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241화 (241/366)
  • 241화 악몽 (2)

    에스티리아 왕국은 사계절이 뚜렷한 국가다.

    선선한 날씨와 알록달록하게 물든 숲은 편안했고 또 아름다웠다. 그런 나날도 저물어 가며, 날씨가 점점 서늘해지고 나뭇잎이 떨어진 나무는 앙상해지고 있다.

    가을은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왕국의 내전도 그와 같았다.

    “후, 후퇴! 후퇴해라!”

    1왕자의 군세가 몰려든다. 그로 인해 2왕자의 진영은 붕괴되었다.

    수적으로도 열세였지만, 이미 전부터 전의를 상실한 병사와 기사는 제 목숨 외에는 안중에 없었다.

    심지어 빈테르트에 의해 적지 않은 수의 지휘관이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을 정도로 은밀하게.

    머리를 크게 다쳤으니 팔다리가 제대로 움직일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그건 하늘도 마찬가지였다.

    콰앙! 콰아앙!

    공성 마법진에 의해 여러 비행정이 추락한다. 대부분 2왕자 진영의, 데본 공작이 지휘하는 선단이었다.

    이윽고 황망한 전장 속, 적들이 마법진을 뚫고 데본 공작이 있는 대규모 비행정에 침입하는 데 성공했다.

    “고, 공작 각하, 적들이 오고 있습니다. 어서 피신하셔야 합니다!”

    “…….”

    호위 기사의 말에 데본 공작은 침묵했다.

    그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뭐가 잘못된 걸까?

    왜 자신의 앞에서 나이젤이 독살당해 죽었을까?

    왜 자신은 나이젤의 호위를 깔끔하게 죽이지 않았을까?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머릿속에 노이즈가 낀 듯한 기분이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악몽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그때 누군가 속삭였다.

    ───파괴해

    아.

    데본 공작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갑작스레 검을 빼 든 그에게서 강렬한 투지가 느껴졌다.

    “지금 이 위기를 타파할 방도가 떠올랐노라.”

    “각하……?”

    “바로 이 비행정의 동력원을 과열시켜 파괴하는 것이다. 그럼 적들도 적잖은 피해를 입을 테지.”

    공작가의 기사들이 아연했다.

    저건 미치광이의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하면 이 비행정에 있는 공작가 일원들의 시체조차 찾지 못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데본 공작이 움직였다.

    “공작 각하, 아니 됩니다! 어서 각하를 막아! 어서!”

    기사들이 움직였지만 무리였다.

    데본 공작은 한때 왕국을 대표하는 기사이기도 했으니. 그 무력은 세월이 흘러 녹이 슬었음에도 예리함을 품고 있었다.

    데본 공작이 웃었다.

    “파괴해.”

    비행정 내부가 요동쳤다.

    들려오는 비명. 흩뿌려진 피가 어느새 동력실까지 닿았다.

    숨을 헐떡이는 데본 공작의 앞에, 비행정의 엔진 역할을 하고 있는 거대한 마석이 명멸하고 있다. 당연하다는 듯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마력의 파동이 하늘을 휩쓸었다.

    성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릴 정도의 충격에 상공이 뒤흔들렸다.

    그에 휘말린 비행정은 반파되어 추락했고, 후폭풍에 노출된 1왕자 진영의 대규모 비행정의 마법진 또한 일부 붕괴되었다.

    수많은 잔해는 비가 되어 대지에 떨어졌다.

    “…….”

    그 참상이 2왕자 로트닐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담겼다.

    도시의 가장 높은 성에 자리 잡은 그에겐 전장이 훤히 보였다. 이어 소란이 들려오는 지면으로 시선을 옮기자 거대한 성문이 들썩이고 있었다.

    쩌억! 쩌어억!

    마법 공성추가 마지막 성문을 파괴했다.

    도시의 시민들은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구석에 숨었다. 다행히도 전쟁이 아닌 내전이기에 약탈을 당하는 일은 없겠지.

