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폭풍전야 (3)
단 한마디에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경악한 시선으로 회담을 지켜보는 귀족들. 특히나 당사자인 1왕자 발르그나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 버렸다.
마탑주는 무정한 눈빛으로 왕가의 혈통들을 주시했다.
발르그나가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조, 조제프 대주교. 그게 무슨…….”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십니까?”
조제프가 품속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던졌다.
이번 언데드 사태로 인해 발생한 인명 피해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것도 왕국에서 직접 만들어서 루아스교에게 보낸 것.
“교구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중 네비론 주교와 펠다른 주교가 목숨을 잃었고, 다른 희생자들은 대부분 장기가 갈기갈기 찢겨 사망했습니다. 왕국 전체로 보면 더하지요.”
남부에서 사망 및 실종된 이는 7,000명 이상.
언데드로 인해 사망자들의 시체가 죄다 언데드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 숫자가 워낙 많기에, 보다 강한 언데드까지 발생한 터라 피해가 급격하게 커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부상을 당하고 살아갈 터전을 잃었으며 가족이 죽어 실의에 빠진 시민은 수만 명. 지금도 통곡의 소리가 들려온다.
심지어 남부 곡창지대가 죽음의 기운에 오염되어 식량난은 확정적이다. 루아스교에서 정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평생.
도저히 웃음이 나올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그 심각성과 아픔을 이해한다면 웃어서는 아니 된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제 비위를 맞추기 위해 미소를 아끼지 않으시는군요. 설마 꼬리에 불과한 귀족들 목을 친 정도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겠지요?”
“꼬리라니, 그건…….”
“마탑주님.”
말을 끊었다.
조제프가 마탑주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참고인 역할로서, 자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거야 간단한 일이지.”
마탑주의 스태프에서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등골을 적시는 섬뜩한 마력. 주머니에서 나온 여섯 개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부패가 막 시작한 그것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죽음이 속삭였다.
“생전의 감정을 들려 다오.”
잘린 머리들이 눈을 떴다.
딱딱딱. 턱을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살고 싶어, 살고 싶어!]
[내 재산! 돌려줘!]
[나는 귀족이야! 귀족이란 말이다!]
[아파아아아아]
[억울해…… 난 억울해…….]
[왜 나만 죽어야 돼! 왜!]
망자들의 절규가 쏟아졌다.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광경이다. 언데드란 걸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위 귀족 몇몇이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마탑주가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머리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뭐가 그렇게 억울하지?”
[저는, 저는 그저 명령만 따랐을 뿐인데…….]
[저만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놈도 사람들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뇌물을 더 많이 줬다는 이유로 처형당하지 않았습니다!]
“그자가 누구지?”
그 질문에 두 머리가 동시에 소리쳤다.
[체디엔 백작!]
명확한 이름이 호명되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오른쪽으로 향했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체디엔 백작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저, 저는……! 그러니까……!”
“이래도 아니라고 하실 생각입니까, 전하?”
대주교가 눈동자가 왕좌를 직시했다.
발르그나가 입을 뻐끔거렸다.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사실을 부정하면 마탑주의 능력을 의심하는 거나 다름없고, 인정한다면 책임과 더불어 회담 분위기는 보다 악화될 테니까.
여섯 개의 머리가 다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정적이 흘렀다.
발르그나가 계속 대답을 망설이자, 대주교가 말했다.
“본래 이 자리의 형식은 회담으로 진행되어야 마땅하겠지만, 전하께서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니, ‘성녀’께서 명하신 대로, 7인의 대주교 중 하나로서 루아스교의 요구를 통보하겠습니다.”
교구 재건 비용, 완전 보상.
죽은 교인의 가족에 대한 위로금.
왕국 남부의 정화 작업에 필요한 물자 및 인력 지원 등.
마음에도 없는 기도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
보다 실질적인 요구다. 왕국은 권력 때문에 루아스교가 간섭하는 걸 피해 왔으니, 왕가와 귀족들에게는 징벌과도 같았다.
발르그나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젠장, 젠장……!’
너무도 천문학적인 대가다.
루아스교가 왕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계획이 다분히 보인다. 단칼에 거절해야 하지만…… 몰려 있는 건 발르그나 본인이다.
