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무덤으로 (2)
콰과과과광!
도시 아세른에 폭음이 울려 퍼졌다.
지면을 강타한 울림에 사람들이 주저앉거나 비틀거렸다. 카페에 널린 커피 잔과 케이크가 튕기듯 바닥으로 떨어졌고, 유리는 깨지거나 금이 갔다.
순간 지진이라도 났나 싶어, 여유를 즐기던 부유층들은 곧장 탁상 아래로 몸을 피신했다. 그렇게 생각될 정도의 진동과 충격이었다.
그 폭발의 중심지에는 폐허만이 남아 있었다.
……터엉!
건물의 잔해가 나가떨어졌다.
그 밑에서 모습을 드러낸 베르덴이 주위를 둘러봤다. 페르네의 주점은 형체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붕괴했다.
방금까지 한스가 있던 장소에는 작은 크레이터만이 남아 있었다. 소멸이라도 한 것처럼 핏물조차 보이지 않았다.
“으으……!”
먼지를 뒤집어쓴 페르네가 베르덴을 뒤따라 나왔다. 그녀의 품속에는 블루가 숨어 있었다.
베르덴이 페르네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다치지는 않았나.”
“아, 네…… 덕분에요.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마법이다. 한스 데이켈이 유적을 탈출할 때 함정까지 같이 데려온 모양이군.”
“하, 함정이요? 아니, 대체 어떤 유적이길래 이런 마법이…….”
베르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직전의 마법에 대한 정체를 떠올렸다.
‘7위계 마법 <대폭렬>.’
1위계 기초 마법인 <마력 폭발>의 최상위 마법.
복잡한 과정은 없이, 마력을 한계까지 응축하여 폭발시키는 공격 마법의 일종이다. 화염 계열은 아니다.
이 근방이 불바다가 되지 않은 게 그 증거다.
뚜렷한 속성이 없는 마법은 구조 자체가 단순하다.
그렇기에 성능 또한 같은 위계 마법에 비해 약한 편이었지만 얕볼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파괴력에 특화된 원소 계열 마법에 비할 정도는 아니나, 무엇이 됐든 간에 7위계 반열에 있는 마법의 위력은 지극히 위협적이니까.
‘대처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위험했다.’
긴장 어린 한숨이 흘러나왔다.
맨몸으로 직격당하면, 마력 저항력이 높은 베르덴조차 중상이다.
카란스와 블루, 숲의 정령은 죽거나 그에 가까운 치명상을 입었을 테고, 페르네는 살아남기는커녕 한스처럼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주점 근처, 가벼운 상처를 입거나 충격에 얼이 빠진 사람들이 보인다. 다행히도 폭발에 휩쓸린 시민은 없는 모양이다.
마침 근처에 사람이 없어 중상자나 사망자가 없다는 건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미리 충격을 상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마력의 폭발은 주점을 넘어 이 거리를 날려 버렸을 게 분명했다.
아세른의 인구 밀집도를 생각한다면 최소 세 자릿수에 가까운 인명 피해가 발생했겠지. 그야말로 도시 한가운데에 공성 마법이 떨어진 거나 다름없는 테러였다.
‘마법진을 파훼했다면 아무 문제 없었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마법진의 수준은 높았고, 주어진 시간은 부족했으니까.
마법진에 대해 베르덴을 따라올 자는 세계를 통틀어도 거의 없다. 그것이 마법진의 파훼라면 더더욱.
1위계에 불과하던 시절, 초월자의 마법진을 파훼하기 위해 생명을 깎아 낸 결과물이었다.
그런 베르덴의 관점으로 봤을 때 이 마법진은 치명적이었다.
한스와 같은 마법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소리 없이 잠들어 있다가, 감히 손을 쓸 수 없을 때 나타나 폭발하는 함정.
설령 도중에 알아챘다고 해도, 파훼하지 못하면 벗어날 수가 없다.
마치 사망 선고와도 같았다.
침입자를 살려 두지 않겠다는 절멸의 함정이다.
