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폭풍전야 (1)
어두운 조명이 내려앉은 아늑한 방.
불그스름한, 짐승의 털로 만들어진 침구. 바깥이 슬쩍 비치는 얇고 검은 커튼이 장식된 캐노피 침대 위에 세 사람이 누워 있었다.
나신으로 잠에 든 두 명의 여성.
그 중심에 누워 있던 고동색 머리칼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윽…….”
머리가 지끈거린다.
몸도 상당히 불편하다.
전날 밤 과음한 탓인가.
아니면 과도하게 허리를 움직인 게 원인인가. 지금까지의 경험상 둘 다일 가능성이 높다.
꿀꺽, 꿀꺽.
찬물을 들이켠 사내가 침대에서 벗어났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욕실로 직행했다. 사용인이 데워 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자기도 모르게 깊은 신음이 나왔다.
속이 울렁거리고 시야가 어지럽지만, 괜찮다.
이런 것도 익숙해지면 하나의 자극이니까. 그렇게 불편한 쾌락을 원 없이 즐기고는, 가운을 두르고 바깥으로 나섰다.
콧노래를 부르며 거실로 향했다.
“채신머리없는 건 여전하구나, 로트닐.”
“아, 깜짝이야……!”
사내, 로트닐이 화들짝 놀랐다.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향했다. 호화로운 의복을 입은, 황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주 오만한 자세로.
“아니…… 대체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겁니까, 발르그나 형님.”
“시끄럽고, 앉기나 해라. 할 얘기가 있으니.”
다짜고짜 명령이다.
표정을 찡그린 로트닐이 반대편 소파에 몸을 누였다.
에스티리아 왕가.
1왕자, 발르그나 베인 디 에스티리아.
2왕자, 로트닐 렌버 디 에스티리아.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봤다.
“대주교하고 마탑주 건으로 바쁠 텐데, 제게 할 얘기가 뭡니까. 연락도 없이 들이닥친 걸 보면, 시답잖은 용건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살갑게 티타임이나 가질 사이도 아니고.”
“그 건방진 말투 고치라고 했을 텐데.”
“……누가 보면 왕위에 오른 줄 알겠네.”
로트닐이 작게 중얼거렸다.
권위를 중시하는 발르그나로선 매우 거슬리긴 했으나 곧 인내했다. 그런 시간 낭비나 하자고 여기까지 찾아온 게 아니니까.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로트닐 렌버 디 에스티리아.”
“이름은 왜…….”
“너는 왜 왕이 되고 싶어 하지?”
갑자기?
“간단한 이유가 아닙니까. 왕이 되면 이 왕국이 내 손안에 들어오니까. 돈도, 권력도 그리고 여자도 전부.”
“그래, 여자. 옛적부터 네 주된 관심사는 여자였지.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하녀든 귀족가의 여식이든, 주변 여자는 죄다 건드려 놓고 책임 하나 지지 않는 게 너다, 로트닐.”
“아니, 뭘 새삼스레.”
“네 본질을 이야기하는 거다. 그리고 내가 널 찾아온 건, 네게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을 하기 위해서고.”
“제안이라…… 뭔지는 몰라도 궁금하긴 하군요. 뭐, 형님이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들어는 보겠습니다.”
슬쩍 귀를 기울였다.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인 발르그나가 뱀처럼 속삭였다.
“실리스. 너에게 주마.”
“……하.”
로트닐이 입가를 감췄다.
“형님이 아주 큰일 날 소리를 하시는군. 실리스는 어미는 달라도 아비는 같은, 소중한 이복 남매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오래전부터 실리스를 원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다. 뭐, 솔직히 말해 이해 못 할 건 아니지. 인형에 불과할지라도 그 외모만큼은 견줄 자가 없으니. 그리고 이복 남매? 남몰래 친척인 공작가의 여자마저 건드린 네가 혈연 운운한다는 게 맞다고 생각하나?”
“뒷조사를 제대로 하셨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거 같으니.”
1왕녀 실리스.
그녀는 이상에 가까운 여자다. 어릴 적 머리를 다쳐 식물인간이 되었다고 할지언정 그 외모는 여전히 찬란하다.
마치 바래지 않는 보석처럼.
정략결혼으로 쓰기엔 더할 나위 없다.
남자라면 누구나 원할 게 분명할 테니까. 본 순간 아예 독점해 버리고 싶겠지. 그 생각은 2왕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로트닐이 입가를 비틀었다.
