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마도 (2)
그가 눈을 떴다.
감각이 흐릿하다. 멍한 시선에 새까만 어둠이 비쳤다. 고개를 내리자, 심연의 중심에 새하얀 육체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 어둠이 만연한 공간에는 오직 그만이 유일했다.
의식이 점점 선명해진다.
안개가 낀 머릿속에 의문이 생겨났다.
자신은 누구인가. 이름도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까지 무엇을 해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기억이 지워진 것처럼 깨끗하다.
대체 이곳은 어디이길래 망각을 초래하는가.
그러던 순간, 눈앞에 길이 펼쳐졌다.
넓고 긴, 벼락이 내리치는 외길이다.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여 그것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살펴봤다. 외길의 끝은 거대한 산맥 꼭대기로 이어져 있었다.
뇌운이 자욱하게 낀 터라 정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했다. 베르덴. 스스로를 인지함과 동시에 새하얗던 몸에 색이 돌아왔다.
그리고 두 번째 발걸음.
왼발을 디디자 일생이 펼쳐졌다. 무엇을 하고자 했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점차 상기되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수록 그 기억과 감정은 뚜렷해졌다.
어느새 베르덴이 길의 입구에 다가섰다.
여기까지 오면서 자연스레 외길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었다.
‘번개의 마도.’
벼락으로 점철된 이 앞을 걷는다면 베르덴은 마법사의 틀을 벗어나게 된다. 마도사. 그 강력한 힘은 당장의 시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미처 걸을 수 없었다.
옆으로 향한 시선에는 다른 마도가 펼쳐져 있다. 화염으로 이루진 길. 그것만이 아니었다. 각 마법 계열로 이루어진 마도가 베르덴을 둘러싸고 있었다.
원소 계열만이 아니라 부여 계열, 정신 계열이 보인다. 심지어 흑마법으로 보이는 것까지 존재했다.
무수한 마도였다.
개척되지 않은 길이 보인다. 아마 누구도 걷지 않은 길일 것이다.
반면에 잘 정돈된 길도 있었다. 분명 누군가 걸었던 길일 것이다. 개중에는 누군가 걷게 될 길도 있었다.
시간대가 엉켜 있다.
난잡한 혼돈 속에서 베르덴은 제자리를 지켰다.
주위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놓인 셀 수 없이 많은 선택지를 바라봤다.
이 수많은 마도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베르덴은 그토록 바라 마지않았던 마도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았다.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중심이니까.’
무엇도 될 수 있고, 무엇도 이룰 수 있다.
한때 그를 가두었던 틀은 부서진 지 오래였다. 직접 손에 쥔 육체는 그야말로 가능성의 집합체였다.
조심스레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심연의 하늘이 갈라지며 정적이 깨졌다.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빛이 내리쬐었고 사방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균형을 잃는다.
그럼에도 베르덴은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그저 차분했다.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알게 되었다.
두려움은 없었다. 잘못된 방향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길은 지금까지 베르덴이 걸어왔던 길이기도 했으니까.
부상하는 의식 속, 육체를 재구성할 때 바랐던 소망이 떠오른다.
한계에 얽매이지 않는 무한한 가능성.
마도 <무한無限>.
* * *
쿠구구구구구!
시설의 지축이 뒤흔들린다.
거대한 마력의 폭풍이 휘몰아치며 흐름을 위압했다. 강력한 격류였다. 봉인진을 부순 관리자조차 저항하기 어려운 힘이었다.
뒤로 밀려난 그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무언가 벌어졌다는 건 알고 있다.
아마 그가 숨겨 놓은 비장의 수단 중 하나일 터.
그런데 이건 예측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미증유의 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급작스러웠다. 무엇보다 초월자에게조차 영향을 끼칠 정도의 마력량이라니.
관리자가 마도왕의 관점에서 현상을 해석했다.
‘설마 그 순간에 마도를 개척한 것인가?’
아니, 그건 아닐 터다.
