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분기점 (2)
혹자는 말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끝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과거, 현재, 미래.
무슨 생각을 갖든, 어떤 행동을 하든 간에 부여받은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주체자로서 판단하고 선택을 내렸다고 느끼는 건 필멸자의 착각일 뿐.
거지가 될 운명이면 거지가 될 것이고.
부자가 될 운명이면 부자가 될 것이다.
살 운명이면, 죽고 싶어도 살 것이고.
죽을 운명이면, 살고 싶어도 죽을 것이다.
그것이 운명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족쇄다. 인간, 엘프, 드워프, 초월자, 드래곤. 뭐든 예외는 없다.
누구나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려 있다.
꼭두각시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그 생각조차 운명에 불과하다. 그저 결정된 길을 따라 움직이며 나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운명을 다루는 건 누군가.
분명 신, 바로 하늘일 것이다.
언제나 모든 것의 머리 위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런 그들에게 선택받은 재능을 천재(天才)라고 극찬한다.
베르덴은 반쪽짜리 천재였다.
타인에게 착취당하기 좋은 천재이며 약자였다.
당시에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평범했다면 적어도 인간으로서는 살아갈 수 있었을 테니까. 어쩌면 이렇게 고통받다가 죽는 게 자신의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절망했다.
한때는 그랬었다.
하지만 현재를 보라.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끝내 실을 끊어 냈다.
의지를 하늘에 맡긴 운명론자라면 그것조차도 운명이라고 부르짖겠지만 글쎄.
역천을 이루었을 때 베르덴은 직감했다.
비로소 사고와 행동, 의지가 오롯이 자신의 것이 되었다고. 더 이상 이용당하기만 했던 약자는 없다.
선택과 결과.
베르덴은 스스로의 지배자다.
“감히, 도전하겠습니다.”
“후회할 짓을.”
쿠우웅!
마력과 마력이 충돌한다.
막강한 존재감이 드리웠지만 베르덴을 무릎 꿇리지 못했다. 초월자의 격은 더 이상 그의 족쇄가 될 수 없었다.
관리자가 눈가를 씰룩였다.
베르덴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크리메이트>
오리엔트로부터 마법이 방출되었다.
파괴의 열선이 왕좌를 향해 쇄도했고 붉은 폭발이 관리자를 집어삼켰다. 이전보다도 훨씬 강해진 위력.
베르덴은 그치지 않고 연속해서 화염 계열의 마법을 연산했다.
콰아앙! 콰아아아앙!
폭음이 고막을 진동시킨다.
섬광이 번쩍이더니 불길이 치솟아 공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오리엔트의 성능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가차 없이 화염 마법을 선보였다.
아지랑이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스태프를 높이 들었다.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모여든 불길이 하나둘씩 겹쳐지며 수십 개의 창을 형성했다.
초열의 비.
<라그나크>
불지옥이 왕좌에 떨어진다.
열기가 멀리 떨어진 베르덴의 피부에 쬐었다. 만약 베르덴이 타운(Town)급의 마을에서 마법을 난사했다면 초토화가 되었을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베르덴이 숨을 돌렸다.
마력회로를 잠시 가라앉히고 있자 폭풍이 일었다.
“제법이군.”
열기가 사라진 자리, 관리자가 고고히 서 있다.
관리자실 또한 다른 시설보다 내구성이 강화된 것인지 마법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모양. 회색의 왕좌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5위계 상위에 불과한 자가, 다른 마법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연산 속도로 자신이 가진 단점을 상쇄하다니. 위계를 뛰어넘는 뛰어난 재능, 가진 건 그 비정상적인 마력량만이 아니라는 건가. 과연 그대는 다르구나.”
“감사합니다.”
칭찬이었지만 베르덴은 웃지 않았다.
결국 관리자에게 상처 하나는커녕 한 발자국조차 움직이게 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그 사실에 놀라거나 할 이유는 없었다.
예상한 결과였다.
7위계의 초월자.
그것도 마도왕의 분신이 이 정도에 피해를 입었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거다. 베르덴은 아직 비장의 수단 중 하나도 내보이지 않았다.
관리자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수준으로는 초월자에게는 결코 범접할 수 없다. 고작 이 정도로 마도왕의 분신인 내게 도전할 만큼 그대가 아둔하지는 않을 터. 그러니───”
쿵.
백색의 스태프가 바닥을 짚었다.
관리자실이 진동하며 낮게 울부짖었다. 관리자의 눈동자에 들어차는 마력. 마도왕의 혈통이 가진 특유의 청금색 안광이 번뜩였다.