    손버릇 나쁜 몇몇 사람들은 빈집을 털지도 모르겠지만.

    로트닐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다.

    “2왕자 전하, 이제 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로트닐의 어머니, 2왕비가 덜덜 떨었다.

    그녀는 사교계에서 모은 인맥을 동원해 로트닐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본래 왕비가 이런 일에 깊게 관여할 수는 없었으나, 현 에스티리아 왕이 왕위 계승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전이 패배로 끝났을 때의 결과 또한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로트닐이 입술을 짓씹었다.

    곧 결심을 내린 그가 2왕비를 데리고 3왕자 에버스에게 향했다. 분명 동생이 비행정 하나를 숨겨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기사들의 호위 아래, 거칠게 방문을 열었다.

    “뭐……?!”

    “꺄아아아악!”

    하지만 살아 있는 에버스는 없었다.

    그 대신 밧줄에 목을 매단 싸늘한 시체만이 있을 뿐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자살에 로트닐이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1왕자 발르그나가 도착했다.

    “끄아아아아아악!”

    1왕자의 기사에게 로트닐의 호위들이 참살당했다. 피로 얼룩진 복도를 짓밟은 발르그나가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에버스가 가장 먼저 시야에 비쳤다.

    “흠, 분수에 맞지 않게 탐욕스럽게 살더니, 갈 때는 검소하게 가는군. 그래도 제 형이 동생을 죽이지 않도록 했으니 기특하기도 해. 그렇지 않나?”

    발르그나가 천천히 고개를 앞으로 향했다.

    깜짝 놀라 주저앉은 2왕비. 눈을 동그랗게 뜬 로트닐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혀, 형님……!”

    “오랜만이구나, 로트닐. 너도 한편생 성욕에 미쳐 살아서 죽을 때도 여자를 끼고 갈 것 같더니, 지금은 가족과 함께 있을 줄이야. 확실히 마지막이 되면 사람이 달라지는 모양이야.”

    발르그나가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소름 끼칠 정도로 싸늘했다.

    로트닐이 당장 무릎을 꿇었다.

    “아, 앞으로 조용히 살겠습니다. 그러니 저하고 어머니를 부디 살려 주십시오, 발르그나 형님!”

    “조용히 살겠다?”

    “약속하겠습니다! 아니, 뭐든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 제발 목숨만은……!”

    “발르그나 전하, 저, 저희는 에스티리아 같은 왕가의 일원이 아닙니까? 그러니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필사적으로 목숨을 구걸한다.

    오만한 발르그나는 그것이 아주 기분이 좋았다. 감히 자신에게 반기를 든 자들을 굴복시키는 건 결코 멈출 수 없는 쾌락이었다.

    “뭐, 내전도 끝났으니 그러지 못할 건 또 없지.”

    “저, 정말입니까?!”

    “그래…… 그런데 말이야. 고민해 보니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군.”

    발르그나가 잔인하게 속삭였다.

    “2왕자와 2왕비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투신한다…… 그런 그림이 더 낫지 않을까? 그게 나나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더 좋을 것 같은데. 너희도 죽어서 명예를 챙길 수도 있겠고. 안 그런가?”

    삽시간에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발르그나 형님!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형님!”

    “저, 저는 왕비입니다! 그런데 왕자가 왕비를 죽이다니, 폐하께서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절규했지만 소용은 없었다.

    발르그나가 턱짓하자 기사들이 천천히 다가갔다. 공포에 질린 채 뒷걸음질 치던 로트닐과 2왕비가 창가에 다다랐다.

    세찬 바람이 이는 까마득한 절벽이 둘을 맞이했다.

    잠시 후.

    ───퍼억, 퍼억.

    성 밑에서 들려온 두 개의 파육음이 내전의 종료를 알렸다.

    * * *

    내전이 종결되자 환호성이 들려왔다.

