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금고 (1)
암흑가 로아프라의 왕, 그론드 베일 디 발라디스.
에스티리아 궁정 마법사의 단장, 레오닐 베르타나스.
위 두 사람은 왕국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들이다.
그들 각자가 가진 무력과 세력은 왕가를 넘어 왕국을 양분할 만큼 막강하니까. 실리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배제해야 할 위험 요소였다.
만일 두 세력이 완전히 힘을 합치기라도 한다면…… 실리스의 능력과 에스퍼렌사 후작의 조력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각개격파가 필요하다.
먼저 대관식을 기점으로 레오닐을 처리하고, 후에 그론드를 토벌하는 것이 계획.
그를 위해서는 둘이 직접적으로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어떠한 변수가 발생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누구 하나를 강제로 격리시켜야만 했고, 그것이 바로 암흑가의 왕이었다. 폐쇄적인 도시인 로아프라는 감옥으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그론드가 죽었다고?’
실리스가 입술을 매만졌다.
이 시점에서 암흑가의 왕이 사망하다니…… 전혀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빈테르트의 정점이 암살을 당했을 리는 없다.
경비가 삼엄하기도 하지만, 애초에 그것이 가능한 자가 있었다면 미약한 전조라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건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로아프라에만 처박혀 있는 사내이니, 운 나쁘게 자연재해에 휩쓸렸거나 아인종 혹은 이형종에게 살해당했을 리는 당연히 없을 테고.
‘건강이 안 좋다거나 위험한 병에 시달렸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없어.’
들어맞는 게 없이 캄캄하다.
이런 혼란을, 실리스는 좋아하지 않았다.
조용히 침묵하던 그녀가 작게 주먹을 쥐며 의식에 집중했다.
───로리안, 암흑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당장 말하세요.
───……애셔입니다.
───애셔?
뜻밖의 이름.
다만 잡히는 게 있었다.
───애셔는 최근 종적을 감췄다고 알고 있었는데. 혹시 빈테르트가 내전 외의 문제로 암암리에 병력을 움직인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요?
실리스는 로아프라를 감시해 왔다.
오직 그론드의 거처만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 덕분에 로리안이 이렇게 빨리 암흑가의 소식을 전할 수 있었지만, 가능한 멀리 거리를 두었기에 빈테르트의 사정을 면밀히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만에 하나라도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되었으니까.
몇 없는 자신의 사람들을 그런 놈들 따위에게 죽게 할 수도 없었다. 후자는 실리스의 의견이었다.
───그럼 설명드리겠습니다.
로리안이 정신 감응을 통해 이야기를 풀었다.
로아프라에 침입한 애셔와 갈리아크.
암흑가의 왕의 명령하에 대대적인 사냥이 시작되었다. 본래라면 두 사람은 초주검이 되어 끌려갔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갈리아크라는 동행자가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애셔가 단신으로…… 로아프라를 반파했습니다. 민간인의 피해는 전무했으나, 그 과정에서 빈테르트의 하부 세력 중 약 4분의 1이 사망 혹은 실종되었고, 나머지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항복했습니다.
로리안은 뒤늦게 현장을 확인했다.
순간 정신이 떨려 왔다. 그건 일개 마법사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또한…… 그로부터 수십 분이 지나, 잿빛 왕성의 태반이 붕괴. 이후 애셔의 마법으로 보이는 거대한 빙산이 낙하한 뒤, 그론드의 사망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시체는, 확인했나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검은손 로베르트가 공포했습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암흑가에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고. 정황상 진실로 파악됩니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실리스가 미간을 좁히며 창틀을 짚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실제는 그녀의 예상을 한층 더 벗어나 있었다.
‘그론드가 죽음은 희소식이야. 하지만…….’
그 자체로 문제이기도 했다.
그론드를 포함한 로아프라 전체를 홀로 압도할 수 있는 강자의 등장. 즉, 레오닐과 동급인 마법사가 나타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애셔가 그 정도의 인물이었다고……?’
괴리감이 너무도 컸다.
분명 에스퍼렌사 후작에게서 보고를 받고, 특출난 사내라고 판단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머리가 복잡해지자 이마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로리안이 속삭였다.
───로아프라가 큰 피해를 입긴 했으나 다행히 본 계획에 차질은 없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실리스 전하.
어떻게 하냐라.
실리스가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론드가 죽었으니 사실상 계획의 목적이 상실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애셔…….’
그는 에스퍼렌사 후작가와 연이 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실리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잘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없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아버지, 평범했던 에스티리아 왕이 그토록 잔혹하게 변해 가는 모습을.
그렇기에 최악을 상정했다.