‘이게 마도왕의 무덤인가.’
직접 본 적은 없어도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피부로 느껴진다. 새삼 고대의 시련이라는 말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베르덴에게는 훗날을 기약할 생각이 없었다.
설령 이보다 더한 함정이 있다고 한들 전혀 두렵지 않았으니까. 탐색자들이나 방주의 다른 도전자들과는 다를 것이다.
오만이 아닌 자신감이자 확신이었다.
생각을 마친 베르덴이 고개를 돌렸다.
페르네가 여기저기 기웃대며 잔해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분명 여기쯤에…… 아! 찾았다!”
멀쩡한 서류를 발견한 페르네가 활짝 웃었다.
자신이 아끼던 주점이 통째로 날아갔는데도 우울하지는 않아 보인다. 몇 개월 전까지 사건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던 그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주점이 날아갔는데 괜찮은 건가?”
“네? 아, 놀라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제 와서?’라는 생각이 먼저 드네요. 왕국에 내전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애셔 님이 지금까지 해 온 일에 비하면야 건물 하나쯤은 별 대수롭지도 않죠.”
페르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중요한 정보가 담긴 서류들이 멀쩡하기도 하고요. 일부 소실된 것도 있는 거 같은데, 제 정보원들이 있으니 복구는 어렵지 않아요. 그냥 이참에 재건축한다고 생각하죠, 뭐.”
허세가 아닌 진심이었다.
정신력이 강해진 것이다. 일종의 성장이라고 봐도 좋을까. 이제 낮은 위계의 정신계 마법으로는 페르네의 정신을 흔들 수 없을지도.
“그 비용은 내가 지불해 주지.”
“안 그러셔도…… 정말요?”
“탐색자들은 계약을 어겼다. 그러니 의뢰 완료 보수 7억 엘크를 지불할 이유가 없지. 어차피 받을 사람도 없겠지만.”
게다가 보관하고 있던 흑마법서를 처분했다.
고객인 마탑주는 베르덴의 바람대로 비싸게 매입을 해 주었다. 단순히 돈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라, 베르덴이 마음에 들기에 그런 걸지도.
그렇게 수중에 있는 돈을 다 합치면, 다이나 은행에서 빌린 25억 엘크는 갚고도 남는다.
타인의 마력으로 등록을 마친 마법서라고 해도 가격은 두 자릿수의 억대를 자랑하니. 아세른에 건물 하나 다시 세우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으흠흠,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연보랏빛 머리가 찰랑거린다.
페르네의 눈동자는 어느새 폐허가 아닌, 새롭게 지어질 자신의 주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뒤처리는 어떻게 하지? 거리 한복판에 일어난 폭발이라 꽤나 복잡해질 것 같은데.”
“그건 제가 처리할 테니 걱정 마세요. 아세른의 수뇌부들쯤이야 저 혼자서 간단히 요리할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제 주점 말고는 거의 피해가 없어 보이니, 며칠만 지나면 금방 잠잠해질 거예요.”
정보상 페르네.
그녀는 왕국 그레이의 터줏대감이다.
“그럼 머물 곳은?”
“딱히 기회가 없어서 애셔 님에게 말은 안 했는데, 아세른 곳곳에 안전 가옥이 있어요. 주로 제 정보원들이 머무르는 곳이죠. 그리고 뭣하면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도움을 받으면 되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보다 애셔 님은 이제 어떻게 하실 거죠?”
물론 답은 정해져 있다.
“탐색자들이 찾은 유적으로 갈 거다.”
“아까 그 함정을 보면 엄청 위험해 보이는데요…….”
“그렇겠지. 마도왕의 무덤이니까.”
“아하, 마도…….”
……마도왕?
순간 페르네가 입가를 틀어막았다.
마도왕? 그 마도왕?
탐색자들에게 보여 줬던 푸른 사파이어가 마도왕과 관련된 유물? 제 건물이 사라졌음에도 아무렇지 않았던 페르네가 격하게 동요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그녀에게 베르덴이 말했다.