더군다나 성녀라는 이름까지 거론되었다. 루아스교의 초월자가 이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어떻게든 액수를 줄여야 한다……!’
그 방법 외엔 없다.
그래, 그게 최선이다.
발르그나가 말했다.
“……의논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거절합니다.”
알현실을 나서는 순간, 회담은 끝이다.
조제프는 어떤 여지도 주지 않았다. 그저 올곧았고 단호했다.
“큭…….”
궁지에 몰린 발르그나가 옆을 바라봤다.
왕국의 최강자, 레오닐이 뭐라도 해 주길 바랐지만……소용이 없었다. 레오닐은 고개를 숙인 채 마탑주의 눈치만을 볼 뿐이었다.
힘의 논리.
초월자와 대주교.
단 두 명의 앞에서 왕국은 약자였다.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루아스교의 요구를 받아…… 들이겠습니다.”
왕권을 위임받은 자가 고개를 숙였다.
준비한 말조차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루아스교의 통보에 수긍하는 게 전부였다.
이로써 회담은 종결되었다.
더 이상 알현실에 남아 있을 이유가 사라졌다.
조제프의 고개가 옆으로 향했다.
“에스퍼렌사 후작.”
“네, 대주교님.”
“회담이 끝났으니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미리 연락했듯, 후작의 저택으로.
“당장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후작이 1왕자에게 예를 취한 뒤, 직접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전하. 가시죠, 마탑주님.”
조제프가 뒤돌아 걸었다.
그의 로브에 새겨져 있는 루아스교의 상징, 황금의 정십자가가 나부꼈다. 세계 종교의 위세는 썩어 가는 왕국이 견딜 만한 것이 아니었다.
“…….”
마탑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레오닐부터 시작해 1왕자, 2왕자, 3왕자…… 왕국에서야 떠받들어 주지만 그에게는 흥미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1왕녀 실리스.
인형처럼 앉아 있는 그녀는 달랐다.
겉모습은 거짓이다.
백금색 눈동자 너머로 보인다. 죽음의 이해자만이 감지할 수 있는, 광할한 죽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영혼이.
“……재밌군.”
오길 잘했다.
네크로맨서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조제프의 뒤를 따랐다.
쿠웅.
닫히는 문.
…….
고요해진 알현실에서 레오닐이 고개를 들었다.
‘빌어먹을 초월자……!’
마탑주가 나타난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일었다. 옥죄는 압박감은 짙은 무력감을 자아냈다.
6위계 마도사, 레오닐.
그가 7위계에 오른다면 마탑주와 같은, 초월자의 자격을 충족한다.
격차는 고작 한 단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결코 좁힐 수 없는 차이이기도 했다. 레오닐은 이미 한계 위계에 도달했으니까.
하지만.
‘실험이 완성되면 나 또한……!’
레오닐이 강하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수십 년에 걸쳐 도달한 실험의 끝.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다. 누가 방해하든 간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완성하고야 말 것이다.
그렇게 오르리라.
세계에 군림하는 절대자의 반열에.
레오닐은 마탑주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머지않아 저 위치에 있을 자신을 꿈꾸며.
* * *
왕도의 저택으로 가는 길은 평온했다.
대주교가 보인 왕국에 대한 차가운 태도가 아직 알려지지 않았음에도, 마탑주가 존재감을 숨기고 있음에도 누구도 다가오는 일이 없었다.
거기다 마차가 편히 지나갈 수 있는 한적한 도로까지.
에스퍼렌사 후작이 미리 손을 쓴 결과였다.
이런 디테일한 환대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저택에 도착한 뒤, 두 사람을 접견실로 안내했다.
슬쩍 기호를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다과를 대령했다. 오로지 이날을 위해 준비한, 후작이 직접 공수해 온 특별한 간식들이었다.
다행히 호평이었다.
이제 삼자대면을 시작할 때였다.
후작이 접견실을 나서자, 첫 번째로 칼리아가 들어왔다.
공손히 인사를 하는, 경직된 그녀의 모습에 조제프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칼리아 양. 저희는 그대의 잘못을 추궁하러 온 것이 아닌, 그대가 행한 희생에 감사를 전하고 그 상황에 대해 들으러 온 것이니까요.”