그러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도 달랐다. 아무리 개개인마다 마도사가 될 때의 반응이 다르다고 하나 규격 외의 변화였다.
이건…… 마치 초월자의 각성과 비슷했다.
‘6위계에도 이르지 못했던 마법사가 초월자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리가……!’
그때였다.
무차별적으로 날뛰던 마력이 갑자기 가라앉았다.
기류가 고요해졌다. 그 중심에 베르덴이 있었다.
여전히 그의 몸 상태는 처절했지만 벽안만큼은 이전보다도 강인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강대한 존재감이다.
그 사실에 관리자가 작게 경악을 터뜨렸다.
“초월자……!”
불완전하다.
하나 그것 또한 초월이다.
베르덴이 오른손으로 왼쪽 어깻죽지를 붙잡았다.
콰드드득! 걸리적거리는 유자의 로브와 마법사의 회한을 거칠게 뜯어냈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드러난 상반신.
팔, 어깨, 가슴, 복부 그리고 다리로 이어진, 역천의 마법진. 칼로 새겼음이 분명한 흉터에는 푸른 마력이 빛을 발하며 흐르고 있었다.
관리자가 본능적으로 그 마법진을 분석했다.
마도왕의 지식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미지의 구조. 하나 대략적으로 어떤 것인지 이해했다.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육체를 강제로 변화시키는 마법진…… 그대는 마법계의 금기를 범했군. 그 힘은 마법사로서 파멸을 앞당길 터. 젊은 마법사여, 그렇게 해서 이기고자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건가? 마법진의 지속 시간이 끝나는 순간 마력회로가 완전히 파괴될 텐데.”
“저는 다릅니다.”
“어떻게 장담하는가.”
“지금 이곳에 서 있으니까.”
마력회로 파괴, 수명을 비롯한 영구적인 신체 손상.
그러한 역천, 개신의 부작용은 지금의 베르덴에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었다. 과거에 재구성한 육체가 지금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한계를 벗어났으니.
‘하지만 제한 시간은 있다.’
역천의 지속 시간은 10분.
10분 뒤에는 불완전한 초월자의 격을 잃어버린다. 당장 해금된 심장의 마력도 다시 봉인되며 마력이 전부 바닥날 터.
그 안에 결착을 내야 한다.
오리엔트를 회수했다.
마력회로를 전력으로 활성화하며 마도를 발동했다.
무한. 형용할 수 없는 전능감이 느껴진다.
마치 마탑의 동력원과 연결되었을 때의 압도적인 힘이었다.
“……내가 그대를 대범하다고 했었지.”
“그러셨습니다.”
“정정하겠다. 그대는 내 본체와 마찬가지로 미친 자다.”
관리자가 처음으로 자세를 잡았다.
눈앞의 도전자를 동급의 존재라고 판단한 것이다.
침묵의 긴장감.
신호는 필요 없었다.
마법이 부딪치며 빛이 확산된다.
그를 중심으로 두 초월자가 움직였다.
마법전의 끝을 향해서.
* * *
원소와 원소가 충돌한다.
대도시를 붕괴시킬 정도의 충격이 대기를 진동시켰다. 그러한 격전 속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베르덴이었다.
얼음의 장벽을 펼쳐 일격을 막아 낸 관리자가 뒤로 물러났다.
‘참으로 위험한 마도로다.’
베르덴이 스태프를 휘둘렀다.
그러자 진홍의 화염이 수백 개의 화살로 화해 쏟아졌다. 허공에서는 네 개의 벼락이 쏟아졌고 뒤에서는 중력의 칼날이 날아왔다.
위계에 속한 마법이 아니다.
심상에 의해 변화된 마력이 곧 마법으로 발현된 것이다. 다시 말해 베르덴 스스로가 마법의 의지 자체가 되어 버린 격.
게다가 마안까지 극성으로 활용하고 있다.
위계라는 틀마저 부순 마법 체계, 무한.
그것이 베르덴이 개척한 마도의 정체였다.
콰앙! 콰아앙!
보호막이 비명을 지른다.