    1왕자 진영의 인간들은 발르그나의 이름을 외치며 승리를 만끽했다. 그 광경을 로베르트가 멀리서 바라봤다.

    “드디어 지루한 왕위 계승전도 끝났네요.”

    빈테르트가 지지하는 1왕자 발르그나의 승리가 확정되었으나 로베르트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조용히 망원경을 접어 가일에게 넘겼다.

    “이로써 빈테르트가 양지로 나갈 기회를 거머쥘 수 있게 되었군요. 한데 로베르트 님은 그리 기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기쁠 게 뭐가 있나요. 진즉에 결말이 정해져 있던 조잡한 내전인데. 쓸데없이 왕국의 자원만 낭비된 꼴이라 아까울 뿐이죠.”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상정했다.

    다만 이렇게나 빨리 상황이 전개되리라는 건 예측하지 못했다. 노스램드 공작가의 나이젤이 데본 공작에 의해 실종, 아니 죽임을 당한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리고 데본 공작의 비행정이 폭발한 것과 3왕자 에버스가 자살한 것도 마찬가지.’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든다.

    평소 알고 있던 데본 공작 그리고 에버스 왕자라 하기에는 괴리감이 느껴졌다.

    로베르트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생각을 지워 냈다.

    어차피 다 끝난 일이다.

    데본 공작도 죽었고, 2왕자와 3왕자도 이 세상에 없다. 괜히 신경을 쓰는 건 불필요한 낭비에 불과했다.

    대신 다른 문제를 떠올렸다.

    “그보다 애셔의 확보는 어떻게 되었죠?”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아직도요? 아무리 종적을 감췄다고 해도 행방조차 모르다니. 그렇다고 해서 정보상 페르네나 갈리아크를 잡은 것도 아니고. 슬레이답지 않게 일 처리가 실망스럽네요.”

    “개입하시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레오닐의 인내심도 거의 한계에 다다른 것 같으니……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어요.”

    레오닐은 명실상부한 왕국 최강.

    전력을 갖춘 6위계 화염 마도사와 척을 져서는 안 된다. 그와 대적할 수 있는 건 암흑가의 왕뿐이니까.

    가능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자칫하면 암흑가 전체가 잿더미가 될 수도 있으니.

    “내전이 끝났으니 여기에 가용된 인력을 애셔의 수색으로 돌리는 게 좋겠죠. 먼저 가서 쉬고 있을 드레이큰에겐 미안하지만, 시급한 사안이니 그 또한 동원하고요.”

    “알겠습니다, 로베르트 님.”

    “그럼 서둘러 로아프라로 돌아가도록 하죠. 급하긴 하지만 폐하의 인가를 받는 게 먼저니.”

    로베르트와 가일이 암흑가로 향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지금 빈테르트가 누굴 적으로 삼았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 * *

    마탑을 벗어난 이후, 베르덴은 자신의 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여겼다.

    위계를 높이기 위해 끈임없이 마력회로를 단련했고, 전투 경험을 쌓기 위해 의뢰를 해결했으며 여러 적들과 마주해 승리했다.

    지금의 경지는 그렇게 쌓아 온 결실이다.

    두 번의 역천을 통해 육체는 극단을 넘어섰다.

    한 번 더 역천의 마법진을 발동하는 것도, 더 이상 마력회로의 확장을 통해 위계를 상승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

    다시 말해 완성을 이룩한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더 이상 자제하며 살아갈 필요는 없다.

    정신적 깨달음이라는 단계가 남아 있지만 준초월자에 도달한 지금, 세계에서 그에게 대적할 존재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

    관리자가 확언했고 베르덴 또한 그렇게 확신한다.

    화아아아악.

    베르덴이 속도를 감속했다.

    시선의 끝에 대도시 아우로플이 보인다. 까마득한 지하에 감춰져 있는 암흑가 로아프라가 이제 코앞이었다.

    베르덴이 성문으로 향했다.

    이젠 유자의 로브가 없이도 <투명화>를 써서 잠입할 수 있었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든 능히 압도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러던 그때였다.

