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금고 (2)
그론드는 욕심이 많고 또 제 것에 민감했다.
허락하지 않은 자가 감히 자신의 소유물에 손을 대려 한다면, 혹은 그랬던 정황이 확인되면 가차 없이 죽였다.
직접 팔과 다리를 잡아 뜯어 로아프라의 거리에 내걸었다. 출혈로 죽든, 아사로 죽든,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 내려 주지 않았다.
잔인하고 가혹한 처형 방식이었다.
그론드가 막 집권했을 당시, 겁을 상실한 범죄자 수십 명이 그렇게 죽었다.
시각적인 공포는 보다 위협적으로 다가왔고, 이후 그론드에게 거역하거나 그의 것을 훔치려는 자는 없었다.
로베르트가 아직 빈테르트에 들어오기 전의 일이었다.
“후우…….”
로베르트가 심호흡을 하고 금고 정중앙에 손을 대었다.
1차 잠금장치. 최대한 체중을 싣자, 손바닥 모양으로 된 버튼이 움푹 들어갔다. 시끄러운 마찰음이 들려온다.
겉면의 금속이 안쪽으로 사라지자, 다섯 개의 다이얼이 나타났다.
2차 잠금장치.
여기서부터 집중을 다해야 한다. 삐끗하기라도 했다간 침입자를 죽이기 위한 함정이 발동될 테니까.
고작 이런 걸로 새로운 왕이 죽을 리는 없겠지만 오해를 살 수 있다. 그리고 영영 돌이킬 수 없겠지.
‘실수하지 말자.’
다이얼을 돌려 번호를 맞추었다.
각 다이얼마다 새겨진 숫자는 총 여섯 개, 다만 모두가 같은 번호다.
당연히 정답은 하나.
이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해야 했다. 편집증에 가까운 방식이었다.
베르덴은 그 과정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대체 뭐가 숨겨져 있길래 이토록 철저한 건지.’
자연스레 호기심이 일었다.
기대감을 갖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툭……!
로베르트가 마지막 다이얼을 맞췄다.
다시금 번호를 확인한 그녀가 안주머니에서 팔찌를 꺼내어 정해진 위치에 갖다 대었다. 액세서리 형태의 열쇠인 모양.
팔찌에서 미약한 빛이 흘러나왔다.
직후 안쪽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개방하겠습니다.”
로베르트가 손잡이를 잡아 뒤틀었다.
끼이이익. 단단히 잠겨 있던 금고의 문이 마침내 열렸다. 그 너머에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마석등에 반사된 휘황찬란한 빛.
금괴, 보석, 무기, 방어구, 마법 물품 등의 현물이 곳곳에 쌓여 있다. 중심에 놓인 현금 다발은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이게 대체 얼마지?’
가치를 환산하기도 어렵다.
베르덴조차 놀라움을 숨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 빈테르트의 재산도 포함되어 있는 건가?”
“아뇨, 빈테르트의 재산은 영향력과 유동성을 위해 투자나 다른 형태로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이건 그론드가 암흑가의 왕으로서, 평생을 쌓아 온 재산.”
로베르트가 한쪽 팔을 벌리며 미소 지었다.
“이제는 전부 애셔 님의 것입니다.”
그녀가 왕의 표정을 살폈다.
무표정했던 얼굴에는 매우 긍정적인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분명 만족한 것이 틀림없었다. 로베르트가 등 뒤로 작게 콱 주먹을 쥐었다.
베르덴이 물었다.
“전부 다 해서 얼마지?”
“현 시가로 따지면───”
접해 본 적 없는 액수가 귓가를 맴돌았다.
베르덴이 금고 내부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금고에서 25억 엘크를 꺼내, 다이나 은행에서 빌린 대출금을 갚아도 남는 게 더 많다.
거기다 수중에 있는 현금 다발까지 합친다면…….
‘웬만하면 돈 걱정 할 일은 없겠군.’
베르덴은 부유해졌다.
* * *
“아직도 애셔를 확보하지 못했단 말이냐?”
레오닐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궁정 마법사단의 1석차 헤이넬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갑자기 종적을 감춰서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 이유를 들먹인 게 언제 적인데! 대체 빈테르트는, 그론드는 뭘 하길래 어린 마법사 하나 잡아 오지 못한단 말이냐! 다른 날도 아니고 하필이면 지금!”
눈에 핏발이 섰다.
주름진 눈가가 사납게 꿈틀거렸고, 가슴 언저리까지 기른 회색 수염이 크게 흔들렸다.
그토록 열성을 다한 실험의 끝이 코앞이다.