대응조차 허락하지 않는 위력과 속도다. 관리자가 고위계 마법을 연산할 시간을, 베르덴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력을 풀었다.
혹한의 냉기가 폐부를 꿰뚫었다.
“크으윽……!”
순간 마력이 흔들렸지만 버텨 내며 시간을 벌었다.
무수한 번개가 무차별적으로 날뛴다.
그 틈을 노린 관리자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원거리에서의 불리함을 인정하고 근거리로 무대를 바꾸기 위함이었다.
서로의 스태프가 교차한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각자의 기술을 선보였다. 이윽고 오리엔트를 엮어 낸 관리자가 오른손을 길게 뻗었다.
<아케인: 임팩트>
그때, 베르덴 또한 손을 마주했다.
콰아아아아앙!
막대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관리자가 스태프로 바닥을 내리찍어 속도를 죽였다. 고개를 든 그의 청금색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어떻게 그대가 <아케인>을……!”
수준이 부족하지만 분명 마도왕의 기술이었다.
모방이라니. 그 복잡한 마력 운용의 편린을 꿰뚫어 봤다는 것인가.
‘마도가 원소 마법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눈앞의 젊은 마법사가 개척한 마도는 마도왕의 것에 필적한다.
멀리서 베르덴이 울컥 피를 토했다.
잠시 휘청거렸지만 역천은 유지되고 있다. 수정체가 터져 버릴 것 같은 고통을 인내하며 마안을 발동했다.
쿼드라 캐스팅.
6위계 이상 마도사의 전유물. 기존 마법의 수십 배에 달하는 마력을 소모하는 최상위 기술.
그 위력은 그야말로 필살이다.
합성되는 네 개의 마법.
삼원색의 중심과 무한의 마도가 더해져 하나의 마법을 창조한다.
<카오스Chaos>
암자색의 구체가 쇄도했다.
즉시 관리자가 후방으로 자리를 박차며 날아올랐다. 그 순간 부풀던 구체가 폭발하며 다양한 속성 마법을 상대를 향해 쏘아 냈다.
“……!”
이 숫자, 위험하다.
보호막으로는 막을 수가 없다.
<왜곡>
7위계 공간 마법.
마력 소모량을 도외시하고 즉각적으로 공간을 비틀었다.
방향을 상실한 마법들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 부딪쳤다.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난 관리자가 고도를 낮췄다.
회색 왕좌의 앞.
처음의 자리로 돌아온 관리자가 지친 기색을 보였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존재감. 마력 또한 얼마 남지 않았다.
“허억, 허억…….”
지친 건 베르덴도 마찬가지.
숨이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가늘었고, 그 강인한 정신력으로도 의식을 선명하게 유지하기 어려웠다.
또한 역천이 끝나기까지 고작 2분.
둘은 직감했다.
다음의 공방이 마지막이라고.
“……여기까지 오게 되다니. 그대의 도전을 만용이라 여긴 것이 참으로 부끄럽군. 그대는 이미 자격을 갖췄는데.”
“…….”
“그러니 젊은 마법사여, 끝까지 전력에 전력을 다하라. 살아남을 수 있도록.”
관리자의 마력이 뒤엉컸다.
청색과 금색이 맞물리며 녹색의 마력이 생겨났다. 그의 눈동자 또한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마도왕의 마도 <근원根源>.
극단을 넘어선 영역에는 원소의 근원이자 시초가 있다.
관리자의 마력이 일점에 집중되었다.
촛불처럼 피어오르는 백색의 불꽃이 세상에 현현했다.
책에서 접한 적이 있다.
정체를 알아챈 베르덴의 사고가 가속에 가속을 더했다.
화염, 물, 얼음, 바람, 중력, 번개, 대지.
머릿속에 베르덴이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원소 마법들이 나열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답은 없었다.
‘저 화염 앞에 내 마법은 무위로 돌아간다.’
대적하려면 초위 마법이 필요하지만 쓸 수 없다.