    ───야! 애셔, 이 새끼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연스레 아래로 시선을 향했다.

    커다란 양손 도끼를 등에 얹은, 흉악한 인상의 거한이 한 손 도끼를 붕붕 휘두르고 있었다.

    “도살자?”

    백금 등급 모험가, 도살자 갈리아크.

    뜻하지 않은 재회였다.

    왜 저 미친 모험가가 여기에 있는 거지? 의문을 느낀 베르덴이 지상으로 낙하했다.

    갈리아크가 성큼 다가왔다.

    “X발, 여기로 오면 만날 줄 알았는데 진짜로 만났네? 이 재수 없는 새끼.”

    “날 찾은 건가? 왜…….”

    베르덴이 도중 말을 멈췄다.

    이제 보니 갈리아크의 모습이 그리 좋지 않다. 갑옷은 엉망이고 몸 곳곳에 상처도 있는 게, 마치 습격이라도 당한 행색이었다.

    누구한테 당한 걸까.

    베르덴은 순수하게 궁금했다.

    “꼴이 왜 그러지?

    “……허허허, 왜 이렇냐고?”

    헛웃음을 지은 갈리아크가 정색했다.

    “너 때문이잖아, 이 X새끼야.”

    * * *

    갈리아크는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암흑가에서 베르덴과 동행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이렇게 몇 번이고 습격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빈테르트 암살자, 빈테르트에게 고용받은 용병들, 뒷골목에 사는 쓰레기들까지. 습격자는 가지각색이었다.

    “죽이면 죽이는 대로 또 오지. 그것도 그냥 오는 게 아니라 사람 먹는 음식에다가 몰래 마비독을 처넣지 않나, 잠도 못 자게 야밤에 쳐들어오지 않나. 아니, X발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일을 겪어야 되냐고?”

    갈리아크가 가슴을 탕탕 두들겼다.

    어울리지 않게, 아주 억울해서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뭐, 그렇긴 하겠군.’

    설마 페르네만이 아니라 갈리아크까지 습격할 줄이야. 어지간히 특이 형질 보유자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본의는 아니었다.”

    “하, 안 본 사이 싸가지는 좀 챙겼나 보네? 뭐, 됐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딱 보니 암흑가에서 한바탕 할 작정인 것 같은데.”

    갈리아크가 베르덴을 훑어봤다.

    엄청나게 귀해 보이는 로브에다가 못 보던 스태프까지 들고 있다. 척 봐도 이전에 쓰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무구임이 분명했다.

    하나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이 자식, 대체 뭐지?’

    뭐라 표현하기 어렵지만…… 굳이 말하자면 존재감이 달라졌고나 할까.

    이전에는 마력을 느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주위를 조용히 압도하는 분위기가 서려 있다.

    뭔지는 몰라도, 큰 변화가 있었던 게 분명하리라.

    그때, 베르덴이 말했다.

    “본래 딱히 손을 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최근 빈테르트가 상당히 거슬리더군.”

    “그래서 없애려고? 그럼 암흑가 전체를 상대해야 할 텐데?”

    “애초에 그러려고 왔다.”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는 대답.

    갈리아크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애셔, 이 새끼. 생긴 것답지 않게 화끈한 건 여전하네.”

    “넌 어떻게 할 거지?”

    “당연히 동행해야지. 나도 그러려고 왔거든.”

    꺼지라고 해도 따라올 기세다.

    베르덴으로선 딱히 상관없었다.

    갈리아크라면 방해물은 되지 않을 테니까. 솔직히 말해 누가 동행하든 간에 결과는 같겠지만 말이다.

    “그럼 따라와라.”

    베르덴과 갈리아크.

    오랜만에 일행이 된 두 사람이 아우로플에 입성했다.

    동대륙 최대의 암흑가, 로아프라.

    그곳에 마도사에 의한 끔찍한 악몽이 시작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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