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분기점 (1)
베르덴의 사고가 일순 정지했다.
왕좌에 앉은 노인의 위압감이 피부를 넘어 육신을 짓누른다. 귓가를 파고드는 음성은 내면에 숨겨진 영혼을 자극한다.
얼마 전, 다크 워튼의 마탑주와 대면했던 그때와 같은 감각이다.
‘초월자.’
스스로를 마도왕이라 소개한 저 백색 마법사.
뭐라 부정할 여지가 없이 마도사의 벽을 넘어선 게 틀림없다. 은연중에 흐르는 미증유의 마력이 공간 자체를 압도했다.
그렇다면 설마 마도왕 본인이라는 말인가?
강한 의심이 피어올랐지만, 찰나의 고민 끝에 베르덴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도왕일 리는 없어.’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상황이 그를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진짜 마도왕이라면 진즉에 손상된 실험실을 완전히 복구했을 거다. 고작 동력원 문제로 관리자실에 갇히는 일은 더더욱 없을 터.
알파가 언급했던, 400년이 넘어가는 마도왕의 부재에는 신빙성이 있다.
정황상 백색 마법사는 시설의 관리자로 보인다.
그 외형은 마도왕의 것과 동일하고 존재감 또한 대단하다. 하지만 역사상 마법의 정점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그렇다면 관리자의 정체는…….’
확신이 생겼다.
베르덴이 곧장 머리를 숙였다.
“마법사 애셔가 마도왕의 분신(分身)을 뵙습니다.”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져 나갔다.
정적이 되돌아올 때쯤 관리자가 미소를 지었다.
“단번에 내 정체를 꿰뚫어 알아보다니, 눈썰미가 제법 뛰어나구나. 한데 내가 가짜임을 알면서도 예를 취하는 것인가?”
“물론입니다.”
베르덴은 진심이었다.
마도왕이 세운 업적은 전설의 극치다. 지금과 같은 마법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게 된 초석 그 자체가 되었다.
극소수의 마법사들처럼 신으로 숭배하지는 않는다.
하나 마법에 몸담은 자로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설령 마도왕의 분신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베르덴의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흥미롭군. 관리자실에 들어온 두 명의 침입자는 내가 분신인 걸 알자마자 태도를 바꾸었는데. 알파가 그대를 마도왕이라고 인식할 만큼 다른 점은 분명하다는 건가. 그래, 이곳을 복구해 주기도 했으니…… 잠깐 정도는 괜찮을지도.”
중얼거리는 관리자의 오른손이 연신 움찔거렸다.
떨림을 억누르려는 듯 강하게 손아귀를 말아 쥐었다. 그것에 베르덴이 의문을 느끼던 그때, 마력이 일며 작은 왕좌가 솟아올라 왔다.
“앉거라, 젊은 마법사여. 나와 대화를 나눌 생각이 있다면.”
* * *
각자의 왕좌가 주인을 맞이했다.
둘 간의 거리와 높이는 서로의 모습을 훤히 바라볼 수 있을 정도. 베르덴이 고개를 들자 관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벽안…… 경지에 어울리지 않는 마력량이 느껴지는군. 재능인 듯 하나 타고났다기에는 묘해. 본래라면 진즉에 그릇이 깨어졌어야 정상일 테니. 그렇다면 후천적인 변화인가.”
예리한 통찰력이다.
역천의 정체는 몰라도 과정을 한눈에 꿰뚫었다. 분신이 이 정도인데 본체는 어떨지 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마도왕 폐하.”
“관리자라고 부르도록. 그리고 답을 요구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가짜일 뿐.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 봤자 무의미할 뿐이니, 질문은 그대 고유의 것이 되겠지.”
베르덴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뜻은…….”
“줄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이곳을 복구해 준 답례로써 그대의 물음에 답해 주도록 하겠다. 이곳 관리자실까지 오면서 여러모로 의문을 느낀 것이 있었을 테니.”
하지만.
“본체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게 좋을 거라 충고하겠다. 본체가 가진 기억의 일부만을 물려받은 나로서는 아는 게 거의 없으니까. 결국 그대의 선택이겠지만 현명한 판단을 하길 바라지.”
답해 줄 수 있는 건 이 시설에 대한 것뿐인가.
‘한정적이군.’
그렇지만 아쉬워할 겨를은 없었다.
마도왕의 분신에게 직접 대답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법적으로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기회였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관리자.”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갖가지 의문이 뒤섞이더니 두 개로 압축되었다.
생각을 마친 베르덴의 초점이 선명해졌다.
“질문을 정했다면 묻도록 하라.”
“예, 그럼…… 이 시설의 열쇠인 푸른 사파이어. 그 정확한 용도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마도왕과 관련된 유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곳이 무덤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서, 같은 것이 적어도 네 개 이상임이 드러났기에 하나의 의문을 자아냈다.
