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246화 (246/366)
  • 246화 암흑가의 왕 (3)

    콰과과과과과광!

    연이은 원소 폭격이 그론드를 강타했다.

    여러 개의 검기를 쏘아 내고, 플로티드의 보호막을 펼치며, 인서드의 전신 갑주로 견디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버티는 게 전부일 뿐.

    베르덴이 마도를 드러낸 순간부터, 그론드는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뒤로 밀려나고만 있었다.

    체중이 앞으로 쏠린 그 순간이었다.

    “뭣……?!”

    등 뒤에서 날아온 거대한 바위에 균형이 흐트러졌다.

    역천의 마안은 공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그 사실을 간파하지 못한 그론드가 당황을 금치 못하며 휘청거렸다.

    정면에서 쇄도하는 용암의 창과 측면에서 생성된 중력의 칼날이 퇴로를 막는다.

    잠깐의 딜레이조차 없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마법은, 그론드의 대처 능력을 상회했다.

    퍼어어엉!

    물리력이 전신을 엄습한다.

    회색 카페트는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뒤로 튕겨져 나간 그론드에 의해 왕좌가 무너져 내렸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잔해를 짚었다.

    ‘믿을 수 없다.’

    로아프라를 지배하는 자신이 밀리고 있다니.

    그것도 손을 쓸 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심지어 이만한 마법을 퍼부었음에도 여전히 상대는 방대한 마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든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만약 저 마법 폭격이 계속 이어진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티팩트가 버틴다고 하더라도 충격은 조금씩 쌓일 것이다.

    그와 더해서 세 개나 되는 아티팩트를 운용하는 대가로 체력은 실시간으로 소모되고 있다.

    우득. 어금니를 강하게 깨물었다.

    전개가 이상하게 흐르고 있다. 아티팩트만 있다면 마법사를 죽이는 것쯤은 간단해야 했을 텐데.

    베르덴이 그론드를 굽어봤다.

    그 시선에는 차가운 조소가 담겨 있었다.

    “이게 전부인가?”

    “그 입 찢어 버리기 전에 닥쳐라!”

    “아직도 깨닫지 못한 모양이군.”

    실력에 힘을 더해 주는 건 장비가 가진 의의.

    무구의 힘을 다스리는 것은 착용자로서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하지만 그론드는 아티팩트에 휘둘리고 있다.

    물론 세 개의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만큼 대부분의 상대에게는 효과적일 테지만, 아티팩트가 통하지 않는 강자에게는 오히려 퇴보된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아무리 베르덴이 강하다고 한들, 여전히 아티팩트에 의존해 돌파구를 찾으려 하는 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마도왕의 실험실.

    베르덴이 역천으로 잠시나마 초월의 격에 올라섰을 때, 관리자 또한 베르덴의 마도와 마안에 밀려났지만 곧바로 대책을 찾았다.

    마법을 허용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근접전으로 무대를 바꾼 것이다. 이건 단순히 강약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경험의 차이.’

    그론드는 지금까지 격상의 강자와 목숨을 걸고 싸운 적이 없다.

    기껏해야 동급 혹은 그 이하의 존재들을 상대로 싸워 왔겠지. 로아프라라는 동굴 속에 처박혀 지배자 행세를 하는 것이 그 반증이었다.

    “내 말이 틀렸나?”

    “…….”

    베르덴의 일침에 그론드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분노가 폭발할 것처럼 들끓었으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이 가슴속을 가득 메웠다.

    ‘감히, 감히, 감히……!’

    콰드득.

    그론드의 손가락이 잔해를 파고들었다.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수십 년간 로아프라를 지배해 왔는데,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사냥감이었을 마도사 하나 따위에게 무너진다고? 이렇게 조롱받으면서?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해서는 안 됐다.

    상대가 격상의 존재라는 걸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반드시 죽여 버린다.

    눈앞의 애새끼를 당장이라도 토막 내 버릴 것이다.

    그렇게 다시금 증명할 것이다.

    빈테르트를, 암흑가 로아프라를 지배하는 그론드 베일 디 발라디스가 어떤 존재인지. 그 전까지 뒤를 생각하지 않겠다.