‘만약 애셔가 레오닐과 손을 잡는다면.’
가능성이 적다고 할지언정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단언컨대 그론드 이상의 위협이 될 것이다.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고 해도, 그 두 사람을 상대하기에는 벅찼다.
실리스는 타인을 믿지 않는다.
그녀가 신뢰하는 건 자신과 같은 아픔과 꿈을 갖고 있는 복수자들뿐이다.
의뢰를 행하는 그레이의 마법사, 애셔.
지금까지 방치하는 게 최선이라고 여겼지만…… 이렇게 된 이상 선택지는 하나다. 계획을 무너뜨릴 수 있는 변수를 이대로 둘 수는 없다.
───‘로아프라 봉인 계획’은 그대로 진행합니다. 다만 그론드의 이상 사태를 알아챈 레오닐이 암흑가로 향할지도 모르니, 당분간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못하도록 무리해서 대관식을 조금 더 앞당기기로 하겠습니다. 정보 교란은 플로나와 세바…… 아니, 암상인 클란드에게 맡기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실리스가 잠시 뜸을 들였다.
톡톡 손가락으로 창문을 두들기며 고민했다.
애셔라는 크나큰 변수.
적이 될지 모르나 아직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보아, 그론드와 달리 타협할 여지가 있다.
배제해야 할 방해물로만 판단하는 대신 조금 더 우호적으로 다가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애셔와 만남을 주선하세요.
* * *
로아프라는 약육강식의 도시다.
왕국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의 영역으로, 지배 세력인 빈테르트가 정한 규율이 곧 법이었다.
물론 불만을 가진 이들은 있었지만 대놓고 표출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도 감히 빈테르트에게, 그론드에게 대항하려 하지 않았으니까.
강자만이 모든 걸 가질 수 있다.
그곳이 바로 암흑가다. 그리고 현시점, 로아프라의 정점은 베르덴이었다.
‘성 아래에 이런 장소가 있었군.’
잿빛 왕성의 지하.
베르덴의 마법 여파에서 벗어난 유일한 장소이자, 평소 그론드가 안식처로 즐겨 사용하는 방이었다.
베르덴이 상석에 몸을 누였다.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방수가 가능한 재질. 식견으로 판단하건대 마수의 가죽으로 만든 소파임이 분명하다.
방어구의 소재를 고작 가구를 만드는 데 사용하다니, 모험가들이 본다면 기겁할 만한 사치품이었다.
전체가 그런 물건으로 도배되어 있다.
방의 크기는 수십 명이 들어와도 남을 정도였으며, 천장에는 세공된 마석으로 만들어진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그 외에 뭔지는 몰라도 상당히 값비싸 보이는 장식품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그때, 가일이 다가왔다.
“퓨리 골드 버즈 차와 치즈케이크를 가져왔습니다.”
소리 없이 그릇과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론드의 비서로 수년을 살아온 가일이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깊게 허리를 숙인 그가 조심스레 뒤로 물러났다.
베르덴이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퓨리 골드 버즈라. 오랜만이군.’
공국에서 의뢰를 하고 있었을 당시, 로든마이어 백작이 대접해 주었던 찻잎이었다.
가볍게 마력을 일으켰다.
염동력으로 설탕 반 스푼을 섞고는 케이크와 같이 차를 음미했다. 품질은 최고급, 기억에 있는 것과 같은 맛이었다.
독이 있을지도 몰랐으나 상관없었다.
아인베르는 소유자에게 중독 면역을 부여하니까. 마도왕의 고대 아티팩트를 착용한 베르덴은 거침없었다.
뭘 하든 감히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태도.
베르덴의 대각선에 앉은 로베르트는 그게 무서웠다.
“…….”
그녀가 회색 눈동자를 슬쩍 굴렸다.
베르덴의 표정은 그론드와 다르게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았다. 거기에 흠잡을 것 없는 신비한 외모가 더해지니 공포는 배가되었다.
탁.
베르덴이 찻잔을 내려놨다.
직후 향해 오는 시선에 로베르트가 식탁 밑으로 주먹을 꼭 쥐었다.
“갈리아크의 상태는 어떻지?”
“우, 우선 최상급 포션으로 응급처치를 했고, 현재는 아우로플에서 성직자를 데려와 치료 중에 있습니다. 말하기를, 완치에 시간이 걸리겠으나 신체에 장애가 올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드레이큰은.”
“그 또한 겸해서 치료를 하는 중이나…… 원하신다면 당장 처분하겠습니다.”
드레이큰은 갈리아크를 죽이려고 했다.
일행에게 피해를 끼쳤으니, 로베르트 관점에서는 새로운 왕이 분노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베르덴은 별생각이 없었다.