베르덴은 현재 완연한 초월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즉, 마력만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아케인: 마력 융합>
오리엔트에 남은 마력을 전부 집중시켰다.
그 안에 <아케인>을 모방하며 얻어 낸 마력 운용법을 일부 접목했다.
준비는 끝났다.
마침내 승부수가 던져졌다.
초위 마법.
<엘 레비오El Rebio>
태초의 불꽃이 다가온다.
그와 동시에 베르덴이 스태프를 내뻗었다. 순수한 마력의 격류가 굽이치며 공간에 한 획을 그었다.
콰과과과과과!
마법과 마력이 대립한다.
인지를 초월한 위력에 맞닿은 공간이 일그러졌다. 그 여파에 지금까지 버티던 관리자실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접전을 이루는 듯했으나 곧 균형이 기울어졌다.
“……!……!!”
베르덴이 밀렸다.
악착같이 버텨 보려 했지만 무리였다. 형용할 수 없는 무게감에 발을 디딘 바닥이 갈라졌다.
부담이 가중된 상처에서 더한 격통이 발생했다. 의식이 끊어졌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관리자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죽이고 싶지 않다.’
살아남는다면 언젠가 마도왕에 버금, 아니 그 이상 가는 마도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존재를 미처 환히 피어나기도 전에 꺾어 버리는 건 싫었다.
하지만 저항할 수 없었다.
그의 바람보다도 관리자의 사명이 우선이니. 마도왕의 인격에 호소해 본들 침입자를 살려 준다는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세상이 백색으로 타오른다.
그에 대항하던 마력의 광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태초의 화염이 서서히 도전자에게 가까워졌다.
베르덴의 눈은 어느새 초점을 잃었다.
의식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마력을 유지하고 있다. 마도왕의 인격조차 경악스러워할 의지이자 집념이었다.
대체 그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길래 견디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의미는 없다.
이대로 가면 죽는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니.
그러던 그때였다.
화아아아아악!
베르덴에게 미지의 변화가 일었다.
순수한 푸른색을 띠고 있는 마력이 칠흑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진홍의 테두리가 그를 명확하게 현현시켰다.
이 위압감.
“저건 대체…….”
마도왕의 지식에도 없다.
베르덴에게 시선을 향했지만 그는 여전히 의식을 상실한 상태. 저건 무의식의 발로였다.
마치 파멸(破滅)이란 단어를 연상케 하는 검붉은 마력.
그것이 태초의 불꽃과 닿았다. 이질적인 힘과 백색의 화염이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었고, 끝끝내 완전히 뒤섞이며 강대한 역장을 형성했다.
────!
번쩍이는 회색의 섬광.
파멸의 파동이 관리자실 전체를 집어삼켰다.
* * *
……정적이 흘렀다.
후폭풍에 의해 관리자실을 비추던 빛이 대부분 사라졌다. 미약한 어둠이 폐허에 드리웠다.
부서진 회색 왕좌.
태반이 붕괴된 계단의 틈새에서 관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가 중심을 잃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백색의 스태프가 버팀목이 되었다.
“……하, 대단하다 못해 위대할 지경이로군.”
태초의 불꽃이 사라졌다.
관리자가 7위계의 경계선에 있는 한낱 분신이라고 해도 엄연히 마도왕의 초위 마법이거늘. 이는 업적이라 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발밑에 있는 잔해들을 바라봤다.
관리자실은 마도왕의 마력으로 보호되고 있었음에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직전의 마법전에서 얼마나 강력한 힘이 발생했는지 실감이 났다.
그 마력은 대체 무엇이었던 걸까.
관리자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든 그가 베르덴을 찾기 위해 시선을 움직였다. 관리자의 반대편에 있는 거대한 문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앞에 잔해의 더미가 쌓여 있었다. 갈라진 천장에서 떨어진 것이리라.
“…….”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스태프.
젊은 마법사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관리자의 얼굴이 단단히 굳었다.
설마.
“죽은 건가?”
후두둑!
베르덴이 잔해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