    격체擊體.

    그론드가 강제로 심장에 기를 투여했다.

    심장박동이 더욱 강해지며, 혈관을 타고 흐른 기운에 힘이 충만해지기 시작했다. 핏줄이 불거진 그론드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투구의 틈새로 번쩍이는, 격노에 찬 눈빛.

    극한까지 강화된 각력에 바닥이 으깨졌다. 심장에 부담을 주는 대가로 얻은 신체 능력은 이제까지와 판이했다.

    그론드의 수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환상의 눈동자여,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생명을 바치노라!”

    아티팩트의 시동어.

    인서드의 전신 갑주, 그 가슴 부근에 나 있는 틈새가 열렸다. 녹색의 빛이 알현실을 가득 메웠다.

    인서드의 눈동자.

    본체와 동일한 힘을 가진 무수한 분신을 만들어 내는 숨겨진 기능. 그 대가로 수명이 감소하지만 훗날의 일이었다.

    수십 명의 그론드가 사방에서 베르덴을 향해 달려들었다.

    피할 방법은 없다.

    저 분신의 검 또한 엄연히 현실의 것이니. 이윽고 마검에서 뻗어 나온 남색의 검기가 활화산처럼 분출되었다.

    ‘내가 이겼다.’

    그론드는 확신을 품었다.

    자신의 전력을 막는 건, 그 어떤 누구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그때였다.

    베르덴에게서 황금빛이 명멸했다.

    아인베르의 두 번째 성능, 개안.

    소유자에겐 어떠한 환상도 통하지 않는다.

    화아아아악!

    빛에 노출된 분신들이 일제히 소멸했다.

    인서드의 전신 갑주가 아인베르를 마주했다. 콰지직. 인서드의 눈동자가 으깨지듯 쪼개지며 기능을 상실했다.

    아인베르의 보복이었다.

    그론드가 눈을 부릅떴다.

    ‘환영을 없앴다고? 대체 어떻게?!’

    이해는 못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이미 사정권에 들어왔으니까.

    그론드가 마검을 양손으로 잡고는 허리를 당겼다.

    소수의 전사만이 발현할 수 있는 극한의 기예, 절기(絕技). 지금까지 이 기술을 본 인간 중 살아남은 이는 없다.

    다만 그론드는 착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베르덴은 의도적으로 그론드의 전투에 어울려 줬을 뿐. 관리자를 상대했을 때와 같은 전력으로 그를 상대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더 경험할 것도, 볼 것도 없다.

    베르덴은 사고를 전환했다.

    상대의 전력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대적자의 말살로.

    ‘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무대로 바꾸는 건 마법사의 기본.’

    오리엔트를 중심으로 중력의 역장이 형성된다.

    쿠우우우웅!

    주저 없이 알현실의 중심에 박아 넣었다. 그러자 아래애서 암자색의 빛이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거대한 힘이 퍼져 나갔다.

    관리자에게 <아케인>을 전수받을 당시, 베르덴이 준초월자로서 창조한 마법 중 하나.

    재앙의 전조.

    <대격변>

    일순 공간 전체가 들썩였다.

    이내 어두운 빛이 터져 나오며 알현실을 포함한 왕성의 상층부가 송두리째 폭발했다.

    * * *

    잿빛 왕성의 외곽.

    이곳에도 하나의 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후우우웅!

    훼월의 날이 허공을 갈랐다.

    한 발을 내디뎌, 그 무게를 이용한 갈리아크가 현란하고 또 무모하게 일격을 더했다.

    다리를 비틀어 피해 낸 드레이큰이 거리를 벌렸다. 그사이에 휘두른 검격이 갈리아크의 전완을 얇게 갈랐다.

    “X발, 또 베였네.”

    갈리아크가 불평했다.

    갑옷이 망가지고 자신에게서 흘러나온 피에 붉게 물든 도살자. 상처 하나 늘어난 것 정도는 티도 나지 않았다.

    반대편에 서 있는 타락한 모험가, 드레이큰은 깨끗했다.