‘어째서 여러 개의 열쇠를 만들어 세상에 퍼트렸을까.’
기껏 숨겨 둔 실험실이 발각될 위험이 생긴다는 걸 진즉에 예상했을 텐데. 실제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침입자가 발생하기도 했고.
베르덴으로선 그 의도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열쇠라고 여긴다면 마땅한 의문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그대는 착각하고 있다.”
“착각이라면…….”
“애초에 그건 열쇠가 아니다. 내 본체를 찾아내기 위한, 일종의 신호였지.”
신호?
“이 실험실은 정확히 말해 골렘만으로 운영되는 연구 시설이다. 그리고 연구의 전체 진행도가 50%를 넘었을 때, 본체에게 연락을 보내기로 정해져 있었지. 알파와 나는 매뉴얼을 그대로 실행해, 정해진 장소에 신호를 보냈다.”
그 연락 수단이 사파이어였던 건가.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의 일이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본체는 올 기미가 보이지 않더군. 이후로 위험을 감수하고 몇 번이나 같은 시도를 해 봤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시설에 나타난 건 그대와 같은 외부인들뿐이었다.”
“이전에도 연락이 전혀 없었습니까?”
“마지막으로 확인된 게 약 468년 전이다. 본체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수도 있고…… 어쩌면 단순히 잊힌 걸지도 모르지. 이미 언급했듯 본체의 사정은 나로선 알 수 없───”
움찔.
갑작스레 관리자가 팔을 크게 들썩였다.
다시 뭔가를 억누르려는 듯 하나 이전보다도 힘겨워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문제없다, 적어도 지금은. 가급적 빨리 질문을 끝내는 게 좋겠군.”
시간이 없다는 것과 관계가 있는 건가.
베르덴은 관리자의 충고대로 대화를 속행했다. 지금까지 봐 온 미지의 경험 그리고 수많은 생각을 함축한 의문이었다.
“이 시설이 만들어진 목적이 무엇입니까.”
인공 골렘.
기억과 관련된 마법 기술.
2차 동력실에 있는 소형 동력원과 1차 동력실에 새겨진 마법진.
마도왕의 생각을 알고 싶다.
대체 이들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했는지.
베르덴의 물음에 관리자는 답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 * *
‘세상의…… 구원?’
베르덴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예상했던 대답과는 아예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난데없이 구원이라니. 갑자기 이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런 당혹감이 서린 반응에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놀랐나 보군. 하기야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본체의 인격을 모방한 나조차도 이해하거나 짐작할 수가 없을 정도니.”
“……이유는 모르시는 겁니까?”
“기억에 없으니 모를 수밖에. 그러나───”
관리자가 자신의 심장에 손을 올렸다.
“본체가 나를 만들었을 때의 마음은 그야말로 숭고한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거룩함은 여전히 내 몸에 흐르는 마력을 통해 느껴지고 있지.”
분신은 당시의 마도왕을 투영하고 있다.
“어째서 본체가 모습을 감췄는지, 지금도 그때와 같은 마음인지는 알 수 없다만…… 단언하건대 이 시설은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의문을 해소하기에는 막연했다.
하지만 결코 가볍게 여길 만한 답은 아니었다. 줄곧 메말라 있던 관리자의 얼굴에 미약한 감정이 드러났다.
그것은 일개 분신이 아닌, 위대한 초월자다운 면모였다.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말할 수 있는 최선이다. 명확한 답을 줄 수 없어 미안하군. 분신의 한계이니 양해를 부탁하지.”
“아닙니다. 저야말로 마도왕의 분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기특하구나, 젊은 마법사여. 그러고 보니 외부인과 이렇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인가. 확실히 색다른 기분이로다. 가능하다면 조금 더 이어 가고 싶지만…….”
손에 힘을 풀었다.
관리자의 표정이 사라졌다.
“이제, 시간이 되었군.”
“……!”
화아아아악!
급작스럽게 마력의 기파가 공간을 휩쓸었다. 단순히 위협적인 걸 넘어 적대적으로 다가오는 압박감.
왕좌에서 일어선 관리자의 전신에 강대한 마력이 흘러넘쳤다.
분위기가 급변했다.
“나는 마도왕의 분신이자 이 시설의 관리자. 본체에게 부여받은 사명(使命)은 허가되지 않은 침입자의 멸절이다. 그리고 시설이 건설된 이후로 총 네 명의 침입자가 있었지.”
기둥 뒤에 있던 스태프와 지팡이가 바닥을 굴렀다.
‘방주의 마법사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인가.’
처량한 신세였다.
그들의 주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침입자 중 하나는 1차 동력실에 갇혀 자멸했고, 둘은 내 손으로 직접 처단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지금 내 눈앞에 있지. 하지만 알파와 함께 시설의 복구를 도운 점, 적의를 드러내지 않은 점을 참작해 판단을 유예했다.”