그런데 고작 특이 형질 보유자 하나가 없어서 지연되다니.
마도사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으로 내리닫다 못해 지하에 처박힌 지 오래였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나서고 싶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최근 에스티리아 왕의 건강이 눈에 띄게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악몽에 시달리는지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대화조차 나누기 어려웠다.
‘제기랄.’
이렇게 된 이상, 공백기를 줄이기 위해 1왕자에게 왕관을 넘겨야 한다. 이미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앞다투어 동의한 상황.
그로 인해 대관식은 앞당겨졌고, 당연하게도 레오닐 또한 참석해야 한다.
아무리 왕국 최강이라고 한들, 힘만 믿고 왕가와 귀족들을 대놓고 무시하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초월자가 된다면 아무래도 좋을 일이지만.’
정보력만 따지면, 레오닐보다 빈테르트가 훨씬 우수하다.
그런데도 아직도 애셔를 찾지 못했다.
말인즉슨 레오닐이 직접 그론드에게 찾아가 닦달을 해도, 자취를 감춘 자를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레오닐이 화를 삭였다.
신경질적으로 혀를 찬 그가 손을 털었다.
“이만 나가 봐라.”
“예, 각하.”
레오닐은 혼자가 되었다.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하고는, 자신의 공간가방에 손을 넣었다. 이윽고 심장 소리가 들려오는 푸른 수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근, 두근, 두근.
아름다운 울림이다.
이건 레오닐 평생의 역작이었다.
초월자가 될 수 없는 그에게, 초월의 길을 열어 줄 ‘마녀’의 심장.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경지가 눈앞에 있음을 깨닫자 황홀감이 느껴졌다.
또한 그를 보고만 있어야 되는 현실에 짜증이 치밀었다. 거의 조울증에 가까운 감정 기복이었다.
레오닐이 멍하니 수정을 바라봤다.
‘어떻게든 이 심장을 ‘이식’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특이 형질 보유자를 찾아야 한다.
그들이 가진 특수한 마력회로를 뽑아내어 재료로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이대로 애셔를 찾지 못한다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설령 특이 형질을 가진 자가 왕국에 있다고 해도, 그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그로서는 전혀 없었으니까.
최악으로는…… 몇 년 뒤에야 실험을 완성하게 될 수도 있었다.
레오닐은 그 시간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레오닐은 헤이넬이 앉았던 자리를 응시했다.
그녀는 궁정마법사단 중 유일한 특이 형질 보유자다. 그 능력으로 오랫동안 레오닐의 수족이 되어 큰 도움을 주었다.
그건 여지없이 인정하는 바이다.
솔직히 희생양으로 삼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
‘그래도 준비는 해 둘까.’
그래, 혹시 모르니까.
물론 애셔를 잡아다 쓰는 게 가장 좋기는 하겠지.
그래도 보험을 두는 건 나쁘지 않았다. 초월이 코앞인데, 마지막까지 사람 목숨을 가리는 건 이성적이지 않았다.
레오닐이 낮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죄책감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 * *
베르덴은 그론드의 금고를 온전히 손에 넣었지만, 가지고 있는 공간가방의 용량으로는 감히 챙겨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현금화하려면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릴 테고. 어쩔 수 없이 당장은 금고째로 방치했다.
아티팩트 두 개에다가 암흑가의 왕의 금고.
본래의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의 부수입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후 간단히 휴식을 취하며 짧은 나날을 보냈다.
슬슬 칼리아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움직이려 하자, 가일이 대신해서 나섰다.
“애셔 님께서는 여기 계십시오. 제가 직접 나서서 그분들을 데려오겠습니다.”
적대감은 없었다.
있다고 해도 칼리아 일행을 인질로 삼지는 못할 것이다.
수작을 부렸다간 인간 혐오 엘프인 카란스가 단칼에 목을 자르겠지.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설령 베르덴이 편지를 써서 보낸다고 해도 믿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함정이라고 여길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더 간단하겠지.’
로아프라에서 할 일이 있긴 하지만, 뭐,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그러던 그때, 갈리아크가 보였다.
붕대로 전신 곳곳을 감싼 채로, 목발을 짚으며 복도를 거니는 도살자. 마냥 누워 있기에는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도살자 갈리아크.
그는 샘웰과 남매와 아는 사이. 다시 말해 베르덴을 대신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래, 너를 보내면 되겠군.”
“뭔 개소리야?”
설명을 들은 갈리아크가 이를 드러냈다.
