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술잔 (1)
대주교와 마탑주가 왕도를 떠났다.
그 직후 베르덴은 한동안 후작가 사람들에게 시달렸다.
접견실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대주교가 왜 저런 꼴이냐, 마탑주에게 무슨 말을 한 거냐, 정신이 나간 거냐 등 특히나 에스퍼렌사 후작에게서 질문과 질책이 쏟아졌다.
딱히 숨길 건 없다.
간단히 상황을 요약해 설명했다.
“마, 마탑주하고 뭘 했다고?”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베르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에스퍼렌사 후작, 칼리아, 멜자르드의 피부가 하얗게 질렸다. 일제히 입을 뻐끔거리다가, 죄다 탄식을 흘리며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에드몬은 도중에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기까지 했다.
저택이 혼란에 휩싸였다.
‘뭔가 익숙한데.’
아, 그래.
작년 겨울, 리비안트 공국.
글러트니에 가담한 가드란 후작가를 방주와 함께 멸문시켰을 때, 로든마이어 백작이 보였던 반응과 판박이었다.
이해는 하나 이미 벌어진 일.
어차피 문제가 될 만한 일도 아니니 달리 수습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베르덴에게는 당장 할 일이 있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대충 둘러대고 방으로 향했다.
초월자를 향한 도전.
그를 통해 변화된 육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 * *
왕도의 밤이 깊어졌다.
방은 마법진으로 철저히 봉쇄되어 있다.
안전한 장소에서 베르덴이 육체를 관조하며 한동안 상태를 살폈다. 마력회로를 타고 흐르는 마력이 느껴진다.
이윽고 베르덴이 손끝에 마력을 집결시켰다. 이전보다 더욱 많은 양의 마력이 집결되었다.
얼마 전까지 베르덴의 수준은 5위계 중위.
엘더 리치를 통해 5위계에 도달한 뒤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룩한, 카란스와의 대련 도중에 얻은 경지였다.
누가 뭐래도 통상적인 성장 속도를 월등히 앞서는 결과임은 자명하다.
“그런데 5위계 상위라니.”
스스로도 당황스럽다.
아무리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신했지만, 성장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한 단계 올라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초월자의 마력에 대항한 것이 그렇게나 큰 경험치가 되었던 걸까.
무엇보다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마력회로는 멀쩡하다 못해 최상의 상태. 마력량 또한 더욱 증가했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변화다.’
분명 마력의 근원인 심장과 관련이 있는 것이 틀림없을 터.
이유는 간단하다.
초월자의 마력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이 미지의 마력 덕분이었으니까.
그런데…… 기현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베르덴이 고개를 돌렸다.
로브와 장비는 이미 벗어 두었다.
전신 거울 너머로 피부를 드러낸 상체가 보였다. 마법사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단련된 육체.
그 위로 베르덴의 역작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마탑에서 직접 칼로 피부를 가르고 근육을 찢어, 어떤 일에도 지워지지 않도록 깊게 새겨 넣은 역천의 마법진.
본래라면 흉터로 남아 있어야 할 흔적이다.
“이건 대체…….”
마법진의 경로를 따라 마력이 흐르고 있다.
마치 마력으로 문신을 새긴 것처럼, 어둠 속에서 푸른빛이 은은하게 명멸했다. 조심스레 손끝으로 문질러 보자 피부 너머에 있는 마력이 촉각을 자극했다.
‘내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실험체로 살아가며 강제로 온갖 지식을 주입받았다.
그런데도 하나같이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다.
‘아니, 이상한 건 아닌가.’
베르덴이 이뤄 낸 역천은 마법계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마법 현상이다. 지금까지의 지식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
하지만 분명 이유는 있을 것이다.
아직 밝혀 내지 못한 마법적 논리가 말이다.
베르덴이 창조한 역천의 마법진.
역천의 대가로써 지불한 마탑의 동력원.
‘둘 중 뭐가 원인일까.’
생각해 봤지만 알 수 없다.
그럴듯한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으니 결과가 나올 리가 있나.
‘역천을 발동한다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역천, 개신(開身).
강제적으로 마력회로를 확장하여, 10분간 한계를 넘어 위계를 상승시키는 금기의 마법진.
‘미친 짓이지.’
잠깐 생각해 봤지만 이건 절대로 논외다.
지속 시간이 끝나면 마력회로가 파괴되고, 육체가 무너져 수명이 줄어들어 버리니까. 마법사의 일생의 단번에 끝장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베르덴은 그때와 다르다.
어쩌면 그 부작용을 견뎌 낼 수 있을지도 모르나…… 확신도 없이 자살에 가까운 시도를 하는 건 미련하고도 멍청하기 짝이 없는 선택이다.
그러니 결국 알아 낼 방법은 하나뿐.
‘바로 위계의 성장.’
베르덴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미지가 점차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후로도 비슷하게 흘러간다면, 훗날 6위계에 올랐을 때 육체가 또다시 변화할 터.