쿠웅!
관리자실의 문이 개방되었다.
“하나 관리자로서 더 이상 사명을 거부하는 건 어렵다. 그러니 당장 이 시설을 떠나라. 이건 내가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기회다.”
나가지 않으면 죽이겠다.
관리자의 음성과 마력에는 짙은 살의가 배어 있었고, 손에 쥔 백색의 스태프가 서서히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베르덴을 배제하려는 것을 참고 있는 듯했다.
“…….”
베르덴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그대로 2차 동력실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관리자가 작게 웃었다.
“……알파는 그대를 마도왕으로서 인식하니,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줄 거다. 그리고 시설을 나가기 직전에 눈여겨본 게 있으면 가지고 가거라. 아무리 관리자라고 해도 시설을 떠난 이를 쫓을 수단은 없으니.”
마지막으로 베푸는 호의.
어째서 그랬는지는 관리자도 알 수 없었다.
분신은 마도왕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불변의 존재였건만…….
‘수백 년이라는 시간에 어딘가 달라진 건가.’
본체의 마법도 완벽하지는 않은 걸지도. 관리자는 자조했다. 아무런 의미 없는 생각일 뿐이었다.
그때, 베르덴이 멈춰 섰다.
관리자실을 나가기까진 한 걸음 전이었다.
“관리자,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나 더해도 괜찮겠습니까.”
“……서둘러 말하라.”
“만약 관리자가 침입자를 배제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
관리자가 멈칫했다.
순간 사명을 잊을 만큼 당황스러웠다.
수 초간의 침묵이 흐른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세상의 진리를 따라야겠지. 승자 독식. 이긴 자가 전부 갖게 될 것이다. 이 시설도, 본체가 남긴 ‘그것’도, 전부.”
단호한 음성.
“하나 내게 도전한 자는 누구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그대보다 경지가 높은 자 또한 예외가 아니었지. 젊은 마법사여, 그대가 특별하다는 건 인정하나 결과는 앞선 자들보다 더 참혹할 것이다. 적어도 그대에게는 도망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니.”
관리자의 말이 맞았다.
상대는 초월자다.
그에 비해 베르덴은 6위계에도 이르지 못했으며 마도조차 개척하지 못했다. 둘 중 누가 죽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말이다.
‘관리자는 불완전한 초월자다.’
마도왕의 마법은 상식을 넘어섰다.
하나 그렇다 해도 분신이 가진 근본적인 약점은 극복하지는 못한다.
‘첫째, 본체에 비해 약화된 경지.’
베르덴이 가늠한바 관리자는 7위계, 초월자의 경계선에 머물러 있다.
마도왕의 마력이니만큼 존재감 하나는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다는 건 분명하다. 하나 실질적인 힘은 다크 워튼의 마탑주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자명하다.
‘그리고 둘째, 마력 회복 불가.’
관리자는 수백 년간 존재해 왔다.
그리고 이전에 방주에서 찾아온 두 마법사를 상대하기까지 했다. 그들도 만반의 준비를 갖췄을 테니 일격에 끝나거나 하지는 않았을 터.
여태까지 적지 않은 마력 소모가 발생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장비의 격차.’
관리자는 마도왕의 무구(武具)를 착용하고 있으나 외형일 뿐이다.
분신은 어떤 마법 물품도 착용할 수 없으니. 관리가자 들고 있는 고귀한 스태프에서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증거였다.
적어도 장비 면에서는 베르덴이 압도적이었다.
‘그와 더해서 마도왕의 힘은 지식으로 알고 있다.’
마도왕의 마법, 마도 등 그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마탑에서 일꾼으로 살던 시절, 로벨린이 처음으로 가져다준 서적이었으니까. 책장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내 승산은 희박하다.’
그래, 알고 있다.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이 만용이라는 것쯤은.
관리자의 호의를 받아, 이대로 돌아가서 천천히 경지를 높이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쯤은…….
하지만 전신의 마력회로가, 몸에 흐르는 마력이, 뛰고 있는 심장이, 역천의 마법진이, 그 모든 것이 합쳐진 베르덴이라는 존재가 말하고 있다.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는 것이 마도에 다다르는 길이라고.
답은 이미 정해졌다.
콰아앙!
마력의 폭발이 2차 동력실의 소형 동력원을 덮쳤다.
시설 전체로 뻗어 나가는 마력이 흐트러지자 관리자실의 문이 다시금 닫혔다.
주저 없이 등을 돌렸다.
관리자를 노려보는 베르덴의 벽안이 강하게 명멸했다. 전신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온 마력이 초월자에게 대항했다.
그리고 선언한다.
“감히, 도전하겠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베르덴은 일생의 분기점(分岐點)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