“젊은 마법사여, 충고하건대 그대가 가진 특별함, 그 전부를 보여라. 조금이라도 삶을 연명하고 싶다면.”
마법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관리자에 의해 알파는 시설의 끝자락으로 보내졌다.
무언가 이변이 발생했음을 감지한 외눈 골렘은 작은 다리로 복도를 내달렸다.
마력이 돌아온 덕분에 시설이 훤해졌다.
잠들어 있던 연구 골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총괄 책임자로서 관리 및 감독을 맡아야 하나 당장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최우선 순위는 언제나 마도왕 폐하였으니까.
상황실로 들어간 알파가 장치를 조작했다.
각 시설의 천장에 설치되어 있는 골렘의 머리가 움직였고, 그들이 보고 있는 화면이 허공에 떠올랐다.
동력원이 복구되었기에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이었다.
알파의 눈에 관리자실이 비쳤다.
관리자와 베르덴.
각자의 파괴 마법이 서로를 겨냥하고 있다.
빛이 번쩍이며 진동이 일었다. 어찌나 충격이 큰지 영상이 흔들릴 정도였다.
[이상 상태 발생. 관리자가 마도왕 폐하를 공격. 시각적으로 보이는 위력으로 판단한바 살해 의도가 다분합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다.
[관리자는 마도왕 폐하의 분신. 마도왕 폐하를 적대하는 건 있을 수 없음. 원인 계산 중…… 확인 불가. 해결 방안 모색 중…….]
알파의 눈이 연신 깜빡였다.
아무리 계산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건 상정되지 않은 변수였다. 언제나 변수로 상황을 판단해 온 알파로선 어찌할 수가 없었다.
[삐빅…… 해결 불가.]
결론은 내려졌다.
알파가 계산을 멈추고 다시 영상을 바라봤다.
마법전은 이미 격전에 가까웠다.
관리자는 왕좌 앞에 서서 마법을 방어함과 동시에 반격을 가했고, 베르덴은 스치지도 않겠다는 듯 회피 기동을 펼쳤다.
사람들이 본다면 아름답다고 느꼈을 것이다.
마법사가 본다면 경외감과 질투심을 느꼈을 테고.
초월자가 본다면 순수하게 놀랐을 것이다. 6위계의 벽도 돌파하지 못한 마법사 따위가 초월자를 상대로 나름 저항이란 걸 한다는 사실에 말이다.
[삐빅.]
베르덴이 마법에 적중당했다.
자동 강화 마력 방벽이 박살 났다. 벽에 부딪힌 그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마력의 창이 베르덴을 추적했다.
[삐빅.]
베르덴이 오리엔트를 휘둘러 마법을 파괴했다.
그러자 수십 개의 마력 화살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재빨리 <선풍의 장막>을 둘렀지만 화살 두 개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마법사의 회한에 흠집이 생겼다.
[삐빅.]
저울이 기울고 있다.
아직 이렇다 할 부상은 없었지만 조금씩 베르덴이 밀리고 있다. 지금껏 막대한 화력을 자랑했던 원소 마법은 관리자에게 닿지 않았다.
[마도왕 폐하.]
어째서 마도왕이 자신의 분신에게 밀리는가.
보통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의문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베르덴이 진짜 마도왕이 아닐 가능성을 생각하겠지.
다만 알파는 달랐다.
이 작은 골렘은 창조주가 최우선이다. 이건 본래 설정되지 않은, 알파가 정한 스스로의 규칙이었다.
[마도왕 폐하가 위험.]
멈췄던 계산을 다시 이어 나간다. 전혀 가 본 적 없는 생각의 영역으로. 이게 가능한 이유는 알파가 특별한 골렘이기 때문이었다.
자율 사고. 마도왕으로부터 기억을 부여받은 건 관리자만이 아니다.
개체명 알파.
창조된 이래 처음으로 스스로 판단했다.
[판단. 마도왕 폐하 구출. 유일한 해결책. 마도왕 폐하의 시설 탈출. 탈출까지 필요한 시간 9분 32초. 문제 요소 2건. 관리자 및 관리자실 문. 시설 골렘만으로는 문제 요소 배제 불가능합니다.]
알파의 시선이 2차 동력실로 향했다.
영상 중간에서 소형 동력원이 빛나고 있었다.
[……문제 해결 방안 1건 확인. 소요 시간 30분. 현재 상황으로 판단. 30분 이후 마도왕 폐하의 생존 확률 4.3%. 이후 1분 지연 시 생존 확률 0.4% 감소합니다.]