    기민한 몸놀림이 특기인 그에게, 비교적 무거운 공격은 하나도 닿지 않았다. 숨이 차오르긴 했지만 갈리아크의 상태보다는 훨씬 나았다.

    드레이큰이 검을 가볍게 털었다.

    묻어 있는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네 눈으로 보다시피 이후의 결과는 뻔하다. 그걸 알면서도 여전히 싸우려고 하는 건가? 도망간다면 쫓지 않겠다.”

    “새끼가, X랄은. 해볼 만한데 내가 왜 도망가?”

    “뭐가 할 만하다는 거지?”

    “이제 확신이 들었거든.”

    뚜둑.

    갈리아크가 목을 풀었다.

    “확실히 쥐새끼 같은 네 몸놀림이 까다롭긴 해. 그런데 예리하지도 치명적이지도 않아. 핏빛검, 그년은 단칼에 내 목을 노렸는데. 다시 말해 그 뜻은 무엇이냐.”

    도살자의 눈빛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그년이 특별했던 거고, 네가 일반적인 미스릴 등급 모험가의 수준이다. 그게 내 결론이다. 그러니까 내가 널 이기면, 실력만큼은 미스릴 등급에 올라섰다는 걸 증명하게 되는 셈이지. 안 그래?”

    대꾸할 가치도 없다.

    눈을 가늘게 뜬 드레이큰이 돌진했다.

    카아앙! 캉! 촤아아악!

    칼날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피가 피부를 적셨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일격을 주고받고 있자, 갈리아크가 눈을 번뜩였다.

    파쇄破碎.

    훼월이 단두대처럼 날아온다.

    드레이큰이 그 경로를 간파하고 기예를 흘려보냈다.

    직후 팔을 내뻗어 갈리아크의 머리를 노렸다. 스쳐 지나가는 검격에 볼이 베이며 피가 흘러내렸다.

    그때, 갈리아크가 허리를 비틀었다.

    전방을 휩쓴 도끼날이 쇄도한다. 카운터. 검을 비틀어 막아 낸 드레이큰이 튕겨져 나갔다.

    처음으로 느끼는 묵직한 손맛.

    갈리아크가 얼굴을 문질러 피를 닦아 냈다.

    “역시. 이제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는 걸 보니 체력이 없나 보구만?”

    “…….”

    드레이큰이 호흡을 조절했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마약 덕분에 신체 능력이 모험가 시절보다 강화되긴 했지만, 격전을 치른 적이 오래였기에 역으로 체력이 감소했다.

    심폐 능력이 부족하다. 암흑가에 안주한 탓이다.

    ‘저자의 경지가 내 아래임은 명백하다.’

    하지만 체력적인 면에서 도살자가 앞섰다.

    심지어 저만한 상처를 입고도 황소처럼 날뛰고 있으며 여전히 전의를 활활 불태우고 있다. 드레이큰의 예상을 훨씬 상회한 집념이었다.

    ‘더 끌면 위험하다.’

    드레이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스흐흡. 공기가 마찰음을 내며 폐부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일순간 전신에 활력이 돌아왔다.

    드레이큰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화아아악!

    송곳니를 드러낸 갈리아크가 훼월과 한손 도끼를 내던졌다. 붉은 기에 휩싸여 매섭게 허공을 가르는 흉기.

    교묘하게 시간 차를 두어 피하기가 애매했다.

    드레이큰이 기예를 펼쳤다.

    유속流速.

    굽이치는 검이 잔상을 그린다.

    갈리아크가 던진 무기의 궤도가 미세하게 틀어지며 비껴 나갔다. 지척에 도달한 드레이큰이 팔을 휘둘렀다.

    그 순간.

    도살자의 거구에 붉은빛이 감돌았다.

    요새要塞.

    과거 베르덴과 함께 통곡의 기사를 토벌한 이후 터득한, 신체 내구성을 강화시키는 새로운 기예.

    오른쪽 어깨를 들며 왼쪽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드레이큰의 일격이 어깨와 손바닥을 동시에 파고들었다. 목을 노렸던 일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당황한 드레이큰의 표정을 보며, 갈리아크가 웃었다.

    “이제 넌 뒈졌다.”

