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계 찢는 천재마법사-238화 (238/366)

238화 밖으로 (1)

마력이 잦아들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베르덴이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봤다. 동부 늪지대에 있는 마도왕의 무덤, 아니 마도왕 시설로 향하는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공간 이동진을 썼을 때 사용했던 푸른 사파이어는 빛을 잃은 채 장치 위에 놓여 있다. 그 아래에는 방주의 마법사들이 썼던 것들이 굴러다녔고.

시설에 진입하기 전과 완전히 같은 광경이었다.

베르덴이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이전처럼 이정표가 되어 주었던 유물은 없으나 길을 헤매는 일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당시의 기억이 어제처럼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문을 지나 복도를 거닌다.

그렇게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자 활짝 열린 문이 나타났다. 마도국의 상징인, 지고한 팔각성이 새겨진 입구.

계단을 오르자 늪지대의 익숙한 향취가 코끝을 스쳤다. 이윽고 어둑어둑한 그림자가 베르덴의 위에 드리웠다.

탐색자들이 캠프는 미약한 흔적만을 남긴 채 사라져 있었다.

‘밖은 오랜만이군.’

낮임에도 햇빛이 거의 닿지 않는 동부 늪지대.

마도왕의 인공물은 그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다. 불길한 풍경과 썩은 식물의 악취가 베르덴을 환영했으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상쾌하다고 느껴졌다.

‘뭐, 시설에 오래 있었으니 당연한 건가.’

동부 늪지대에 찾아왔을 때가 여름.

지금은 기후로 보아 가을에 든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다. 비상시에 대비해 틈틈이 모아 두었던 식량은 시설에서 거의 소진된 상태.

바깥 공기를 오래 쐬지 못했으니, 최악의 늪지대라고 해도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형조작>

쿠구구구구.

대지가 솟아나 주변 일대를 감췄다.

여기까지 불청객이 올 가능성도 거의 없고 사피어어가 없는 이상 시설 내부에 침입하지도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남겨 둘 이유는 없었다.

베르덴이 단단히 토지를 다졌다.

부자연스럽긴 하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이 작은 언덕은 늪지대의 하나가 되어 환경의 일부가 될 테니.

작업을 마친 베르덴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드넓은 창공과 주위에 펼쳐진 늪지대를 아래로 두며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비행주파>

목적지는 도시 아세른. 방향은 남서쪽이다.

* * *

동부 늪지대의 하늘은 언제나 텅 비어 있다.

본능에 충실한 아인종과 이형종이 상시 눈에 불을 켜고 있기 때문이다. 참새든 마법사든 먹잇감으로 보인다면 어김없이 습격한다.

물론 사냥 시도가 가능한 경우라면 말이다.

화아아아악!

베르덴의 신형이 대기를 관통했다.

5위계의 <비행주파>를 웃도는 비행 속도. 그의 몸에는 황금빛의 둥근 테가 하나 떠올라 있었다.

‘이거…… 상상 이상이군.’

아인베르의 광환.

별다른 마법을 펼치지 않아도 자체적으로 공기 저항과 충격으로부터 베르덴을 보호했다.

그와 더해서 고작 하나밖에 생성되지 않았음에도, 빛이 가미된 그 속력은 예측치를 벗어났다. 늪지대의 사냥꾼들이 감히 쫓아올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

‘만약 광환이 세 개까지 중첩된다면 어떻게 될까.’

같은 수준으로 속력이 증가한다고 가정한다면…… 대략적으로 5일 거리를 하루가 채 안 되어 주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중에 크게 방향을 바꾸거나 할 수는 없지만 이동 시간을 예상보다 크게 단축할 수 있게 된 건, 베르덴에게 있어 좋을 뿐인 오산이었다.

잠시 후 속도가 기준치를 넘었다.

또다시 하나의 광환이 생겨나며, 총 두 개가 중첩된 것과 동시에 주위의 풍경이 더욱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심 청량감이 느껴질 정도로 시원스러운 귀환길이었다.