“아…… 마, 말씀 감사합니다.”
“부담 갖지 말고 편히 앉으십시오.”
칼리아가 조심스레 앉았다.
특히나 초월자의 시선에 침을 삼켰다. 허벅지 위에 올려진 양손에 땀이 맺혔다.
아무리 마탑주가 배려하여 힘을 숨기고 있다고 한들, 지위에서 느껴지는 무형의 압력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런 긴장 속에서 조제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묻겠습니다. 주검의 영광이라는 흑마법사 집단. 그들과 접촉하게 된 때가 언제입니까?”
* * *
대주교의 질문에 칼리아는 사실만을 답했다.
가끔씩 말을 더듬을 때도 있긴 했으나 예상했던 것보다는 차분했다. 칼리아는 스스로에게 대견하다며 칭찬했다.
이윽고 질문이 끝났다.
머릿속으로 정보를 정리한 조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칼리아 양. 말을 조리 있게 잘하시는군요. 덕분에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처럼 이해하기 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주교님……!”
“그대의 노력과 결실에 대한 보상은 추후에 논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 애셔란 분을 불러 주시겠습니까?”
“아, 예! 당장 데려오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칼리아가 곧장 밖으로 나섰다.
멀어져 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조제프가 마탑주에게 물었다.
“3왕자와 흑마법사가 결탁했다라.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탁이 아니라 이용이겠지.”
탁.
마탑주가 찻잔을 내려놨다.
“왕국 남부에 출몰한 언데는 군단은 7위계 흑마법 <망자의 행진>으로 발생한 것이네. 모종의 마법 물품을 쓴 건지, 아니면 그만한 흑마법사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무시 못 할 집단임은 분명하지. 그런 그들이 3왕자 따위를 동급으로 여길 이유가 있겠나.”
“3왕자를 추궁해도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다는 거군요.”
“시간만 버리게 되겠지. 그런데 굳이 단서가 필요한가?”
“……무슨 뜻입니까?”
“노사란 흑마법사가 남긴 ‘위대한 주검이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시는 그날, 불멸의 세상이 찾아올 것이다.’라는 유언. 거기서 말한 위대한 주검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네도 잘 알 텐데? 루아스교가 손수 지워 버린 역사 중 하나이니.”
조제프는 답하지 않았다.
교에서 정한 금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발설해서는 안 되니.
하나 무언은 곧 긍정이기도 했다.
“수백 년 전에 모습을 감췄던 강대한 흑마법사들의 등장이라. 그들이 왕국을 찾아온 이유는 옛적에 사라진 ‘봉인된 신체 조각’을 찾는 것일 테지. 그리고 다시 종적을 감췄다는 건 그 목적을 이뤘다는 뜻이고.”
“…….”
“나 또한 다크 워튼의 마탑주로서 알아보겠네. 그러니 자네도 교에서 관리하고 있는, 봉인된 신체 조각을 잘 주시하게. 그 시체가 부활하는 순간, 대륙은 다시 전란에 휩싸이게 될 테니까.”
“……충고 감사합니다.”
조제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주가 과자를 집어 들었다.
급변하는 세계. 산 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이해한 네크로맨서에게는 아주 큰 자극이었다.
진심으로 직접 찾아오길 잘했다며 작게 웃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들어오십시오.”
조제프가 허락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잿빛 머리의 마법사. 그가 두 사람을 향해 깊게 예를 취했다.
“마법사 애셔라고 합니다.”
베르덴이 자신을 간단히 소개했다.
‘초월자와 대주교.’
칼리아가 슬쩍 말하기를, 감히 눈조차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라고 하던데. 물론 세계의 정상에 가까운 존재들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쨌든 가장 중요한 건 이거였다.
보헤미른 마탑주를 제외한, 새로운 초월자이자 마탑주를 마주한다는 사실. 그로써 현재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것이 베르덴에게 큰 의미였다.
그렇게 기대와 긴장을 안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내 마탑주와 눈을 마주친 순간.
툭.
마탑주가 과자를 떨어뜨렸다.
놀라움을 넘어 경악에 가까운 눈동자가 베르덴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