상대가 문을 두들길 필요도 없이 염동력으로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가일이 복도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아, 예. 애셔 님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베르덴을 향해 가일이 나지막이 말했다.
“암상인 클란드입니다.”
* * *
갑작스럽게 찾아온 클란드는 혼자가 아니었다.
금색 머리칼과 녹색 눈을 가진 사내와 휠체어에 힘없이 앉아 있는, 가면을 쓴 남자가 곁에 있었다.
베르덴은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며 그들 셋과 마주 앉았다.
“오랜만이네, 애셔. 아니, 이제는 폐하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
“왕을 자칭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가, 그렇겠지. 혼자서 로아프라를 압도하는 자네에게 이 지하 도시는 너무 작을 테니. 표현에 주의하도록 하겠네.”
클란드는 미안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숙였다.
베르덴의 본 실력을 알게 된 탓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전보다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그야 자네에게 용건이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말해야 할 게 있네. 혹시 우리가 처음 거래를 했을 때 기억나나?”
암상인과의 첫 거래.
그건 페르네가 준 ‘어떤 인물에 대한 정보’와 경매자 목록과의 교환이었다.
베르덴은 그때 들었던 클란드의 중얼거림을 떠올렸다.
───그래…… 그랬군. 머리가 반쯤 태워진 채 빈민가에 버려졌었나. 그래서 내가 그토록 애를 써도 찾지 못했던 거야. 애초에 내가 기억하는 외모와 전혀 다를 테니까…… 잘도, 잘도 살아 있었군.
왜 클란드는 그때의 이야기를 꺼낸 걸까.
베르덴의 시선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향했다. 가면과 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목 부근에 화상 자국이 보였다.
클란드의 턱에 있는 것과 비슷한.
“그때 찾던 사람이…….”
“역시 눈치가 빠르군. 맞네. 바로 이 친구지.”
클란드가 남자의 가면을 천천히 벗겼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참혹했다.
머리와 얼굴의 태반이 화상 흉터로 뒤덮여 있었고, 목 안쪽까지 녹아내렸는지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으…… 어…….”
남은 눈동자 하나가 베르덴을 직시했다. 그 눈빛에는 고마움이 깃들어 있었다.
클란드가 남자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슬픔과 분노 등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는 손길이었다.
“이름은 케미언. 내 제자일세. 과거에 실종되어 행방이 묘연했지만 자네가 준 페르네의 정보로 찾을 수 있었지.”
“그건 다행입니다만.”
베르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를 통해 클란드가 말하고자 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네. 내가 찾아온 것이 갑작스럽고 또 의문스럽겠지. 하지만 이 모든 건 자네와 아주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네. 그간 에스퍼렌사 후작가에서 내건 의뢰를 해결하는 등 자네의 행보와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화상을 입은 케미언, 정체를 숨기고 있는 클란드, 레오닐의 실험, 그것을 알아내고자 하는 에스퍼렌사 후작까지.
“…….”
“이곳에 온 건 그 의문을 해소함과 더불어 자네에게 부탁을 할, 단 한 사람을 소개해 주기 위함일세. 내가, 우리가 진정으로 모시는 분이시지.”
그의 말에는 깊은 충성심이 담겨 있었다.
그건 에스퍼렌사 후작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다.
“로리안.”
사내, 로리안이 마력을 개방했다.
베르덴이 감각을 곤두세웠다.
무엇이든 간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지만 그의 마력에서는 어떠한 적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베르덴 자신을 어딘가로 이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통상의 위계 마법이 아니었다.
“……특이 형질?”
“정신감응이라 불리는 특이 형질이지. 자네가 로리안의 마력을 받아들인다면, 정신계에서 그분과 만날 수 있을 걸세. 물론 자네가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클란드가 선택권을 넘겼지만, 사실상 강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로리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특이 형질 보유자.
아직도 궁극적인 목적이 밝혀지지 않은 레오닐의 실험.
클란드의 정체와 그가 모시는, 에스퍼렌사 후작 이상의 누군가.
‘마법사로서 흥미를 갖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고민은 짧았다.
베르덴은 대답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
클란드를 신뢰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정신계로 들어간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언제든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로리안의 마력을 차츰 받아들이자 정신이 어둠 속으로 이끌리기 시작했다. 귓가에 클란드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기억해 주게. 우리는 적이 아닐세.”
직후 의식이 번쩍였다.
어느새 베르덴은 광활한 어둠 속에 놓인 정원 한복판에 서 있었다.
햇빛의 따사로움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고 꽃의 향기와 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 정도로 정교하게 정신계를 구축하다니.’
정신계 마법사라면 경지에 이른 게 분명하다.
베르덴이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한 여인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백금색을 띤 머리칼과 눈동자. 그녀가 입고 있는 얇은 드레스 또한 같은 색으로 물들어져 있다. 첫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여자가 클란드가 충성하는 존재라는 걸.
“만나서 반가워요, 애셔.”
여인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는 에스티리아 왕가의 1왕녀, 실리스 리벤 디 에스티리아.”
실리스가 치맛자락을 작게 집어 올리며 예를 갖추었다.
베르덴이 봐 왔던 어느 누구보다도 고귀함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모습. 이윽고 그녀가 베르덴을 향해 미소 지었다.
“부디 실리스라고 불러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