베르덴이 만족스럽다는 듯 아인베르를 어루만졌다.

금속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부드럽고 매끈한 촉감이 손끝에 감돌았다. 이렇게나 얇은 두께에도 그만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다니.

기본적인 상식과 상충되어 있지만 당연했다.

드래곤의 비늘과 가죽은 세상을 통틀어서 최상위 소재로 분류되어 있으니까. 특수한 성능과 별개로, 방어력은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에 너무 의존해서는 안 된다.’

드래곤의 소재는 상한선에 맞닿아 있다.

즉, 이미 그 자체로 한계점이기에 성능을 더 높이는 게 불가능했다. 성능을 유지한 채로 무언가를 제작하는 것도 무리였고.

그렇기에 드래곤과 관련된 아티팩트는, 제작 과정에서 소재의 성능을 일부 희생하여 특수한 기능을 탄생시킨다.

‘다시 말해 아인베르는 드래곤의 비늘과 가죽보다 방어력이 아래.’

전반적인 저항력은 매우 높으나, 로브 형태이기에 비교적 참격 내성이 약한 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으나 결코 무적이 될 수는 없다.

드래곤의 비늘에 손상을 줄 수 있는 존재 혹은 아티팩트라면, 아인베르는 베르덴을 지켜 줄 수 없을 테니.

이를테면 초월자와 같은…….

깊게 생각을 하던 베르덴이 문득 관리자를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소멸했겠지.’

한때 베르덴도 실험으로 몸이 망가져 시한부 인생을 살았었다.

그런 그였기에 죽음을 기다리는 기분은 이해하고 있었지만, 마도왕의 분신인 관리자는 어땠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은 미련 없이 떠나갔기를. 베르덴은 말없이 애도를 표했다.

“그나저나 동료라.”

지금까지 누군가와 여정을 함께하려 한 적은 없었다. 아니, 아예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다는 게 맞겠지.

다른 무엇보다 베르덴 자신의 강함을 우선시했으니. 마탑과 마탑주를 무너뜨리려면 그 또한 초월의 위에 올라야만 했으니까.

고독조차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현재 베르덴은 준초월자.

이제 정신적 깨달음만 얻으면 그토록 바라던 초월자가 된다. 하지만 그 벽을 넘어서는 건 아직 요원한 일이었다.

여태껏 걸어온 길이 잘못되지 않은 건 분명한데…… 그럼 방향이 틀린 게 아니라 무언가 부족하다는 걸까.

‘어쩌면 그게 동료일지도 모르겠어.’

솔직히 말해 그게 어떤 깨달음을 줄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고려해 볼 만은 했다. 초월과 별개로 확실히 보헤미른 마탑에 원한을 가진 자는 있었고, 함께한다면 베르덴의 복수에 큰 도움이 될 테니.

그들이 실제로 복수를 행할 마음이 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무엇이 됐든 베르덴은 관리자의 조언을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쇄애애애애액!

이윽고 세 개의 광원이 중첩되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늪지대의 외곽에 도착했다. 속도도 속도지만, 늪지대의 복잡한 지형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기에 가능했던 결과였다.

‘하루에서 이틀 정도면 아세른에 도착할 수 있겠군.’

생각하던 그때였다.

───콰아앙!

멀리서 폭음이 들려왔다.

정확히 베르덴과 겹치는 경로였다. 시선을 앞으로 향하자 검은 연기가 늪지대 사이에서 치솟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붉은 열기가 일었다. 확실히 인위적인 폭발이다.

‘누가 늪지대에서 아인종 토벌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린 베르덴이 한쪽 눈을 감았다.

<마력의 눈>

상공에 마력의 구체가 형성되었다.

절반의 시야가 소란의 진원지를 비췄다. 옷차림이 더러워진 사내가 필사적으로 달리며 다수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는 광경.

움직임을 보아 전문적인 솜씨였다.

‘왕국의 금지에서 추격전이라.’