그론드를 처리한 이상 더 날뛸 이유는 없었다.
뭐, 갈리아크가 죽은 것도 아니고.
“내버려 둬라.”
“예, 폐하.”
폐하?
베르덴이 미간을 찌푸렸다.
불쾌감을 드러내자 가일과 로베르트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호칭을 바꾸지.”
“네? 그럼, 어떻게…….”
“그냥 이름으로 불러라.”
“알겠습니다, 애, 애셔 님.”
“그래서. 지금 로아프라는 어떻지?”
로베르트가 곧장 설명했다.
로아프라의 권력이 교체된 건 단 하루 만의 일.
그러한 급변속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조직들은 각자의 아지트에 틀어박혔다. 항거할 수 없는 힘을 경험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혹여 새로운 왕의 변덕으로 처분이라도 당할까 두려움을 품고 있었지만, 누구도 로아프라를 떠나는 일은 없었다.
어디 숨을 곳도 없는 데다가 도망치는 순간 척살당할 수도 있다고 여긴 것이다.
“폐…… 아니, 애셔 님을 귀찮게 하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겁니다. 만약 그럴 기미가 보인다면 제가 직접 사전에 방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베르트는 자신 있게 말했다.
쓸모를 입증해야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만큼 죽고 싶지 않았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지금 당장 뭘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대로 로아프라에 눌러앉을 건 아니었다.
베르덴에게 암흑가의 왕좌는 너무도 작았다. 그가 쌓아 온 힘은 고작 지하 도시를 지배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그론드처럼 왕을 자칭하며, 동굴 속의 고블린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목적은 전부 이뤘으니 슬슬 왕국을 떠날 때이긴 하지만…….’
당장은 그럴 수 없다.
레오닐은 버젓이 살아 있으니까.
인체 실험을 자행한 자들에 대해 알고도 방치하거나 살려 줄 아량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그 행위 자체가 베르덴의 역린이었으니까.
다만 레오닐을 단번에 처리하는 건 어렵다.
초월자가 아니라고 해도 6위계 마도사의 힘을 얕봐서는 안 된다. 왕도 레티아에서 마법전을 벌였다간 피해가 확대될 수 있다.
그러니 레오닐을 끌어내야 한다.
아니면 놈과 독대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든가.
“…….”
베르덴이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 침묵이 분위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로베르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위험해.’
새로운 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 어쩌면…… 가일과 드레이큰 그리고 로베르트 자신을 처분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당장이라도 살려 줄 이유를 보여야 한다.
필사적으로 골똘히 머리를 굴리던 로베르트가 눈을 번쩍 떴다. 그래, 있었다. 새로운 왕에게 바칠 만한 아주 큰 선물이.
“애셔 님, 당장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 * *
로베르트는 빈테르트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다.
뛰어난 능력이 있었기에 당당히 수장의 자리를 꿰차고 또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론드는 로베르트를 중하게 여겼다.
단순히 무력이 강한 것보다는 수십, 수백억을 굴려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이는 것이 훨씬 더 크니까.
강함이 세상의 진리라는 건 자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전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너에게 맡기겠다.
지하 도시의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
그를 거닐며 로베르트는 당시의 명령을 떠올렸다.
“그론드는 자신의 금고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비밀리에 저에게 주었습니다. 신임을 한다는 증거이기도 했지만 금고를 채워 놓으라는 명령이기도 했고, 저는 지금까지 그에 대해서 그론드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론드는 없다.
그가 찬탈했던 왕위는 새로운 왕에게 빼앗겼다.
베르덴이 말했다.
“그래서 그 금고를 나에게 넘기겠다는 건가?’
“그론드를 폐위시킨 건 애셔 님이니까요. 그가 가졌던 재산 또한 귀속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적어도 이 로아프라에서는.”
로베르트가 싱긋 미소 지었다.
타인의 재산으로 신임과 목숨을 얻기 위한, 그녀의 음흉한 속내였다.
얼마 후, 잿빛 왕성의 까마득한 지하에 도착했다.
지하 호수 아래라 그런지 미약하게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관리되지 않은 낡은 통로에는 틈새마다 동굴 이끼가 자라 있었다.
“그럼 열겠습니다.”
로베르트가 벽을 더듬거렸다.
벽돌을 누르자 기관이 작동되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마력을 교란시키는 처리까지 되었다.
마력감지로는 찾아낼 수 없는 장치.
쿠구구……!
진동과 함께 벽이 열린다.
그 너머에는 두께를 가늠할 수 없는 금속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베르트가 소개했다.
“이것이 바로 그론드의 금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