약 45분 뒤에는 완전 사망.
낮은 확률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개체명 알파. 마도왕 폐하 구출 시작합니다.]
계산은 끝났다.
알파가 2차 동력실을 향해 서둘러 달려 나갔다.
* * *
베르덴이 가파른 호흡으로 육체 내부의 열을 식혔다.
마법사의 회한과 유자의 로브가 일부 파손되었지만, 그만한 마법전을 벌였음에도 생채기 하나 없었다.
잠깐의 소강상태.
관리자의 시선이 베르덴의 손으로 향했다.
“그 반지, 상시적으로 감각을 강화시키는 고등 룬이 새겨져 있군. 마법사의 육체로 견디기 어려우니 마력회로에 직접 각인한 것인가. 실패했으면 팔을 통째로 잘라야 되며 마력회로까지 손상되었을 텐데. 그대도 어지간히 대범하군.”
“마도왕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그건 그렇지. 그대와 비교하자면 내 본체는 미치광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 그런데 그대가 보여 줄 것은 그것으로 끝인가?”
서늘한 음성.
관리자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안력을 높이자 관리자를 둘러싼 푸른색의 장막이 아른거렸다. 베르덴의 화력으로도 흠집을 내는 게 전부였던 마력 보호막.
마법이 전부 적중했다면 파괴할 수도 있었겠지만, 관리자는 그 사실을 경계하고 있었고 위험하다 싶은 마법은 곧바로 요격하고 있다.
‘마도왕의 <아케인>…… 책에서 읽었던 것 이상의 위력이다.’
마도사가 초월자가 되면 마력 또한 진화한다.
그들이 생성하는 마력 방벽은 거대한 성벽에 필적하며, 심지어 박살 난다고 해서 마력회로에 반동이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런 초월자의 마력을 기반으로 한 마력 조작 기술, <아케인>.
마도왕이 자신의 마도를 통해 직접 만들고 개량한 독자적인 마력 운용법.
현재는 마도국의 왕가 혈통에게만 전수되며, 마도왕의 핏줄을 이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유물이다.
‘관리자는 원소 마법이 아닌, <아케인>만 사용하고 있다.’
장비의 유무 때문에 우위를 점하기 어렵다는 거겠지.
7위계 마법을 사용한다면 다르겠지만 관리자는 분신으로서의 약점을 자각하고 있다. 그러니 효율적으로 마력을 소모해 베르덴을 죽이겠다는 판단일 터.
그게 가능할 정도로 둘 사이의 격차는 현격했다.
베르덴이 앞으로 두 발짝 걸어 나갔다.
‘내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관리자의 마력을 전부 소모시키거나, 저 보호막을 뚫고 관리자에게 치명상을 입히거나.
그 해법은 하나뿐이다.
‘관리자의 전력을 이끌어 내는 것.’
방법은 있다. 이미 밑 준비는 끝났다.
다시금 마력을 일으키며 오리엔트로 관리자를 겨냥했다.
트리플 캐스팅.
<레위의 암석>
방대한 마력이 소모되었다.
허공에 드리운 굉대한 암석 세 개가 관리자에게 육박했다.
“실망이군.”
관리자의 주위로 세 개의 마력 구체가 생성됐다.
쩌적! 뻗어 나온 마력의 광선에 관통되어 산산이 붕괴되는 암석들. 주위로 흩어지는 잔해 속에서 백색 스태프가 베르덴을 겨냥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마력량이 집중되며 대기가 떨려 왔다.
“이번에는 그 감각으로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확언이었다.
그에 베르덴이 답했다.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뭐?”
찰나의 순간, 오른쪽 눈을 번뜩였다.
마안(魔眼). 감춰져 있던 역천의 마법진이 눈동자 위로 떠올랐다.
<리모스Rimose>
콰드드드득!
바위의 잔해에서 다섯 개의 바위 가시가 쇄도했다. 공성 마법. 보호막을 일부 관통한 첨단이 산산이 부서지며 마력을 붕괴시켰다.
관리자가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전조도 없이 원거리에서 마법을…….”
아직 당황하기에는 이르다.
직후 관리자의 머리 위에서 푸른빛이 내리쬐었다.
흐르는 별, 유성.
마력으로 이뤄진 거대한 구체가 관리자를 향해 추락했다.
전초전은 끝났다.
번쩍이는 섬광과 폭발.
덮쳐 오는 후폭풍 속으로 베르덴이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