의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동부 늪지대에서 저러는지. 이곳으로 숨어든 도망자나, 그를 쫓아온 추적자들이나 정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지간한 강자가 아니라면 제 발로 사지에 뛰어든 격이었으니까. 베르덴의 관점에서도 금지의 환경 자체는 아주 열악…….

잠깐.

베르덴이 도망자를 자세히 살폈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페르네의 정보원?’

이름은 게드슨.

아세른에서 활동하는 페르네의 정보원이다. 그녀의 주점에서 베르덴과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왜 쫓기고 있는 거지? 더군다나 동부 늪지대에서?

고민은 찰나였다.

즉시 판단을 내린 베르덴이 아인베르를 기동했다. 세 개의 광환이 맹렬히 회전하자 전신이 황금빛에 물들었다.

<순광>

아인베르의 공간 이동.

빛과 함께 베르덴의 모습이 일시에 사라졌다.

* * *

게드슨을 비롯한 몇몇 정보원들은 페르네의 명령을 받아 동부 늪지대 근처로 향했다.

작디작은 안전 가옥에서 빈테르트의 추적을 피함과 동시에 잿빛 머리의 마법사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물론 후자가 이뤄질 가망은 별로 없었다.

그가 언제 늪지대에서 나올지도 알 수 없었으니까.

모르는 사이에 비행을 통해 지나칠 가능성도 매우 높았고. 그래도 손 놓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정보원들은 각자 구역을 나누어 늪지대 부근을 감시했다.

기약 없는 나날. 지루했지만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 악명 높은 빈테르트의 암살자들에게 추적당할 일은 없게 되었으니까. 흔적은 확실하게 지웠다.

‘그랬었는데!’

늪지대를 내달린 게드슨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흉흉한 살기를 내뿜고 있는 암살자들이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왜 이렇게 됐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갑자기 놈들이 나타났다는 건 이해했는데, 어떤 이유로 늪지대에 왔는지를 모르겠다.

한낱 정보원을 잡자고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텐데.

‘좆됐다. 진짜로 좆됐다.’

게드슨이 식은땀을 폭포수처럼 흘렸다.

늪지대의 지형 탓에 체력도 바닥이고, 연막탄이나 폭발탄 같은 소모품도 죄다 소진되었다. 이대로 가다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늪지대에서 괴물 하나만 나와도 끝장이었다.

살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죽는 건가? 게드슨은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화아아아악!

그러던 순간, 그의 앞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뭐, 뭐야?!”

난데없이 나타난 빛의 기둥. 게드슨이 얼굴을 가리고 주춤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건 암살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광휘 속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취를 감춘 빛.

겨우 고개를 든 게드슨이 곧 눈을 부릅떴다.

“애, 애셔 님!”

감히 손을 댈 엄두도 나지 않는, 찬란한 로브를 두른 잿빛 머리의 사내. 처음 보는 복장이었지만 그 얼굴과 분위기는 여전했다.

“저자가 애셔라고?”

“듣던 대로의 얼굴이다. 여기서 마주치다니 운이 좋군.”

암살자들이 횡재했다는 듯 칼자루를 쥐었다.

여기서 그를 확보해 로아프라로 전달한다면 크나큰 공훈이었다. 포상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두둑하겠지.

탐욕과 살기가 얽힌다.

그를 보던 베르덴이 게드슨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할 말이 많다.

하나 느긋하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게드슨이 곧장 사건을 요약했다.

“빈테르트에서 애셔 님을 추적하고 있고, 그로 인해 페르네 님이 위급, 그래서 칼리아 님에게 구원을 요청한 상황입니다!”

“나를? 이유는.”

“그, 그게 도통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라.

그럼 장본인들에게 물어봐야겠지.

“빈테르트에서 왜 나를 쫓고 있는 거지?”

“그건 암흑가의 왕께서만 아시는 일. 네놈은 그냥 순순히 잡히면 된다. 관절이 잘린 채로 끌려 다니기 싫다면.”

암살자들이 키득거렸다.