“아마 이번에는 시간이 꽤 걸릴 거다. 그러니 그 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미리 말하도록.”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페르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베르덴이 옆에 쌓인 잔해를 바라봤다.
“카란스, 아직 멀었나?”
“이제 막 끝났습니다, 형제여!”
카란스가 잔해 속에서 튀어나왔다.
늦게 모습을 드러낸 건 정령 마법을 쓰느라, 기만의 얼굴이 해제된 탓이었다. 재사용하려면 일종의 대기 시간이 필요했다.
로브 안쪽에 숲의 정령을 숨긴 카란스가 훌쩍 다가왔다. 엘프다운 가볍고도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그가 먼지를 툭툭 털었다.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습니다. 형제의 부름이 늦었다면 모두 무사하지 못했겠죠. 감사합니다, 형제여. 그런데 절 부른 이유가 뭡니까?”
“네 도움이 필요하다.”
“뭐가 됐든 돕겠습니다. 그래도 가능하면 넓은 자연인 게 좋겠군요.”
카란스가 눈을 빛냈다.
엘프 특유의, 동족에 대한 신뢰였다. 그 밖에 사람들이 많은 도시 속에서 지내며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싶다는 바람도 엿보였다.
“마침 목적지가 그런 곳이다.”
“오, 자연! 그게 어디입니까?”
베르덴이 동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동부 늪지대.”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 * *
에스티리아 왕국에는 4대 공작이 있었다.
그중 리비안트 공작은 독립을 해서 공국을 일으켰고, 루비넬리안 공작가는 반란 혐의로 사용인까지 몰살당했다.
그 결과 두 명의 공작만이 남았다
1왕자를 지지하는 도스램드 공작가.
2왕자를 지지하는 데본 공작가.
둘 다 에스티라아 왕가와 핏줄이 이어진 먼 친척 관계였다. 물론 그들 사이에 가족애 따위는 없다.
누가 먼저 쥐냐, 누굴 먼저 짓밟냐. 오로지 욕망에 투철했고, 그에 따라 각자 지지하는 왕자들이 달랐다.
하지만 언제든 이권을 위해서라면 저버릴 수 있는 충성이었다.
데본 공작이 직접 차와 과자를 내왔다.
손님이 손님인 만큼 가격이 비싼 수제품이었다.
자리에 앉은 데본 공작이 손짓했다.
“내 초대를 받아 줘서 고맙네. 이건 이 자리를 위해 준비한 특제 과자지. 자네 입맛에도 맞을 거라 장담하겠네. 자, 식기 전에 어서 들게.”
“감사합니다, 데본 공작 각하.”
도스램드 공작가의 장남, 나이젤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고급스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식도를 타고 위장에 내려앉았다. 정신이 노곤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차였다.
“후우, 이거 참 따뜻한 차로군요.”
“마음에 드는 것 같아 보이니 다행이네. 그럼 이제 건설적인 대화를 나눠 보도록 할까.”
둘의 만남은 비공식이다.
오래 시간을 끌어 봐야 좋을 게 없다. 서로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이젤이 물었다.
“좋습니다. 각하의 용건이 무엇인지 궁금하던 참이었습니다.”
“크흐흐,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지 말게. 내가 자네와 이런 자리를 만든 이유가 달리 있겠나. 바로 전향이지.”
1왕자를 버리고 2왕자를 지지하라.
그것이 데본 공작의 용건이었다.
나이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향이라. 그거참 의문이군요. 그건 제가 아니라 제 아버지인 도스램드 공작 전하께 말씀드려야 할 사안이 아닙니까?”
“우리의 정보력을 우습게 보지 말게. 자네가 진즉에 공작위의 계승 준비를 마쳤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도스램드 공작은 가문을 다스리기에는 많이 늙었지. 그러니 실질적인 가주는 나이젤, 바로 자네가 아니겠나.”
“하핫, 그렇게 말씀하시니 마치 제가 아비의 죽음을 기다리는 불효자 같지 않습니까.”
“틀렸나?”