    “……!”

    드레이큰이 검을 빼내려고 했다.

    하나 그럴 수 없었다. 융기된 근육이 검날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뭐, 이런 무식한───’

    갈리아크가 팔을 움직였다.

    드레이큰의 멱살을 잡은 그가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이야아아아아아!”

    근력은 갈리아크가 우위. 벗어날 방법은 없다.

    ───콰아아앙!

    두 사람이 내곽의 성문에 처박혔다.

    “커억!”

    머리가 으깨질 것 같은 충격.

    이제 시작이라는 듯, 갈리아크가 주먹을 내질렀다. 근육이 파괴되고 뼈가 비틀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 와중에 드레이큰이 검을 뽑았다.

    필사적으로 휘둘렀지만, 그 일격을 갈리아크가 입으로 깨물어 막아 냈다. 칼날에 닿은 입술의 가장자리가 찢어졌다.

    그 얼굴은 광인, 그 자체였다.

    “이…… 런…… 미친……!”

    그걸 이제 알았냐?

    갈리아크가 검을 빼앗으며 상대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전신을 비틀며 옆으로 힘껏 내던졌다.

    엄청난 완력에 성벽의 일부가 붕괴했다.

    드레이큰의 몸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살아는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로아프라의 천장이 멍한 눈동자에 비쳤다.

    “아오, X나 빡세네.”

    갈리아크도 주저앉았다.

    출혈 탓에 몸이 나른했지만 기분은 아주 좋았다. 전직 미스릴 모험가를 상대로 이겼으니까.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드레이큰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네가 이겼지만…… 결과는 같다. 너는 괴물을 몰라……. 그 마법사는 암흑가의 왕을 이길 수 없다.”

    “처맞고도 그 소리네. 아까 네가 날 이긴다고 하지 않았냐?”

    “그건 범인이기에…….”

    “아까부터 범인, 범인. X발, 아가리부터 부숴 버렸어야 했나.”

    갈리아크가 피가 섞인 침을 뱉고는, 품에 감춰 둔 포션을 자신에게 들이부었다. 상처에서 격한 고통이 일었다.

    완치는 무리겠지만 대충 지혈제 역할 정도는 할 터.

    “드레이큰?”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렸다.

    로베르트와 가일.

    빈테르트의 경비 전체를 담당하는 수장, 드레이큰의 모습에 놀란 듯했다. 이어 두 사람의 시선이 갈리아크에게 향했다.

    “갈리아크?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몰라, 인마. 저 새끼한테 물어봐.”

    갈리아크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움직였다.

    묵직한 돌멩이를 단단히 틀어잡았다. 미치도록 피곤하긴 했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당할 생각은 없었다.

    “…….”

    로베르트가 상황을 주시했다.

    아직 그녀는 로아프라에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드레이큰도 만신창이고.’

    전말을 알아내려면 불청객인 갈리아크를 붙잡아야 한다.

    설마 그 혼자 로아프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로베르트가 턱짓했다.

    “가일, 저 남자를 생포…….”

    그때, 미증유의 힘이 느껴졌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향하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잿빛 왕성의 상층부가 붕괴되고 있었다.

    산산조각난 잔해 사이로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눈에 익숙한 실루엣.

    갈리아크를 제외한 세 사람이 당혹감에 빠졌다.

    “……폐하?”

    암흑가의 왕이 추락하고 있다.

    * * *

    콰아아아아앙!

    지면에 떨어진 그론드가 숨을 토했다.

    성 꼭대기에서 떨어진 충격은 별것 아니었지만, 성을 붕괴시킨 마법은 막대한 위력이었다. 인서드의 전신 갑주가 일부 손상될 정도로.

    그래도 그 덕분에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다.

    그론드가 마검을 지팡이 삼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고개를 들자, 상공에 떠 있는 베르덴과 눈을 마주쳤다.

    베르덴이 그론드의 갑주를 살폈다.

    ‘확실히 어지간한 마법으로는 뚫을 수 없겠군.’

    <대격변>에 휩쓸렸음에도 멀쩡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단순히 마법 폭격을 계속해서 퍼붓는다면 부술 수 있겠지만…… 마력은 차치하고 시간 낭비가 극심하겠지.