지금보다 더한 인내가 필요하겠지.
그 시간을 단축하려면 성장의 계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침 베르덴에게는 발판이 되어 줄 사건이 존재했다.
베르덴이 공간가방을 개방했다.
타원형의 푸른 사파이어.
방주에서 건네준 마도왕의 유물을 손에 들었다.
‘……시련이라.’
방주의 제안, 리스너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내년 봄까지 고대의 시련인 마도왕의 무덤을 찾아 극복하고, 방주의 회의에 참석하기로 한 약속. 기한은 이제 반년조차 남지 않았다.
그래도 별 걱정은 없다.
유물 탐사단 ‘탐색자들’의 탐험 보고서.
그에 따르면 테인체 구릉, 아르에곤 산맥을 넘어 마지막 장소인 동부 늪지대를 탐색하고 있다고 했으니.
왕국의 2대 금지인 만큼 광활하고 위험한 지역이라고는 하나, 5위계 마법사를 포함한 각종 전문가가 있으니 전멸할 일은 없을 것이다.
‘곧 있으면 원하는 성과를 가져오겠지.’
그 정도야 기다릴 수 있다.
베르덴은 기대를 품으며 유물을 수납했다.
마법사의 회한을 비롯한 장비를 착용하고는 유자의 로브를 겉에 둘렀다. 이내 마법진을 해제하자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똑똑.
직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출입을 허락하자, 검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들어왔다.
칼리아였다.
“밤늦게 휴식을 방해해서 미안하군, 애셔.”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칼리아 님.”
“그,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
할 얘기?
저번에 말했던 용건이란 건가.
“말씀하시죠.”
“음, 그러고 싶지만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렇군. 그래서 말인데.”
칼리아가 바깥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나가서 술이라도 한잔하지 않겠나?”
* * *
왕도의 야밤은 생기가 가득했다.
거리 곳곳에 걸린 마석등이 어둠을 밝혔고, 그 빛 아래에서 시민들이 밤 문화를 누리고 있다. 순찰병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노점 음식을 즐겼다.
호위는 데려오지 않았다.
애초에 두 사람을 길거리에서 위협할 만한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기사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칼리아와 베르덴이 나란히 걸었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왕도에서 가장 오래된 주점이다. 옛날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운치가 있는 곳이지. 나도 왕도에 온 게 꽤나 오랜만이라 아직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다행히 그대로인 모양이군.”
칼리아를 따라 시선을 옆으로 향했다.
낡고 거대한 3층짜리 주점이 보인다.
창문 너머로 내부를 슬쩍 구경했다.
많은 손님이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었다. 그리고 옛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서인지 마석등이 아니라, 촛불과 화톳불로 빛을 대신한 인테리어까지.
마치 마법이 상용화되기 전의 시대를 보는 것 같았다.
“들어가지.”
칼리아와 함께 주점에 들어섰다.
통일된 복장을 갖춘 웨이트리스가 음식과 술을 나르고 있다.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신 귓가를 울렸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주점의 중심이었다.
“싸워라! 싸워!”
“이긴 놈한테는 내가 에일 한 병 쏜다!”
“나는 칠면조 다리!”
구경꾼들의 환호 속에서 두 사내가 치고받았다.
무기도, 살의도 없는 순수한 주먹질이다. 날것의 폭력이었으나 그렇기에 모두가 열광적이었다.
베르덴이 잠시 지켜봤다.
마구잡이식으로 퍼붓는 공격. 자세히 보면 두 사내는 급소를 피해 서로를 가격하고 있었다.
“저들은 싸움꾼이다. 주점 주인에게 고용되어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게 일. 거창하게 싸우면서도, 최대한 큰 부상이 없도록 훈련된 자들이지. 몸이 재산이니까.”
연극에 가까운 싸움이라.
확실히 이렇게 보니 색다르게 느껴지긴 했다.
“그럼 자리를…….”
퍼억!
그때, 앞차기를 맞은 싸움꾼 중 하나가 크게 밀렸다.
도중에 발을 헛디딘 것인지 중심을 잡지 못하는 모양. 정확히 베르덴과 칼리아가 있는 곳을 향해 넘어졌다.
가볍게 마력을 일으켰다.
성질 변화로 생겨난 바람의 벽이 싸움꾼을 감싸 안았다.
당장 기립한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제가 실수를. 이거 참 죄송…… 합…….”
싸움꾼이 얼어붙었다.
그의 눈에 비친, 일반인과 궤를 달리하는 베르덴과 칼리아의 외모. 누가 봐도 ‘나 귀족이오’ 하는 듯한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왕도는 특히나 귀족의 권위가 강하다.
무례는 곧 처벌이다.
그리고 싸움꾼은 무례를 저질렀다.
“부,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당장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싸움꾼의 행동에 주점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정적과 시선 속에서 베르덴이 내심 한숨을 쉬었다.