같잖은 협박. 베르덴이 말없이 한 발짝 나섰다. 그러자 암살자들이 기민하게 나뉘며 전방위에서 그를 둘러쌌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라. 이쪽은 전격 내성을 높이는 매직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으니. 아무리 네놈이 특이 형질이라고 한들 4위계 전격 마법사가 우리 전부를───”

파지지지직!

순간 베르덴을 기점으로 전격의 파동이 주위를 휩쓸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터라 제대로 반응조차 하기 어려웠다. 이렇다 할 고통도 없었다.

암살자들이 자신의 몸에 맺힌 정전기를 바라봤다.

“이게 뭔……?”

<균열의 연청>

내부에서 뇌격이 폭발했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없애 버리는 전격에는 내성이고 뭐고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이것이 6위계 전격 마법의 파괴력.

‘그동안 에스퍼렌사 후작에게서 의뢰만 받아서 그런가.’

도대체 언제 적 4위계를 들먹이는 건지.

확실히 기밀이 중요한 의뢰들만 한 탓인지, 베르덴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갱신되지 않은 지 오래인 모양이었다.

‘그보다 특이 형질이라고 했었지.’

베르덴은 특이 형질이 아니다.

그런데 빈테르테에서 파견된 암살자들은 확신을 품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해답은 곧바로 나왔다.

‘설마 레오닐?’

비밀 사교장을 통해 잠입한 1왕자의 성.

그곳에 감춰진 실험실에서, 카란스를 해부하려던 마법사 드레뷔스가 말했었다.

───1왕자 전하와 빈테르트를 말하는 거다. 둘은 오래전부터 특이 형질 보유자를 납치해 폐하께 보내 왔지. 그럴 때마다 폐하께서는 상을 내리셨고…… 뭘 받았는지는 나야 모르겠지만.

‘아직 그 정체 모를 실험이 끝난 게 아니었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빈테르트에서 이렇게까지 대대적으로 움직인 걸 보면. 어째서 자신을 특이 형질이라고 착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베르덴이 미간을 좁혔다.

인체 실험을 벌인 레오닐은 몰라도, 빈테르트까지 어떻게 할 생각은 딱히 없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저쪽에서 먼저 신경을 건드렸으니…….

“지워 버릴까.”

“예, 예?”

“혼잣말이다. 그래서 페르네는 어디에 있지?”

게드슨이 다급하게 지도를 꺼냈다.

눈앞에서 빈테르트의 암살자들이 마법 한 방에 몰살당한 걸 목격한 그였다. 그 장본인이 자신의 편이라는 것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무서웠다.

“카, 칼리아 님께서 비행정을 타고 움직이셨다면 이미 페르네 님과 그 일행분을 태우셨을 겁니다. 그럼 아마…….”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도 한 곳을 짚었다.

“여기. 이 부근일 겁니다. 가장 안전한 라인즈로 향하시려는 거겠죠.”

그리 멀지는 않다.

방향은 남쪽. 거리는 오히려 아세른보다도 가까웠다.

“그런가. 알려 줘서 고맙군.”

“아, 아닙니다. 저야말로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근처에 숨을 곳은 있나?”

“아, 넵. 여기서 동남쪽으로 가면…… 우왁?!”

베르덴은 게드슨이 서 있는 지면을 일부 분리해 허공에 띄웠다.

그러고는 마력의 보호막을 둘렀다. 속도에 버티지 못하고 날아가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게드슨의 낯빛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애, 애셔 님?”

“안내해라. 거기까지 데려다줄 테니.”

이대로 늪지대에 두고 갈 수는 없다.

바깥이 가깝긴 하나, 지친 게드슨이라면 괴물에게 습격당해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베르덴이 게드슨과 함께 하늘 높이 떠올랐다.

직후 고속 비행이 이어졌다.

“어? 이, 이거 속도가 왜…… 자, 잠깐! 잠깐만요, 애셔 님! 너무 빠릅니다! 빠르다고요! 그냥 걸어서 갈 테니 제발 내려가───”

갸아아아아아아악!

정보원 게드슨.

그의 처절한 비명 소리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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