“야이, 지금 내 상태 안 보여?!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데 그 먼 거리를 어떻게 가! 그냥 네가 날아갔다 오면 되잖아!”
“로아프라에서 할 일이 있다. 그리고 비행정을 쓸 거니 문제는 없겠지.”
“내가 네 부하냐? 이런 씹───”
“방어구.”
우뚝.
갈리아크가 멈췄다.
그의 방어구는 드레이큰과의 전투에서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작살이 나 버렸다.
“그론드의 금고에 쓸 만한 방어구가 많더군. 필요하다면 팔아 주지.”
“……얼마?”
“싸게.”
어차피 쓸 일도 없는 물건들이다.
비싸게 팔아야 한다며 구매자를 찾을 생각도 없었다. 돈은 충분하니까.
차라리 적당한 값에 팔아넘기는 게 이득이었다. 베르덴에게나, 갈리아크에게나.
“미친,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갈리아크가 가일과 함께 로아프라를 떠났다.
소규모 비행정을 이용하니 라인즈를 왕복하는 데 며칠이면 충분할 것이다.
베르덴이 로베르트와 함께 암흑가로 향했다.
<지형조작>으로 뒤틀린 거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대지진이 일어난 것만 같은 광경에 민간인들은 근방에 일절 다가가지 않았다.
확실히 그럴 만했다.
뭐, 그 덕에 귀찮은 일이 아예 사라졌으니 된 거겠지.
이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이상, 로아프라를 망가진 상태로 내버려 두는 건 좋지 않았다.
“그러니 수복해야겠지.”
“……예?”
로베르트의 시선을 뒤로한 베르덴.
그가 마력회로를 전력으로 활성화하며, <아케인>으로 마력을 넓게 퍼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과 잿빛 왕성으로 이어지는 지형 전체가 베르덴의 영역이 되었다. 다음으로 머리 회전을 가속했다.
공간을 분석하여 조작할 범위를 정확히 계산했다.
곧 결론을 내린 베르덴이 눈을 번뜩였다. 마력이 서린 벽안이 형형했다.
<지형조작>
쿠구구구구구……!
로아프라가 다시금 움직인다.
조각난 지형이 하나가 되었고, 또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마치 퍼즐을 맞추기라도 하듯 지형 전체가 조립되고 있다.
‘미쳤어.’
실시간으로 파괴된 지형이 회복되는 과정에, 로베르트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렇게 수십 분이 지나고 나서야 베르덴이 마력을 가라앉혔다.
이전보다 훨씬 많은 마력과 집중력을 소모한 터라 마력회로가 뻐근했다.
만에 하나 지반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안 되니.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로아프라는 옛 모습을 되찾았다.
다만 무너진 건물은 베르덴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평범한 <지형조작>으로는 금속 같은 건 조작할 수 없었으니까.
애초에 건물 설계도조차 알지 못한다.
대신 잔해는 끌어모아 광장에 모아 두었다.
각 소재별로 차곡차곡 말이다. 완전히 가루가 된 것이 아니라 재사용하기에는 용이할 것이다.
문제는 건물을 수복할 인력인데.
“그건 제게 맡겨 주세요. 당장이라도 수복을 실시하겠습니다.”
로베르트가 장담했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후, 수천 명이 모였다.
크고 작고를 떠나, 로아프라에서 살고 있는 조직들이 죄다 모였다. 개중에는 베르덴과 갈리아크를 사냥하려 했던 권력자들도 있었다.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모른 척 몸을 숨기는 건 악수.
살길를 찾기 위해, 실수를 만회하러 온 자들이었다. 솔직히 말해 베르덴으로서는 딱히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빈테트트의 조직원들이 도시 설계도를 가져와 배부했다.
건축 기술에 조예가 있는 자는 조장을 맡았고, 외부에 연줄이 있는 권력자들은 자재 조달을 맡았다.
거스르는 자가 없으니 진행은 일사천리였다.
‘마치 군대 같군.’
베르덴은 멀쩡한 건물 지붕에 올라 이를 구경했다.
로베르트를 중심으로 험악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아무리 그녀의 무력이 약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슬레이나 드레이큰와 같은 수장급에 비해서일 뿐.
권력자 한둘 정도는 단신으로 죽일 수 있다.
로베르트가 뒷짐을 졌다.
흑발과 하얀 피부. 도서관의 사서라고 해도 믿을 법한, 이지적인 외모를 가진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정적 속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대한 빨리 끝내세요. 멀쩡하게 살아 돌아가고 싶다면.”
“네, 네!”
설득과 화합보다는 협박이 효과적인 도시, 여긴 로아프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