‘여기는 글렀군.’
주점의 주인이 다급하게 달려 나온다.
소란이 더 커지기 전에 나가자고 할 찰나에 칼리아가 나섰다. 그녀의 상징인 검붉은 머리칼을 본 주점 주인이 입술을 덜덜 떨었다.
“호, 호, 혹시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칼리아 드 에스퍼렌사다. 본의 아니게 나 때문에 흥이 깨져 버렸군.”
“아, 아닙니다! 저희가 어찌……!”
“그래도 이거라면 충분하겠지.”
칼리아의 손이 스치듯 지나쳤다.
어느새 주점 주인의 손에는 100만 엘크짜리 지폐 두 장이 쥐여 있었다.
“하나는 여기 모인 손님들에게 쓰고, 나머지 하나는 싸움에서 이긴 승자에게 전달하도록.”
“아…….”
주점 주인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할 일을 자각한 그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크게 소리쳤다.
에스퍼렌사 후작가와 칼리아의 이름을 찬양하며, 오늘 밤은 술과 안주를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분위기는 급변했다.
“에스퍼렌사 후작가! 만세!”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내가 귀, 귀족…… 그것도 백강 칼리아 님에게 술 한잔 얻어먹게 되다니……! 이, 이 무슨 영광이!”
“이긴 사람한테 100만 엘크라니! 어이! 당장 싸우지 못해!”
이전보다 더한 활기가 주점에 가득 들어찼다.
어깨를 으쓱인 칼리아가 싱긋 웃었다.
“이렇게 됐으니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아도 되겠군.”
“능숙하시군요.”
“이 정도야 기본이지.”
직후 주점 주인이 직접 자리를 안내했다.
3층 가장 높은 곳, 아늑한 테이블을 택하고는 음식을 주문했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주점에서 가장 값비싼 증류주와 쫄깃쫄깃한 닭 오븐 구이가 한 상 차려졌다.
“제가 자르겠습니다.”
염동력으로 닭을 들어 올렸다.
미세한 바람 칼날로 정확히 부위별로 조각냈다. 마법으로 닭 손질이라니. 호사스러운 해체 솜씨에 칼리아가 작게 박수를 쳤다.
“마력의 성질 변화인가. 전에 몰래 들으니, 에드몬 할아범이 너에게 마도를 빼앗겼다고 아버지에게 하소연을 하던데. 이게 그거로군.”
“빼앗은 게 아니라 일부만 따라 했을 뿐입니다.”
“당사자 입장에선 그게 그거겠지.”
그건 그렇지.
베르덴과 칼리아가 잔을 마주쳤다.
독한 술을 한 입에 들이켜고는, 포크로 닭고기를 찍어 입에 넣었다. 은은하게 양념이 된 닭껍질은 짭쪼름하며 고소했고, 뼈 없는 순살 부위는 촉촉했다.
요리 솜씨는 제법이다.
분위기에 어울리는 맛이었다.
두 번째 비워진 잔.
베르덴이 칼리아의 술잔을 채우며 나지막이 물었다.
“이제 용건을 밝힐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무게 잡을 만큼 중요한 건 아니다. 그랬다면 여기가 아니라 저택에서 이야기했겠지. 내 용건이란 건……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다.”
“말씀하십시오.”
“네가 라인즈를 나선 이후, 나는 종종 샘웰의 주점에 들렀다. 로아프라에서 터득했다던 칵테일이 꽤나 내 입맛에 맞았거든. 그러다 보니 샤를로트와 에이든 남매와도 점차 안면을 텄고…… 어떤 연유로 라인즈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도 듣게 됐다. 그 과정에서 네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도.”
에이든의 특이 형질…… 에 대한 건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말라고 언질을 해 두었으니. 에이든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세 사람이 약속을 어길 이유가 없었다.
친분이 생긴 사람일지리도.
‘그렇다는 건 그 외적인 부분의 이야기겠지.’
그때, 칼리아가 물었다.
“애셔, 너는 왜 에이든과 샤를로트를 구했지?”
……왜 구했냐라.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깊게 생각할 것 없는 단순한 의문이다. 그야…… 그렇지 않나. 너는 불법 노예였던 두 남매를 구하기 위해, 로아프라의 조직 하나를 없애 버리고 그 빈테르트와도 반목하기까지 했으니. 대체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길래 그만한 리스크를 감당하고,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었는지 알고 싶다.”
칼리아의 생각을 천천히 곱씹었다.
대충 어떤 목적으로 이런 자리를 만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답해 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
“하지만 그 전에 칼리아 님이 그런 의문을 갖게 된 이유부터 듣고 싶습니다.”
“……이유, 이유라.”
톡톡.
칼리아가 식탁을 손끝으로 두들겼다.
그러다 판단이 섰는지 단번에 증류주를 입안에 털어 넣고는 탁! 술잔을 강하게 내려놨다.
“푸념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그래도 좋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