“글쎄요.”
나이젤이 눈을 가늘게 떴다.
기세가 달라졌다. 뱀과 같은 시선이 데본 공작을 훑었다.
“어쨌든 각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확실히 지금과 같은 상황에, 도스램드 공작가가 2왕자 전하를 지지하면 1왕자 전하는 매우 불리해지지요. 특히나 정치적으로는 압도적으로 밀릴 겁니다.”
“잘 알고 있군.”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잘하면, 콜록, 크게 한몫 챙길 수 있을 텐데. 그래서, 전향에 대한 대가는 무엇입니까?”
나이젤은 위정자의 그릇이다.
도스램드 공작이 죽기도 전에 자신의 세력을 갖춘 건 유능의 반증이다. 떠보다가는 역으로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을 터.
데본 공작은 곧장 가격을 제시했다.
“2왕자께서 왕위를 계승하신다면, 과거 루비넬리안 공작가가 다스렸던 영토를 주겠네. 그리고 작년에 발견한 마석 광산과 금광의 채굴권을 넘겨주도록 하지. 합의에 따라 세금을 대폭 줄여 줄 용의도 있네.”
“콜록, 오호, 아주 비싼 대가로군요.”
거래가 이뤄진다면 나이젤은 전무후무한 권력을 가진 공작이 될 것이다.
하지만 크게 끌리지는 않았다.
1왕자가 승리한다고 해도 적지 않은 이권이 따를 테니까.
그때, 데본 공작이 속삭였다.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인 건데…… 자네가 적극 나서 준다면 인형 또한 손에 넣을 수 있도록 하겠네.”
“인형……?”
“그래, 인형.”
나이젤의 눈이 커졌다.
왕국에서 인형이라고 칭할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2왕자 전하는 성욕과 독점욕이 매우 강하시긴 하나, 손에 넣는 순간 그 욕망은 빠르게 사그라들지. 그럼 버려진 인형은 어떻게 되겠나? 갖는 사람이 임자지.”
“그럼, 콜록, 1왕녀 실리스를…….”
“그래, 자네 것이 되는 거야. 내 아들들이 질투하겠지만 어쩌겠나.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많이 가져가는 게 세상의 이치인데. 안 그렇나?”
돈과 권력은 이미 쥐고 있다.
그렇게 되면 관심이 가는 건 바로 여자다. 인형 왕녀, 실리스. 그녀는 왕국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여인이다.
“1왕자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신다면 왕녀는 다른 귀족이나 타국으로 가겠지. 자네와 왕녀는 적지만 피가 이어져 있고, 1왕자 전하는 근친을 혐오하시니, 자네는 손조차 대지 못하게 될 게 분명해. 하, 남자로서 참으로 아깝지가 않나?”
아깝다. 아깝고말고.
돈, 권력, 여자. 전부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를 어떤 귀족이 버릴 수가 있겠는가.
나이젤의 가슴속에 욕심이 들끓었다.
그 또한 에스티리아 왕가의 핏줄이 이어진 인간이었다.
“그거참, 콜록, 콜록! 거부할 수가 없는 대가로군요.”
“거래를 받겠는가?”
“저는, 콜록, 콜록. 그러, 콜록! 콜록!”
기침이 심해진다.
나이젤이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들썩였다.
“이런. 놀라서 침이라도 잘못 삼킨 건가? 심해지기 전에 어서 차를 들게.”
“가, 감사…… 콜록! 콜록!!”
쨍그랑!
손에서 찻잔이 떨어졌다.
다급한 숨소리와 함께 목을 부여잡은 나이젤이 연신 기침을 토해 냈다.
“콜록! 힉. 힉. 콜록! 콜록!”
“……어?”
뭔가 이상하다.
단순히 사레들렸다기에는 너무 요란하다. 당황한 데본 공작의 눈앞에서, 나이젤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목구비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 나이젤?”
“우웨에에에엑!”
끈적한 피가 식탁 위로 쏟아진다.