“대가가 뭡니까?”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다고 공표해라. 그렇게 한다면 실리스를 포함한 다른 여자들은 물론이고, 왕국의 2인자로서 군림하게 해 주마.”
“호오, 형님답지 않게 후하십니다. 2인자에다가 여자라니. 말씀대로 구미가 확 당기긴 합니다.”
“그럼…….”
“그런데 제가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송곳니가 옅게 빛났다.
“왕이 되면, 다 가질 수 있다고.”
“…….”
“형님께서 아무리 암흑가의 왕을 배후에 두고 있다고 하나 그 못지않게 제 파벌도 상당합니다. 저를 지지하는 귀족은 전체의 반에 가까우니. 오죽하면 제 별명이 사교계의 왕자겠습니까. 사실 이건 제 어머니의 도움이 크긴 했지만.”
에스티리아 왕은 4명의 왕비를 두었다.
그중 3명은 사망하고, 로트닐을 낳은 2왕비만이 살아 있다. 왕가의 안주인인 그녀가 사교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감히 무시할 수 없다.
1왕자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에스티리아 왕국은 장자 승계가 전통이다.”
“전통은 그렇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우리 아바마마께서는 누가 왕위를 계승하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계시지 않습니까. 혹여 두려우신 겁니까? 제게 패배할까 봐?”
쾅!
발르그나가 탁상을 내리쳤다.
“로트닐, 진심으로 나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못 할 게 뭐 있겠습니까.”
공기가 확 가라앉았다.
곧 자리를 박찬 발르그나가 성큼성큼 바깥으로 나섰다.
로트닐이 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시간을 들여 파벌을 깎아 내려 했더니, 승부를 빨리 보자는 건가. 쯧,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군.”
발르그나를 도발하긴 했으나, 솔직히 말하자면 로트닐이 밀린다.
로아프라의 빈테르트.
암흑가의 왕이 가진 세력은 작은 국가와도 같으니, 섣불리 맞섰다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다.
혼자서는 무리다.
그렇게 판단한 로트닐이 동생을 떠올렸다.
3왕자 에버스.
몰락한 왕위 계승 후보자.
“에스퍼렌사 후작가에게 호되게 당했다고 했었지.”
그래도 충분히 쓸 만하다.
남은 잔당을 흡수하면, 적어도 양지에서는 로트닐의 파벌이 더욱 커지게 될 터. 정치적인 싸움은 명백히 자신이 우위다.
큰 변수가 없는 한, 승리자는 정해진 거나 진배없다.
‘왕위는 내 겁니다, 발르그나 형님.’
일국의 지배자가 될 모습이 선하다.
로트닐은 웃음을 감추지 않고 침실로 향했다.
여성의 교성이 들려왔다.
* * *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비행정 내부.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베르덴과 에드몬이 대치했다.
벽안이 왼쪽으로 향하자, 에드몬의 뺨에 땀이 흘러내렸다.
“애셔, 자네…… 진심인가.”
“예.”
망설임 없는 대답이다.
그 확고한 마음을 되돌리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겠지.
하지만 에드몬은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특별히 다시 기회를 주겠네. 그러니…….”
착.
베르덴의 손이 스치듯 지나쳤다.
시선을 돌려 에드몬에게서 빼앗은 게 무엇인지 확인하고는, 들고 있던 걸 책상 위로 던졌다.
“끝났습니다.”
“제길!”
도둑잡기.
에드몬은 패배했다.
“또, 또 내가 지다니……. 이보게, 한 번만, 한 번만 더 하세나!”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에드몬 할아범, 내리 7연패를 당했는데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베르덴과 칼리아가 거부했다.
카드 놀이에 노인 공경은 없었다. 에드몬이 힘없이 고개를 축 늘어뜨리며 재도전을 요구할 찰나, 비행정 전체에 신호음이 들려왔다.
“수도에 거의 도착했나. 잠시 나갔다 오지.”
“같이 가시죠.”
“잠깐, 그 전에 한 판만…….”
에드몬을 뒤로하고 갑판으로 향했다.
비행정이 구름 아래로 고도를 점차 낮추자, 창공 너머로 도시가 보였다.
“이곳에 오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군. 저길 봐라, 애셔.”
칼리아가 앞을 가리켰다.
고개를 향하자, 높고 두꺼운 성벽과 그 안쪽에 빼곡히 들어찬 건물들이 햇빛에 휩싸여 있다.