    ‘새로 얻은 ‘성신 마법’이 있긴 하지만…….’

    베르덴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초월자를 상대하기 위한 비장의 수단을 여기서 보일 생각은 없었다. 로아프라 전체에 영향을 끼치기도 할 테지만 그론드는 그 정도로 강력한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생각해 놓은 방법은 있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서 성을 부수고 무대를 바꾼 것이다.

    베르덴의 마안이 호수를 응시했다.

    슈화아아아악!

    거대한 물기둥들이 치솟으며 하나로 뭉친다. 그론드의 영역이 사라진 덕분에 이전보다도 편하게 마력이 움직였다.

    머리 위에 형성된 거대한 물의 창.

    밑바닥을 드러낸 호수에서 수많은 유골이 달싹거렸다.

    <원소화>

    선택한 것은 얼음 속성.

    오리엔트를 천천히 긋자 물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모조품인 혹한의 반지까지 극성으로 사용하여 위력을 강화했다.

    ‘마검 케덴스는 마력의 배열을 끊는다.’

    하지만 얼음과 같이, 보다 분명한 실체를 가진 마법을 단번에 부술 수는 없다. 그것이 마검이 가진 약점이었다.

    거대한 빙산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로아프라에서 살아가는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허공에 떠오른 호수가, 얼음의 창이 되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지켜봤다.

    이윽고 마법이 완성되었다.

    <글레시어스>

    단 한 명을 죽이기 위한 마법이 낙하한다.

    점차 가까워지는 압박감에 그론드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는 압도적인 크기였다.

    주먹을 쥔 그가 스스로에게 힘껏 소리쳤다.

    “웃기지 마라!”

    그론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저 거대한 얼음 또한 결국 마법에 불과하니까.

    격체는 아직 지속되고 있다.

    다리에 힘을 실은 그론드가 하늘로 솟구치며 못다 한 기술을 펼쳤다.

    절기, 소격消擊.

    콰아아아아앙!

    수 미터에 이르는 남색의 검기가 빙산과 맞부딪쳤다.

    그론드의 절기는 힘을 흐트러뜨리는 걸 넘어 완전히 분산시킨다. 또한 마법을 베는 마검까지 손에 쥐고 있다.

    “플로티드!”

    플로티드가 날아와 그론드의 등을 받쳤다.

    뒤에서 출력을 내어 밀려나지 않도록 힘이 되어 주고 있다.

    쩌저적.

    접전이 지속되던 중, <글레시어스>의 첨단이 무너졌다. 그를 기점으로 빙산의 한가운데에 거대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론드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보였다.

    베르덴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확실히 대단한 기술이군.’

    무지막지한 질량을 견뎌 내고 마법에 대항할 줄이야.

    저게 기를 깨우친 자들이 쓰는 절기라는 것인가. 작금의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끝끝내 얼음창이 양단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팽팽하게 당겨진 줄은 자그마한 균열에도 끊어지는 법.

    베르덴이 오리엔트를 당겼다.

    <글레시어스>를 이루는 데 대부분의 집중력을 할애하고 있지만, 1위계 마법을 사용할 정도의 역량은 남아 있다.

    <원소화>를 유지하면 다른 계열의 마법을 사용할 수 없지만, 단순히 마력을 방출하는 것은 가능하다.

    화아아악!

    베르덴이 오리엔트를 길게 뻗었다. 미약한 마력이 거대한 빙산에 힘을 더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완전한 균형이 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

    우드득.

    마검을 지탱하던 그론드의 손가락이 부러졌다.

    육체가 무게를 버티지 못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검기가 흩어져 사라졌고, 마검 케덴스는 까마득한 아래로 튕겨져 날아갔다.

    코앞에 서늘한 한기가 들이닥쳤다.

    그론드의 탁한 금빛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패배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랐다.

    “말도 안───”

    쿠웅.

    빙산이 그론드를 짓누르며 추락한다.

    잿빛 왕성의 내곽에 떨어진 마법.

    그 위력에 로아프라 전역이 크게 뒤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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