치사량에 근접한 출혈량이었다. 이내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숨을 마신 나이젤이 목소리를 쥐어짰다.
“사, 살려…….”
철퍽!
머리가 피웅덩이에 처박혔다.
더 이상 숨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붉게 충혈된 두 눈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손쓸 수도 없는 즉사였다.
아니, 독살이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데본 공작의 손이 떨렸다.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정황상 나이젤은 차를 마시고…… 정확히는 찻잔에 묻은 독으로 인해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과를 준비한 건 공작 자신이었고, 그는 나이젤을 죽일 마음이 조금도 없었으니까.
누군가 개입했다.
‘3왕자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 애초에 이 자리는 비밀일 텐데? 그보다 대체 언제? 내가 독이 묻은 컵을 고를 줄 어떻게 알고?’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하다.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나이젤이 죽은 이유는 나중이다.
바로 그의 죽음으로써 형성될 후폭풍이 문제였다.
다름 아닌 도스램드 가문의 차기 공작이다.
그런 귀족이 죽었다. 그것도 다른 왕자를 지지하는 데본 공작 앞에서.
‘이거 자칫하면…….’
얼굴이 하얗게 질린 데본 공작이 침을 삼켰다.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목이 따가웠다.
‘어, 어떻게든 정리해야 한다.’
범인 색출 따위는 중요치 않다.
누가 죽고, 누가 같이 있었느냐가 쟁점이다. 이 사실을 들키는 순간 어느 누구도 데본 공작의 변명을 들어 주지 않을 것이다.
정치는 원인보다 결과였다.
나이젤의 시체를 치우고 흔적을 지워야 한다.
다행인 건 여기는 비공식 자리. 둘의 만남은 외부에 발설되지 않을 것이다.
입막음만 제대로 한다면.
공작답게 이성을 되찾은 데본 공작은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끄아아아악!”
“아아아악!”
나이젤의 시체를 소각하고 그가 데려온 호위들을 죽였다.
마지막으로 데본 공작이 직접 자신의 측근을 뒤에서 베어 갈랐다. 누가 범인과 관련되어 있는지 몰라, 단 한 명도 남기지 않았다.
식지 않은 피가 칼날을 타고 떨어졌다.
이제 나이젤의 행방에 대해 아는 건 데본 공작 한 명뿐.
완벽한 뒤처리였다.
그렇게 공작은 모른 척 돌아왔고, 타인에 대한 경계심을 높였다.
그리고 며칠 뒤.
나이젤의 실종에 대한 범인으로 데본 공작이 지목되었다. 증인은 나이젤의 호위 중 하나. 분명 공작의 눈앞에서 죽임을 당했던 사내였다.
왕국에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했다.
* * *
늪지대 안은 추적이 매우 어렵다.
습기가 가득한 불쾌한 지형. 발자국은 웅덩이에 잠기고, 워낙 이런저런 것이 뒤엉킨 것들은 인공적인 흔적을 지운다.
심지어 그것이 금지로 지정된 지독한 늪지대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베르덴 혼자서는 부족하다.
탐색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시간을 얼마나 허비하게 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카란스라면 다르다.
숲의 정령과 계약한 가디언 엘프는 자연과 교감을 나누어 정보를 얻는 것이 가능하니까.
늪지대로 들어간 탐색자들의 발자취를 쫓기에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추적자였다.
아세른을 떠난 베르덴, 카란스 그리고 숲의 정령이 동부 늪지대의 입구에 섰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음에도 안은 어둑어둑했고, 종류를 모를 벌레들이 날아다닌다. 썩은 악취는 절로 표정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빛이 들지 않는 동굴보다도 심각하군.’
최악의 환경이다.
베르덴이 후각을 차단했다.
그래도 카란스는 다르겠지.
엘프는 자연을 사랑하는 종족이니까.
그때, 카란스가 물었다.
“형제여, 여기가 형제가 말한 그 자연입니까?”
“그런데?”
“이딴 건 자연이 아닙니다.”
카란스가 정색했다.
예상 못 한 지역 차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