‘공국의 수도, 리드론. 그 이상이군.’
왕국은 왕국이라는 건가.
특히나 눈에 띄는 건 도시 중앙에 있는 넓은 숲이었다. 시선을 조금 더 위로 향하자, 숲속에 거대한 왕성이 세워져 있는 게 시야에 비쳤다.
왕도 레티아(Letia).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 * *
다그닥, 다그닥.
후작가의 마차가 왕도의 거리를 지났다.
바깥으로 대도시의 활기가 들려오고 있지만, 이제는 별로 놀라울 것도 아니다. 베르덴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마탑 밖의 삶에 익숙해졌으니까.
맞은편에 앉은, 에스페런사 후작이 말했다.
“애셔 그리고 칼리아. 너희 둘은 왕성에 초대되기는 하겠지만, 대주교와의 만남은 일대일 면담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달리 이유가 있습니까?”
“조제프 대주교로부터의 요청이다. 분명 너희들이 귀족의 눈치를 볼까 그러는 것이겠지. 쓸데없는 걱정이긴 하다만.”
칼리아는 오랜 기간 범죄자를 처단해 왔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손에 잡힌 귀족이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베르덴은 에드몬조차 가늠 못 하는 마법사.
눈 깜짝하지 않고 의뢰를 받아 왕가에 대적하며 궁정 마법사까지 죽였다. 레오닐을 함정에 빠뜨린 것 또한 마찬가지.
그런 두 사람이 귀족의 눈치를 볼 리가 없었다.
어쨌든.
“대주교에게는 상황 설명만 하면 되니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대신 숨기는 것 없이, 그 주검의 영광이란 집단에 대한 것까지 전부 얘기하도록.”
“알겠습니다.”
“네, 아버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저택에 도착했다.
왕도에 머무는 동안 지낼 장소였다. 마차에서 내려 저택의 집사를 따라가던 도중, 뒤에서 칼리아가 속삭이듯 물었다.
“애셔, 혹시 왕도에 따로 볼일이 있나?”
“없습니다.”
“그런가. 그럼…….”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자, 붉은 신념의 기사 하나가 달려오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각하. 왕성에서 긴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말해라.”
집사는 눈치껏 물러났다.
베르덴과 칼리아가 있긴 했으나, 후작은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기사는 자신이 들었던 내용에 대해 정확히 고했고.
“……뭐?”
경악과 불신.
셋의 반응은 같았다.
* * *
왕도의 밤.
베르덴은 창가에 걸터앉았다.
은은한 달빛과 멀리 보이는 마석등의 불빛을 시야에 담으며 생각에 잠겼다.
10개의 마탑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마탑, 다크 워튼.
베르덴이 있던 보헤미른 마탑보다 순위가 높은 마탑이다. 당연하게도 그를 지배하는 마탑주는 초월에 이른 절대자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죽음과 관련된 마도를 개척했다고 하던데.’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다크 워튼의 마탑주.
죽음의 이해자라고 일컬어지며 네크로맨서라는 이명을 이어받은 흑마도사. 위계의 수준운 불명, 이름 또한 불명이다.
겉의 일부만이 알려졌을 뿐, 속은 베일에 감춰져 있다.
‘그런 존재가 이곳에 온다니.’
보헤미른 마탑주를 제외하면, 초월자를 마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주체 못 할 흥분이 조용히 메아리쳤다.
마법사라면, 마도사라면, 초월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에드몬은 입을 떡 벌린 채 목소리를 잠시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베르덴의 반응은 비교적 점잖긴 했으나 속은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하나의 의문이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지금의 나와 초월자의 격차는 얼마나 될까.’
고작 2년도 안 된 시간 만에 따라잡을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같은 5위계 마법사를 압도하는 강함이 지고한 경지를 실감할 수 있을지. 그렇게 초월자의 발끝에라도 닿을 수 있는지 말이다.
이런 궁금증이 마음속에 응어리졌다.
곧 있으면 풀어지겠지.
‘……기대되는군.’
베르덴이 바깥을 바라보며 밤잠을 설쳤다.
갑작스러운 초월자의 방문 소식에, 저택 전체가 입을 닫은 듯했다.
은연중에 감도는 적막감. 초월자라는 존재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는 자는 그 무게감을 느끼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 시계의 초침.
기다리던 그날이 찾아왔다.